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34]
최인규(崔仁圭, 1881-1942)
최인규는 강원도 삼척에서 1881년에 태어나 일찍 결혼해서 딸을 낳았지만, 아내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면서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습니다. 그는 40세가 되던 1921년에 예수님을 믿고 북평감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1933년에는 천곡교회로 옮겼고, 2년 후 전 재산을 헌납할 정도로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1940년이 되자 강원도 지역에서도 신사참배가 본격적으로 강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신사참배가 곧 우상숭배라 여기고 완강히 거부했고, 그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교회는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양반 출신이고 마을 유지어서 일본경찰은 그의 체면을 깎아내리려는 생각에 똥통을 지게 했으나 그는 그런 상태에서 매를 맞아가면서도 견뎌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일본경찰의 고문 방법은 최인규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 꼬챙이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을 했고, 코에는 고춧가루를 부었습니다. 게다가 50대씩 몽둥이를 맞아야 했습니다.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은 이런 형태의 고문을 견뎌야 했습니다. 최인규는 그런 고문과 몽둥이를 맞고도 아침과 저녁으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는 함흥재판소에서 재판받으면서도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는 망했다. 일본은 우리 민족을 못살게 하는 죄악을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며 오히려 단호하게 일본 재판장을 향해 외쳤습니다. 결국 재판장은 최인규를 불경죄로 적용해서 1941년 11월, 징역 2년형을 언도했습니다. 수감된 후 1942년 그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참조> 김재현, 『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