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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 중서부지역 작전(연천-동두천-의정부전투) 2-1 수정중
제1절 작전 개요
중서부지역 작전은 서울 북쪽의 동두천-포천 축선에ㅐ서 국군 제7사단과 북한군 제3.4사단 및 제105전차여단(-)과의 3일간에 걸친 공방전을 말한다. 국군 제7사단은 동두천-의정부-서울 축선과, 포천-의정부-서울 축선에서 북한군 주공 군단인 제1군단의 제3.4사단과 고속기동부대인 제105전차여단(-)과 6월 25일부터 27일가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육군본부는 의정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제2사단(-), 그리고 기타 증원부대(포병학교 교도대대) 등을 증원하였지만 역부족으로 개전 2일 만에 의정부가 함락되고 서울 최후 저항선인 창동과 미아리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게 된다.
제 2 절 북한군과 국군의 상황
1. 북한군 상황
가. 전투 편성
의정부-포천 지역 정면에서 공격하는 적은 2개 보병사단과 2개 전차연대 및 2개 군단 포병대대였다. 즉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제4보병사단(적성-3번도로 좌측)과 제3보병사단(제4사 좌측 지역-사직리), 고속기동부대인 제105전차여단 에하의 제107전차연대.109전차연대.제203전차연대 제3대대, 그리고 군단 포병인 제17포병연대의 제1포병대대와 제3포병대대가 있었다.
지휘관 편성은 제1군단장은 조선의용군 출신인 김웅 중장, 제3사단장에는 제88여단 출신인 이영호 소장, 제4사단장에는 이권무 소장, 제105전차여단장에는 제88특별여단 출신의 유경수 소장이었고 예하 연대장들은 소련거주 한인 2세들로 전차병으로 독소전쟁에 참전 경험자들이다.
나. 공격준비태세
(1) 제4사단(연천-동두천-의정부 방면)
북한군은 '50.6.22일 총참모부의 전투명령 제1호에 의해 6월23일까지 전개를 완료하라는 지시에 따라 국군 제7사단 정면의 북한군 제4사단은 진남포에서 기차로 이동하여 6월 21일에 돌고개(신망리 서남쪽 8km, 석현), 선곡리(신망리 서남족 6km), 신망리 지역에 집결하였다.
북한군 제4사단은 신망리, 의정부, 서울 북부지역 축선으로 주공을 투입하여 관동(문산 동북쪽 20km), 고문리(신망리 동남쪽 8km) 지역을 공격하고, 제1.3사단 및 제105전차여단과 협조하여 서울을 점령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르르 위해 제4사단은 신망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준비태세를 갖추게 된다.
사단의 최근임무는 마지리-객현리-장현리-초성리을 연하는 선이며, 이후 4사단은 계속 공격을 확대하여 오현리(의정부 서북쪽 16km)-하패리(의정부 북쪽 15km) 선까지 진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단은 2개 연대병진으로 공격하며 제1제대는 제16연대(주공)에 사단포병연대(-). 2개 전차중대. 공병대대(-)이고, 조공은 제5연대와 1개 포병대대. 1개 대전차대대. 공병 1개 중대였다.
(2) 제3사단(운천-포천-의정부 방면)
북한군 제3사단은 6월 19일에 야미리(운천 남쪽 4km)지역에 배치 되었다. 제3사단은 후포(영평 동쪽 4km)-신팔리(서파)-퇴계원-서울 동북지역의 축선을 따라 진격한 후 제4사단 및 제205전차여단과 협조하여 서울의 동부지역을 점령하도록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2개연대 병진으로 공격하여, 최근임무계선은 계류리-기지리-유동리선이고, 차후 임무게선은 장승거리-마산리-서파선이었다. 1일차에 무봉리(의정부 동북쪽 9km)-마명리-검단리까지 진출하고 2일차에 서울 동북지역을 점령하도록 계획했다.
제1제대는 제7연대를 주공으로 여기에 1개 자주포 대대(-), 1개 전차중대, 기관총 대대(-)를 조공에는 9연대로서 2개 전차 중대와 1개 대전차중대 그리고 기관총 중대를 편성하였다.
(3) 제105전차여단(포천-의정부 방면)
제105전차여단은 전쟁이전에 평양에 여단 참모부, 제107전차연대, 정찰대대,모터사이클대대가 주둔하고 있엇고, 철원에 203전차연대가, 그리고 개성과 사리원 사이인 남천에 제109전차연대가 배치되었다. 그 중 제107.109전차연대가 주공방면인 철원-서울 축선에 투입되고, 조공 방면인 남천동-개성 축선에는 제1사단과 함게 제203전차연대(-)가 투입되었다.
주공방면을 담당한 제105전차여단(-) 예하부대는 제4사단 및 제3사단과 협조하여 우리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포천지역까지 진출한 후, 보병의 전과확대에 기여하고 전쟁 당일 25일 오후 늦게 의정부까지 진출토록 하였다. 그리고 2일차에 6월 26일 서울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2. 국군 상황
가. 제7사단 부대현황
중서부지역을 담당한 제7사단은 유재흥 준장의 지휘하에 제1연대와 제9연대가 적성-초성리-사직리 간의 47km를 경비하고 있었다. 제7사단은 서울에서 제7여단으로 창설된 후, 1949년 2월에는 수도여단으로 개칭되었다가 같은 해 5월에 사단으로 승격되고, 다시 6월에 제7사단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이 지역의 경게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제7사단은 제1.제3.제9보병연대와 포병 및 공병대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전쟁발발 3주전에 '50.6.1일부로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어 전쟁 당시는 2개 연대였으며, 6월 15일부로 제2사단 제25연대가 제7사단에 편입되었으나, 온양에 위치하고 있던 관계로 의정부에 막사등 일련의 문제로 7월 15일로 부대이동이 연기되었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원 소속인 제2사단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제7사단은 제1연대장에 함준호 대령, 제9연대장에 윤춘근 대령, 잠시 배속되었던 제25연대장은 김병휘 중령이고, 전투 경과에 따라 이 지역에 증원된 수도경비사령부의 제3연대(포천축선 증원) 장은 이상근 중령, 제8연대(미아리-한강 방어) 장은 서종철 중령, 제18연대(동두천 축선 증원)장은 임충식 중령이었다. 이 외에도 보국대대 제2중대, 기갑대대 장갑차 1개 소대, 포병교 대전차포 2개 중대 등이다.
한편 충남지역에서 북상하는 제2사단은 사단장 이형근 준장, 제5연대(축석령 증원)는 연대장 대리 박기성 중령, 제16연대(금오리 증원)장은 문용채 대령, 제25연대장은 김병휘 중령, 이밖에도 포병교 제2교도대대(김풍익 소령), 육군사관학교 생도 대대(조암 중령), 서울시청 전투경찰대대가 있었다.
나. 전투준비태세
제7사단은 '50. 5월 육본의 명에의어 주저항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지역고수 개념으로 3선방어개념이었다. 제1선은 38도선 경계선으로 소대단위 거점을 설치하엿다. 제2선은 주저항선으로 마차산-소요산-가랑산-천주산을 연하는 선으로 대대단위 거점을 설치하였으나 교량파괴나 장애물을 미설치 되었다. 제3선은 의정부 북쪽의 불국산-158고지를 연하는 선으로 이 선에서 역습을 전개하려 했다.
제7사단은 '50년 봄부터 재경 대한청년단원과 학생들을 2,000명을 동원하여 주진지와 경계진지를 구축한다. 하지만 이미 전술한대로 경계태세 해제로 인해 외출 외박이 시행되고, 사단의 중고차량이 전쟁 당일 모두 부평으로 이송되어 보유차량도 40%수준이엇다. 중화기도 25%수준이 정비를 이유로 입고 되어 전투력 발휘는 곤란하였다.
제3절 연천 - 동두천- 의정부 전투
1. 전투 개요
연천-동두천 전투는 최초 이 지역의 경계책임을 맡고 있던 국군 제7사단 1개 연대가 북한군 주공집단인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 1개 대대와의 공방전을 말한다. 이 전투 중 육본은 수도경비사의 제18연대(-)를 증원하였으나, 의정부가 적 3사단에게 조기에 함락됨으로서 퇴로가 차단되었다. 따라서 이 전투는 적에게 퇴로를 차단당한 국군 2개 연대(제1연, 제18연)가 각각 창동 및 김포반도로 철수하는 상황까지 포함한다.
먼저 제7-1연대는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북한군 제4사단과 전차 1개 대대를 맞아 38도선 경계진지 전투와 주저항선 전투를 실시하여, 비록 마차산에 1개 대대의 유휴 병력이 발생하지만 25일 22:00시까지 적의 양익포위를 막아내고 동두천을 사수하였다. 그러다 덕정지역으로 철수하게 된다.
육군본부는 25일 의정부축선의 위험을 확인, 동두천 축선에 제18연대(-)를 증원하여 아 1연대와 같이 동두천을 탈환하도록 하여 일시적 제1연대가 동두천을 탈환하게 된다. 그러나 우측인 포천축선에서 아9연대를 돌파한 적 제3사단이 의정부를 6월 26일, 조기에 함락하여 제1연 및 제18연은 퇴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제1연은 창동으로, 제18연은 고양을 경유하여 6월 28일 행주나루를 통해 김포반도로 철수하였다.
2. 38도선 경계진지 전투
가) 북한군 제4사단의 기습공격
국군 제7사단의 우측 정면인 아 1연대 경계지역으로 북한군 제4사단의 2개 연개가 병진공격을 감행하여 왔다. 이에 반해 아군은 제7-1-2대대가 방어중이고, 제1대대와 3대대는 연대본부 지역에서 육본지시로 소부대 훈련중에 있었다.
따라서 제2대대만 병력이 제대로 있고 양개 대대는 외출 외박으로 1/3규모도 남지않은 상태에서 전쟁 첫날을 맞이했다.
나) 양원리-초성리 지역의 경계진지 전투
제2대대는 3개월 전인 3월 하순에 제1대대와 교대하여 경계임무를 수행 중에 있었다. 대대는 2개 중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1개 중대는 예비로 대대본부가 있는 동두천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적 제4사단은 제16연대의 대대규모 병력으로 한탄강을 도하시키고, 좌일선에서는 적 제18연대가 도감포로 도하하여 집중공격하였으며 적 전차는 3번도로를 따라 초성역 쪽으로 공격해 왔다.
전곡 전방 제1연대 경게진지 전투상황도
임진강
적4사 지휘부, 제5연 집결지
임진강
전곡 한탄강
제203전차-3대대
동이리 적18연 제4-16연대 임진강 도감포 한탄강 상대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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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방촌 학담 제7중대 7-1연 2대대=2대대
제6중대(-)
양원리 초성리 대전리
1사 3대대= 7사 1연대2대대 1개소대
적암리 종현산
동막동 1연=9연
13연=1연 제5중대
간파리
1사=7사 제2대대 예비집결지
마차산 소요산
제1대대 예비집결지
감악산
동두천 제2대대 지휘본부
봉암리
제3대대 예비집결지
제7중대는 초성리 전투에서 중대병력의 2/3를 잃었다. 좌측의 제6중대는 간파교 좌우측에서 급편진지를 구축하고 적과 교전하여 중대장이 전사하고 철수하게 되며 개전 3시간 만에 경계진지를 상실하고 소요산과 마차산을 연하는 선에서 적을 저지하려 하게 되지만 적 전차가 도로상에 출현하게 된다.
다) 주요 조치
사단 당직사령 작전참모 이영규 중령은 적의 침공사실을 사단장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시간은, 사단장이 전날 육군 장교구락부 개관식에 참석하여 부재중이었고, 유사단장은 약수동 자택에서 05:15분에 보고받고 06:00에 사단 사령부에 도착하였다고 기록된다.
하지만 전쟁 당일 사단 참모장 김종갑 대령은 배속된 제25연대 문제로 온양에 내려가 있고, 사단 참모들은 보병학교 고군반 교육을 받고 있었고, 군수참모는 통신연락이 않되어 25일 14:00시가 되어서야 연락이 되었다.
3. 주저항선 전투 : 동막동-동두천 전투
가. 제1연대(-)의 주저항선 전투
제2대대가 혈전을 벌이면서 11:00시까지, 연대로부터 제3중대를 증원받아 소요산선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때 제1대대(-) 잔류병력 300며을 동두천으로 이동시키고 제3대대의 200명을 좌일선 봉암리로 출발시켰다.
제1대대가 동두천에 도착한 09:00시에 적의 포탄이 동두천에 작렬하고 있었다. 이에 대대는 81mm박격포 1개 반과 기관총 4정, 2.36" 로켓포를 제2대대에 넘겨주고 25일 12:00시에 마차산의 9부 능선에 병력을 배치한다.
하지만 적은 25일 12:00시에 전차를 앞세우고 3번도로를 따라 공격, 동두천 북쪽 2km 지점의 창말고개를 넘다 대전차포 중대의 포화에 전차 1대를 잃고 초성리쪽으로 퇴각중이었다.
한편 제3대대(-)는 25일 봉암리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산 서측으로 진격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내안홍-오금동간에 병력을 배치하였으나 적이 오질 않았다. 이에 정찰결과 적이 움직이지 않아 진지보강 작업을 계속하게 된다.
나. 주요 조치
1) 사단 및 연대 조치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6월 25일 10:00시경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 사단 사령부를 방문하자, 병력증원과 대전차 무기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채총장은 수경사 제3연대를 사단에 배속하겠다는 약속과 적 전차를 육탄공격으로 방어하라고 한 후 돌아갔다.
그러나 25일 11:00시에 우측 방어지역인 포천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3번과 43번 도로상에 적 전차가 밀려들고 있었다. 이때 포천 방면의 제9연대가 적 전차 돌입 보고를 마지막으로 통신이 두절되었으며 채총장이 약속한 제3연대(-)가 14:00시에 의정부에 도착하자 이를 포천방면의 탄장 전선으로 급파하였다.
그러나 일몰 무렵에 송우리에서 제3연대가 철수하게 되고, 제1연대 역시 동두천에서 적에게 점령됨으로서 의정부 위기가 눈앞에 이르게 된다.
이때 정보참모 이세호 소령이 축석령 북쪽에 적 전차가 출몰한다는 보고를 올리게 되자 사단장은 참모장 김종갑 대령에게 육탄공격을 지시하였다. 이에 김대령이 사단 사령부내 고급 하사관 30여 명을 집합시켜 특공대를 편성하여 축석령으로 출동하였다.
당시 우수운 이야기중 하나가 부평의 탄약중대에서 추진된 105mm포탄이 인마살상용이 아닌 백린연막탄이었다.
2) 육군본부 조치
육군본부는 비상발령과 함께 08:00시에 후방 예비사단의 전방 추진을 지시한다. 또한 25일 10:00시에 채총장은 의정부 전선을 돌아보고 제7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11:00시에 수경사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배속시키고, 육군 포병학교 대전차포 2개 중대와 기갑연대 장갑차 1개 소대를 지원토록 조치했다.
