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內訌의 세월 속 내설악 가을 풍경
<10월 15일 백담사 오세암 산행>
■ 산행 개요
♣ 산행 일시 : 2020년 10월 15일 (목) 맑음
♣ 산행 지명 :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 만경대
♣ 산행 주관 : 성남 분당중앙산악회
♣ 산행 시간 : 약 5시간 10분(10 : 00 ~ 15 : 10)
♣ 참석 인원 : 총 45 명
♣ 산행 회비 : 25,000 원/인
♣ 산행 회식 : 용두리 황태구이집 회식
♣ 특기 사항 : 김철영 고문 동행 만차
■ 산행 후기
▶ 바쁜 세월을 휘어잡는 코로나 19 확진자가 두 자리 숫자를 오르내리는 가운데 단풍 맞이 산행을 자제하라는 당국의 권유를 외면하고 모처럼 설악산의 가을을 구경하러 함께한 산우들로 세로 임차한 경기 76사 4656 (운전기사 전현규)호의 좌석을 가득 메운 산행 버스는 산행객이 비교적 한산한 백담사 주차장으로 아침 9시 45분에 내려놓는다.
▶ 오늘 산행코스는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처 오세암을 왕복하는 것으로 산행 계획서에 명시되어 있으나 봉정암까지 연장 산행을 실천하려는 청송을 비롯한 준족들에게 오후 5시까지 하산 약속을 지키라는 박 회장의 간곡한 당부를 받고 백담사를 출발하여 김철영 고문과 매천, 정숙희 산우 등과 계곡 가장자리에 듬성듬성 피어오른 단풍을 둘러보며 영시암을 지나고 매천 산우와 둘이서 다소 힘든 등성이를 넘어 오세암을 돌아보고 해발 922m의 만경대에 오르니 내설악의 절경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의 검은색 현란한 봉우리들이 맑은 하늘 속으로 높이를 경주하듯 솟아오른 절경이 시야를 즐겁게 해 준다.
▶ 잰걸음으로 만경대를 내려와 연변에 선명하게 피어난 홍갈색의 단풍을 감상하면서 백담사에 들렸다.
일제 강점기에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 유신론(佛敎維新論)』과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소가 되었고 만해사상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의 유배지인 근세사의 영욕을 간직한 백담사를 돌아보며 감회가 교차한다.
■ 산행지 안내
▣ 백담사(百潭寺)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가야동 계곡과 구곡 담을 흘러온 맑은 물이 합치는 백담계곡 위에 있어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 절의 기원은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한계사(寒溪寺)이다. 690년(신문왕 1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했다. 785년(원성왕 1) 다시 불탄 것을 790년에 종연(宗演)·광학(廣學)·각조(覺照)·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절터에서 30리 아래로 옮겨 운흥사(雲興寺)라고 했다.
984년(성종 3)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987년에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의 북쪽 60리 되는 곳에 옮겨 짓고 심원사(深源寺)라고 개칭했다. 1432년(세종 14)에 또다시 불이 나자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신열(愼悅) 등이 옮겨 짓고 선구사(旋龜寺)라 개칭했다. 1443년 화재로 소실되자 1447년 옛터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1455년(세조 1)에 다시 화재로 불타 버리자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 등이 옛터의 상류 20리 되는 곳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명했다. 1775년(영조 51)에 다시 불이 나자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와 함께 중건하고, 심원사(尋源寺)라고 개칭했으나 1783년(정조 7)에 다시 백담사로 환원했다. 1915년에 일어난 화재로 거의 모든 당우가 타버린 것을 당시 주지였던 인공(印空)이 중건에 착수해 1921년에는 응향각 등 사무실 30여 칸을 새로이 짓고, 종과 북을 주조해 낙성법회를 열었다. 근대에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면서〈님의 침묵〉〈불교 유신론 佛敎維新論을 집필하는 등 만해사상의 산실이 되었다. 6·25 전쟁 때 불탄 것을 1957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前) 대통령 내외가 대(對) 국민 사과 성명 발표 후 이 절에 은거했다가 1990년 12월 30일에 연희동 사저로 돌아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칠성각·선원(禪院)·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이 있다. 그밖에 자장의 유물로 전하는 아미타상과 소종(小鐘), 인조(仁祖)의 하사품인 옥탑(玉塔), 설 담다(雪潭堂) 부도, 연포당(蓮浦堂) 부도 등이 있다.
▣ 오세암(五歲庵)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에 속하는 백담사(百潭寺)의 부속 암자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하여 관음암(觀音庵)이라 하였으며, 1548년(명종 3)에 보우(普雨)가 중건하였다.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한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이 중건한 다음부터이며, 유명한 관음 영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정은 고아 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동 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조카를 위해서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는데 밤새 폭설이 내려 키가 넘도록 눈이 쌓였으므로 혼자 속을 태우다가 이듬해 3월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 소리가 은은히 들려 달려가 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뒤 1888년(고종 25) 백 하화상(白下和尙)이 중건하였다. 당시 법당을 2층으로 짓고 박달나무로 기둥을 세웠는데, 매끄럽기가 부드러운 명주옷으로 문질러도 결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절은 수선 도량(修禪道場)인 동시에 유명한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아늑한 맛으로는 설악산 내 사찰 중에서 제일이며, 수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金時習)이 승려가 된 뒤 머물렀던 곳이고, 조선 중기 불교의 부흥을 꾀하다 순교한 보우가 수도하였으며, 근대의 고승이자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렀던 곳이다. 특히, 김시습과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면서『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쓴 것은 매우 유명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승방·객사, 새로 지은 산신각이 있고, 옛 절터가 근처에 있어 석물(石物) 등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약 2㎞ 떨어진 곳에는 마등령이 있다.
▣ 만경대(內雪嶽 萬景臺)
설악산 내설악 만경대는 강원도 인제군 오세암 바로 앞의 해발 922m 봉우리로 2013년 3월 1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104호로 지정되었으며 오세암(五歲菴)이 바로 앞에 있어 역사 문화적 가치가 더욱 뛰어나다. 용아장성, 공룡능선, 흑선 동계곡, 나한봉 등의 내설악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뛰어난 경관 조망지점이다.
※ 사진은 모두 http://cafe.daum.net/jungang4050에서 산행안내는 다음 카페에서 가져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