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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98
12월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대림 제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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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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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L50HqkHW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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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사람, 평생에 걸쳐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 주님 손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
대림 시기 접어들면서 첫번째 독서로 이사야서가 계속 봉독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구약 시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 예언자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기원전 740년경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701년경까지 남 유다에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아버지는 아모츠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여예언자였으며,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그는 왕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진솔한 조언을 건네는 것을 봐서 상류층 출신으로 여겨집니다. 이사야서를 읽어보신 분 잘 아시겠지만, 이사야서는 꽤나 깁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총 66장이나 되는 방대한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 향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 북 이스라엘은 거의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남 유다도 당시 강대국인 앗시리아 제국과 그에 맞서 싸운 이집트, 시리아, 그리고 떠오르는 신흥 강호 바빌론 사이에서, 약소국가로서의 서러움을 톡톡히 맛보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힘겨운 시기 이사야 예언자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강대국을 통한 현세에 내릴 하느님의 심판이 유다 백성 위에 곧 닥칠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하느님께 불충실한 유다, 사악하며 부도덕하며, 그릇된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유다는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사야 예언자는 강력한 질책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서 따뜻한 격려와 위로와 사랑과 희망이 가득 담긴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을 권고합니다. 진실성이라고는 1도 없는 겉치레뿐인 예배를 당장 집어치우라고 조언합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정의를 세우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사야 예언자는 진실로 뉘우치는 사람,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리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백성을 유배와 파멸로부터 구해 주실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약탈의 위협 앞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한결같이 당신 백성에게 충실하신 하느님’ ‘한결같이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선포합니다.
한결같다는 것! 충실하다는 것, 불변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지니신 여러 속성 가운데 가장 우세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결같다는 것! 충실하다는 것! 변함없다는 것! 얼마나 마음 든든한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결같은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한결같은 모습을 지니는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변함없는 충실성!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한결같은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해 천년이 가도 만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읍을 만드시겠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이사야서 26장 1절)
이어서 그 성읍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당신 백성을 초대하시는데, 자격 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사람, 평생에 걸쳐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 주님 손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야서 26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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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당신의 가치는?>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ID6bp4l3Z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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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이라며 투덜거립니다. 자신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이들은 그리스도께 합당하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한 닢에 대한 비유를 통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되찾은 어린 양과 되찾은 은전 한 닢에 대해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회개한 사람들입니까? 회개했다면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당신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영화 ‘담보’(2020)에서 사채업자 두석은 불법체류자로부터 돈을 받기 위해 그 딸을 담보로 잡습니다. 9살 승이인데 다음 날 돈을 가져다주면 담보를 넘길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승이 엄마는 그날 저녁에 불법체류자로 잡혀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승이는 두석으로부터 탈출하여 엄마를 찾으려 하지만 엄마는 추방당한 상태입니다. 두석은 졸지에 승이의 책임자가 되어버립니다. 엄마는 두석에게 승이의 작은할아버지를 소개해주며 그가 돈을 갚을 테니 승이를 그에게 맡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승이가 좋은 집안에 입양되게 되고 자신이 다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을 때면 승이를 데려가겠다고 합니다.
승이는 그때 엄마를 찾아다니다가 위험한 사람에게 유괴를 당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두석은 간신히 승이를 찾아내 구해줍니다. 그리고 승이 작은할아버지로부터 돈을 받고 승이를 넘깁니다. 승이 작은할아버지는 승이를 술집에 팔아넘깁니다. 술집 주인은 승이 엄마 행세를 하며 학교도 보내지 않고 승이에게 잡일을 시킵니다. 손님이 던지는 것에 얼굴이 상해도 병원에도 데려가지 않습니다.
승이는 울면서 두석에게 전화합니다. 두석은 자신이 담보로 맡았던 것에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승이를 다시 데려옵니다. 승이를 데려오기 위해 유일한 재산인 차를 팝니다. 그리고 승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습니다.
다행히 승이는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갑니다. 엄마도 잠시 한국에 입국하여 승이가 크는 것을 보았지만 두석이 워낙 승이에게 잘해주는 것을 보고 그냥 중국으로 돌아갑니다. 지병이 있어 자신은 오래 못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승이 아버지도 살아 있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습니다. 두석은 어머니도 찾아주고 아버지도 찾아줍니다. 그러나 승이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두석을 결국엔 이렇게 부릅니다.
“아빠!”
