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헤어졌다 그것이 내 일이다
입술이 부족한 세계에서 사람들의 발을 닦아주는 일
입속에 껌을 쭉쭉 늘리며 나의 얼굴을 선택했지
이 세계의 끝을 건너갈 발이 내게 올 것이다
길거리에 버려진 깡통 같은 것을 걷어차는 것이 신호가 되겠지
바늘꽃이 피어나 유리 정원을 꿰매고
이 세계에서 멈춘 사람들이 드디어 걷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연습 중이다 나는 잘 헤어질 수 있다
뚜벅뚜벅 문을 따고 옷을 벗고 얼굴을 벗고 이불을 끌어당긴다
눈을 감는 용감한 사람이 된다
피로한 발이 저 끝에 목숨처럼 매달려 있다
내가 만진 사람들이 나와 사랑에 빠지듯
오늘도 쓰레기통에 넣고 꽁꽁 묶은 것이 있다
눈물 없이 나는 만인의 연인이 된다
평등하고 고른 냄새를 자랑한다
당신의 발을 오래 닦아주는 일 그것이 내 일이고
내가 연습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다
- 연습할 수 없는 것들 / 이근화
길가에 수양버들
오늘 따라 더 푸르고
강물에 넘친 햇빛
물결 따라 반짝이네
임뵈러 가옵는 길에
봄빛 더욱 짙어라
- 금야연가 / 피천득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게 있다
눈 덮인 산허리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차가운 손길에 나는 몸을 움츠린다
너는 칡넝쿨로 너를 묶은 채 웅크려 있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빽빽하게
솔잎들은 너를 찌를 듯이 흙바닥에서 주춤주춤
나는 나무의 뒤편들을 오가며 숨바꼭질을 하고 너는 상처를 상상하며 운다
청설모와 다람쥐들이 나무 아래로 내려오면
우리 아스팔트 고향에서 들려오는 폐건물에서의 메아리울음, 그 수많은 생략들
묶어줘 나를 풀지 말아줘 얼마나 많은 흉터들을 건너갔는지
너는 울면서 내게 울지 말라고 말한다
허물어진 도시의 먼지들이 이 숲을 뻐끔뻐끔 메워 오고
모두가 너를 잘못 알고 있는 것뿐이라고 속삭인다
눈가루들로 희뿌옇게 앉은 저 멀리 산 중턱
너는 메아리를 닮아 차츰 사라져 간다
나를 풀면 위험해. 너는 내게 손 내미는 대신 말을 내건다
떨어지려는 것처럼 흔들리는 도토리들
칡넝쿨이 더 세게 너를 옥죄고, 나는 너를 풀지 못한다
아련해져 가는 너를 잡아보려고 손을 뻗으면
선은 손에서 멀어져 가고 손은 선에 닿지 않고
바람을 지나쳐 보내며 신기루를 믿고 싶다고 말한다
너무 멀리 와 버렸어 상처가 없는데 아프다
눈 감은 내 눈 앞에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지고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에서 너를 안고 눈을 감는다
- 사라지는 포옹 / 이이체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따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들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 그 머나먼 / 진은영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 마디가 힘겹고, 돌아눕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나는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 슬픈 빙하의 시대 2 / 허연
그해 겨울 오랜 연애를 마감하였고 파란 사파리 점퍼를 사서 계절이 다 닳도록 입었다
즐겨 들었던 노래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몇 갑의 담배를 피웠고 끊을 수가 없었다
떨지 않았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해 겨울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따금 전광판을 바라봤지만 나는 소식이 되지 않았다
이따금 생은 괜찮았다 이따금 새가 날았다 이따금 아는 사람을 만났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어디든 나는 나이를 둘러매고 갔다 췌장을 앓았다
받아온 약은 먹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무들은 멈추었다 겨울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다
다 필요 없어 보이기만 했으니, 만져보았던 글자들이 몸을 떨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늙은 개들은 언덕을 따라 올라가고 아이들은 여전히 달리기를 잘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내가 주운 종이는 구겨져 있었다
그 종이에 쓰인 것들 흔들리다가 쏟아져 모두 그해 겨울이었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했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질문 뿐이었다
한 손을 번쩍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겨울은 언제나 다음에 찾아올 겨울을 기약하였다
영원한 작별은 불가능하거나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죽어가고 있었다 구원은 도처에 있었으나 아무도 줍지 않았다
많은 문장으로 일기를 썼고 그보다 더 많은 문장을 지워갔다
여전히 그만둘 수 없었다 이토록 질긴 것들이 무엇인지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으므로
과연 우리는 마땅한 것일까 자꾸 손을 숨겼고
그렇게 숨고 싶어 하는 손을 나는 늘 경계하였으나 손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져갈 때 나는 그들의 이름을 생각하고
우리는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나를 감아올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자주 잠이 들었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밤도 있었다
그해 겨울 나는 그해 겨울을 포기하였고 동시에 모든 그해 겨울을 보고 싶기도 하였다
나는 안전하였다 그게 나를 무섭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잠들 수가 없었다
그해 겨울 나는 불어왔다 불어갔다
너무 멀리 날아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 그 해 겨울 / 유희경
둘이서 마주 앉아,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 이마를, 흐트러져 뚜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 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
우리는 빗방울만큼 떨어져 있다
오른뺨에 왼손을 대고 싶어져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둘이 앉아 있는 사정이 창문에 어려 있다 떠올라 가라앉지 않는
생전의 감정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 나는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더 갈 수 없는 오늘을 편하게 생각해본 적 없다
손끝으로 당신을 둘러싼 것들만 더듬는다
말을 하기 직전의 입술은 다룰 줄 모르는 악기 같은 것
마주 앉은 당신에게 풀려나간, 돌아오지 않는 고요를 쥐여 주고 싶어서
불가능한 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 뒤를 돌아볼 때까지
그 뒤를 뒤에서 볼 때까지
- 내일, 내일 / 유희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는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슬프다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 기념 사진 / 황인찬
말라가는 건초향기가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오후야
너를 기다리며 이파리 사이에 달린
검은 버찌알들 전부 빛나게 닦아놓았어 방문 앞엔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별을
문을 활짝 열지는 마, 약봉지들이 멀리 날아가네
먹지 않고 숨겨둔 알약들은
길 잃은 아이들의 손바닥에
가본 길로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오누이들에게
그럼 자작나무숲과 새들에게, 너에게만 말해줄게
내 몸엔 점이 여섯 개야 나는 오늘 과일칼을 깎았어
고통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자는 살인에는 관심이 없대
아무래도 미치광이 같아, 아름답게 찌르는 일에 중독된
그리고 나는
검정 속의
오렌지 같아 아무래도 점점 흐릿해지는
이 병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페스트는 익은 사과냄새 홍역은
막 뽑은 깃털냄새가 난대
초록과 빨강 사이에서 문득 깨어나고 싶다면?