육군은 포천이 함락되자 대전에서 북상중인 제2사단(이형근 준장)을 의정부 축선에 투입토록 하고, 17:00시부로 수경사 제18연대(임충식 중령)를 제7사단에 배속시켰다. 또한 포천 동측방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13:00시부로 육사교장(이준식 준장)에게 육군사관학교 생도 대대와 군에 배속된 경찰 1개 대대로 47번도로를 막으라고 지시하였다.
한편 명령을 받은 제2사단은 가용 병력이 제5연대 2대대 밖에 없어서 이를 대동하고 18:00시에 용산역에 도착하여 당일 20:00시에 금오리 제9연대 지역에 도착한다.
당시의 증원부대들의 현황을 보면 먼저 수경사의 제3연대(-)는 25일 14:00시에 의정부에 도착하여 송우리 전선으로 직행하고, 포병교의 2개 대전차포중대와 기갑연대의 장갑소대가 25일 저녁 무렵에 도착한다. 육사생도대대(조암중령)는 20:00시에 차량으로 기동하여 내리(내촌) 부근에 도착하여 47번도로 양측의 고지군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경찰대대는 다음날 26일 아침에 도착하였다. 포병교(직무대리 김계원 중령)의 제2교도대대(김풍익 소령)가 25일 22:00시부로 제2사단을 직접지원하기 위해서 출동준비에 들어갔다.
수경사 제18연대는 25일 17:00시에 명령을 받고 19:00시에 용산 주둔지에서 징발된 민간 차량으로 출발하였다. 당시 제18연대는 옹진에서 철수한 후 부대정비 기간이었고 제1대대를 집단적으로 휴가를 보내, 제2대대와 제3대대로 21:00시에 의정부에 도착하여 녹양동에서 숙영하게 된다.
이렇듯 육본의 가용병력은 휴가 외출 외박 등으로 완편된 인원이 없이 급조된 병력으로 건재유지나 지휘체계가 어수선한 조직으로 겨우 3,000명 선이었다.
다)적의 동두천 재공격과 주저항선 전투
적은 25일 15:00시에 전차를 앞세우고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203전차연대 제3대대의 일부 전차를 앞세우고 3번도로를 따라 동두천으로 남진했다. 동시에 북한군 제16연대 및 제5연대가 동두천 좌우측에서 양익포위를 시도하였다.
이에 소요산-마차산 간의 제1연대 주저항선 지역의 거점상에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결국 탄약등 중과 부족으로 동두천쪽으로 후퇴하게 되고 그 결과 마차산의 제1대대(-)가 적에게 고립된 가운데 17:00시에 적의 선두가 창말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적 전차가 일몰과 함게 동두천시내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결국 22:00시에 덕정으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마차산의 제1대대에는 철수명령이 전달되지 못했다. 26일 저녁 무렵에 소대단위로 나누어 의정부로 철수하는 과정에 부대대장 김봉용 대위가 전사하는 등 악전고투 끝에 27일 밤 미아리에 도착한 병력은 최초 200여 명이 겨우 1개 분대였다.
한편 좌일선 제3대대(-)는 내안흥-오금동 간에 2개 중대병력을 배치하여 봉암리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의 포위망에 빠져 결국 25일 20:00시에 덕정으로 철수하라 명령하고 각자 흩어져 대대장은 21:30분에 덕정에 도착하여 수습된 병력을 제1대대에 넘겨주게 된다.
라) 동두천 역습
1) 채병덕 총장의 의정부-포천 역습 명령
6.25일 첫날 전투에서 포천과 동두천이 적에게 함락되어 의정부가 위협을 받게 되자, 육군본부에서 직접 의정부-포천 축선을 지휘 통제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제7사단은 초기전투에서 과반수를 잃었고, 제2사단도 사실 1개 대대만이 의정부에 도착하여 후방지역의 예비사단을 신속히 전선으로 전개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군 지휘부는 의정부-포천 축선에 축차 병력투입이냐, 아니며 한강선 방어를 놓고 의견이 갈라졌다. 이에 채총장은 26일 01:00시에 제7사단사령부에 들러 26일 08:00시를 기해 역습을 실시하여 38도선을 회복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2) 제7사단의 역습명령과 피아 상황
제7사단장은 26일 08:00시를 기해 동두천을 탈환한 다음 소요산-마차산 간의 원진지를 회복하기 위한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제1연대는 덕정에서 동두천으로, 제18연대는 녹양동에서 봉암리를 탈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 적은 새로운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포천 정면의 적 제3사단은 송우리까지 진출했고, 그 선두는 전차 30대를 앞세우고 축석령 3KM지점의 이동교리까지 진출하여 국군을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동두천을 점령한 제4사단은 진로를 바꾸어 서측의 316번 도로를 따라 봉암리-덕정 축선으로 병력을이동시키고 있었다.
탄장에서 물러난 제9연대(-)의 주력은 47번 도로의 서파를 지나 퇴계원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제3연대(-)도 축석령부근에서 150여 명을 수습하여 금오리 남쪽 고지로 후퇴하여 사실상 포천 방면은 공백지대로 남았다.
동두천 방면의 제1연대는 혼성병력을 덕정국민학교에 수용하고, 마차산의 제1대대(200명와 용암리의 제3대대가 독자적인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수경사의 제18연ㄷ대(-)도 의정부 북쪽에서 숙영하고 있었다.
한편 채총장으로부터 직접 출동명령을 받은 제5-2대대장(차갑준 소령)은 이형근 사단장에게 행동지침을 물어 총장명령대로 이행하라는 지시로 축석령으로 출동하다 6월 26일 03:00시경 이곳에서 적의 선두와 조우하여 급편방어로 들어간다.
3) 제1연대의 동두천 탈환과 창동 지역 철수
가) 제1연대(-)의 동두천 탈환명령과 연대 본부의 철수
제1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탈환명령을 받고 연대에 도착한 시간이 26일 아침 06:00시였다. 제1대대장 한태원 중령이 혼성병력으로 동두천을 탈환했을 대에 연대장은 덕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정부에 적전차가 출현했다는 보고를 받고 직동에 있는 연대본부로 달려가니 사단에서 동두천의 혼성대대를 창동으로 철수시키라는 명ㄴ이었다. 그러나 14:00시에 철수명령을 하달 할 당시는 이미 적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연대는 연대지휘소를 우이동으로 옮기고 이곳에 26일 21:00시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연대본부는 우이동-창동선에 낙오자 수집선을 설치하고 철수병력을 수용하였다. 그 결과 제1.3대대에서 400여 명이 집결하여 창동 방어선에 투입하게 된다.
나) 혼성대대의 동두천 탈환과 제1연대(-)의 철수
제1연대의 혼성대대와 제3대대는 26일 08:00시에 역습을 실시하였다. 특히 좌측에서 제18연대(-)가 병행하여 공격한다는 사실도 모르는체 동두천 탈환을 목표로 북진하였다. 그러나 10:00시경 동두천에 돌입했을 때에 적의 행방이 묘연하였다. 동두천을 탈환했다.
그러나 바로 14:00시에 연대장으로부터 신속히 창동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혼성대대에 떨어졌다. 이날 13:00시에 포천방향으로 들어온 북한군 제3사단이 축석령을 넘어 의정부로 들어온 데다 봉암리 서측으로 진격한 북한군 제4사단 일부가 덕정을 돌파한 결과였다. 하지만 모두가 38선까지 진격하자는 것이다. 제1연대에는 "호"부대로 불리는 서북청년단 출신이 많았는데 그들은 고향을 찾는 것이 소원이었다.
500여 명의 혼성대대는 17:00시에 덕정초등학교에 모여 의정부를 향해 철수중에 옥정리(의정부 동북쪽 10km)에서 제9연대와 제3연대의 일부 후퇴병력과 합세하여 21:00에 천보산의 북쪽 기슭에 이르렀다. 그러나 적의 기습으로 대열이 와해되어 300여명을 수습하여 의정부 서쪽으로 우회하여 3번도로를 넘어 녹양동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도봉산 서측의 송추에서 사단 공병소대와 합류하여 백운대 계곡으로 야간 행군을 강행한 끝에 6월 28일 09:00시에 우이동에서 연대본부에 합류한다.
한편 26일 아침 좌측에서 함께 공격하기로 한 제3대대는 08:00시에 용암리를 출발하여 적정이 없이 동두천 서측 신흥동에 이르렀다. 이때 현 진출선보다 서남쪽으로 4km나 떨어진 205고지(덕정북서쪽 8km) 적의 기계화부대가 남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연대에 연락을 취했으나 통신두절이 되고 바로 이때 적의 기습공격으로 300여 명의 병력은 교전 30분 만에 분산되고 말았다. 따라서 대대장 김항목 소령은 소대병력을 지휘하여 덕정으로 해서 우이동, 여기서 북상하여 오봉산을 점령한다. 부대대장 강완채 대위는 의정부 북족에서 천보산-수락산-불암산-태릉으로 철수하였고, 제10중대장 김명환 대위는 도락산을 넘어 창동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처럼 제1연대는 동두천을 탈환했음에도 조기에 의정부가 함락되어 철수를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27일 12:00시까지 창동-우이동선에서 수용한 병력이 400명을 넘지 못했으며 최초 38선 경계임무를 수행한 제2대대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4) 제18연대(-)의 봉암리 역습과 한강도하 철수
수경사의 제18연대(임충식 중령)는 육본 명으로 6월 25일 야간에 의정부지역에 도착하여 녹양동 일대에서 숙영을 했다. 6월 26일 반격에서 제7사단의 좌측을 맡은 연대는 봉암리를 탈환하기 위해 중간집결지인 덕정에 09:00TL에 도착했다. 그리고 10:00시에 제2대대를 선두로 공격을 하여 12:00시경 덕정 서북쪽 은현초등학교를 지날 때에 제7사단장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았다. 우측에서 공격하던 제1연대가 6월 26일 10:00시에 동두천을 탈환했으나 적의 행방이 묘연하고, 그 우익의 제2사단이 축석령에서 고전을 치른 끝에 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금오리가 피탈되어 의정부가 위기에 빠지게됨에 따라 내린 조치였다.
제18연대는 급편방어태세로 돌입하였다. 이때 덕정 북서쪽 도로에 북한군 기계화부대가 행군하고 있는 것이 관측되었다. 수색대와 2.36" 로켓반으로 편성된 별동대가 변암교를 넘어서는 적 선두차에 집중포격을 가했으나 적 기계화부대가 밀어닥침에 따라 분산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적은 기계화부대만 316번 도로를 따라 진출하고 도보부대는 신천 강변의 덕정으로 진출하였다. 제18연대(-)는 기계화부대가 통과한 후 진지를 조정하여 후속하는 적을 공격하여 12대의 우마차에 실린 전차 포탄을 노획히고 총위 1명, 소위 1명, 하전사 11명을 생포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사단 사령부는 의정부에서 창동파출소로 이동하여 교신이 두절된다. 이에 연대장은 단독철수를 결정하고 6월 27일 01:00시에 고양을 경유하여 삼송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대가 철수하는 지역은 국군 제1사단 지역으로 사전 협조를 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연대본부와 제3대대는 도하리-오산리를 경유하여 석현리-일영리에 이르서 하룻밤을 보내고 28일 08:00시에 삼송리에 도착한다. 제2대대(장춘권 소령)는 가납리-비암리-광탄면의 동거리에 18:00시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보내고 28일 새벽에 고양을 경유하여 28일 09:00시에 삼송리에서 연대 주력과 합류한다.
이어서 제18연대는 제1사단이 봉일천에서 고양 남쪽으로 철수한다는 보고를 받고, 연대는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하기도 결정하고 6월 28일 밤 행주나루터에서 김포반도로 도하하게 되었다.
(마) 의정부 함락과 철수
의정부-포천 축선의 방어임무를 책임지고 있던 제7사단은 6월 26일 정오경 금오리 전선이 무너진 뒤 불과 1시간 사이에 퇴로가 막히었다. 이에 사단장은 창동으로 지휘소로 이동하도록 명령하고 먼저 의정부를 빠져 나왔다. 3번 도로가 차단되어 서쪽의 직동곡개를 넘어 송추에서 다시 우이동 계곡을 돌아 26일 17:00시에 현 창동파출소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단과 제1연대 본부는 26일 19:00시를 기해 창동으로 철수를 하여 창동 방어선을 준비하게 되었다.
제 4 절 운천-포천-의정부 전투
1. 전투 개요
운천-포천-의정부 지역은 적 1군단의 주공이 지향된 지역으로 북한군은 이 지역에 전투력을 집중 운용하였다. 이 지역은 국군 제7사단 제9연대가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북한군 주공 집단인 제3사단과 제105전차 여단의 2개 전차연대를 맞아 싸운 공방전이다.
이 전투는 국군 제9연대가 6.25일 11:00시 포천이 먼저 적 기계화부대에 의해 피탈되고, 이에 연대의 주저항선(천주산과 가랑산 거점)이 붕괴되면서 16:00시 경에 적 도보부대에 의하여 다시 포천이 점령되면서 연대가 분산 철수까지를 다루고 있다. 연대는 25일 주저항선이 붕괴되면서 야간을 이용하여 일단 광릉으로 철수한 후 다음날 태릉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제2대대와 제3대대는 교전과정에 전쟁 당일 25일에 분산되어 후방으로 철수한다.이에 제9연대 방어지역은 수경사 제3연대(-), 제2사단(-), 육사 생도대대, 서울시경경찰대대, 그리고 재경지역의 포병교 교도대대가 26일 의정부가 함락될 때까지 방어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적전차를 앞세운 적의 기세에 눌려, 계속적인 축차 병력투입으로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도 못해보고 축석령-금오리 방어선이 붕괴되고 국군은 백석천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한다. 또 47번 도로상의 내촌에 배치된 육사생도 대대와 경찰 대대는 26일 적의 공격을 받고 태릉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이 전투에서 포천축선 패전 책임을 물어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을 보직해임하고 의정부지구사령관에 임명된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26일부터 통합 지휘하였다.