승이가 다 컸을 무렵 두석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이 망가집니다. 그렇지만 승이가 성공하여 유명한 통역사가 되고 의사와 결혼할 때 유일한 부모로서 승이를 데리고 입장합니다.
승이는 처음에 돈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을 담보로 챙긴 두석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그를 노리는 나쁜 사람에게 납치를 당합니다. 두석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도 승이를 팔아넘겼고 결국 승이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도 못 가고 술집에서 자라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승이는 이 세상에 자신을 인간답게 여겨준 단 한 사람이 두석이었음을 알고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합니다. 두석은 담보의 뜻이 처음엔 돈을 받기 위해 담보였다가 “담엔 보물이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승이에게 “너의 가치가 얼마냐?”라고 물으면 돈 때문에 팔려 다니는 물건에 불과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석과 함께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귀중한 존재가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두석은 승이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99마리 양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듯이 행동합니다. 자신의 율법을 지키는 행동들이 주님 앞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높여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그리스도가 없다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음을 압니다. 그러니 그들은 회개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깨 위에 얹혀도 꿈틀대지 않습니다. 그분의 어깨에서 내려와 자신 뜻대로 가면 곧 죽음 목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약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잃어버린 은전 한 닢처럼 주인의 손에 있지 않으면 장롱 바닥에 떨어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한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쥐어지고 예수님의 어깨에 매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 기도입니다. 저도 주님께 감사하여 “주님, 제가 어떻게 당신의 은혜에 보답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이냐? 넌 그냥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가치는 나뭇가지에 불과합니다. 내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버지!”라고 불러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에게 떨어져 나가면 버려진 가지처럼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당신의 가치는 얼마입니까?”라고 물을 때, 회개한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저 스스로는 정말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아버지로 믿고 따르면 무한한 가치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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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21.24-2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고 하신다. 이 말씀은 지금 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탓하시는 말씀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아들의 뜻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과 반대되는 가르치실 수가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죽은 다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은 현재의 삶에서부터 맺는 열매와 덕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의 열매와 덕은 삶의 어려움에 의해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안정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폭풍이 불고 극심한 풍랑이 닥치고 유혹이 계속되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25절) 비와 강물과 바람이라는 말로 인생의 온갖 상황, 모략, 중상, 상실, 죽음, 가족을 잃는 일 등 삶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끄찍한 일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박은 사람은 이런 재아 어느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는다. 바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고 하겠지만 더 근본적적으로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고 굳건히 서 있는데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을 인생의 모든 파도 저 너머에 올려놓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운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런 사람은 집짓는 수고를 다 하고서도 수고의 열매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은총 대신 벌을 받기 때문이다. 강도, 간음, 위증하는 사람들도 자기 일을 하려면 수고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수고를 했어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큰 손해까지 본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은 불륜이나 방탕, 만취 분노에 빠져 사는 이들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고 있다.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필리 4,13)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 어리석은 자가 된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이 대림시기를 노력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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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이사야의 묵시록’(24―27장 참조)으로 불리는 오늘 독서의 신탁은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어 황폐하게 하시겠지만, 당신 왕권을 보존하시고 시온산에서 구원을 내리신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하느님의 정의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노래로서, 주님 백성의 앞날을 대비하시는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찾게 될 안녕과 보호를 기념하며, 신실한 예루살렘과 개혁된 유다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예언자는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길이길이 신뢰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살아야 할 삶의 대원칙인 ‘산상 설교’를 마무리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분명한 태도로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신앙인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와 희망의 노래 속에서, 이사야 예언자와 시편 저자가 강조하는 주님께 대한 굳은 신뢰가 오히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래처럼 쉽게 무너질 사람이나 제후들이 아니라 굳건한 반석이신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생각을 다하여 오롯이 신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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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4-27)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즉 생각으로만 믿고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과 같은 사람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어서 비바람에 그 집이 무너지는 것과 환난과 박해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사실상 같은 상황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뿌리 없는 믿음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곧 ‘말씀의 뿌리를 잘 내리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신앙은 곧 생활이 되어야 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라면, 즉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냉담 상태’ 라고 부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상태가 신앙생활을 잠시 쉬는 것일 뿐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신앙이 아주 죽어버린, 또는 신앙을 아주 잃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죽거나 잃은 것은 없는 것이니, 그것은 안 믿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인데, 믿을 기회가 없어서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더 나쁜 상태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총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집’은 ‘인생’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안전한 인생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즉 ‘집인 것처럼 흉내만 낸 집’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앙생활을 흉내만 내는 사이비 신앙인의 인생이고,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아예 거부한 사람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집 없이 노숙하면서 거센 비바람을 그대로 맨몸으로 맞는 사람”입니다.