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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의 말씀 15,1-4>
나 요한은
1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
2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3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민족들의 임금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십니다.
4 주님, 주님을 경외하지 않을 자 누구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 누구입니까?
정녕 주님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이 와서 주님 앞에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운 처사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12-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담화, 곧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줍니다.
먼저 박해와 박해 가운데에 있을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 그러나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루카 21,12-15)
박해가 오히려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깨우치십니다.
곧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눌변인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탈출 4,11-12.15-16).
그러니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신앙이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7-18)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실 것이니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 받거나 배척받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고 즐거운 것, 듣기 좋은 말에 더 맞들이고 쉽게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곧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19)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성 베네딕도 역시 ‘인내’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수도규칙 머리말 50)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다.”
(필립 3,10; 로마 8,17)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루카 21,17)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제자의 운명>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를 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제자의 운명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곧 제자라면 박해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제자라면 그때 그것을 증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면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을 사람들이 박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자가 아닌 사람은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아닌 셈입니다.
제자가 아닌 사람이나 제자여도 참 제자가 아닌 사람은 박해를 받게 되면 베드로 사도가 배반할 때처럼 나는 그 양반 제자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자가 아닌 사람이나 참 제자가 아닌 사람은 주님의 제자답게 박해받을 짓이랄까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박해받을 짓만 골라 하셨습니다.
우선 약자 편에 늘 서셨습니다.
이것은 권력자의 눈에 거슬리는 겁니다.
권력자들이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약자 편에 서실 뿐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염두(念頭), 이 말이 새삼스럽습니다.
염두란 생각의 첫 자리라는 뜻입니다.
생각의 첫 자리엔 늘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다 비판하셨고 그래서 박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라면 주님처럼 박해받을 짓만 골라 할 것이고, 반대로 제자가 아니라면 박해받을 짓은 절대 하지 않고 오늘 주님 말씀처럼 박해를 증언의 기회로 삼지도 않습니다.
기회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두 부류가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는 사람과 기회를 잡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기회라면 그것을 놓치는 사람이 실패하는 사람이고, 잡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흔히 얘기하지만, 요는 그것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잡고, 기회라고 생각지 않는 사람이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해를 누가 기회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제자들만 기회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박해를 기회로 생각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든 그리고 무엇이든 기회로 생각할 것이며, 주님을 증언하고 자기의 사랑을 증거할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아무튼 제자의 운명은 박해를 피할 수 없고,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박해를 주님을 증언할 기회로 삼아야 함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2 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
(루카 12,12)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소신을 지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 6,15)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 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6)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 1,12)
우리가 지닌 삶의 십자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 안에서 삶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모든 수고와 땀을 그분은 아십니다.
그러니 삶의 여정에서 오는 시련과 고통을 은총의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이 세상에서 희망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는 반대 받는 표적인 우리를 이 세상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끝까지 참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참아나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을 참아내는 힘은 무엇일까요?
제가 힘들었을 때를 생각하니 대학에 다니며 저와 같은 동년배들이 TV에서 잘나가는 것을 볼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도 돈을 벌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단돈 500원이 없어서 학교 구내식당에서 파는 점심을 굶고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휘재 씨 같은 경우는 “그래, 결심했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말도 안 되게 웃기고 또 말도 안 되게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같은 나이의 처지로서 어떤 벽을 느꼈습니다.
언젠가 노력하면 무엇이든 다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런 사람처럼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짓눌렀습니다.
이러한 절망감이 저를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세상에서는 희망할수록 희망의 힘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56회에 일찍 성공을 거둔 후 실패를 맛보고 오랫동안 ‘자발적 외톨이’로 살아온 태사자 김형준 씨가 나왔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사실 우리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어느 정도 실패하기에 우리가 실패했을 때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형준 씨는 공부를 매우 잘해서 대학에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획사에서 큰 계약금을 준다고 하며 김형준 씨를 불렀습니다.
그에게 돈과 인기는 매우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금을 부모님께 돌려주지 않고 친구들과 돈을 쓰러 다녔습니다.
기획사에서 받을 계약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학기 학점 2가 안 되어 학사경고를 받아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명해지면 되니까.
하지만 계약 자체가 자신에게는 거의 배분되지 않는 계약이었습니다.