2. 38도선 경계진지 전투
제9연대 경계진지 전투 상황도
적3사 지휘소/105전차여단 지휘소/적8연대지휘소
운천
야미리
적4=적3사 적105전차-107연대
적3-7연대 적105-109연
적8연-1대대 영평 영평천 적3-9연대
-38선------------------------------------------------------------------------------------------------------------------------------------------------------------
2-6중대 2-7중대 양문리
2=2 추동리 가양리 사직리
종현산
1연=9연 만세교
2-5중대
자하동
가랑산 3대대 예비진지 기산리
탄장
1대대예비진지 천주산
포천 2대대지휘소 서파
가. 적의 공격제대 및 아군부대 배치 : 상기 배치도 참조
여기서 적 105전차여단 107연대는 주공연대인 제7연대를 후속하다가 전쟁 2일차에 포천-의정부-서울 동북쪽으로 진출하도록 하였고, 제109전차연대는 조공연대인 제9연대를 후속하다가 일동-서파-서울 동쪿으로 진출하여 신속히 한강사의 교량을 점령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반면에 국군 제7사단은 포천지역을 제9연대(윤춘근 중령)이 추동리-사직리에 이르는 26km의 책임지역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 방어정면을 3,400명의 병력을 가지고 북한군 제3사단과 107전차연대 및 109전차연대와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제9연대도 1개 대대가 38선 경비를 담당하고, 2개 대대는 38선에서 26km 떨어진 후방에 위치한 연대본부가 있는 금오리에서 소부대 전술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제2대대(권순기 소령)는 전쟁 발발 2일전에 제3대대(이철원 소령)와 진지를 교대하였다. 따라서 추동리에 1개 중대, 양문에 1개 중대를 배치하고 만세교에 1개 중대를 에비로 확보하여, 실제로 우측방 양문에서 사직리간 19km는 무방비 상태였다.
다행인 것은 연대 전장병이 외출 및 외박을 실시하지 않은 채 전 장병이 영내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 경계진지 전투
북한군은 6월 25일 03:40분을 전후하여 공격준비사격을 시작하였다. 북한군의 30분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으로 국군은 기관총진지를 제외한 모든 교통호가 붕괴되면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적은 전차 3대를 앞세우고 먼저 중앙의 삼팔교를 통과하여 양문교까지 진출하여 제1소대 진지를 유린하였다. 결국 우측의 제7중대는 43번도로를 빼앗기고 후퇴하게 된다.
좌측의 제6중대도 추동리에서 한차례 교전을 하지만 325번 도로를 따라 출현한 적 전차에 유린당하고 포천 방향으로 철수를 하게 된다. 당시에 모든 유무선은 두절되었다.
대대장 권순기 소령은 연대에 상황 보고를 하고 이어서 예비인 제5중대에게 북만세 좌우측의 160고지와 208고지를 연해서 저지진지를 급편하도록 하였으나 양문교를 넘어선 적 전차를 저지한다는 것은 바위에 달걀치기와 같은 것이었다.
다. 주요 조치
제9연대장은 상황보고를 받고 금오리에 있던 제1대대와 제3대대에 천주산-가랑산 간의 주저항선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57mm대전차포중대장(허헌 대위)에게 만세교로 직행하여 적 전차를 저지하도록 하고 2.36" 로켓포 12문을 집결하여 만세교 부근의 중요 지점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포를 견인할 차가 없어서 포 3문을 지프차로 끌고 갔다.
이때 금오리의 1대대와 3대대 병력은 수송할 차량이 없어서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차량이 수리를 위해 반납되었고 겨우 21/2톤 5대만 연대에 남아서 1대대 병력을 먼저 보내고 헌병으로 하여금 의정부에서 민간차량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이에 사단은 우선 사단 포병인 제5포병대대(이규삼 소령)에게 2개 포대를 포천방면의 제9연대를 지원하고 제2포대는 동두천의 제1연대를 직접 지원하도록 하였다.
육본에서는 11:00시부로 수경사 제3연대(-)를 제7사단에 배속시키고, 포병학교 대전차포 2개 중대와 기갑연대 장갑차 1개 소대를 지원하였다. 이후 포천이 함락되자 대전에서 북상중인 제2사단(-)을 의정부 축선에 증원하고 제7사단의 동측방을 보호하기 위해 13:00시 부로 육사생도대대와 경찰 1개 대대를 47번 도로 내리(음현리 일대)부근으로 보내 적을 저지토록 하였다.
3. 주저항선 전투 : 만세교-포천 전투
가. 제9연대(-)의 출동과 만세교 부근 지연전
연대 주력은 25일 09:00시에야 주둔지를 출발했다. 이때까지 연대에서 경계부대인 제2대대에 지원은 대전차포 3문과 로캣포 12문에 불가하였다. 따라서 제2대대는 4시간 동안 홀로 싸우고 있었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43번 도로를 따라 공격을 하게 되고 국군은 만세교 부근에서 대전차포로 전차를 공격해 보지만 파괴되지 않고 계속 남하하여 만세교를 지나 포천 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나. 제1대대의 주저항선 전투
경계부대인 제2대대는 북만세 진지가 돌파된 후 퇴로가 차단되어 조직적인 철수를 하지 못하고 각개 분산된 채 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병력들은 아무런 지휘도 없이 왕방산 기슭을 따라 의정부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나중에 수용된 제2대대 병력은 겨우 30명에 불과했다.
적 전차가 신대(현 새터)를 통과하여 탄장으로 진출할 무렵 내촌리 부근에서 유환박 소령이 지휘하는 제1대대(-2)가 이를 저지하고 있었다. 제1대대는 금오리에서 차량이 부족하여 출동이 지연되자 대대장이 81mm 박격포 3문과 제3중대 병력 100명을 지휘하여 차량 5대로 출동하였다.
제1대대는 접근하는 적을 향해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공격하자, 적 전차는 만세교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대대(-2)가 적 전차를 물리친 후 대대 주력이 탄장에 도착하였다. 의정부에서 징발한 민간차량 12대에 병력을 분승하여 이동함으로서 대대병력 650명이 되어 주저항선 진지(천주산-가랑산선)를 점령하게 되었다.
제3대대는 제1대대 본진과 같은 시기에 도착하여 신북대교 서측의 가랑산에 진지를 편성하였다.
다.적 기계화부대의 선공과 포천 점령
북한군 제3사단은 이날 새벽 38도선을 돌파하여 4km 남쪽의 만세교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북한군은 포천을 양익포위로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전차부대를 선두로 아 주저항선의 중앙지대를 돌파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했다.
이 당시에 국군 제9연대는 43번 도로 양측방의 천주산과 가랑산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측에는 병력이 부족하여 병력이 배치되지 않아 공백상태로 남아 있었다.
연대는 2.36" 로켓포를 신북대교 부근에 집중배치하고, 제5포병대대의 표적을 도로상에 선정하여 적 전차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이때 적 전차 2대가 백기를 달고 위장 진출하여 연대는 적잖은 피해를 입고, 적은 전차 8대를 포함하여 수많은 전차 및 차량이 후속하여 내려오고 있었다.
적 전차는 아군의 로켓포 사격에도 끄덕없이 신북대교를 통과하여 연대 주저항선의 중앙지대를 돌파하여 포천으로 직행하여 11:00시에 포천을 점령하였다. 국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한 적기계화부대는 아무런 저항없이 진출하였다. 여기에 북한군 제9연대는 가랑산 좌측의 무럭고개로 우회하여 진출하게 되면서 제3대대는 유무선이 두절되고, 연대 주력은 퇴로가 차단되어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라. 주저항선에서 철수
북한군은 기계화부대가 아 주저항선을 통과한 지 1시간 후에 보병부대의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주로 천주산 제1대대 진지에 포격을 가하고 43번도로를 따라 2열종대로 진격해 왔다. 이 당시에 국군 제5포병대대는 적 전차의 포천 점령으로 철수하게 되어 화력제공을 할 수 없었다.
북한군 선두부대가 탄장 남쪽 400m의 디긋자 회랑에 접어들 때 제1대대는 적을 강타하여 적이 일시적으로 흩어졌으나 다시 25일 12:00시에 재공격을 감행하였다. 적은 1개 대대규모로 제1대대 진지를 포위하고 주력으로 중앙을 돌파하여 43번 도로 양측방을 공격하여 왔다. 이에 제1,3대대는 협조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12:40분경 측후방에서 나타난 적 전차 4대가 위협사격을 가하자 집중사격을 받은 제3대대가 진지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적 전차가 신북대교를 통과하면서 제3대대와 통신두절이 되고, 제1대대는 전사 42명.부상 80여 명이 발생하면서 주저항선은 무너졌다.
특히 포천에서 송우리로 철수하던 포병 대대는 적 전차에 어룡동 부근에서 대대 후미가 붙집히에 되어 화포 7문을 버리고 겨우 2문만 송우리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연대본부 후속부대가 탄장으로 급파되었으나 적 전차의 공격으로 포천 남쪽에서 되돌아갔다.
사단은 축차진지상에서 적을 저지하도록 했으나 이미 통신이 두절되고 많은 피해가 발생하면서 조직적인 철수는 불가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제9연대장은 제1대대와 천주산 동측을 우회하여 서파로 빠지기로 하고 철수를 개시하고, 제3대대는 통신이 두절되어 끝내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
제9연대 주저항선 전투 상황도
종현산 만세교
아 5중대
4=2
1연=9연 가랑산 탄장
9-3대대 천주산
9-1대대
포천
왕방산
5포병대대(-) 해룡산
어룡리
적105전차여단(-)
적3사단(-) 지휘소
내리
회암령 9-제3대대예비진지
송우리
연대와 제1대대는 폭우속을 이용하여 17:00시경 지현리-명덕리-서파로 이동하고 밤 21:00시에 내리에 당도하였다. 이 당시에 육사생도대대(조암 중령)가 들어왔다. 연대본부와 제1대대는 팔야리부근에서 숙영을 하고 26일 광릉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이미 의정부가 실함되;어 26일 밤에 육군사관학교에 집결하게 된다.
한편 명령을 받지못한 제3대대는 남은 병력이 가랑산진지에서 이날 밤에 철수하여 왕방산 기슭을 따라 회암령을 넘어 덕정부근으로 빠진 다음 아침에 옥정리(송우리 서쪽 5km)에 집결했다. 병력은 겨우 100여 명으로, 여기서 제1연대 철수 병력과 합세하여 의정부로 철수하다 다시 천보산 북쪽에서 분산하여 일부만이 우이동으로 철수하여 집결하였다.
이렇듯이 제9연대는 겨우 제1대대만이 태릉으로 집결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분산되어 전투력이 상실되었다.
4. 송우리-축석령-금오리 전투와 의정부 함락
제7사단의 최후저항선에 해당하는 송우리-축석령-금오리 전투에서는 최초 이 지역을 담당했던 제7사단 병력은 철수하고 없었다. 대신 증원부대인 수경가 제3연대와 제2사단이 담당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작전부대들이 제대로 전투력을 깆추지 못하고 축차적으로 투입되며 개전 2일 만인 26일 정오경에 적의 제105전차여단과 제3사단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 결과 국군의 전 전선은 퇴로가 차단되는 위기를 맞게 됨으로서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가. 송우리 전투
1) 제3연대(-)의 출동과 송우리 급편방어진지 편성
포천 정면에서 제9연대가 전투 중일 때 6월 25일 상오 제7사단에는 제5포병대대(-)만을 증파하고, 후속할 예비병력이 없이 악화되어 가는 전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당시 수경사 제3연대는 원래 제7사단의 예속부대로서 전쟁 발발 10일 전까지 사단 예비였다. 그러나 6월 15일부로 수경사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출동할 당시에 제3연대는 장병 대부분이 주말 외출 중이라 전쟁 당일 아침에는 영내에 450명에 불과한 병력이 남아 있었고 25일 11:00시에 소집된 연대 총병력은 650명이었다.
따라서 연대는 병력을 혼합편성하고 징발 차량 20대에 편승하여 서빙고 연대본부를 출발하여 14:00시에 의정부에 도착하여 상황 설명을 듣고 다시 탄장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15:00시경 포천 서남쪽 2.5km의 자작리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포천시내에 불길이 치솟고 제9연대 부상병들이 들것에 실려 피난민과 같이 내려오고 있었다. 대전차포와 포병 일부병력이 철수하면서 포천에 적이 들어왔다고 알렸다.
이에 연대장은 수색소대로 위력수색을 실시한 후 연대를 3km 후방인 송우리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한다.
2) 송우리 지역 작전 경과
연대는 송우교를 중심으로 좌우 측방에 각각 2개 중대식 배치하고, 혼성 제11중대는 43번 도로 중앙에 배치하였다. 17:00시경 적 선두가 전차포를 사격하며 접근하게 된다. 그러나 각종 대전차 화기로 사격에도 끄덕덦이 적전차는 송우리 진지를 돌파하게 된다. 더욱이 근접하는 적 보병마저도 대규모로 계속 남하하여 중과부족으로 18:30분경에 제3연대(-)의 급편방어진지는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서 연대장(이상근 대령)이 행방불명 되고, 각 대대장들의 통제로 의정부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20:00시에 수습된 병력은 제1대대는150명 밖에 안되었다. 대대는 축석령에서 다시 금오리 남쪽의 155고지로 철수하여 포천지역은 무인지대가 되었다.
나.축석령 전투
가) 제5연대(-)와 포병교 교도대대 축석령 전투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6월 26일 새벽 채병덕 총참모장으로부터 역습명령을 받고 사단지휘소가 있는 금오리로 돌아왔지만 당시에 사단 예하부대들은 서울로 이동 중에 있었고 가용한 병력은 제5-2대대 밖에 없었다. 따라서 축석령으로 이동하여 제3연대의 통제를 받으라고 했다.
축석령으로 이동중에 제5-2대대는 6월 26일 03:00시에 야간이동으로 출발했지만 실제로는 개인실탄이 15~30발 밖에 없는 전투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더구나 실제 축석령에는 제3연대가 없었다. 연대는 이미 철수하여 금오리 남쪽에 집결 중이었다. 이처럼 사전정찰도 없이 축석령으로 진출하다 적 전차가 고개를 넘고 있어 방어태세로 전환하게 된다. 하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진지가 노출되어 포격과 기총으로 아군 진지에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제2대대는 소총으로 30분간 교전하였지만 방어선이 무너지고, 뒤이어 도착한 제1대대도 탄약을 보급받지도 못하고 진출하고 있는 중에 적에게 기습을 당하여 조직이 와해되어 분산 철수하게 된다.
한편 의정부 동북쪽 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포병교 교도대대가 금오리로 긴급출동하였다. 서울 용산동 주둔지를 출발하여 상금오리에 포를 배치하고 포사격을 지원했으나 적 전차의 진출을 막지 못했다. 이에 대대장 김풍익 소령이 2포대 6번포를 데리고 장풍익 포대장과 자일동 서남쪽 1km지점의 교량부근 43번 도로상에 09:10분경 포를 방열하고 있다가 50m 근접까지 적 전차를 유인하여 사격으로 파괴하게 되었다. 이에 적은 뒤로 물러나게 되지만 이미 국군 보병은 모두 분산되어 전선형성이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이로인해 포병대대장과 포대장, 포반원은 모두 적의 적전차 사격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나) 제16연대(-)의 축석령 전투
축석령-금오리 -백석천 전투 상황도
덕정 송우리
적3사(-)/ 적 107전차연대(-)
적 203전차연대 3대대
불국산 적 4사단
축석령
국5연(-)
금오리 아 제2사 지휘소
아 16연대(-)
천보산
직동 의정부 아제7사 지휘소
사패산 아25연-2대대 아25연-3대대 적 3사
호원동
오봉산 도봉산 아16연-2대대
아16연(-) 아5연(-2) 퇴계원 방향
적105전차여단(-)
적4사
적 유격 1개 중대 상계동
우이동 창동 6.26,아7사 지휘소 불암산
국군 제2사단이 축석령에서 적의 1차 공격을 물리친 후 제5연대(-)의 분산병력을 수습하여 축석령에 다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때 문용채 대령이 지휘하는 제2사단 제16연대(-)가 6월 25일 19:00시에 청주에서 출발하여 금오리에 도착했다. 제2대대는 6월 26일 먼저 04:00시에 창동역으로 도착하여 도보로 의정부를 거쳐 금오리에 도착했었다. 하지만 제16연대(-)는 제대로 탄약이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에 적 제3사는 축석령에서 일시 물러난 후 이동교리 부근에서 재정비를 한 후에 보전협동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일부 병력을 서측으로 우회시켜 회암령을 넘어 의정부쪽에서 공격을 하였다. 제16연대(-)는 12:00시에 적이 보전협동으로 축석령으로 공격해 오자 좌우 측방에서 화력을 집중하였지만 적이 의정부 방향으로 직행함으로서 의정부 위기가 촌각에 달리게 된다.