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자기가 집을 안 지어서 집 없이 사는 사람은 ‘어리석기도 하고 가엾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석 위에 지은 집에서 사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지은 집에서 사는 사람과 집 없이 사는 사람의 차이가 거센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만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환난도 박해도 없을 때에는, 또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기 전까지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거센 비바람을 환난과 박해로 생각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심판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집을 제대로 잘 지었는지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 비로소 드러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환난과 박해 때에 드러납니다. 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잘 살았는지는 심판 때에 드러납니다. 지금 아무 일도 없다고 해서 태평하게 살면서 나중에 생길 일에 아무 대비도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지금은 아무 일도 없지만 나중에 생길 일에 미리 잘 대비하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심판을 생각하면서 지금 충실하게 준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고 있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과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말씀하신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마태 23,3)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두 경우는 사실상 차이가 없습니다. 사도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33-35)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고(마태 26,56), 나중에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마태 26,69-74) 그들의 생각(마음)과 실제 행동이 달랐던 것은, 즉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은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긴 일이 그때까지는 머리로만(생각으로만) 믿고 섬긴 것이었고, 아직은 그게 ‘삶’으로는 이어지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박해 때문에 겁에 질리자 그들의 신앙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때 사도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가 비바람에 무너지는 위기를 아주 ‘혹독하게’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나중에 완전히 변화되어서 믿음과 삶이(신앙과 생활이) 하나로 일치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모래 위에 지었던 집을 스스로 허물고 견고한 반석 위에 다시 튼튼하게 새로 지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든지 사도들이 겪었던 그런 위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이란 끊임없이 그런 위기가 다가오는 생활입니다.) 지금은 진심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어떤 환난과 박해를 만났을 때 자기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평소에 믿음과 삶이(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또 자신의 의지력에 대해서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과 성실한 기도생활은 ‘반석’입니다. 자만심과 위선은 ‘모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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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색이 있어서 색을 보는 것 같지만 색을 보는 눈이 있어야 색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적색, 녹색, 청색 등의 3가지 광수용체만 있어서 가시광선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우는 16개의 광수용체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 보지 못하는 자외선과 편광까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본다는 측면에서 사람은 새우보다 보는 능력은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지식은 은하계를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은 우주의 시작과 끝도 볼 수 있습니다. 우주의 시작과 끝이신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색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교회의 전례는 제의 색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백색 제의는 순결과 영광을 의미합니다. 홍색 제의는 피와 열정을 의미합니다. 자색 제의는 참회를 의미합니다. 녹색 제의는 성령과 희망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색을 보는 것은 새우보다 못하지만 색을 통해서 구원의 의미를 찾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소리가 있어서 듣는 것 같지만 귀가 있어야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16에서 2만 헤르츠의 소리를 듣지만 개는 65에서 5만 헤르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개는 고막에서 소리를 22배로 증폭시킬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은 개보다 못하지만 소리를 통해서 구원의 의미를 찾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회심하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의 웃음소리는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소리는 언어가 되었고,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되었으며, 언어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은 생존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람이 생존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는 하느님과 사람이 맺은 표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었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가 되었습니다. 역사와 신화는 문명과 문화가 되었고, 과학과 기술이 되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은 사람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터넷과 양자컴퓨터의 만남은 인류가 풀지 못한 숙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견고한 성을 만들 것 같습니다.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문명과 문화를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만을 위한 성과 문명은 무너지고 말았던 바벨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만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집’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집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제후들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그렇습니다. 문화와 문명 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집이 아닙니다. 더불어 사는 모든 이웃과 연대하는 삶입니다. 환경을 보존하고 보호하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이 결코 무너지지 않는 집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누추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지만 구유는 2000년이 넘는 지금도 무너지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련의 바람, 고통의 바람, 근심의 바람이 불면 곧 무너지고 마는 집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집은 시련의 바람이 불어도, 고통의 바람이 불어도, 근심의 바람이 불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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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가야하네>
마태오 7,21.24-27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 내 말을 실행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가야하네>
나의 뜻에서
하느님의 뜻으로
나의 나라에서
하느님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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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앙>
살아있는 사람은 호흡을 합니다. 하지만 호흡을 의식하는 사람은거의 없습니다.
