|
• 천경자 | 이탈리아 기행 (1973, 부분)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展을
다녀왔습니다.
방대한 전시입니다.
여성 작가 23인의 작품들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의 3층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천경자 작가를 출발점으로 하여,
'한국의 대표 여성 동양화가'를 총정리한,
그래서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되는 한편
알고 있었던 사실들 사이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공부할 것이 무척 많은 전시입니다.
몇몇 작가들의 작품들은
난생 처음 보기도 했습니다.
이름만 들었던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이런ㆍ저런,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ᆢ
한국 사회에서
'여류 작가들의 삶과 예술 활동'이
얼마나 어려운 길임을 또 한번 절감했습니다.
천경자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두 가지 전시 중의 하나입니다.
2층의 '천경자 컬렉션 전시실'의 전시는
사진 촬영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전시작들 하나하나가 오랫동안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한 전시입니다.
여유있게 시간을 갖고 관람하세요.
• 전시 포스터
■ 전시 서문
•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 전시 기간: 2024. 08. 08 ~ 11. 17
• 전시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3층 전시실
• 23명의 작가가 살아온 시대의
정치ㆍ사회적 변화와 미술제도가
작가의 삶과 작품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
'서울시립미술관'은 2024년
천경자(1924–2015)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작가 22명의 작품과 자료로
전시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을 개최합니다.
천경자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당시 정규 미술학교가 없던 조선을 떠나
미술 공부를 하고자 1941년 일본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재학 중인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부상(祖父像)>으로 입선했고,
태평양 전쟁(1941–1945)으로 수업 연한이 단축되면서
그해 가을 졸업했습니다.
일본에 남아 활동하고자 했으나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귀국해 1944년 제23회
마지막 《조선 미전》에서 <노부(老婦)>로 입선했습니다.
본 전시는 그간의 전시나 연구와 달리
천경자 작가의 이런 현대적 사고방식을 부각하고
그가 미친 영향, 그리고 당시 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천경자와 달리 일제강점기로 인해 동양화에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기 쉽지 않았던 여성 작가들을
조망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전공한 동양화에 부과된
의무만이 아니라,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듯이
가사와 양육의 의무를 다해야만 했습니다.
가정과 작업 사이에서 늘 죄책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시간이 부족해 실컷,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게 유일한 바람이었습니다.
작가로서 진보적 사고를 지녔던 천경자 작가 역시
여성으로서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기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지 못했고
당장 먹고살게 없는데 작품을 판매할 기회를
남성 작가에게 빼앗겨 아이를 데리고 간 그 자리에서
통곡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예술을 파괴하지 못했던 것처럼,
시대적 난관과 가정적 어려움이 이들의 열정을
식히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림을 그렸고,
단체활동으로 전시를 이어갔고, 보수적이고
정형화된 《국전》 양식에서 벗어나 결국
각기 다른 조형언어로 자기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이들은 공통으로 일제강점기(1909–1945),
8·15광복(1945), 한국전쟁(1950–1953),
4·19혁명(1960), 5·16군사정변(1961),
군사독재(1961–1979), 12·12군사반란(1979),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 신군부 정권(1980–1993),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계속된 민주화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냈습니다.
사회, 개인의 삶, 예술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에
본 전시는 일제강점기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회적 흐름과 미술의 흐름을 한데 묶고
그 연관성을 찾아 당시 동양 화단 전체를
조망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교육기관, 《조선 미전》의 전개,
광복 이후 교육기관, 《국전》의 전개와 그사이에
이루어진 정치, 사회적인 개입, 동양화의 흐름,
단체활동과 업적 등 많은 자료와 각 작가의 연보를
객관적 시각으로 체계를 잡고 상세히 정리해 이들의
작품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들이 어떻게 비슷한
소재와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던 ‘여류 동양화가’에서
지금의 ‘작가’로 성장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천경자 작가의 진솔한 자서전, 각종 기사와 글,
작품 등 다양한 자료를 심도 있게 연구, 이를 토대로
그의 삶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찾고 이들과의 관계를
탐색해 상세히 정리한 연보를 통해 그간 그에 대한
오해와 오류를 바로잡고 향후 보다 심화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본 전시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인
천경자 작가를 기리는 동시에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고
다양한 작품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한
정찬영, 이현옥, 정용희, 배정례, 박래현, 천경자,
박인경, 금동원, 문은희, 이인실, 이경자, 장상의,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윤애근, 이화자, 심경자,
원문자, 송수련, 주민숙, 김춘옥, 차명희 작가의
작품 세계를 어떤 경계도 제한도 없는 동시대
미술 흐름 속에서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 '서울시립미술관' 전경
출입구부터 동선을 따라 관람하였고,
주어진 캡션 정보에 충실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ㆍ포스팅하였습니다.
• ( 작가 이름 )
( 작품 제목 ), ( 작품 연도 )
( 작품 매체 )
( 작품 크기 )
'작품 크기(size)'는
'높이(Height) x 넓이(Width)'입니다.