다) 금오리 방어선 붕괴와 의정부 함락
제2사단은 제5연대(-)와 제16연대(-)가 병력을 집중운용하지 못하고 축차투입한 관계로 적의 월등한 화력 및 기습공격으로 조기에 퇴로가 차단되어 병력이 각개 분산하게 되었다.
사실 이시간에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금오리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에서 자일동 서북쪽의 202고지-금곡선에서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제대로 된 건재유지 병력이 없고, 개인탄약과 공용화기 탄약이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여기에 제25연대는 제1대대는 안동에 파견나가 있었고, 제2대대와 3대대가 전날 밤 온양에서 출발하여 26일 아침 용산역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금오리에는 사실 육군 포병교 105mm 1개 대대가 금오리 남쪽의 신촌부락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하는 것이 전부였으며 적의 포탄이 사단 지휘소에 12:30분경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적전차가 의정부 시내에 들어와 위협사격을 가하자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5.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 설치
사단은 적의 전차포 사격에 도보로 의정부를 우회하여 동측의 소로를 따라 창동쪽으로 철수하였다. 철수 도중인 14:00시경 의정부 남쪽 5KM의 경원선 철로와 교차로 부근에서 총참모장 채병덕을 만나, 후퇴 책임을 물어 제2사단장을 해임하고 대신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을 임명하여 양 사단을 통합 지휘하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채총장은 축석령 방어를 했던 국군 제2-5연대장 박기성 중령도 해임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런 아수라장에서 제2-25연대 2개 대대가 백석천 제방을 따라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제5연대장에 임명된 최창언 중령은 장암동(의정부 남쪽 4KM)에서 혼성병력 187명을 인수하여 해질 무렵에야 수락산 서쪽에 진지를 편성하였다. 분산 병력은 후퇴하여 27일 아침에 창동지역에 집결하게 되었다.
제 5 절 백석천- 내촌 전투
1. 전투 개요
백석천 전투는 의정부가 함락된 이후의 제2사 제25연대가 북한군과 전투한다. 내촌 전투는 47번 도로상에서 이곳을 뒤늦게 투입된 생도대대와 포천을 점령한 후 이곳으로 진출한 북한군 간의 전투를 말한다.
백석천 전투는 의정부가 함락된 후 온양에서 출발하여 창동에 뒤늦게 도착했던 제2-25연대(중령 깁병휘)가 의정부 남쪽 백석천에서 26일 17:00시경 3번도로를 따라 보전혐동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향해 화력을 집중하여 백석교에서 적전차 궤도를 명중시켜 후속하던 10여 대의 전차는 의정부방향으로 퇴각하게 된다.
내촌 전투는 6월 26일 내촌에 배치된 육사 생도대대와 경찰 대대가 이지역으로 투입된 북한군 제3사단 예하부대와 전투한다. 사실 이곳은 일동-서파-퇴계원에 이르는 중요한 요충지인데도 전쟁 당시에는 병력이 배치되지 않은 지역이다. 따라서 25일과 26일 새벽에 배치되었다가 26일 적의 공격으로 태릉으로 철수하게 된다.
2. 제25연대(-)의 백석천 전투
의정부 하락과 함께 3번 도로가 차단되자, 전선에서 적과 싸우던 각 부대는 철수를 하게 된다. 제1.제9.제3.제18.제5.제16연대 등 수경사와 제7사단 및 제2사단 예하의 6개 보병연대와 제5포병대대가 창동을 목표로 우회기동하거나 멀리 서쪽 고양방면으로 우회하여 철수를 하게 된다.
이때 제25연대만 창동에서 대기하던 중 채병덕 총참모장을 만나 백석천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26일 15:00시경 2개 대대 병력으로 이곳에 저지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 시간에도 제25연대는 탄약을 보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26일 17:00경부터 3번도로를 따라 적의 전차대열이 아군 방어정면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전차 1대에 궤도에 포탄이 명중하면서 적은 일시적으로 의정부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백석교를 통과한 적 전차 4대가 계속 남진하여 호원동 동쪽의 철교부근까지 다가왔다. 이곳에는 혼성 제2대대(축석령에서 철수하는병력을 수습하여 편성한 부대)가 부대대장 중대장 등이 전사하며 30여분 혈투로 적전차를 격퇴하였다. 이로 인해 그나마 27일 창동 전선의 전투전개가 미흡하나마 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 제25연대(-)는 6월 26일 야간 경계태세로 들어가 27일 새벽 북한군 보.전.포 협동공격을 백석천과 약수암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지연전읅 펴며 철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혼란이 야기되어 연대본부와 제3대대는 미아리로 철수하고, 제2대대는 도봉산을 넘어 구파발과 눙곡을 거쳐서 행주나루를 건너 철수하게 된다.
3. 생도대대의 내촌 전투
내촌 전투 상황도
포천
적105전차여단 107/109연대 적 제3사?
적3사
서파
아2-3연대
송우리
회암령
적 제9연-1개 대대
축석령 국사봉
아2-5연대/ 아 2-16연대 진목리 경찰대대
생도대대
팔야리
부평리
태릉으로 철수
의정부 동측방 내촌일대는 개전초기 무방비 상태였다. 아 제7사단의 가장 우측지역으로 적이 점령시는 의정부와 포천 정면의 아군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요충지다.
이에 육본은 나중에 이를 간파하고 육사 생도 대대와 경찰 대대를 보내 적의 진출을 저지하려 했다. 먼저 경찰 의 방어진지를 돌파한 적이 생도대대지역을 진출하자 육사교장 이준식 준장의 명령으로 생도대대는 이날 밤 태릉으로 철수한다.
가. 육군본부의 육사생도 대대 출동 명령
육본은 전쟁 당일 10:00시에 의정부 전황을 확인한 후, 제3연대를 제7사단에 배속시키고 재경지역에 있는 각 군사학교의 기간병으로 수도 경비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에 육본은 수도방위특별연대를 편성하고, 연대장에 보병학교 유해준 중령을 임명한 후 보병교 교도대대와 육사교도 대대 및 육사 생도 대대를 통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서부지역의 상황이 불리하자 채총장은 보교 교도대대와 육사 교도대는 제1사단에 배속하여 문산으로 파견하도록 한다. 그리고 육사 생도대는 제7사단의 동측을 방어하라고 지시하였다.
나. 육사 생도 대대 전투편성과 진지점령
이에 이준석 사관학교장은 교무처장 조암 중령을 대대장으로 하여 임관을 2주일 앞둔 생도 제1기생 263명과 입교한지 불과 25일 밖에 되지않은 제2기생 334명 등 총 597명으로 편성하게 된다. 그러나 1기생은 2/3가 외출중이었고, 2기생은 전원 영내에 있었다.
전투편성을 마친 생도대대는 25일 16:00시에 징발된 민간차량을 이용항여 가산리 방향으로 출동하였다. 19:00시경에 음현리 일데에 도착하여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 시간에는 경찰대대도 아직 오지않았다.
다. 내촌 전투
6월 25일 밤을 372고지에서 철야경계로 보낸 육사생도대대는 26일 아침부터 진지공사를 서둘렀다. 이날 06:00시경에 300명의 서울 경찰대대가 도착하여 47번도로 우측 고지에 배치되었다.
적은 26일 16:00시가 되어서야 적 제3-9연대에서 대대규모로 이곳 국사봉 남쪽으로 우회기동하여 내리 북쪽에 배치된 경찰대대를 공격하였다.
경찰대대는 불과 10분만에 음현리로 철수하게 되고 적은 생도 대대방어정면으로 공격해 왔다. 그러나 조직적인 방어력에 적은 물러났다가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여 18:00시경 좌우 양 측면에서 재공격을 가해 육박전이 벌어지며 사투를 벌이게 된다.
바로 이때 생도대대 철수명령이 떨어져, 적과 접촉한 상황에서 19:00시경부터 철수를 개시하였다. 광릉-용암리를 거쳐 퇴계원으로 철수간 많은 손실을 보며 26일 21:00시에 학교본부로 집결하게 되었다.(당시에 인솔 대대장인 조암 중령은 행불이 된다. 일설에 북에 귀순하였다고 한다. 아니면 프락치로서 복귀했다고도 한다)
제 6절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지역 주민 및 참전용사 증언)
[대통령을 모셔랴]
1. 이종록 당시 이지역 소대장 증언 "싸우려 가려해도 차가 없어 못갔다."
"무슨 병력이 다 있고 무기가 다 있어요?"
여기서 전사에 나와 있는 내용과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당시 제9연대 소대장이었던 고 이종록 예비역 중령의 증언은 다르다.
이 중령님은 무려 '99년부터 '14년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함께 유해를 찾기 위해 전국을 매년 4~6회 함께 다니던 용사님 이었다.
본인은 양문리에서 소대장을 하고 있다가 비상 해제로 포천에 왔다가 전쟁을 만나 최초진지에 가지 못하고 그래도 가까운 포천에 있었던 관계로 영중 백로바위 우측, 그러니까 43번도로 우측 야산에서 소대를 만나 축차적으로 내려갔다고한다.
차량을 무슨 정비한답시고 죄다 입고 시켜서 전방으로 병력을 추진할 차량이 없었다.
그러니 연대장이 강압(?)으로 휴가를 안보내 병력만이 있는데 그 탱크를 어떻게 막아내느냐고 물으셨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 길을 따라 탱크가 포천으로 가고 있단다.
주저항선이 가랑산-천주산이지만 주 도로를 따라 북한군이 먼저 밑으로 내려 가는데 무슨 방어작전이냐고 말하며 병력도 대대병력이 중대병력도 못 되었다고 한다.
"아니 휴가도 안보내고 대전차포도 있고 하는데 왜 그냥 밀려내려 갔어요?"
"어이, 뭐 시꺼먼 뭉치가 크릉 하면서 찻길을 털털털 밀고 내려 오는데 누가 막아?"
"병력이 어디 있어요, 적 전차가 한번 사격하면 모두 공중으로 날아가 버려 공포에 질렸는데......"
"혹시 이곳에 무슨 사연이 있는것 아니예요?"
난 2000년에 이곳 포천 신북, 가랑산 우측 벙커에 왔다.
지금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적탱크 방어용 토치카가 포천에 있다.
강영훈 전총리가 육본 인사국장으로 가기전에 9연대장을 하면서 만들었다는 벙커가 살아 있다.
누구는 장도영 연대장 시절에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혼자가 아닌 이종록 참전용사님과 함게 이곳에 와서 묵념을 올리고 술한잔 따라 드렸다.
"적 탱크포에 맞아 총안구가 무너지고 철골이 모습을 들어낸 벙커다."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벙커
"혹시 이곳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 아니예요?"
"이곳에 2.36"대전차포 병사들이 들어가 있다가 다 죽었어요."
아무리 총으로 쏴봐야 그 시꺼먼 적전차는 끄덕도 않고 대전차포를 쏘아도 덜커덩 거리고 진출해 버리고 포탑을 돌려 한번씩 사격을 하면 일대는 숙대밭이 되고 말았다.
한여름날 비는 내리는데 그 사람 피흘린 냄새가 천리는 간다고 한다.
몸으로 싸운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지 도무지 해볼 수 없는 적이 눈앞을 지나 버젖이 길을 따라 포천으로 내려가는데 산으로 도망치는 군인의 신세가 말이 아니란다.
누가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없고 소대장이 말이 소대장이지 병력이 없는데 2~3명 데리고 무슨 소대장이냐고 반문하는 용사님이다.
"이곳을 발굴해 주세요. 여기 대전차 포 인원 3명이 묻혀 있소!"
벙커 위로 올라서니 아기묘처럼 나즈막한 봉분같은 것이 있다.
"이거 전쟁 끝나고 내가 와서 유해를 수습하여 동네사람과 매장한 것이요!"
"네?, 아니 그러면 무려 1129일동안 그냥 이 벙커안에 뼈로 그대로 있었단 말입니가?"
"그래요, 처음 냄새가 나서 좀 섬찟했는데 한여름이 가니 냄새도 사라지고 무너진 총안구로 들여다 보면 시신이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린 그 제보자 아저씨를 찾으려 했으나 이미 죽고 안계셨다.
이지역은 현제 제8사단 책임지역이었다.
나는 그 부대 병력을 지원받아 발굴을 하기 시작했다.
전투화도 있었고 탄티도 있었다는 이용사님의 증언을 토대로 발굴을 해 본 결과 그 말대로 사과박스크기의 규격에 뼈를 추스려서 모아 놓은 상태로 유품과 함께 3구의 유해가 나왔다.
2. "노무현 대통령이 찾아오신 요골의 대전차포 진지."
전사에 보면 제9연대 2대대가 이곳 160고지에서 철수 병력을 수습하고 적과 교전하였으나 탄약이부족하여 평촌을거쳐 퇴계원으로 철수 한다고 되어 있다.
나는 이곳이 아들녀석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철원을 가는데 거쳐 가는 곳이라 매번 이 사실을 추적하려 160고지뿐만 아니라 가랑산, 천주산, 금주산, 영중일대 야산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다 요골에 조문원 할아버지를 어느 날 만나게 된다.
"어르신, 혹시 이곳에 계속 사셨나요?"
"그럼요, 여기가 우리 조상님들의 뼈가 묻혀 있는 곳 입니다. 왜 물어보세요?"
나는 바로 43번 국도변에 있는 할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방에 앉게 되었다
할머니가 과일이며 커피를 차려 나오시고 우린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요, 내가 17살인데 국군이 뭘 싸워 그저 호에 앉아있다가 탱크가 나타나니 저 뒤로 해서 도망가기 바빠. 나는 체격이 왜소하니 이놈들이 안잡아가요. 그래서 살았어."