신앙은 호흡하듯 하는 것입니다. 뼛속깊이 신앙이 배어있어 온 몸에서 신앙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호흡이 곤란하면 고통스러워하며 그때서야 비로소 호흡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온 몸으로 신앙하는 사람은 자신과 갈림 없이 하나인 분출하는 신앙이 짓눌릴 때에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억압과 맞섭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고통스러운 박해의 시간에 오히려 실천하는 신앙은 찬란히 빛납니다.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실천하는 신앙을 죽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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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이제까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선교사로서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오늘 성인의 축일을 맞아 우리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와 사랑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묵상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 강론을 다 적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조금 수준이 높은 내용입니다. 우리 명상의 집에 오시는 교우분들은 수준이 높다 못해 너무 깊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딱” 맞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 최근에 오신 분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서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방금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데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다 아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직접 실천하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성서학적으로 설명을 하면 산산 설교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나 받아 들이기 어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흔히 “다 하느님의 더 깊은 뜻이 있겠죠?”라고 말하곤 합니다. 갖다 붙이면 다 하느님의 뜻이 되는 듯합니다. 고통도 하느님의 뜻, 기쁨도 행복도 다 하느님의 뜻, 대학에 붙어도 하느님의 뜻, 대학에 떨어져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다 할 수 없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부부가 사랑해서 둘이 하나되어 산다 하더라도 남편의 속내를, 혹은 아내의 뜻을 다 알 수 있습니까? 평생 같이 살아도 알다가도 모를 것이 부부 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포기하고 살죠!
어쨌던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깨우쳐 가는 길은 하느님과 우리 의지의 단순한 일치를 넘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머리로는 하느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과의 사랑의 결합이 있을 때 어느 정도 감이 옵니다. 그분과 온전히 사랑으로 결합되었을 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을 넘어 자연스럽게 그 뜻을 실천에 옮길 수 있습니다. 그분 사랑은 본질적으로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흘러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분 사랑의 불길은 활활 타올라 우리를 그 불길과 하나되게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 영의 살아 있는 불길이다. 하느님의 뜻은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그렇다고 비밀스런 체계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 속에 살아 있는 구체적 실체이며, 우리 영혼은 그 불길 안에서 타오르도록 창조되었다. ‘하느님의 뜻’ 이란 그분의 사랑과 지혜의 움직임이다.”(인간은 섬이 아니다. p.95)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자신을 성찰할 때,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이익이나 만족을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특히 시련 중에 있을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느님과 친밀한 사랑의 일치 속에 있다면, 자신의 이익이나 만족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게 되며, 그분의 뜻이 옳고 좋아 그것을 행하게 됩니다. 자신의 뜻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자신의 행복을 나의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의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들은 나 자신의 뜻을 더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하느님의 뜻을 좇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주님, 당신 뜻에 따라 인내하고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명상의 집에서도 봉사하겠습니다. 다만 우리 딸이 이번에 대학에 꼭 입학을 해야 합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그것이 무엇인지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명상의 집의 나무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렇게 미사와 기도를 바치며, 성경을 읽고 고독과 침묵 속에서 깊은 관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뜻이 예수님 안에서 소멸되어 그분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기도 안에서 끊임없는 “자기-내어놓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깊은 나의 내면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뿐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도 이냐시오 성인의 말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젊은 하비에르는 활기차고 굳은 성격을 지녔으며 세속적인 야망을 추구하던 청년이었기에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라”라는 이냐시오의 끈질긴 제안에 감화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태오 복음의 다음의 내용을 들려 주었을 때,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회심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마르 8,36). 하비에르는 자신의 회심을 이끌었던 이 성경 구절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쳐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자신을 내세우기 보다 자신을 하느님의 손 안에 놓인 연장이요 쓸모 없는 도구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주님께 대한 섬김과 복음 전파를 향한 간절한 원의는 성령의 활동 안에서 여러 지역에 풍성한 복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주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축일을 맞아
저희도 지금까지 저희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는지 되돌아 보게 하소서.
저희의 뜻을 당신께 맡겨 드리며 진정 당신의 뜻을 원하게 하소서.