검지 손가락 위의 꿀 세 방울과 성난 말벌의 벌통 사이에서
화려한 접시 장식보다는 푸른 아스파라거스밭의 초조함 사이에서
오늘 밤엔 어떤 병을 앓고 싶니? 어떤 詩를?
내 몸엔 점이 여섯 개뿐이야
달아난 한 개를 찾으러 밤의 손가락이 무한히 길어지고 있어
잘려나간 밑둥들이 송진냄새 뿜어내는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너를 기다릴게
- 혼자 아픈 날 / 진은영
십 년 전 녹음했던 비틀스처럼 비가 내리려 한다 벽지의 꽃잎이 떨어질 것 같아
몸이 아픈 오전 아이들이 또 개 줄을 잘랐는지 개가 달려가는 소리
골목을 따라 달리는 구부러지는 개, 그 뒤를 쫓는 아이들의 환호성
나란히 누워 서로를 훔치고 있는 당신과 나는 아이들이 개를 부르는 소리 근처에 살고 있다
개 이름과 내 이름의 사이 발톱을 세운 비가 내린다 돌아보지 않을 만큼
차갑다,란 말 뒤에 내가 비쳤고 당신은 슬픔이 뱉어놓은 가래
한쪽은 보고 한쪽은 잊는다 오래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시력을 열어본다
눈동자 너머 소독약 냄새 나는 지난날이 쓰러져 있다
앞은 뒤를 그리워하고 뒤는 앞을 참는 기묘한 데자뷔 창밖,
발톱 소리 같은 당신의 등 그리고
- 나와 당신의 이야기 / 유희경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지 튕겨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히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 나오면,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 비가 2 / 기형도
이제 그만 혹은 이제 더는 이라고 말할 때 당신 가슴에도 눈이내리고 비가 내리고 그랬을까
수면처럼 흔들리던 날들이 가라앉지도 못하고 떠다닐 때 반쯤 죽은 몸으로 도시를 걸어보았을까
다 거짓말 같은 세상의 골목들을 더는 사랑할 수 없었을 때 미안하다고 내리는 빗방울들을 보았을까
내리는 모든 것들이 오직 한 방향이라서 식탁에 엎드려 울었던가
빈자리들이 많아서 또 울었을까
미안해서 혼자 밥을 먹고, 미안해서 공을 뻥뻥 차고, 미안해서 신발을 보며 잠들었을까
이제 뭐를 더 내려놓으라는 거냐고 나처럼 욕을 했을까
우리는 다시 떠오르지 않기 위해 서로를 축복해야 한다
더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손들을 늦지 않았다고 물 속에 넣어 보는 것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별들로 반짝여 보는 것이다
- 밑 / 이승희
밤에 걸어도
골목길을 가만히 누가 뒤따라와도
나는 믿는다
꽃필 것을 믿고
그 지독한 냄새와 부스러기에 과민증이 도질 것을 믿는다
흐드러진 흰 꽃의 가치는 스러지는 데 있고
꽃나무 아래 하얀 목덜미를 젖힌 소녀에게
무자비한 사랑이 주어질 것을 믿는다
가구와 수집품을 밖으로 끌어내고
커튼을 뜯어 젖히고
네 마음을 건드린 소리와 색채에 묻혀있던 내 몸뚱이를
보라
사랑이여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나는 믿는다
오늘의 뉴스를 믿고
유랑극단을 믿고
노래와 서커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믿는다
어떤 음악도 독서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철거반도 폭격도 내 식사를 망치지 않는다
사랑아, 너는 파리처럼 날아왔다 떠날 것이다
대충 이러다 멈춰줄 걸 믿는다
뜸하게 물을 줘도 꽃은 피고
물주지 않았는데 흙에서 반쯤 나와 피어나는 꽃도 있다
그런 꽃일수록 끔찍하다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조용한 골목에 강도가
어쩌면 기다리는 애인일지도
살인은 멈추지 않고 강간은 끝나지 않고 전쟁은 더더욱 치밀해질 것이다
우리는 충분지 않은 과오를 나누고
끝내 나아지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을 믿는다
- 김이듬 / 나는 세상을 믿는다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 병 /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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