인기는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매달 80만 원씩 받아서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 안 좋아진 것은 태사자까지 해체하게 된 것입니다.
김형준 씨는 사람들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으며 나이가 46세가 될 때까지 자발적 외톨이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전의 자기 모습을 알고 있던 이들로부터 전화 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너무 우울한 나머지 뭐라도 해야 하겠기에 택배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일찍 성공했지만 오랜 시간 살아갈 힘을 잃었던 김형준 씨가 다시 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희망해야 합니다.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는 또 다른 희망이 생겼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을 희망해서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쳐가던 대학시절 힘을 얻게 해 준 것은 종교였습니다.
저는 그때 잘나가던 저의 또래들을 보며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만약 내가 천국 가고 저들이 지옥 간다면?’이라는 몹쓸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극단적인 생각을 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은 저에게 다시 살 힘을 주었습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해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희망할 때는 오히려 희망의 힘을 잃습니다.
희망은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에 있어야 힘을 얻습니다.
땅에 묻히면 힘을 잃습니다.
희망도 총량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를 희망하면 하나는 덜 희망하게 됩니다.
나뭇잎을 먹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을 때 나비는 더는 나뭇잎을 희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꽃을 희망합니다.
그래서 나뭇잎이 없어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내가 희망하는 대상이 있는 곳에 나도 살게 됩니다.
천국을 희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7-19)
천국에 가면 우리는 우리가 잃었다고 착각한 것까지 다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죽음 뒤의 세상을 희망하라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희망하며 희망을 잃고 사는 삶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이 세상의 고통을 참아내기도 아주 쉬워집니다.
지옥문 앞에는 “이곳에 들어오는 이는 희망을 버려라!”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희망하면 희망을 잃습니다.
항상 나와 비교되고 내가 범접하지 못할 업적을 이루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희망은 절망의 씨앗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세상 것들을 희망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이 힘들어지고 행복지수가 떨어집니다.
심지어 자살률이 1위입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하라고 하는 이들은 오히려 이 세상을 힘들게 살도록 만드는 이들입니다.
희망은 하늘의 것입니다.
그 희망이 이 지상의 것에 쓰인다면 힘을 잃습니다.
마치 경유 차에 휘발유를 넣는 것과 같습니다.
경유 차에 휘발유를 넣어도 괜찮을까요?
다 망가집니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빼내고 다시 경유를 채워 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희망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런데 지상의 것을 희망하면 고장이 납니다.
연료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나의 존재가 바뀌어야 합니다.
단편영화 <슬픈 남자>(The Sad Man)가 있습니다.
그는 늘 혼자입니다.
혼자 행복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줍니다.
그는 행복합니다.
그런데 여자아이가 남자의 가면을 벗기자 남자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아이를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또 우울해합니다.
아니 그것을 행복이라 여깁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려면 좋아하는 것을 바꾸면 됩니다.
그러면 그 좋아하는 것에 맞게 나도 바뀝니다.
내가 바뀌지 않고 계속 나뭇잎이 없다고 우울해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하는 것에서 천국의 것을 희망하는 것으로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그 즉시 다시 삶의 에너지가 솟습니다.
본래 희망은 하늘의 것이고 하늘의 것을 희망할 때 작동합니다.
꿀은 애벌레에게 어떤 에너지도 주지 못합니다.
먼저 나비가 되어야 꿀이 에너지가 되듯, 천국을 희망해야 희망이 나에게 에너지가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종말을 걱정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을 살고자 노력합시다>
지금에야 종교 자유 시대를 만끽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예수님 이름 때문에 권력자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미움과 적개심과 박해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님께 최우선권을 드린 이유로 부모도 뭣도 모르는 불효자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대역죄인, 사형수라는 타이틀이 뒤따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굴비 엮듯이 줄줄이 엮여 법정으로, 감옥으로 끌려갈 때, 길가에 나와선 사람들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듯이 바라보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생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을 지상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했습니다.