당신의 뜻과 하나되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나누는
당신 손 안의 연장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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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병원에서 청소일을 하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청소하는 병실 중에 의식불명 상태로 오랫동안 누워있는 청년 환자의 병실이 있습니다. 이 청년의 아버지는 누워있는 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면서 병실을 지키고 있었지요.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청소하러 이 병실에 들어가려는데 마침 이 청년의 아버지께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보호자가 없었지만 그래도 청소원은 조용히 병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아버지께서는 왜 아들의 병실을 청소해주지 않냐면서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아까 담배 피우러 나가셨죠? 그때 제가 청소하고 나왔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소원은 자기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아들의 병실을 청소했습니다. 나중에 동료가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누워있는 아들로 인해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셨겠어? 나까지 스트레스를 줘서는 안 되지.”라고 답합니다.
이 청소원은 화가 났을까요? 청년 아버지의 아픔을 이해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청소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생각하면 화낼 일도 줄어들고 기쁨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허구한 날 “주님, 주님!”하고 외쳐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삶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 많은 물질적인 봉헌을 하는 것 역시,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느님께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한 가지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좇아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먼 훗날,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심판받는 것은 우리 사랑의 크기라고 하지요. 얼마나 큰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구원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앞선 이야기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사랑이라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이웃 사랑이라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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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사랑>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참으로 큽니다. 요즘은 그 사랑이 더 커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한둘이지요. 그러다 보니 더 잘해주고 싶고, 자녀들이 잘 크길 소망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부모를 종종 봅니다. 돈과 시간 모두 자녀를 위해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어떨까요? 부모가 힘이 드는 만큼 아이도 힘들 것입니다.
부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돈 벌어오고, 좋은 교육 하고,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다 해주는데 뭐가 불만이야? 너는 공부만 하면 되잖아.’
그런 기대가 아이를 힘들게 한다고 합니다. 부모의 관심이 커질수록 기대가 커지고 그만큼 아이는 힘들어집니다.
주님께 감사함을 갖습니다. 우리에게 실망이 크실 텐데도 꾹 참으며 우리 스스로 할 수 있게끔 하십니다. 이 모습을 기억하며 내 자녀에게 그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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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버지의 뜻>
작심삼일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돌아보면 결심과 행동은 언제나 다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 하는데 세월이 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틀에 박힌 법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님의 계명을 합리화시키는 데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함이 없건만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물러지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로마 2,13)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그리고 그 실천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 6,6)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신앙고백이나 찬미의 말도 그 진실성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한편 실행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내 뜻을 이루려고 애달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원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닐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지순례나 기도회, 피정을 다녀와서는 너무 좋았다고 떠벌립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좋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새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좋았다는 것은, 변화된 삶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실천의 어려움을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 33,31)고 적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반을 잘 다지고 그 위에 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큰바람과 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비바람을 걱정할 틈도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 오면 곧 흔들려 방황하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성 마더 데레사는 말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요”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십시오.”(알베리오네신부) 우리 모두가 실천하면 할수록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으니 실천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차지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날이 되기를 소망하되 한 번에 많은 것을 행하려고 욕심부리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하늘을 그리워하면서도 내 뜻을 관철하려 한다면 정도를 벗어났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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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슬기로운 삶>
-늘 기본에 충실한 1.기도, 2.공부, 3.실행의 삶-
오늘은 사도 성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리는 예수회 출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입니다. 민46세 선종할 때까지 참으로 불꽃같은 치열한 삶을 살았던 성인은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했고, 그가 개종시킨 교우수만해도 10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 동방의 사도라 불리는 성인은 마지막으로 중국 선교를 앞두고 중국 본토까지 불과 14km의 뱃길을 남겨두고 산첸섬에서 열병에 걸려 1552년 12월3일 바로 오늘 선종합니다.
성인은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함께 시성되어 성인품에 오릅니다. 이어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고 얼마전까지 우리는 두 분의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참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는 성인이 선종하던해 중국의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마태오 리치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결코 하느님 사전에 ‘우연’이란 말은 없음을 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말, 둘은 ‘절망’과 ‘우연’입니다. 참으로 세상 모두가 하느님의 손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느님 처분에 맡기는 겸손한 자세요 바로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인이 되는 슬기로운 삶에 대해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설교의 결론부분입니다. 특히 강조되는 바 주님의 뜻을, 말씀을 실행하는 삶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과연 주님의 뜻을 실행함으로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슬기로운 삶인지요. 반석위의 인생집을 짓는 일은 평생 영원한 현재 진행형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방심은 금물이니 죽을 때까지 주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언제나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니 모든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평범한 진리이지만 우리에게 충격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내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마치 코로나19팬데밐으로 휘청거리는 오늘의 세계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참으로 제가 보기엔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위에 건설된 현대문명인 듯 참 위태해 보입니다. 슬기로운 듯 하나 참으로 어리석은 삶이 이런 기본에, 본질에 불충실한 사상누각의 삶입니다.
