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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되신 예수님을 따라야 할 이유
마가복음 14:53~65
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을 단적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혼돈의 환경에서 당황하는 세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이유는 여럿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꼽으라면 가치관의 혼돈입니다.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불의인지에 대한 경계심이 모호하게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수없이 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인 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것이 옳다라고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결과가 나올 때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배당금을 18세 이상 매월 1인당 150만 원을 평생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후보에게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옳다라고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니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유는 진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거짓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마가복음 14장 53절부터 65절까지의 말씀에서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이 거짓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의하여 수모를 당하는 모습과 진리 되신 예수님을 놓치고 위협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왜 진리이신가를 말씀드리고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사람들의 결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진리가 되신 이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는 선한 목자라’는 문장에서 쓰인 단어는 “나는 이다”라는 문장이 헬라어 ‘에고 에이미’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야훼 יהוה >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자신을 소개하고 애굽으로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출 3:14)라고 했을 때 그 같은 의미가 바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중에 진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진리’를 헬라어 원문에서는 ‘알레데이아 ἀλήθεια’라고 하는데 ‘가리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현재에도 온 하늘과 땅에 충만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진리의 특징은 숨길 수 없고, 모든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변함이 없습니다.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막 14: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 중에 제3계명인 출 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순종하여 거룩한 이름인 여호와 또는 야훼(Yahweh)의 사용을 삼가기 위해 대신 우회적인 표현으로 ‘찬송 받을 이’이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亡靈)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호를 “소홀하게” 혹은 “생각 없이” 부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헛되고 부질없는 그리고 경솔하고 모욕적인 그 모든 언행심사(言行心事)를 금하고 있습니다. 이런 당시의 상황에 의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 받을 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막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내가 그니라”고 밝히므로 유대인들이 섬겨왔던 하나님 그분 자체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시며 하나님의 본체가 되심을 밝히자 막 14:63~64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이 그의 옷을 찢었다고 할 때 그의 예복보다는 오히려 속옷을 찢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제사장은 자기가 예수님의 담대한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대제사장의 격렬한 반응에 대하여
요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이처럼 진리는 어떤 장벽으로도 논리로도 가릴 수 없는 절대적입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은 태초에 만물이 짓기 전에 계셨고, 지금도 영원하 계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는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 당시 최고 의결기관은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공회원은 70인이고 의장을 포함하면 71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재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밤에 열릴 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재판하는 공회는 밝은 대낮에 열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재판은 어두컴컴한 밤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기에, 밝은 대낮에 예수님을 법정으로 붙잡아 오면, 이에 불만을 품은 군중들에 의해 큰 소란이나 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을 미리 막아내기 위하여 밝은 대낮이 아니라 깊은 밤을 택한 것입니다.
또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공식적으로 재판이 열리고 절기나 안식일에는 재판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심지어 밤중에 재판이 열리고 있습니다. 불법적인 재판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모순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세워놓은 법을 어기면서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거부하게 되면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되고 파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 재판 과정에서 대적자들은 거짓 증언을 발판 삼아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몰아갔 있을 때 제자들은 도망을 가버립니다. 이런 환경에서 유일하게 딱 한 명, 베드로가 남아 있습니다. 본문 막 14:54절,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 집 뜰 안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얼마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는 칼을 들고 대제사장 종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런 돌출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미 베드로의 얼굴이 알려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용감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의 기록이 어떻습니까? 그가 예수를 멀찍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수제자 베드로의 행동에는 아직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그렇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고 담대함을 가져다 주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깨닫고 예수님이 가신 진리의 길을 갔더라면 그렇게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리를 등지고 살 때 어쩔 수 없는 어둠에 갇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처럼 자기의 생명을 갉아 먹으며 살게 됩니다. 두려움과 근심 염려로 자신을 가둬두고 벗어나지 못합니다.
진리를 등지고 사는 사람은 막 14: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고 한 것처럼 말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대적하여 아담과 하와를 죄를 짓도록 한 뱀에게 내린 저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불순종의 죄로 타락하도록 마귀의 도구로 쓰임 받은 뱀은 그 죄의 대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배로 기어 다니는 것과 흙을 먹고 사는 일입니다. 이것은 땅에 속하여 땅의 것에 갇혀 사는 것을 말합니다. 뱀으로 상징화하는 마귀는 철저하게 땅에 속한 존재로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늘의 문을 닫아걸고 오직 세상의 모순된 것으로 괴로움을 겪으며 영생의 희망이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진리를 거부하여 진리 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짓의 영 마귀에게 지배를 받아야 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사람들의 결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기 전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에서는 예수님이 진리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견해는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입니다. 즉, 베드로의 고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네게 알게 한 이는’이란 말씀 중에 ‘알게 한 이는’이란 표현은 헬라어 원문에서 ‘아포칼륍토 ἀποκαλύπτω’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폭로하다, 덮개를 벗기다, 나타내다, 드러내다.’라는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베드로의 인격 자체에서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네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은 결코 배움으로 또는 철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알게 하셔야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우리에게 인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임하기 전에는 그의 의협심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들고 대제사장 종 말고의 귀를 자르기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지켜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야 하는 길이 죽음의 길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덜컥 두려움에 빠졌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이 그에게 생명으로 와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지어주신 것으로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함이 깃들여 있는 시몬이 반석의 뜻을 지닌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변화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약속하신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기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대하여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내가 본질적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로 바뀝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소금의 성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빛으로 빛은 소멸될 수 없는 영원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진리가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나를 다스리므로 창조의 원리를 알게 되고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같은 믿음으로 우뚝 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오직 예수님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흐르게 됩니다.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며 예배를 신실하게 드리는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으로 진리 가운데 머물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