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널빤지에 올라서 있는 자가
큰 바다에서는 가라앉아 버리듯이
그와 같이 게으른 자를 만나면
좋은 사람도 가라앉고 맙니다.
그러므로 게으르고
정진하지 않는 자를 멀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한거(閑居)하고 성스러우며
스스로 독려하고 참선을 하고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는
현자들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parittaṃ dārumāruyha, yathā sīde mahaṇṇave.
evaṃ kusītamāgamma, sādhujīvīpi sīdati.
tasmā taṃ parivajjeyya, kusītaṃ hīnavīriyaṃ.
pavivittehi ariyehi, pahitattehi jhāyibhi.
niccaṃ āraddhavīriyehi, paṇḍitehi sahāvase.
[행장] “소마밋따 장로(Somamitta thera)는 바라나시(Bārāṇasi)에서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다. 그는 삼베다에 능통하였으며 위말라(Vimala, Th3:16) 장로와 친숙하게 지내면서(kata-paricayattā) 지속적으로 그의 곁에 가서 법을 듣고 교법에 청정한 믿음을 얻어 출가하였다. 그는 구족계를 받고 여러 가지 의무(vattapaṭivatta)를 다 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위말라 장로는 게으르고(kusīta) 혼침이 많은 상태로(middha-bahula) 밤낮을 보냈다. 소마밋따는 ‘게으름에 빠져서는 어떤 덕스러움(guṇa)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그를 버리고 마하깟사빠 장로에게 다가가 그의 교계에 굳게 서서 위빳사나를 확립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됨에 확고하게 머물렀다. 장로의 일화는 『아빠다나』에도 나타나고 있다.
아라한됨을 얻은 뒤 위말라 장로를 교계로써 경책하면서 본 게송 두 개를 읊었다. … [본 게송들을 통한 그의 경책을] 듣고 위말라 장로는 절박한 마음으로(saṁvigga-mānaso) 위빳사나를 확립하여 참된 목적을 성취하였다(sadatthaṁ ārādhesi).” (ThagA.ii.24-25)
* ‘그러므로 게으르고 / 정진하지 않는 자를 피해야 합니다.’는 tasmā taṁ parivajjeyya, kusītaṁ hīnavīriyaṁ을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주 유익한 법들(adhikusalā dhammā)에 대해서 머리를 돌려버린 뒤 비열하게 가라앉아서(kucchitaṁ sīdanato) ‘게으르고(kusĪtaṁ)’, 정진을 시작함이 없기 때문에(vīriyārambha-abhāvato) ‘정진하지 않는(hīna-vīriyaṁ)’ 그런 사람(puggala)을 모든 곳에서 피해야 하고 그의 견해를 따르는 것(diṭṭhānugati)을 멀리해야 한다(āpajjeyya)는 뜻이다.” (ThagA.ii.25)
** 주석서는 본 게송에 나타나는 술어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몸으로 떨쳐버림을 근원으로 하여(kāya-viveka-sambhavena) ‘한거함(pavivitta)’이 있다. 거기서 오염원들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ārakattā) ‘성스러우며(ariyā)’이다. 열반을 향해 전력을 다하는 것(patipesitattatā)이 ‘스스로 독려함(pahitattā)’이다. 대상을 정려(靜慮)함(ārammaṇ-ūpani-jjhāna)을 통해서 그리고 [무상·고·무아의] 특상을 정려(靜慮)함을 통해서 ‘참선을 하는 분들(jhāyino)’이다. 모든 시간에 분발하여 정진하기 때문에(paggahita-vīriyatāya)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는 [분들] (āraddha-vīriyā)’이다. 세간과 출세간으로 구분되는 통찰지를 구족하였기 때문에 ‘현자들(paṇḍitā)’이다. 그들과 ‘함께(saha)’ 머물러야 하나니(āvaseyya), 참된 목적(sadatth)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nipphādetukāma)은 함께 머물러야 한다(saṁvaseyya)는 말이다. [이러한 교계를] 듣고 위말라 장로는 절박한 마음으로(saṁvigga-mānaso) 위빳사나를 확립하여 참된 목적을 성취하였다.” (ThagA.ii.25)
-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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