사상누각沙上樓閣이란 사자성어의 한자가 있는 것을 보면 동서양의 이해가 일치됨을 봅니다. 정주의 기본基本이, 기반基盤이, 기초基礎가 약해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면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투쟁도 내적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날마다 자기와의 투쟁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이 우리에게 크나큰 격려와 위로가 됩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이들에게, 주님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바로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 위에 인생집을 짓기 위한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입니다. 비단 분도회 수도자들뿐 아니라 슬기로운 삶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이 늘 염두에 두고 실행해야 할 정주 영성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 위에 인생 집을 짓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이겠는지요.
기도, 공부, 실행이란 세 필수요소입니다. 반석같은 정주의 삶을 떠받쳐주는 세 기둥같은 요소입니다. 참으로 기본에, 본질에 충실한,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슬기로운 삶의 세 필수요소가 ‘기도하라’, ‘공부하라’, ‘실행하라’입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뜻을, 말씀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기도와 말씀공부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황님의 12월 기도지향도 기도의 삶입니다. 누구보다 ‘기도의 사람’인 교황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전문을 인용합니다.
“교회 선교의 핵심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와의 대화에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매번 우리는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대화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로 우리는 현실을, 우리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마음도 변화합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해도 기도없이는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가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의 삶으로 더욱 깊어지기 위해 기도합니다.
마음을 적시는 기도의 침묵 안에 머무르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말씀공부는 함께 갑니다. 평생공부가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부가 말씀공부요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가능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의 실행입니다. 아무리 기도의 뿌리가 좋아도, 말씀의 꽃이 좋아도, 말씀의 실행을 통한 열매가 없으면 모두 헛일입니다. 기도와 말씀과 실행의 균형과 조화가, 삼위일체적 일치가 슬기로운 정주의 반석같은 삶에 결정적임을 깨닫습니다. 얼마전 고백성사시 본당사제에게 준 충고도 생각납니다.
“다시 깨어 새롭게 시작하세요. 사랑하는 ‘주님의 전사’, 요한 신부님, 1.기도하라, 2.공부하라, 3.사목하라, 늘 본질적인 일에 충실하세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슬기로운 삶, 즉 기도와 말씀공부, 말씀실행의 본질적인 수행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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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이 우리의 든든한 반석이심을 떠올려 주십니다.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4)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반석이라 부릅니다. 주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자애, 보호와 돌봄을 표현하기 위해서지요. 반석의 견고함과 단단함, 흔들리지 않음, 항구함은 주님이 당신 백성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이사 26,3)
그렇다면 누가 그 반석 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요? 어떤 이가 반석이신 주님께 머무를 수 있을까요? 그 조건으로 예언자는 "한결같은 심성"과 "신뢰"를 제시합니다. 주님의 백성은 한결같은 신의와 사랑을 지닌, 굳은 믿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백성은 마치 반석이신 주님을 투영하는 거울처럼, 자신의 주님을 꼭 빼닮았네요.
복음에서 예수님도 반석을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이 문제는 집을 지을 때 반석과 모래 중 어느 것을 지반으로 선택하느냐의 문제보다 훨씬 심오합니다. 아무리 반석이 모래보다 견고하다는 상식을 알고 있어도, 자신에게 다가오신 말씀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영락없이 모래 위에 집 짓고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지요. 이사야서에서 주님이 낮추시고 헐어 버리고 먼지 위에 내던지신 "높은 곳의 주민, 높은 도시"(이사 26,5)처럼 사상누각을 짓느라 헛수고만 한 셈이지요.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25)
들은 말씀을 망각과 외면의 허공으로 흩어버리지 않고 손과 발과 마음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은, 단단한 반석에 구멍을 내어 기둥을 심는 기초 작업처럼 주님과 우리 자신을 견고히 결속하는 거룩한 여정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단단히 묶인 이들, 이미 주님과 한몸인 이들은 삶에서 들이치는 비바람과 홍수에도 끄떡하지 않을 겁니다. 주님이 떠내려가시지 않는 한 우리도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요.
집을 지을 때 반석과 모래의 쓰임새를 분별할 줄 아는 이라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저자는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 1,22)라고 권고합니다.