"아니 160고지에서 전투를 했다고 하는데 아니라고 하시면 전사책 쓴 사람을 잡아다 혼을 내야지, 여기 할아버지께 찾아와서 당시 상황을 들어보고 썻어야 제대로 쓰는 건데...... "
"우리집 뒤가 싸운 곳이고 저 앞에 길건너 밤나무 있지, 그 옆에 두명이 7사단인데 묻혀있고 마을 뒤로 들어가면 천주산 오르기전에 우측에 약수터가 있었는데 그곳에 한명이 죽어서 그 자리에 묻어주었지."
"아니 군대도 안가셨다면서 무슨 시신을 묻고 다녀요?"
"무슨 소리야, 군대를 안간것이 아니고 못갔지. 소년병으로 학도병이 되어 미군들 기관총들고 다녔는데 인정을 안해주는 놈들이 나쁜 놈이지?"
"전쟁 끝나고는 왜 안가셨는데요?"
"폐병에 걸려서 각혈을 하는데 내가 싫은 것이 아니고 군에서 못오게 한 거라니까."
우린 산에 올랐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어르신이 시신을 묻었다는 곳을 확인하는 것이다.
금주산 밑에 금주리도 들어가고 가양리에 돌을 캐내고 있는 금화봉에도 올랐다.
신북대교에 가고 무럭고개에 가고 가랑산에 올랐다.
가랑산(307m)은 전사에 주저항선이라 하는 곳이라 올라서게 되었다.
주변에는 원수봉이 406m이고 덕령산이 350m으로 87번지방도와 43번도로를 안고 있는 교통의 요지다. 좌측으로는 넘어서면 동두천이 나오는 왕방산(736m)와 국사봉(755m) 버티고 있다.
3. 전투 흔적을 찾아라
그러나 가랑산이나 천주산에 오는 1개중대 규모로 구축은 되어 있고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자 하는 전투의 흔적이 없다.
전투의 흔적이란 파편, 탄피,탄창,탄크립등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징후가 없고 우리가 병력을 투입하여 발굴작전을 했으나 유해가 부분유해라도 한점이 없다.
도대체 주저항선이라는데 어디서 싸웠다는 것인지......
마차산, 그리고 소요산과 한줄기인 왕방산과 국사봉은 제1연대의 초기 전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제1연대는 전곡의 장현리와 적암리 고릉리 그리고 포천의 초성리 대전리 추동리선이 38도선으로 높은 산이 없고 개활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주 저항선이 마차산과 소요산을 연하는 선인데 실제 전투는 3번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적전차에 기가 죽어서 제대로 대적한번 못하고 동두천 덕정으로 밀려가서 겨우 지원군을 만나 적에게 역습한번 하고 의정부 축선으로 밀려 나게 된다.
이곳도 사실은 초성리 지금의 탄약부대 뒷산 175고지에서 열심히 싸운 다음에는 그 줄기를 타고 소요산으로해서 방랑의 길에 들어서 왕방산이며 국사봉을 전전하게 되고, 이 산들은 고지가갔고 있는 잇점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중공군이 들어와 미군과의 전투에 쓸모있는 전투현장이 된다.
할아버지는 깡마른 체구에 강단이 있어 보인다.
43번도로 우측으로는 된봉이 304m이고 천주산은 425m로 남북으로 길게 산이 이어지고 우측으로는 19번도로와 47번도로가 있고 남쪽으로 710m 수원산이 있다.
"할아버지 힘들지 않으세요?"
"무슨 소리야, 그 무거운 기관총을 메고 지금 6사단쪽에 있는 고남산을 미군따라 넘었던 용사야."
"저도 힘들어 죽겠는데 벌써 3일째 산을 걷는데 힘드시겠지요."
극구 아니라고 큰소리치고 하나라도 더 알려준다며 이리가고 저리가고 나는 그 어른의 지시(?)를 받고 빌빌 땀을 흘리며 그렇게 종종 산을 올랐다.
"대통령님이 오실만한 곳을 찾아라!" 2007년도에 특명이 떨어졌다.
서울에서 가깝고 접근성이 양호하며 국군이 전사한 곳을 가능한 선정하라는 조건이다.
지난 유해발굴 기간에 고위직이 현장에 온것은 11군단장을 하신 홍갑식중장이 가장 높은 분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 소식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조건을 만족시킨다는게 쉽지는 않다.
4월부터 발굴작전에 들어가니 6월 6일 현충일 까지는 2개월 밖에 남지않은 시간이다.
양구나 철원등 전방은 제외다. 이유는 땅이 얼어있어 발굴작전이 늦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곳 요골에 들러 160고지부터 실태조사를 다시 하는 과정에 바로 43번도로에서 직선거리 100m도 안되는 곳에 도로변을 끼고 굴토되어 있는 개인호와 교통호를 찾아냈다.
당연히 어르신이 많은 기여를 했으며 지금도 당당하게 건강해 보였다.
"발굴되는 철모, 그리고 2.36"대전차포와 군인들!"
나는 무슨 첩보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대에서도 모르고 이 지역 책임부대에서도 모르게 은밀한 발굴준비를 몇몇 믿을 수 있는 엄선된 인원을 대동하여 대통령님을 맞이할 준비에 들어갔다.
일명 '007작전'이다.
먼저 지뢰탐지기로 할아버지의 육감이 정해준 곳을 탐색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육감을 발휘하여 그리고 전술식견을 발휘하여 앞에 지나가는 43번도로와의 연관성을 판단, 도로와 근접한 곳에 대한 정밀 답사를 실시 하였다. 일구가 통제하는 탐사팀이 수시로 연락이 온다.
"1번 광수 : 파편3개, 탄창 1개"
"2번 광수 : 전투화 잔해 4편, m1탄 5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1주일이 가는데 유해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이곳이 악랄하기로(?) 그 유명한 헌병초소가 있는 만세교리 일대다.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제8사단, 제5군단이 나오고 북쪽으로 한 5km만 가면 영평천 38휴게소가 나오는데 실제 이곳이 38도선이 지나가는 곳이다.
나는 금주산 금주사에 올라 제발 용사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소원을 말하고 아예 베이스 캠프를 만세교리 옆에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이곳 일대를 탐문하기로 했다.
여러가지 정황상 이곳 어딘가는 분명 초전에 많은 희생이 발생하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곳이 있으리라 나는 확신을 갔고 있었다.
이유는 이종록 용사님의 초전에 적이 기습도 사실 아니고 포 몇발 때리고 탱크를 밀고 내려오는데 뭔지도 모르고 진지에 투입된 인원이 전투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니 이곳 어딘가는 적 전차에 직접 맞아서 숨져간 용사님이 계시리라 믿었다.
2주가 지나는데 드디어 연락이 왔다.
"광수 3 : 철모 확인~!"
나는 바로 현장에 달려갔다. 길에서 불과 직전으로는 100m도 안되는 곳에서 철모가 나온다고한다.
난 너무 좋아서 바로 상부에 보고를 했다.
"종다리 1 나와라 오버"
"종다리 1 나왔다 오버"
"철모 출현, 가능성 90%다 오버"
이렇게 되어 저 백악산 밑으로까지 보고 되고 일정에 반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낭패가 어디 있겠는가?
달려가 확인하니 철모가 아니고 화이버였다. 철모속에 들어가 있는 것인데 깨진 화이버다.
이미 무선연락으로 순식간에 다 통보가 되어버렸는데 큰일이다.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고......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어서 일단 바로 위에는 보고를 올리고 1주일만 침묵속에 있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비밀작전에 투입되는 인원을 늘렸다. 1개분대 규모에서 3개분대 규모로 다른 곳에 발굴 팀을 이곳으로 옮겨와 밭언저리를 집중 기초굴토를 하고 이 밭의 조성시기를 확인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주인을 찾았는데 아주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우리가 한 30년전에 밭을 구입했는데 정리를 하다보니 뼈가 나와 몇구를 이곳에 묻었습니다."
"혹시 유해 말고 다른 것은 없었습니까?"
"전투화도 있었고 탄창, 실탄도 보여 같이 보이는 것은 함께 묻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
우린 바로 땅 주인이 말한 곳 일대를 전면 굴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나절만에 드디어 유해를 찾았다.
산 꼭대기가 아닌 바로 길옆에서 적 전차포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모든 병력을 전부 내려 밭언저리 위주로 조금 이라도 움푹 파인 곳이 있으면 모두 굴토하였다.
이 일대에 호가 30여개가 넘고 교통호도 구축되어 있는데 좀 오래는 되었지만 6.25전쟁 당시 것은 아닌듯 싶었다.
유해는 찾았으니 이제 세부적인 전사를 확인하고 이곳 전투에 참가한 중대장이나 대대장을 찾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여 제9연대 제1대대 작전장교를 하였던 박정수 중위(그당시)를 부산에서 찾아내어 현장에 모셔왔다.
"전사에는 천주산과 가랑산이 주저항선이라 하는데 어디서 주로 전투를 했습니까?"
"계획이란 없었다. 내가 작전장교가 된 이후에 한번도 작전회의를 해 본적이 없다."
"그럼 병력은 주로 어디에 배치 되었습니까?"
"바로 만세교 못미쳐 160고지에 배치되어 전투를 하고 대전차포들은 바로 국도변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누군가 지휘를 했으리라 보는데 혹시 대대장이나 중대장이 현장에서 지휘는 했습니까?"
"뭘 지휘야, 깜깜한 새벽인데 비는 내리고 일부 인원들이 외출을 나가 들어오지도 못했고 각자가 작전계획대로 열심히 싸우다 철수하고 말았지."
"내가 2.36"대전차초가 적의 탱크포 사격에 날아가는 것을 직접 보았지."
"그곳이 어디 입니까?"
"잘은 모르지만 길을 바라보고 저 코너를 돌면서 적 전차가 사격을 했고 우리들은 고지에 있었지."
"그럼 보병하고 전차가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꽤나 떨어져 보병이 나타나는데 한 500m쯤 되나."
"그럼 최 전방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습니까?"
"2대대가 전방인데 알기로는 바로 무너져서, 아니 탱크가 밀고 오는데 뭘로 막겠어?"
"그럼 조금전에 대전차포조가 전사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셨는데 전쟁중이거나 전후에 그 유해들을 찾으려는 노력은 개인 또는부대별로 없었습니까?"
"그후에도 수많은 전투를 하며 죽어간 인원이 너무 많은데......, 잘 모르겠다!"
우린 모습으 들어낸 유해 앞으로 용사님을 안내하고 소주 한잔 올리도록 하였다.
"광수 3 : 철모가 나옵니다."
이때 13번 호에서 완벽한 철모가 나오기 시작했다.
철모 속에는 용사님의 얼굴이 들어 있다.
"광수 4 : 이상한 것이 나옵니다."
한 50m떨어진 밭 바로 옆에서 실제 2.36"대전차포가 나오고 있었다.
그 용사님이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완벽한 대전차포가 나온다.
조할아버지도 참전용사님도 우리 모두도 이곳에 모여 들었다.
아니 60여년이 지나는데 그 당시 그 자리에 그대로 대전차포를 안고 계시는 용사님의 모습이 일어서고 있는 순간이다.
이 순간을 뭐라고 해야할지 역사는 너무도 아픈 사연을 우리에게 주고 있었다.
이곳 일대에서 발굴되는 유해가 무려 11구가 되어간다.
시간은 말없이 흘러 어느덧 5월이 오고 이제 백악산 밑에 있는 집단들이 들어와 실태를 점검하고 경호작전을 짜고 난리가 나고 있다.
이때서야 이곳 작전책임부대인 제8사단에 통보하고 경계병력이 투입되고 대통령님이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안전작업을 하는데 병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관련자들이 들락달락 거리고 나름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느라 분주하게 간다.
4. "여보, 이거 조작은 아니겠지?"
하루는 경호팀에 이어 비서실에서 오고 안보실인지에서도 오고 하는데 높은 양반이 날 좀 보잖다.
그래서 나 개인 혼자서 그분을 안내하여 대통령이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설명을 별도로 해 드렸다.
"이곳은 2.36"대전차포가 실제로 발굴된 곳으로 유해가 2구 나오고 있습니다."
"이곳은 철모 속에 지금 우리 용사님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11구가 나오는 유해중 7구째가 되는데 걸음을 멈추셨다.
"오해는 마시고 몇가지 질문을 드릴테니 괞으시겠지요?"
"출신이 어디십니까?", "육군3사관학교 16기 생입니다."
"몇년도에 임관을 하셨습니까?", "1979년도 입니다."
"혹시 고등학교는 중경고등......?", "아닙니다. 서울 대방동에 있는 성남고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금도 전쟁터에 6.25당시에 전사한 분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이라처럼 그 모습이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더 이상 못보겠습니다. 이렇게 놓아두고 무슨 단결된 군대라고......"
"저는 힘도 없고 빽도 없고 이제 진급시기도 지나고 아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대로 입니다."
"죄송합니다. 오해가 있다면 이해 바랍니다. 워낙 과거에 군이란 조작이 많아서......"
너무 눈물이 나고 서럽고 미안해서 더이상 바라볼 수 없다고 하였다.
"차렷, 경례. 바로. 묵념!" 이렇게 그분은 떠나고 대통령님이 오셨다.
대통령님은 너무도 수수했다.
기본 상황판을 이용하여 보고를 받으시고나서 나의 안내로 11명의 용사님 모두를 만나셨다.
2.36"대전차포도 들어 보고 철모와 용사님의 얼굴이 있는 곳에서는 실제 발굴도 하면서 발굴병과 대화를 나누었다.
"김병장, 이거 힘들지 않아요?"
"네, 용사님을 발굴하는데 힘이 든다고 하면 안됩니다. 정말 숭고한 일을 하고 있어 영광입니다."
김창호 병장은 서울대를 다니다 필리핀에 가서 그쪽 의대를 다니다 30이 되어 군에 들어온 인원인데 5개국어를 하는 수재였다.
법무부 5급시험에 합격한 인원으로 지금쯤 4급이 되었으리라.
"이건 아닙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발굴 되도록 인력을 늘리세요!"
그런다 마지막 단계가 바로 3구가 함께 나오는 곳이고 이곳에서 태극기를 봉정하는 의식을 올렸다.
대통령님이 참전용사, 지역 제보자등과 악수를 나누고 나서 현장을 떠나기 전에 탄식을 하며 얼굴을 들어 올리셨다.
그리고 한마디 남기셨고 우리는 4개팀이 8개팀으로 두배로 인력이 늘어났다.
이때까지도 군 주요지휘관이 현장에 오는 경우가 없었는데 이후로 지역 지휘관이 현장에 오는 것이 정례화 되어 지금은 너무 많이 와서 문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땅속에 묻혀있는 뼈가 감작스레 밖으로 노출되어 햇빛을 보고 바람을 만나면 급속도로 수축되어 원래의 모습이 변하게 된다.
그러면 허벅지뼈의 길이로 키를 가늠하게 되는데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장에서 그늘을 만들고 최적의 조건을 유지하려 무척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다 계획된 날짜에 못오고 넘겨버리면 무척 당혹스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아직 군대는 영웅이 잠들어 계신 현장보다 지휘관의 일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정한 민주주의 군대가 되려면 이런 병주주의 의식이 저 높은 곳에서 이행 되어야만 한다.