• 전시장 입구 전경
• 천경자 (1924-2015)
생태, 1951
종이에 채색
51.5 x 87 cm
• 천경자
뱀 스케치, 1951
종이에 연필ㆍ수채
37.5 x 27 cm
• 천경자
꽃과 병사와 포성, 1972
종이에 채색
284 x 185 cm
1972년 6월, 문화공보부에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이마동(李馬銅) 단장으로 해서 미술계
현역 작가 10명(이마동, 김기창, 김원, 박광진, 박서보,
박영선, 오승우, 임직순, 장두건, 천경자)을 전쟁 중인
베트남으로 보내 약 20일간 한국군의 활약상 등을
기록화로 그리도록 한다.
천경자는 베트남에서 돌아와 스케치를 바탕으로
170호 크기의 <꽃과 병사와 포성> (1972)과
150호 크기의 <목적> (1972) 등 두 점의
기록화를 그려 200만 원을 받는다.
이때부터 다달이 이자 치르기에 급급하던
경제 사정이 풀리면서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꽃과 병사와 포성>은 국방부에 걸려있다가
이 전시를 통해 처음 대중에게 공개된다.
• 천경자 作, <베트남 전쟁 드로잉> 모음 (1972)
• 천경자
헬기 수송작전, 1972
종이에 수채
28 x 37.5 cm
• 천경자
갈대 수색작전, 1972
종이에 잉크ㆍ수채
28 x 37.5 c.
• 천경자
소장굴 수색작전, 1972
종이에 수채
28 x 38 cm
• 천경자
매복작전, 1972
종이에 수채
28 x 38 cm
• 천경자
26연대 부락작전 I, 1972
종이에 잉크
28 x 38 cm
• 천경자
26연대 부락작전 II, 1972
종이에 잉크
38 x 28 cm
•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종이에 채색
43.5 x 36 cm
"뱀을 그릴 땐 슬픔, 괴로움밖에
내게 남아있는 것이 없을 때였습니다.
어떤 누명 쓴 여자 복역수가
그 억울함을 새기는 심정으로
피맺힌 수를 한 뜸 한 뜸을 놓듯
나는 뱀을 그렇게 그렸습니다 …
그때 뱀을 그리면 살 것 같데요."
• 이화자 (b. 1943)
무제, 1997
종이에 채색
112.1 x 162.2 cm
1984년, 41세의 이화자는
부산산업대학교(현재 경성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동해안별신굿(풍어제)을
접하고 감화를 받는다.
기 보유자인 김석출(金石出: 樂士)ㆍ
김유선(金有善: 巫女) 부부와 교류하면서
이를 공부한다.
그 내용과 형식을 그림에 반영한다.
동해안별신굿은 부산 동래구에서
강원도 고성군에 이르는 동해안 어민들이
풍어와 안전을 비는 마을굿으로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현재 국가 무형유산)로 지정된다.
별신굿은 내륙지방 동제(洞祭)와 달리
이 지역의 세습무(世襲巫)들이 의식을 진행한다.
별신굿의 대상신은 골막이 서낭신으로서
마을을 수호한다.
이는 대체로 3~5월, 9~10월 사이에 많이 행한다.
경비 부담은 재산의 형편에 따르고
어촌의 경우 선주가 많이 부담한다.
제일(祭日)이 되면 마을에서는 우선
굿청(굿을 할 때 총본부가 되는 곳)을 설비한다.
굿청은 대체로 바닷가 선착장 부근에
넓은 모래밭이 선정되는데 마을마다
일정한 장소가 지정되어 있다.
굿청에는 큰 차일을 치고
신대(신이 내려앉는 이동식 거처)와
신기(神旗)를 세우고 제상을 차린다.
굿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끼어든
모든 부정한 것을 정화해 제전을 깨끗이 하는 부정굿,
마을 수호신인 골막이 신을 굿청에 봉안하는 골막이 청좌굿,
신과 신 또는 신과 인간의 화해를 하는 화해굿,
중 도둑잡기라는 굿 놀이인 세존굿, 조상신에 대한
굿거리로서 축원ㆍ공수ㆍ유흥의 단계로 진행되는 조상굿,
가옥을 관장하는 성주신을 위한 성주굿,
천왕신(天王神)에 대한 굿거리인 천왕굿,
용왕신에 대한 굿거리로서 축원 덕담의 무가를
가창하는 용왕굿 등 13개의 굿으로 이루어진다.
동해안별신굿은 마을 단위의 축제이면서 무속 예능의
전시장으로서 종합예술제의 성격을 가진다.
이화자는 특히 깃대에 오 방으로
오색의 만장 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차용하는데,
자기 생각과 표현을 담기 위해 먹을 바탕에 깔고
채색을 올려 샤머니즘적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 이화자
구름, 1997
종이에 채색
72.7 x 90.9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