주님으로 인한 고통과 시련의 강도가 커져갈수록, 이 세상 너머의 또 다른 주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더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주님 나라에서 누릴 행복으로 충만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삶을 휘감을 때면 그들은 주님께서 남겨주신 희망과 구원의 말씀 머릿속에 떠올리며 힘을 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복음 21장 17~19절)
안 그래도 요즘 머리카락이 왕창왕창 빠져나가 걱정이 태산인데, 주님께서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시니, 마음에 세상 편안해지고 따뜻해집니다.
종말에 관한 복음을 읽으실 때 마다 많은 분들께서 걱정들을 하십니다.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이윽고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는 경고성 말씀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내린 결론은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자나 깨나 그분께서 생각하시는 고민 한 가지는 우리 모든 인류의 구원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의 영혼 구원을 위해 늘 노심초사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안개 속 같은 다음 세상 역시 그렇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세상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임에 확실합니다.
이 세상보다 훨씬 하느님 사랑이 충만한 세상이 확실합니다.
다음 세상을 걱정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을 살고자 하는 각오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부터 천국을 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내 안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종말은 오랜 기다림의 완성입니다.
열심히 달리고 달린 사람들, 최선을 다해 노력한 사람들에게 표창장이 수여되는 은총의 순간이 종말입니다.
하루하루를 충만히 살아온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의 순간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이고, 인내와 수고의 보답으로 영원한 생명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박해>
‘박해’는 종말의 표징이 아닙니다.
앞의 9절에 있는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박해’에도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날과 표징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박해’를 언급하신 것은 “박해를 받겠지만, 박해는 종말의 표징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이 모든 일에 앞서” 라는 말씀은 다른 재난들보다 박해가 먼저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박해를 받게 되면 종말을 더욱 의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더욱 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 신앙인들은 무조건 박해를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신앙인들은 무조건 박해를 받아야 한다.”, 또는 “신앙인들은 무조건 박해를 받게 된다.”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박해를 받을 때도 있다.”이고, “박해를 받아도 흔들리지 말고 신앙을 지켜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줄곧 박해를 받는 경우도 있고, 전혀 받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박해를 예고하는 말씀을 하실 때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라는 말씀도 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박해를 받느냐, 안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박해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2) 박해란 무엇인가?
신앙을 흔들어서 신앙생활을 못하게 막거나 방해하는 일은 모두 박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폭력과 억압의 방식으로 박해가 가해지기도 하고, 유혹이나 충고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방식이든 간에,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해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일들은 모두 박해입니다.
3) 누가 박해자인가?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박해자가 될 때가 많지만,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박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박해가 항상 교회 외부에서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 내부에서 올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박해를 받은 일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분리되기 전의 일이고, 그래서 그 박해는 교회 내부의 박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내부의 박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박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족의 박해는 가장 견디기 힘든 박해입니다.
4) 박해자들은 왜 신앙인들을 박해하는가?
이 질문의 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까지 미워한다.”
(요한 15,18.23)
하느님과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신앙인들을 박해한다는 말씀은 박해자들의 뒤에 사탄이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사탄이 바라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실패하는 것.
따라서 박해자들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말렸을 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고 엄하게 꾸짖으신 것은(마태 16,23), 그를 사탄에게서 지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가서(루카 22,3)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박해자들 편에 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유다는 지켜 주지 못하셨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못하신 것이 아니라 유다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박해자들 편에(사탄 편에) 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더라도 ‘말’과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마라.”, “흔들림 없이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라는 말씀은 ‘말재주’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마태 10,19-20).
“박해를 받아도 성령의 도움 덕분에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키는 모습” 자체가 최고의 증언이고, 최고의 언변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무엇인가?”
‘믿음’과 ‘기도’입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아도 죽지 않도록 지켜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고 죽어도(순교해도) 저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라는 말씀에서 ‘생명’은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혼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기서 ‘인내’는 무턱대고 참기만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 - “인내의 승리, 찬미의 승리”>
어제 뒤늦게 읽은 영어 말마디 하나가 깊은 여운으로 남아 위로와 희망, 힘을 줍니다.
묵시록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모든 시간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All time is in God’s hand)”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한결같은 인내입니다.
결코 절망할수도 없고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믿음에서 저절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고백도 나옵니다.
세상 그 누구도 이런 믿음의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손(hand)’하니 거의 20년 전 미국 미네소타주 성 요한 수도원에 머물 때 어느 노 수도사제와의 따뜻했던 우정이 생각납니다.