우린 지금도 군에 들어오는 인원들에 대해서 계급을 갔고 있는 간부들의 의식이 옳바르지 못하다.
분명 그 인원은 국가의 부름에 나라를 지키려 들어온 용사임에도 무슨 머슴이 들어온양 아주 비천한 대우를 하기 일쑤다.
본인의 올챙이 시절은 잊어버리고 개구리 시절만 고려하는데 지금 우리 군의 학력이 무려 100% 대학생들이 들어오고 있다. 뭣이 부족하겠는가?
문제는 우리 간부들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모범을 보여야 하고 기본지식을 습득하여 대화의 상대가 되어야 한다.
"귀하게 대우하면 귀하게 행동한다."
요즘은 많은 혁신으로 내부의 병부조리와 구타 및 가혹행위, 왕따, 성추행등의 문제점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잊을만 하면 터지는 것이 집단 총기난사나 대형사고가 터진다.
모두가 자식하나 기르는 신세대의 입장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주게 된다.
어떠한 이유로도 군에서는 병상호간에 사고가 발생해서는 안된다.
그러려면 간부들이 내 자식처럼 동생이나 형님처럼 서로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배려와 존중의 문화가 선행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전시에 전우를 위해서 부대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진정한 용사가 돤다.
그러니 당연히 전쟁도 아닌데 왜 전쟁터에 못 오는 지휘관은 진정한 지휘관이 아니다.
여기 숨져간 용사님은 싯점을 바꾸면 바로 나다.
명령을 받고 싸우다 전사한 부하며 동료이고 선임일진데 이곳에 오는 것보다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계획을 잡아놓고 현장에 오지않는 지휘관은 전장에서 전우를 버리고 도망간 군인이다.
5. 영중면 가양리에 금화봉(254m)이 있고 바로 그 북쪽에 289고지가 있다.
이곳은 좌우측으로 9번도로와 43번도로가 양호하게 발달하고 있고 영평천에서 종격실 능선으로 신북면 신평리가지 내려가는 아주 좋은 기동로다. 높지도 않고. 조일현 할아버지의 이야기로는 박촌말에 이씨가 살고 있는데 이지역 토백이로 유해 있는 곳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를 대동하고 박촌말로 들어가 만나기로한 이상길(71세, '10년도)어르신을 찾았다. 어르신은 이곳에 살다 서울에 들어가 아들집에 있으며 안산에서 용달차 운전을 하고 계시는데특별히 오늘 탐사를 위해 올라오셨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국방부에서 온 유해발굴팀입니다."
"아, 예. 조영감이 여기에 웬일로 함께 오셨오?"
"아니 이사람들이 전쟁때 죽은 시신을 찾는 발굴팀인데 언젠가 저기 산에 뭐가 있었다고 하지않았어. 그래서 그곳 좀 알려 달라고 함께 왔지."
"그곳은 지금 돌을 캐낸다고 난리인데 얼마전에 올라가니 누가 치웠는지 보이질 않아요. 1.4후퇴시에 전사하였으나 묻어주지 못한 유해가 4구나 있었는데 아마 깃대봉이지 싶은데......"
우리는 지도를 펴놓고 어르신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산에 올랐다.
산이 반은 돌채취를 위해 헐려 나갔고 반이 남아 있는데 능선에는 개인호가 일정간격으로 남아있다.
지탐기를 돌려보니 삐삐 소리도 나는데 기초굴토를 해보니 탄피가 제법 보인다.
다른 동네사람들이 이야기를 듣고서 한마디씩 하는데 6.25전쟁 당일에는 이곳에 전투도 없었다고 한다. 총소리 몇번 나고 군인들이 몇 명 있다가 죄다 밑으로 내려가 버리고 북한군이 줄맞춰서 걸어 내려왔다고 한다.
아니 휴가도 안보내고 진지를 점령하여 열심히 싸웠다고 이곳 연대장이나 대대장은 증언록에 남겼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하지만 다른 증언을 들어보면 일부 인원을 휴가를 갔고 전방이라야 너무 넓은 지역을 맡고 있어서 동네 청방대와 함께 근무를 섰고 실탄도 없고 총도 부족하였고......
그러나 산에 개인호가 많다고 하니 그것은 중공군이 들어왔을 때에 나중에 미군이 들어오는데 중공군이 호를 같이 파야한다고 해서 동네에서 괭이 들고 올라가 이곳저곳에 판 것이라 한다.
그럼 6.25전쟁 당시에 이곳 군인들은 어디서 전투를 했는지 아리송해지고 말았다.
6. 양문리와 성동리로 차를 돌렸다.
양문리에 최종록(80세, '07년도)이라는 우리 처가집 고모부라는 분이 살아 계신다.
이 어르신도 6.25전쟁을 이곳에서 만났기에 나는 증언을 한번 듣고 싶었다.
가서 보니 조할아버지와 다 아는 사이다.
43번도로 옆으로 포천천이 흘러 영평천으로 들어가고 바로 앞이 38도선 경계였다.
"고모부님 전쟁 당일날 군인들을 보셨습니까?"
"어떻게 된건지 잘 모르겠고 쿵쿵거려 나와보니 비가 내리는데 무슨 검은 물체들이 왔다갔다 하더라고. 그래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북한군이 쳐들어왔다면서 밑으로 강을 따라 자꾸 내려가는거야."
"그럼 어르신은 나중에 피난이라던가 북한군에 끌려가지 않으셨나요?"
"장가를 들어 내기랄 한달도 안되었는데 집에 부모님도 살아 계시고 할머니까지 있는데 갈 수가 있나 그냥 일단 있었지. 피난갈 겨를이 없었어요."
"그럼 군에는 언제쯤 가셨습니까?"
"인공때 중공군이 들어온다고 다 나가라해서 수원으로 내려가다가 군에 들어갔지."
조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아니 이곳은 죽은 군인들이 없었어. 우리 동네는 밭이고 논이고 아군이 다 죽어 있었는데?"
"직접 죽은 사람은 동네에서는 못 보았고 길건너 탄약중대가 지금 있는데 그 야산에 시신이 있다고 소문이 돌았고 동네 개들이 물어 뜯어서 주둥이가 벌겋게 하고 다니긴 했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지."
"지금 탄약중대 말하는 거지요?"
"갈우재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면 군부대가 지금 있어요."
[ 하루 아침에 집안방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동네]
"성동리에 가면 쏘련군 탱크진지가 있어요. 그것은 직접 보았어요."
아니 영평천 남쪽에 쏘련군 탱크진지가 있다고 한다.
우린 바로 차를 몰아 성동리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영농회의를 하고 있어 잠시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 했다.
동네에 6.25전쟁 때에 살았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유는 정말 기막힌 사연이 이 동네에는 살아서 그 아픔을 이어가고있었다.
하루 아침에 집 안방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동네
그렇게 이웃사촌간에 우애하며 잘 살고 있는데 해가 바뀐 어느날 갑짝스레 쏘련군이 나타나고 미군이 나타나더니 북한지역이 된다며 살기 싫은 사람은 떠나라는 것이다.
아니 이곳에 조상의 뼈가 묻혀있고 논이며 밭이며 먹고사는 삶의 터전인데 북한이 되었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고 한다.
갑작스레 한 집은 집 안방 가운데로 38도선이 지나게 되어버려 얼마나 웃기게 되었는지 아무런 대책은 없다. 1달 이내로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40여가구가 살았는데 1/3은 그대로 남아서 북한 사람이 되었다.
2/3는 38도선 이남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일부는 아예 고향을 떠나 서울이나 다른 친척이 있는 곳으로 이주해 가버렸다.
뻔히 바라보이는 길 하나 놓고 남과 북으로 갈라졌으니 얼마나 한심한 동네가 되었겠는가!
큰집 제사에도 동서네 백일잔치에도 이제는 갈 수가 없게 통제되어 버렸다.
이러니 자동적으로 경계근무하고 있는 군인들을 속이고 넘어가고 넘어와야 하는데 가끔씩 쏘련군은 말을 타고 나타나 순찰을 돌고 떠나고 미군은 차로 한번 휙 돌고 가면 그만이다.
아니 집이 반으로 갈라졌으니 어떻게 대책을 내놓으라고 말을 하려해도 누구한테 해야할 대상이 없다.
미군에게 말하려니 영어가 안되고 이장에게 말을 하니 이장이 무슨 능력이 잇는 것도 아니다.
이 황당한 현실에 누구도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시간은 가버려 집 살림을 그저 집 밖으로 끄집어 내서 38도선 이남으로 짐을 옮겨놓고 있는 사람, 북쪽으로 옮기는 사람......
아무리 무정부 상태라지만(이때는 우리는 정부가 없었다.) 이런 경우가 어디있겠는가?
더구나 당시는 우리보다 북이 먼저 행정조직을 갖추고 감언이설로 김일성장군이 태양이라며 농민의 우상으로 신격화 시키는 세뇌작업이 진행 중이라 웬만한 사람들은 홀딱 반하여, 특히 지주가 아닌 일반 소작농들은 북쪽이 살만한 곳이라고 현혹되어 버렸다.
이시기를 이용하여 강건너편에서는 노동자 농민의 천국이라느니 해방군을 찬양한다느니 연일 주민선동대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동네가 어떻게 되겠는가. 편이 갈라져서 한순간에 죽일 놈, 살 놈이 되어 공산주의자와 민주주의자가 되어 갔다.
하지만 정부가 없으니 누가 나서서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이 잘 살지는 못하면서 좀 배웠다는 친구들은 좌익이 되었고 대부분은 분위기에 따라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또 한해가 지나니 훈련한답시고 포가 강을 넘어 성동으로 들어오더니 탱크가 왔다.
'47년도의 일이란다.
우리쪽에는 청년방위대와 경찰이 미군의 통제를 받아 어쩌다 하나씩 있는 초소에서 근무를 하게 되는데 청방대에는 총도 없고 몽둥이가 유일한 무기였다고 한다.
이 몽둥이는 비단 여기뿐만이 아니고 가평에서도 그랬고 춘천 북방도 그랬다.
먹을 것은 부락에서 알아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니 말이 경계지 경계근무도 아니였다.
어디든지 쥐구멍은 있듯이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일부 사람들은 수시로 북으로 넘어가고 남으로 넘어오고 별 제재없이 자유롭게(?)왕래하며 불편함도 없었다 한다.
오히려 북쪽에서는 토지개혁이 다하여 있는 사람들이 땅을 내놓는 7:3방식으로 토지분할이 되니 땅이 없던 남쪽 집들은 자연스레 저쪽을 흠모하게 되어갔다.
지역마다 공산당이 많은 곳을 '어디의 모스크바'라 칭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논산의 성동을 충남의 모스크바라 하고 양평의 신원리를 양평의 모스크바라 하고 가평을 "경기의 모스크바"라 하는 경우와 같이 이일대가 모스크바의 검은 그림자가 두리워 졌다.
이제 왔다갔다하는 대포도 탱크도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일상이 되어간다.
처음에야 미군이와서 쏘련군과 뭐라고 쏼라솰라 하기는 하는데 얼마 지나니 이것마저 없어졌다.
"지역 주민을 납치해 가는 북한군인"
그런 어느날에 갑작스레 북한군 수십명이 넘어와 밭에서 일하던 우리쪽 남자 셋을 납치해 갔다.
소식을 접한 미군이 오고 다시 쏘련군이 와서 뭐라고 하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 이전에 이 셋이 북으로 넘어와 소를 훔쳐 갔다는 이유로 잡아간 것이였다. 하지만 그 진실은 아무도 모르고 큰소리치는 북한쪽이 우세하게 상황이 전개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수시로 넘어와 우리쪽 아가씨를 데려가고 돼지를 잡아가고 소도 몇마리 잡아갔으며 그때마다 자발적으로 넘어왔다고 생떼를 쓰곤 했는데......
"일본시대 단무지 만드는 콘크리트 지하창고에 쌓여지는 무기"
이러다 보니 못사는 것은 우리였다. 피해도 모두 우리가 입었다. 하지만 보호해줄 군인이 없다.
동네가 어느 순간에 모두 좌익처럼 되어가고 서서히 서로를 못믿고 의심하게 되며 경찰에 밀고 하는 등 인심이 흉흉해져 갔다.
그나마 별로 없는 동네 청년들이 서울로 포천으로 빠져나가고 동네는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게 되니 밤에는 무법천지처럼 북한군이 자유스레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이럴때 가장 용감하며 안전한 것이 어린아이들이다.
개념이 없으니 탱크를 보면 신기하여 경계선을 넘어가 만져보기도 하고 그 군인들과 대화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자랑삼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엄마 엄마, 나 오늘 탱크 만졌다!"
"너 이리와, 그렇게 그런데 가면 큰일난다고 했는데 또 넘어갔어? 종아리 걷어라!"
그런 어느날이다. 소리없이 달밤에 탱크가 움직인다.
쥐도 새도 잠들은 고요한 밤인데 어제 강넘어 왔던 탱크가 슬며시 산 자락으로 숨어든다.
그곳은 요 몇일사이 사람들이 삽곡갱이 들고 들락달락 했던 곳이다.
달은 어스름한데 군인들인데 민간인 복장을 입고 지하저장창고 쪽으로 뭘 메고들 간다.
지아무리 세상이 비밀을 지킨다해도 눈뜨고 있는 쥐가 있고 새도 있는 법.
바로 이장집에 머슴살이 하던 노총각이 궁현에 식모살이 하던 순이를 만나러 주인몰래 나가서 꽃바람을 쐬고 들어 오던 길이였다.
"주인 어른, 어젯밤에 저 건너편에 탱크가 산 뒤로 가던데요?"
"야 칠칠아 너 그런것 보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다 너 잡혀간다."
하지만 이장은 그날 아침 이 사실을 지서에 알렸다.
그리고 다시 미군이 현장을 확인한답시고 왔는데 그런 사실 없다고 딱 잡아떼고 강넘어로 돌아 갔다고 우기는 바람에 괜스레 머슴놈만 또 바보가 되었다.
코흘리게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다방고 놀이를 한다.
상철이 진만이 순옥이 영이 미숙이 옥림이 은미 등 3학년 국민학교 애들이 뛰어다니며 깔깔 거리고 웃어데는데 쏘련군도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집마당에서 뛰어놀다 시끄럽다는 일동댁 아줌마의 된소리에 동네로 나와 골목을 달리며 신나게 놀다 꽁꽁 숨어든 곳이 지하 창고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처음보는 것들(따발총, 쏘련제 소총, 박격포 등)이 쌓여 있다.
갑작스레 군인들이 달려와 큰소리로 나오라고 하여 그만 밖으로 나왔다가 다 술레에게 들켜버렸다.
천진스런 아이들의 술레잡기 놀이에 북한군은 쏘련군을 안심시키고 다시는 오지마라며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런 정확한 정보를 받아챙길 그 누구도 주변에 있질 않았다.
