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와 ‘6‧ 25 노래’를 부르다/ 채명신 장군님 묘역에서
6일 전이다. 현충원에 폭염(暴炎)은 살인적이었다. 모든 이의 만류를 무릅쓰고 군복을 착용한 채, 채명신 장군님의 묘역에 섰다. 그리고 부른 노래가 ‘애국가(4절까지)’와 ‘6 ‧ 25 노래’.
어색한 표현이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장군님의 묘역은 수시로 찾는 곳이어서 그 주변에서 일어난 갖가지 일화 등은 적을 수 없다. 대신 ‘애국가’와 ‘6‧25 노래’ 자체에 얽힌 사연 몇 가지는 들먹여야겠다는 외람된 생각을 해 본다.
먼저 ‘애국가’. ‘42년 교직 생활 및 21년 무료 노인학교 운영 기간 ‘애국가’(4절까지) 부르기를 해 왔었다. 군부대 안보 강연을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제대했었던 26사단에서 장병들에게 애국가를 계명창으로 가르치기도 했으니까. 서울이며 근교의 문학 행사장에서도 지휘를 겸해서 가끔 그랬다. 노인 학생들을 인솔하여 동남아 다섯 나라를 세 번에 걸쳐 여행하면서 한 그곳 교민학교 어린이와 한인회원들과의 애국가 제창, 결코 잊어지지 않는다.
교장 승진한 학교가 공군 5전투비행단 가까이 있었다. 무료 노인학교를 운영한 지 7년째 되던 해 ‘6‧ 25 5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았다. 아니 쌍방 합의였다. 해포 본교 및 분교장(分敎場) 어린이 고학년 수십 명과 함께 하루 전날 밤을 내무반(현 생활관, 예비군 내무반)에서 ‘체험 활동’을 하는 조건이었다. 노인학교에 봉사 활동하는 Y 하사(나중 주임원사, 공군을 빛낸 인물 선정)와 나, 그리고 인솔 교사 몇은 모기에 뜯기며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이튿날,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기념식이 열렸다. 군 장병들과 어린이들이 연병장에 질서 있게 서 있었고, 나는 비행단장 K 장군과 지휘대에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았다. 이윽고 ‘6‧25노래’! 그 순간의 감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장군과는 수시로 연락이 오간다.
다시 20년이 흘러 70주년 기념식이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나는 거기 <실버넷뉴스> 기자 신분으로 취재차 갔다. 거기서 만난 이가 뒤에 합참의장으로 예편하는 공참총장 W 장군이었다. 공군과의 인연은 그래서 남다르다. 난 누구보다 우렁차게 ‘6‧25노래’를 불렀다. 실로 오랜만에 공인(公人)으로서 기념식에 선 착각까지 불러일으켰다 하자.
채명신 장군님 묘역에서의 ‘6‧25 노래’는 나를 마치 공인이 된 것처럼 들뜨게 했다. 가사도 잊어서 헤맸으니 부끄럽다. 그럴수록 더 현충원에 가고 싶은 까닭이 있다.
- 2023년 6월 25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