이름도 잊었지만 아마 지금쯤은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순수한 신부님의 모습에 호감을 느껴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더니, 손이 차다 웃으며 사양하기에 재차 다음 말을 건네며 악수에 성공했던 일화입니다.
“당신 손은 찹니다. 그러나 당신 마음은 따뜻합니다(Your hand is cold, but your heart is warm)”
말 한마디 천량빚 갚는다 했습니다.
이 대화 이후 신부님과 급속히 가까워져 짧은 동안이지만 깊은 우정을 나눴습니다.
하느님은 좋으신 분, 하느님 마음은 늘 따뜻할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 마음이 그대로 하느님 마음을 닮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God’s final victory)’입니다.
어제의 메시지, ‘모든 시간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와 더불어 역시 큰 위로와 희망, 힘을 줍니다.
역시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이들에게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항구한 인내도 이런 궁극의 승리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승리는 그리스도의 승리, 그리고 믿는 우리의 승리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우리의 궁극적 승리를 믿기에 우리는 어떤 역경과 수난중에도 항구할 수 있습니다.
지난 11월13일 연중 제33주일 복음이 오늘과 같았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핵심 구절에 대한 교황님의 삼종기도후 강론도 잊지 못합니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By your perverance you will secure your lives)”에 대한 강론입니다.
좀 길다 싶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바로 이것이 인내다.
날마다 선을 건축하는 것!
인내는 특히 우리 주변의 현실이 다르게 행동하도록 부추길 때 항구히 선善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 인내는 선 안에 머무는 것이다.
나의 인내는 어떠한가?
나는 항구한가, 또는 매순간 믿음과 정의, 애덕을 살고 있는가?
즉 내가 좋을 때, 잘 나갈 때, 즐겨 원할 때, 나에게 적합하고 도움이 될 때 기도하는 반면, 내가 불만족스럽고, 아무도 내게 감사하지 않을 때, 나는 기도하기를 멈추지는 않는가?
단적으로 내 기도는 주변 상황에 의존하는가?
혹은 주님께 항구한 마음에 의존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일깨우셨듯이, 우리가 인내한다면, 우리는 삶의 슬프거나 추한 사건들에도, 심지어 우리 주변에서 목격하는 악에도 우리는 두려움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항구히 하느님의 선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토스트에프스키의 ‘카라마조포의 형제들’이란 소설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의 죄에 두려워하지 마라. 죄중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왜냐, 그것은 신적 사랑의 닮음이요, 지상에서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인내는 바로 세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반영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성실하기에, 그것은 항구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다.
기도에 항구했던 주님의 종, 우리 성모님(사도1,12-14), 우리의 인내를 강화해 주소서.’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ㄱ).
바로 인내는 그대로 신적 사랑의 반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갈수록 인내의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인내, 믿음의 인내, 희망의 인내, 겸손의 인내입니다.
참으로 궁극의 승리자이신 하느님께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둘 때 한결같은 항구한 인내입니다.
이런 인내는 그대로 생명의 구원에로 직결됩니다.
바로 이런 인내를 북돋아 주는 결정적 수행이 하느님의 승리를 노래하는 찬미가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이런 하느님 찬미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승리를 앞당겨 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은 승리한 이들이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바로 이 찬미가를 우리는 평생 매주 금요일 저녁기도 성무일도 때마다 바칩니다.
그대로 인용합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사오며,
만민의 왕이시여 당신의 길은 바르고 참된 길이니이다.
주여, 당신을 경외하지 않을 자 누구이오며,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 누구오리까?
당신만이 홀로 거룩하시나이다.
당신의 심판이 공정하게 내려졌으니,
모든 민족이 당신 앞에 와 경배하리이다.”
(묵시 25,3-4)
얼마나 고마운 가톨릭 교회의 공동전례 찬미와 감사 기도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 찬미의 생활화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인내를 붇돋아 주어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루카 21,12)
오늘 복음 대목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복음서 전체 맥락에서는 이 표현이 나옵니다.