그들은 서서히 그리고 은밀히 전쟁전에 탱크진지를 만들고 무기들을 들여와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는데 우린 아이들이 디방고 놀이로 최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탕 탕 탕 탕"
강건너 편에서 갑작스레 총소리가 요란하다.
38휴게소에서 성동 검문소로 가다보면 우측이 영평천인데 바로 강변에 약간 큰 바위가 거북이 처럼 머리를 내밀고 있다.
요란스런 총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니 사람이 그 바위위에 올라 서 있다.
주변에는 군인들인지 민간인인지 여러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데 또 탕탕소리에 바위위의 사람이 강물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몇사람인지 모르지만 족히 열사람은 되어 보였다.
얼마 안있어 마을에 소문이 돌았다.
북한군인들이 북쪽 마을에 침투한 남쪽 프락치를 잡아서 처단했다는 것이다.
성동은 이렇게 포천의 모스크바로 변하여 갔다.
"6.25일 새벽, 비는 내리다."
갑작스레 마을 야산 뒤편에 숨었던 탱크가 동네 앞에 나타났다.
번쩍 번쩍 포를 몇번 갈려데니 주변은 아무도 대항하는 사람이 없다.
초전에 누가 북한군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하는지 데려와 보라는 동네 어른의 눈빛이 슬프다.
언제 도망쳤는지 국군은 없고 북한군도 그저 동네에 온 아저씨처럼 몇명이 왔다가 떠났다.
그런데 완장차고 갑작스레 엊그제 사라진 철식이란 놈이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동무들 이제 해방이요. 모두 김일성수령 동지 만세를 부르기오."
도대체 뭔지도 모르고 집집마다 나가 시키는대로 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엊그제 저 강건너 거북바위에서 죽어간 사람의 모습이 떠 올랐다.
순식간에 머슴놈이 대빵이 되고 모두들 벌벌 떨며 집에 있는 것을 갔다달라는대로 바쳐야만 했다.
괜스레 말한마디 잘못하면 황천길이라는 것을 일동댁은 잘 알고 있다.
최진사댁 마당에 삼각다리가 세워지고 말을 탄 멋진 군인이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영중국민학교에 있던 여선생이 나타나 위원장이라며 내일 아침에 여성들은 모두 학교에 오란다.
비는 철철 내리고 평상시처럼 아무일 없는 동네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있으니 서울이 해방되었다고 난리다.
이제 김일성동지의 영도력아래 조선인민은 하나가 되었다며 장백산가를 부르고 매일매일 모여 인민학습이란 것을 받으라 한다.
그러는 중에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살려주시라요. 위원장 동무. 난 아무것도 모르오......"
나중에 들으니 아랫마을에 면장의 집이 있는데 면장 아버지가 잡혀와 아들이 숨어있는 곳을 말하지않는다고 주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번 들어가면 다리가 부러지고 손목이 절단되고 살아만 나와도 다행이다는 소문이 동네를 짓누르고 있었다. "인민의 천국....., 이것은 죽음아니면 병신이 되는 것이다."
또 어느날에는 도망치지 못하고 어느 집에 숨어 지내던 군인이 붙들려와 삼각대에 매달렸다.
옷이 벗겨지고 몸에서 피가 튀어 나오고 이제는 옆에 있는 올소하는 인원들중 한명이 돌을 들고 나타나 뒷통수를 내리쳤다.
한명은 대창으로 배를 찌르고 한명은 손으로 눈알을 빼버렸다.
들것이 들어오고 어디론가 버려지는 용사는 무명용사였다.
그걸 들고 나갔던 동철이 아버지는 죽어버렸고 한명은 살았는데 동네에서 못살고 자식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성동리의 6.25전쟁이야기는 슬펐다.
이동네에 살다 1.4후퇴시 포천으로 피난와 살았던 박종수(74세. '07년)어른으로부터 설마설마하는 고통스런 의문에 새바람이 불어왔다.
"내가 살았던 지역의 밭과 야산이 만나는 비탈에 국군시신 5구를 묻어주고 목비를 설치해 주었는데 나중에 피난에서 돌아오니 목비가 없어졌어요."
"그렇습니까. 어르신 여기 오셔서 현장을 알려주면 안되겠습니까?"
차가 포천으로 달렸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마을회관에 있는 분들에게 말하니 동네에 살았던 어르신이 맞다고 한다.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워낙 순식간에 북한군이 지나가버렸으니 그 어르신이라면 알 수도 있을거라 한다.
"혹시 탱크진지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
나는 눈시울을 적시며 그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일어서 탱크진지로 가서 위장된 그 모습의 실체를 보았다. 탱크는 이렇게 사전에 들어와 38도선상에 대기하다 바로 남으로 달려 내려가 요골의 2.36"대전차포 분대를 죽이고 포천으로 의정부로 내려갔던 것이다.
또한 초전에 병력이 실탄도 준비 못하고 제대로 병력도 일부 인원이 외출등으로 자리를 비워버려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오와 열을 맞추어 당당하게 남쪽으로 행군하듯 내려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지하탱크를 찾았으나 경지정리를 하면서 부숴버렸다고 한다.
그곳에 시신이 있었다는 제보도 있었는데 흔적조차 없으니 어떻게 찾겠는가.
그속에 무기들을 숨겨놓고 병력은 비무장으로 들어 왔다가 일거에 재무장을 하여 남쪽으로 쳐 내려왔다. 이런 시설은 보호하여 후세대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너무도 아쉽다.
탱크진지를 찾았다.
정말 남쪽에서는 보이지않는 산의 우측자락에 탱크진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누구도 사용하지않아 잡목이 자라나 있고 그 호의 규모가 좀 작아보이기는 하지만 소대규인지 중대규모인지 명확히 호의 형태가 남아있다.
하지만 탄약중대 야산은 우리가 정밀 탐사를 하여 '07년도에 1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그 수많은 개인호가 아직 그대로 있는데 시설공사를 하면서 많은 지역이 훼손되고 말았다.
7. 나와 조어른은 다시 차를 돌려 포천 가채리로 향했다.
어룡동에 포천고 자리를 만들면서 유해가 많이 나왔다는 고모부의 둘째 아들(처남)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양반도 사실 성동에서 어릴때 칼싸움놀이를 하면서 지하창고 일대에서 유해를 직접 목격했다고 제보한 장본인으로 나이는 나보다 몇살 아래다.
조어른은 신이 났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본인이 경험한 6.25전쟁의 드라마를 직접 다시 새기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괜찮다고 집에 계시라해도 막무가내로 따라 오시겠다고 한다.
가채리는 가랑산, 원수봉, 차돌백이산으로 들러싸인 지역으로 동네 뒤가 무럭고개다.
이 무럭고개로 전쟁초기 보병이 빠른 걸음으로 포천을 우회하고 탱크는 43번도로를 따라 내려옴으로써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번 못하고 주저항선이 무너진 곳이다.
참전용사중에는 살아남아서 이 가랑산과 천주산에 병력이 배치되어 전투를 했다고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그저 왔다가 간 것이지 전투는 별로 하지도 못했고 죽어간 용사들은 신북교 주변과 주로 논밭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비는 내리지 더위가 일찍 찾아와 시체는 썩어 냄새는 나지 그놈들의 내무서원이란 자들이 맨 처음 한 일이 시체 치우는 일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치안대를 조직하고 여성동맹이란 것을 만들고 이집저집 올가미처럼 감시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여기서 포천분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그당시에 포천이라는 것이 38도선에서 가까웠고 최초 38선과 이듬해에 쏘련군이 측량으로 38도선을 다시 그어 많은 사람들이 남과북으로 흩어지면서 가족간에도 형제지간에도 갈라서다 보니 알게모르게 상호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북한에서 양성된 프락치들이 많이 유입된 곳이 특히 가평이며 포천이라고 한다.
그러니 적 탱크가 시내에 들어오니 벌써 인공기가 나부끼고 일부사람들이 나와서 김일성만세를 부르며 북한군을 맞이했다고 하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곳에 대대본부도 있고 많은 군인가족들과 경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공무원도 이곳에 있다보니 들어오자마자 벌이는 인민재판에 대상들이 수없이 많아 그들은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피해르 당하는 쪽에서는 공포분위기에 언제 끌려가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여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게 되었단다.
이 무럭고개가 유명해진 것이 바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집단으로 죽인 곳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들어와서는 벌써 명단을 들고 와서 하나하나 찾아내는데 이것은 분명 이곳에 살다 넘어간 인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내통하고 있던 자들이 있었기에 너무도 소상하게 파악하여 집집이 뒤지는데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이곳의 산 이름이 원수봉이라 하는데 그 의미가 사뭇 가슴깊이 다가선다.
8. 지역주민의 제보
가. 정덕희(여)분이 포천에서 연락이 왔다. 영송리 마을 입구에 컨테이너 좌측지점에 국군전사자 1구를 묻는 것을 직접 1구를 묻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셨다.
"어머님, 그럼 혹시 보셨으면 어떤 모습 이었어요. 국군인지 어떻게 기억하시는지요?"
"아니 내가 거기 살아 군인들을 보았는데요. 죽었는데 인중이 날아가고 머리가 터져 죽었어요."
나.조선봉(66세, '07년도)아저씨는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금동리에서 덕둔리로 넘어가는 오대고개 정상부근에 서낭당이 있는데 그 뒤에 마을에 여기저기 널려 있었던 전사자들을 수습하여 집단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지역은 379번도로, 368번도로가 동서남북으로 지나는 곳으로 여기서 넘어가면 종현산우측으로 해서 창수면 추동리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이곳은 우리가 추동에서 제보를 받기로는 중공군이 미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저수지에 풀어논 농약을 먹고 죽어서 떠있는 물고기 사체들처럼 수없이 있었다는 곳이다.
이 덕둔리지역도 밖에서는 식별이 쉽지않은 곳으로 북한군이 우리 양민과 유력인사를 끌고 북으로 넘어가는 루트다.
그러니 여기뿐만이 아니라 그 너머 상추동에 지금 화력발전소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곳도 대량으로 중공군 유해를 갔다가 매장했다는 곳이다.
여기서 북서방향으로 368도로를 타고 가면 바로 초성리고 그 좌우측이 400고지군과 588고지 종현산이 버티고 남쪽으로는 소요산 585고지와 755m 국사봉, 736m 왕방산으로 산악도로로도 접근로로 아주 양호한 곳이다.
이미 우린 몇번식 이 고지군들은 다 탐사를 실시하여 '09년도에는 왕방산에서 10구, 추동리 남쪽 삼정리에 들어가 '02년도에 2구, 고일리 일대에서 3구의 유해를 모두 제보에의해 발굴했다.
다. 또 한명의 제보는 김경애(60세, '07년)여자분으로 우금리 산 89-1번지에 육사생도 1,2기 600여명이 전투를 벌여 100여명이 전사했다는 내용을 보훈처 신문에서 보았다고 제보가 왔다.
무척 고마운 분이고 이제 여성분들도 증언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9. 참전용사의 증언
그 내용의 진위는 생도참전자 증언에서 나오겠지만 나는 2000년도에 육사10기 되는 분과 직접 육사생도들이 점령한 곳을 답사하였다. 이분들은 3분이 함게 오셨는데 전두환대통령기에 대해서 많은 원한을 가지고 계셨고 당시의 지휘자에 대해서도 옳바르지 못하였다고 회고 하였다.
병력을 데리고 와서 배치해놓고 다음에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도 않는 가운데 적전차인지 자주포인지 맞은편에 경찰대가 점령하고 있는 곳을 강타하여 경찰이 바로 무너지고 말았다 한다.
생도들은 엄정한 군기속에서 적이 오는 최후저지선에 오도록 누구 명령없이도 기다렸다 일제히 사격으로 한번은 물치쳤다.그러나 적이 우회하여 뒤에서 올라오는 바람에 모두 철수하여 육사로 내려갔다고 한다.
"이곳에서 전사한 동료들은 몇 명 인가요?"
"사실 이곳에서 전사한 인원은 없었고 후퇴하다가 적의 기습으로 요소요소에서 10여명 전사했다."
이런 결과로 발굴작전을 했으나 한구도 발굴을 못했다.
하지만 우린 계속적인 지역주민 탐문활동을 게속해 가며 발굴작전을 해가던 과정에 '02년도에 음현리 일대에서 4구를 발굴했다.
"육사생도 마크 화이버와 완전유해"
현재까지 우린 20여년동안 12,000여명을 발굴한 인원중에 이렇게 육사생도 마크가 선명한 화이버를 쓰고 전사한 인원은 단 한구다.
M1대검을 차고 있고 수통도 그대로였으며 탄티를 차고 있던 용사님인데 교도대대 조교인지 생도인지는 모르지만 완벽하게 유해의 모든 부분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여성분이 제보한 내용은 소문으로 지역에 떠 도는 이야기가 취합이 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2008년도에 다시 우금리에 사는 홍기락(49세)씨가 증언을 해 왔는데 국사봉 547고지일대에 유해를 목격했다하여 남북으로 형성된 500m 높이의 능선 15km구간을 탐사하여 분석한 결과 국사봉 정상 부근에 호가 집중으로 굴토되어 있어 이곳 위주로 발굴 하여 정말 3구를 발굴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육사생도대는 어디 선까지 진출했는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우린 내촌 못미쳐 좌측은 생도대에서 366고지군, 우측은 경찰이 378고지군위주로 점령했다고 보는데 국사봉은 이곳으로부터 5km이상 전방으로 이격되어 첨병이 점령하기도 거리상 맞지 않는다.
그럼 여기서 당시 생도대대를 지휘했던 참전용사와 전투에 참여한 인원의 증언을 통해서 현실성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가. 먼저 사관학교 생도 대대장 소령 손관도의 증언이다.('68년 11.14)
"교도대대가 출동하지 않았습니까?"
"문산으로 간 것만 알았지 어디에 갔는지 몰라요. 서울에 있다가 삼각지에 나가보니 동기생 김철수 대위가 출동을 하고 있어요. 문산에 간다며 북괴가 쳐들어 와서 간다고 해요. 그래서 을지로 5가에 가니 기갑연대 경리장교 김희덕 중위를 만나 그 사람 차를 타고 성동역에 가니까 송대후 대위가 "백인엽 대령이 지휘하는 부대가 신막을 향해서 전진한다는 거예요. 해주에 상륙해 가지고 안심하라는 거예요." 사관학교에 들어가 보니 10기생들이 출동준비르 하는데 부대장이 조암이고 나는 부대대장이라 이거야. 퇴계원으로 해서 나가는데 피난민들이 나오니까 딱 서요. 조암이가 대학 동창인데 어디가느냐고 물으니 지도도 보지않고 그냥 전진해 가는가에요. 그래서 이렇게 들어갔다가는 적에게 포위될 것같아서 내가 부대를 세워놓고 좌측에 산이 있는데 거기서 총알을 나누어주니까 어느것이 m1탄환이고 어느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병기장교를 불러 야단을 했지. 어디쯤 가니 경찰이 도로 우측에 배치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노출을 시켜버렸어요. 조금 있는데 군인을 하나 붙들어 왔는데 신분증이 상당히 많아요. 그래서 어디냐고 물으니 14연대다 이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상하다 그랬는데 조암이가 놓아 주었어요."