이는 결코 손해볼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큰 영광이 되지요. 말씀을 실행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행위를 통해 육화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서 육화하신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니 실행하는 이는 이미 주님과 하나입니다.
창조 때부터 우리를 위해 준비된 그 말씀이 우리 각자의 실존과 언어로 지금 여기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절실하고 또 열렬한 덕분이지요. 그처럼 귀하디 귀한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유산되거니 사장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꼭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작고 소박하고 나지막한 사랑의 실행이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더 단단하게 하고, 세상을 더 선하고 진실되고 아름답게 만들리라 믿습니다. 이미 사랑의 실천으로 반석이신 주님 위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든든하신 주님 보호 안에 평화로이 거하시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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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성모님> 믿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성모님 하늘의 문 :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늘문이 닫혔는데 마리아의 믿음으로 구세주 잉태하시고, 새 하늘이 열리고, 마리아 응답으로 인류 구원이 이루어진다.
-마리아는 첫 크리스천이 되십니다.
마리아의 노래 :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주님의 말씀을 순순히 들으신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그리스도여, 오늘 우리의 생활도 주님의 말씀(주님의 종이오니, 주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자줄모탁子啐母啄 :스승과 제자가 줄탁동시(啐啄同時)할 同道唱和(동도창화)
*- 적기에 스승이 제자와 한마음이 되어 제자의 배움을 이룩할 수 있도록 도와줌을 말합니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할 적기에 어미닭이 밖에서 부리로 달걀 껍질을 쪼고 태어날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행위인 줄탁이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하며, 어느 한쪽이 빠르거나 늦어도 성사(成事)될 수 없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인 마리아가 예수 아기를 성령으로 잉태할 수 있었던 것은 처녀가 아기를 배면 돌로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쓴 마리아의 응답으로 하느님과 마리아의 줄탁동시(啐啄同時,同道唱和)가 이루어진 결과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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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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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집을 보금자리로 하여 살아갑니다. 곧 집을 자신이 머무는 거처로 삼아 살아갑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거처하고 있는 마음의 집도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가정 혹은 수도원을 육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이고, <복음>은 “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과 집이 세워진 기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반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1-4)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고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1)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영원한 반석”이라 하고, <복음>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하십니다. ‘하느님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란 영원한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그분으로부터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구이겠는가?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그 실행방법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온몸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자신을 내어놓는 쪽, 곧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곧 “십자가”가 있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곧 예수님께 의탁하여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택하는 일입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오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는 쪽을 택하는 일이요, 부당함을 당하고도 그를 감싸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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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제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말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해되지 않아도 인정하고,
어긋나도 침묵으로 감싸고, 먼저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알면서도 손해 볼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오해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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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오늘은 소화 데레사 성녀(10.1)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나셨고, 예수회 사제로서 사도 바오로처럼 열정적으로 이방인 지역, 특히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한 분입니다. 성인께서는 인도와 일본 선교를 마치시고, 중국으로 향하던 중에 선교지에서 선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5-7장)의 끝부분으로써, '산상설교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이 두 사랑은 하나이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과 말로만 하느님을 사랑해서는 안 되고, 행위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위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죽은 사랑이 아닌 살아있는 사랑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완성되기를 바라십니다.
지난 월요일 비슬산 관기봉 등산을 마치고 어느 한 스님과 대화를 했는데, 대화의 요지는 지금 여기에서 예수가 되어야 하고,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가 되어야 하고, 불자는 부처를 바라보아야 하고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26,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7,24)
오늘도,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반석!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이 되는 반석!
지금 여기에서 예수가 되는 그런 반석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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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wqMoZ4gAi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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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마음을
돌보는 것에서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된다.
실행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닌
무엇을
받아들일까의
문제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큰 실행이다.
하느님의 뜻은
무너짐과
세워짐을
반복하며
우리를
성장시킨다.
하느님의
뜻이
되기 위해선
깊어지는
기본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기본은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 간절히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 가고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향하는
올바른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 없이
뜻은
실행으로
옮겨질 수 없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 마음을
변화시킨다.
무너짐에서
세워짐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바꾸어 놓는다.
마음을
살아나게
하시는
아버지의
실행이다.
뜻과 마음
성장과 변화
실행과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삶은
시련 속에서도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의 실행으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것이다.
뜻은 실행을
깨우고 실행은
삶의 중심을
잡아준다.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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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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