"26일날 포천에 나갔습니까?"
"아니요. 25일날 나갔습니다."
"조암 그 사람이 사상적으로..."
"그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플레이보이 기질이 있어서 그렇지 사상적으로는 그렇 수 없습니다. 대세가 낙동강으로 밀려나니까 그 사람이 변절 했을 거에요."
나. 생도대대 인사장교 대위 최재명의 증언이다.('67.3.14)
"그때 사관학교 연대라 했습니까?"
"사관학교 교도대를 묶어 가지고 그것을 어디에 배속으로 했어요. 그리고 문산으로도 나가고 그랬는데 우리는 생도 1기,2기를 데리고 사관학교 연대라했지요."
"그때 나갔을 때 배치 상황은 생각 나십니까?"
"하여튼 포천 있는데 국사봉이라고 있어요. 거기에 강이 하나 내려가는데 바른쪽에는 경찰대대가 배치했고 우측에 우리가 배치했는데......
그러다 식사를 하려다 기습을 받앗습니다. 그래서 몇 죽고 철수해서 사관하교 앞에 F고지에 배치했어요. 27~28일까지 배치했는데 서울이 점령된 것도 모르고 철수 명령이 28일 10시인가 내려 광나루로 가기위해 차를 타고 망우리 고개 올라가다가 기관총 사격을 받고 올라 오는데 다시 요새 면목동 정거장에서 북한군 4명이 기관총으로 사격하는거에요. 그래서 차를 돌려서 내려오는데 비석있는데다 차를 놓고 내려가는데 조암은 거기서 떨어져서 붙들렸습니다."
"그 분이 사상적으로 다르다고 생각은......"
"줏대가 없지요. 그래서 저쪽으로 넘어가서 처음에는 이용당하다가 총살 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광나루에 와서 배를 끌어내려 가지고 타고 건너 수원으로 가서 하루저녁 자고 대대편성을 했어요."
다. 생도대대 작전장교 대위 이승우의 증언이다.('65.12.7)
"알려지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는 비화라든가 이런 것 있으면 알려주세요?"
"마침 아침 먹고 외출했다가 북한의 불법 남침을 알았고 학교에 가니 교도대가 14시 정도에 문산지구로 출동을 했고 마침 경찰도 1개 대대로 해서 16시경에 자동차를 타고 포천지구에 가는데 지명은 모르겠고 어듬어듬 해지는데 민간인들이 더러는 부상도 입고 소에다 피난 보따리를 싣고 피난을 하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포천에 벌써 적이 들어와 가지고 남진을 계속한다는 겁니다.
그냥 차에서 내려서 도로를 중심으로 1개대대는 우, 1개 대대는 좌에 배치하고 바른쪽에는 경찰이 점령했습니다.
고지에 있는데 야포가 떨어지고 박격포가 떨어지고 여기서 이이고, 저기서 아이고 하면서 피해만 입고 그대로 철수하여 태릉 전방고지에 '하'고지라는 곳을 경찰 병력을 수습해서 일부인원을 보강도 하고 밤에 다시 점령하여 밤을 새었는데 벌서 적이 망우리로 들어왔다는 겁니다.우린 광나루에서 민간배로 강을 건너 수원으로 갔다가 한강고지로 와서 3일간 전투했어요.
"그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천선이 무너져 가지고......,3일간 지탱을 했어요. 자꾸 적의 첩보원도 오고 민간인도 오고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다 죽여버렷습니다. 그 중에는 죽으면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고, 어던 이는 보따리에 시계, 금품 이런 것을 싸가지고......,한 100명은 죽였어요. 오라고 해서 적정에 대해 물어 본다음에 꽝하고 쏘아 버렸습니다.
라. 생도대대 제2중대장 소령 박응규의 증언이다.('68.10.31)
"그 당시에 생도대대가 병사로서 출동을 했는데 출동할 때 무슨 이의같은 것이 없었습니까?"
"그러니가 좀 늦게 나간 것이 아닙니까. 나중에 말을 들으니 채병덕 장군이 권총을 빼들고 사수하라고 했다는데 사관학교가 처음에 나간 것은 아닙니다."
"출동한 것이 25일 오후이고 현지에 가서는 저녁이라 일단 숙영을 해서 26일 아침에 진지를 구축했다고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나갈 때는 경찰대대는 같이 안나갔지요. 경찰은 26일날 아침에 도착했습니까?"
"갈 때는 없었어요. 보지는 못했고 배치 되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이 애매한 것이 경찰이 372고지, 육사부대가 330고지에 배치되어 있는데 적이 이쪽 도로를 타고 와서 먼저 경찰쪽을 공격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차로 가서 얼마 안 걸어갔어요. 밤새 포 소리는 났는데 이상 없다고 하더니 아침에 무슨 총소리가 나더니 그때 사관학교에는 기관총이 많았는데 그냥 버리고 다 나오고 그랬습니다."
"큰 희생은 없었잖아요?"
"사람은 큰 손실은 없었습니다."
"철수할 때 경찰을 보지못햇습니까?"
"보았습니다. 퇴계원 이쪽 위에 오니까 전방에서 오는 부대도 있고 9연대인지 그것도 있고 경찰도 섞여 있어요.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은 우리는 중화기를 다 버리고 왔는데 그 사람들은 전부 메고 왔어요."
생도대대 전투원 최일섭의 증언이다.('66.2.1)"
"언제 전투에 참여하셨는지 경험담을 말씀해 주세요?"
"전쟁 나던 때가 나는 육사에 들어가서 25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후 5시쯤 해서 총을 가지고 집합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포 소리는 나는데 9시쯤에 포천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적정을 몰랐던지 적이 우리 뒤에 골짜기에 1개사단이 들어와서 야영을 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앞에 들어가서 배치를 했고 우리가 25일 하루를 잤으니까 26일 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싸울 겨를도 없이 도망을 쳣습니다. 다시 전부 차를 타고 도망을 쳐서 나와서 어느 고지인지 다시 배치를 하고 하룻밤을 보내는데 27일 아침에 그 앞에서 전차가 나오는 거예요. 후퇴를 해서 춘천가는 쪽 무슨 고지인데 유격전을 하라해서 올라갔는데 이때는 28일인데 중대장이 학교를 보고오라해서 갔다오는데 아무도 없어요. 다시 사관학교로 들어가려니 벌서 정문에 적이 보초를서고 있어요. 도망치다가 몇몇이 만나 스리코터가 있어 타고서 광나루로 갔는데 군인들이 많이 있어요. 반갑다고 m1총을 흔드는데 생도1기가 탁 치는거예요. 총을 빨리 가마니 밑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그 앞에 병력이 북한군이고 따발총을 메고 있는걸 처음 보았어요. 그렇게 해서백사장에 가서 큰 배에 스리코터를 실어 보내고 우리는 작은 보트를 타고 도하를 하는데 적이 드르륵 하며 쫒아오는 겁니다. 모두 머리를 배 바닥에 숙이고 있는데 배를 젓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그때 무슨 일이있었느냐면 경찰관 신분증을 내미는 사람이 있어 함께 타고 오게 되었는데 그 경찰이 배를 젓겟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머리를 숙이고 있다 한참 후에 머리를 들어보니 배가 다시 광나루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생도1기가 그자리에서 죽였습니다. 참 비참하더군요."
마. 생도대대 전투원 신재성의 증언이다.('66.1.26)
"6.25전쟁이 나서 포천방향으로 출동하실때 그때의 이야기를 해주십시요."
"저는 생도 2기로 6월1일 입교해서 6월24일 m1소총 기계훈련 사격이 끝났습니다.
전쟁이 났다고 하여 포천으로 출동했는데 기산면이라고 기억되는데 60mm 박격포 탄약수로 밤새도록 탄약을 나르고 호를 파고 했습니다.
26일날 점심으로 주먹밥 하나 얻어먹고 오후 2시내지 3시 되니까 거기에 보리밭이 있었는데 원거리 700~500이에요. 거기서 전차소리가 나고...... 교도대와 혼합 편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군기가 엄해서 용변도 보러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옆에 있는 경찰들이 호 몇개 파놓고 흰셔츠 바람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적들의 주공이 경찰을 향했습니다. 우리는 위장으로 발견되지 않아서......
26일 새벽에 사관학교 앞에 와서 하루 밤을 자고 불암산에 제 2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그때 직책이 전령이라 멧세지를 전달하고 오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어쩔수 없이 봉아산으로 가는데 수풀속에 1기생 4명이 있어 함께 잠복하게 되는데 따발총이 빗발치듯 쏟아져도 맞지않고 산 계곡 웅덩이에 숨었는데 적 1개중대가 수색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김영민이라는 사람은 자결을 하고 나머지 4명은 자수하자 2명 안된다 2명으로 패가 갈여 죽을 그 웅덩이 속에서 싸움을 해서 우리가 이겨 숨막히는 탈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까 온 세상이 붉은 깃발인데 집집마다 막대기끝에 붉은 천을 매달고 있고 길에는 4열,5열로 군가를 부르며 서울로 들어가고 전차는 300대정도......
배가 고파서 마을로 접근하는데 사관학교에 한 3000여명이 모여 김일성뭐라 노래를 부르며 야단 입니다. 여기서 외아들로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m1총을 분해해서 버리고 군인복장을 다 갈아입어 민간인으로 위장을해서 양발만 싣고 걸어서 광나루로 이동하는데 발은 피가 터지고, 이천에 가서 본대와 합류하여 전투를 했습니다.
이상의 육사생도대대 전투관련 증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 전투다운 전투는 못했다.
둘째 : 교육중인 생도를 제대로 훈련을 받은 것도 없는데 채병덕총장이 강제로 장교도 아닌 병으로 투입하여 불평도 있었지만 나라지키는 일이라 따랐다는 애국충정심을 본 받아야한다는 것.
셋째 : 전투한 곳은 국사봉 547고지가 아닌 음현리 좌우측 350고지군 일대가 맞겠다는 것.
넷째 : 북한군 1개사단(?)이 들어와 야영을 했다면 서쪽의 죽엽산(616m)마명리 일대 개곡 하천(왕숙천)을 연하여 숙영지를 편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적3사단이 밀어붙이는데 벌써 4사단은 의정부에 다 내려가고 3사단도 주력이 포천을 지나고 있는데 이곳에 사단 병력이 집중할 일이 없다고 봐야한다.
제9연대는 이미 11:00시경에 포천이 점령을 당하고 포천 남쪽에 있던 제5야전포병대대 진지를 유린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대 연락장교에 의해 제3연대가 포천으로 출동중이니 탄장선에서 적을 저지하라는 사단장의 지시가 있었으나 이미 예비진지까지 적에게 피탈되고 사단과도 연락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연대장 재량으로 광릉으로 철수를 하여 축석령에서 증원부대와 합세하려 17:00경 내리는 비를 틈타 서파방향으로 철수를 감행한다. 그러나 제3대대는 연락을 받지 못하고 진지에 대기하다 철수 시기를 놓쳐 좌인접 제1연대지역 덕정으로 철수를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전투력의 큰 손실을 입게 된다.
이런 과정에 제3연대(연대장 이상근 대령)는 제7사단 배속 명명령을 받고 연대장이 도착하지 않은 가운데 일단 가용한 병력 600여명을 2개 대대로 편성하여 제3대대장 지휘하에 서빙고를 떠나 포천으로 출발하여 15:00시경에 포천남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포천은 함락 되었고 그래서 송우리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였으나 적의 전차부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아지고 도착하지 않은 연대장을 대신하여 제3대대장이 철수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왜 서파로 들어온 적이 진출을 하지않고 숙영을 했을까 하는 문제다.
여기에는 기막힌 사연이 있었으니 전차부대가 서파까지는 선두에서 밀고 내려왔으나 서파로부터 다음 내촌으로 이르는 길이 당시에 전차기동이 불가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대부대가 내려오다 전차가 오던 길을 뒤로 돌아 포천으로해서 우회하여 47번도로 상으로 와야하는 문제가 발생하여 밀어붙이지 못하고 1일을 허비하고 만 것이다.
만약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육사생도대대도 음현까지 진출도 못하고 오다가 지리멸렬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면 수도서울의 동측방이 비록 춘천에서 지연으로 보호받고 있었지만 조기에 무너져 아예 서울이 누구도 철수를 못하고 운명이 끝나버릴 수도 있었다는 가정이 성립하게 된다.
10. "가채리에 유해 30여명이 묻혀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가채리 주변의 일대 야산을 탐사하고 드디어 오고자했던 목적을 해결하기 위해 우선 포천시청에 들렸다. 이유는 공무원이 제보를 했기 때문이다.
이금종(50대) 과장이 본인 동네의 매장지역을 알려왔기에 직접 양해를 구하여 현장을 답사하기로 하고 찾아가 모시고 현장에 왔다.
제보내용은 '50. 10월 초순경에 국군이 북진간 신북대교가 파괴되어 가교를 설치하여 이동간 지뢰 폭발로 군차량이 파괴되어 30여명이 전사하여 가채리에 매장 추정되는 묘 1기가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 찾아가니 동네 입구에 정말 있어야할 자리가 아닌데 크기가 생각보다 넓이가 큰 규모가 있긴 했지만 과연 30명이 묻혀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30명이면 집 규모가 된다.
누구도 정확한 답을 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른 목격자를 찾을려고 노력 했다.
포천시 과장은 시청으로 보내드리고 우리끼리 광범위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진실을 찾아 다녔다.
"아이고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군인들이 와서 그 강변에서 수습해서 이곳에서 화장해 갔어요."
그런데 다리밑을 가보려고 나오는데 다리 위에 한 할아버지가 계셔 혹시나 하고 올라가서 여기서 전사한 군인들을 보신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본인이 당시에 7살로 강가에서 놀다가 군인들이 죽어가는 모습도 보았고 얼마후에 군인들이 와서 모두 찾아내 화장해 가는데 그 화장장소도 가서 보았다고 한다.
지금 그 무덤은 그 당시에 태워버리고 남아있는 것들을 긁어서 묻었다고 한다.
조문원 할아버지와 헤어지는 시간이 되었다.
포천고에 들어가 사연을 들었다.
학교를 짓기 위해 야산을 밀어내는 과정에 유해가 일부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당시에 어떻게 처리했는지 아는 분이 아무도 없고 또한 이 학교부지가 일부공동묘지에 전쟁당시에 양민학살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우리는 조용히 물러났다.
"어르신 꼭 다음에 여기오면 집으러 찾아뵙겠습니다."
"이과장, 기다릴테니 그냥 지나가지 말고 업무가 아니라도 꼭 지나다 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