어제까지 들은 무시무시한 종말의 재앙들에 앞서, 먼저 일어날 일을 예수님께서 나중에 말씀하신 것이지요.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루카 21,12)
천재지변이나 전쟁, 전염병, 혹세무민의 이단 출현 등 집단적인 재앙이 들이닥치기 전에,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공격을 당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루카 21,16)라고 하시니 갈수록 태산이지요.
그러니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을 잘 간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루카 21,13)
박해 받고 넘겨지고 끌려가는 혹독한 과정 끝에 사람들은 제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줄 겁니다.
이때 제자들은 자기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루카 21,14)
"말씀"과 "지혜"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공포와 두려움 중에도 말씀이고 지혜이신 분께서 친히 활동하시도록 온전히 내맡겨야 합니다.
성령께서 박해 받는 영혼 안에 머무르시며 그를 대신해 증언해 주십니다.
인간적 꾀와 말재주, 처세술은 진리를 전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주님께서 적절하고 합당한 말을 떠올려 주시고 선포하게 해 주실 때까지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제자들과, 그 제자의 제자의 제자인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그 너머에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수난과 십자가와 죽음 없이는 주님의 길을 설명할 수 없으니, 그때까지 믿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지요.
제1독서에서는 이 희망을 쟁취한 "승리한 이들"(묵시 15,2)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묵시 15,2-3)
우상과 쾌락과 탐욕에 무릎 끓지 않은 "승리한 이들"이 주님께 찬양 노래를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세상 삶이 꽃길만은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미 복음에서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바로 온갖 박해 속에서 인내로써 생명을 얻은 이들입니다.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십니다."
(묵시 15,3)
"승리한 이들"은 지상에서 호되게 겪은 환난과 박해와 멸시, 죽음까지도 의롭고 참된 주님 섭리의 일부라고 고백합니다.
비록 그 과정 속에서 육신은 괴롭고 마음은 상처 받았어도 주님 향한 믿음과 신뢰를 거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시야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
(복음 환호송)
신앙의 길에서 "주님 향한 충실함"은 죽기까지 부여잡아야 할 생명줄입니다.
박해와 재난 속에서도 그래야 합니다.
"충실함"은 이 단련의 시간을 거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잡이입니다.
"승리한 이들"이 노래하듯, 주님의 날은 "주님의 의로운 처사가 드러나는"(묵시 15,4) 날입니다.
마냥 두렵고 혼란스러운 재앙의 순간만이 아니지요.
의로우신 그분께 충실했던 우리 각자의 여정에 비추어, 우리의 의로움도 빛 한가운데에 드러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간을 보내며 매일의 말씀은 종말과 삶의 의미를 숙고하도록 도와줍니다.
말씀의 안내에 따라 저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건너감이고 새로운 시작이지요.
고된 세상살이 속에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육상 경기 중에 ‘장애물 경기’가 있습니다.
그냥 달릴 수 있지만 장애물을 건너는 것은 우리의 인생도 그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장애물이 넘어져도, 장애물 때문에 넘어져도 끝까지 달리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모임을 마치고 뉴저지에 또 다른 모임을 갈 일이 있었습니다.
저녁 7시에 모임이기에 오후 2시 30분 비행기를 예약했습니다.
저에게도 3번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2시 30분 비행기 늦어져서 3시 10분에 떠났습니다.
다행히 5시에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게이트가 부족해서 30분을 기다렸습니다.
아직은 시간 여유가 있어서 콜택시를 불렀습니다.
분명 게이트 B라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택시기사는 게이트 C에 있었습니다.
택시기사는 게이트 B로 왔고, 저는 무사히 7시 뉴저지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모임에서 신부님은 ‘용기를 내어라’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신부님은 뉴욕에서 시애틀까지 기차여행을 하는 ‘꿈’이 있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기차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간에 식당 칸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와인과 음식을 먹었는데 가격이 비싸서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시애틀에 도착해서 보니까, 식당 칸의 음식은 모두 기차표에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자신의 무지를 탓하였습니다.
살면서 많은 경우에 더 할 수 있는 것들을 못한 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더 많은 신자들을 도울 수 있었는데 그렇게 못했다고 합니다.
더 많이 기도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변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혼인의 성사성도 많이 줄어들었고, 공동체성도 많이 줄어들었고, 개인화된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존재해야 하고, 도전에 응답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읽은 동화가 생각납니다.
토끼가 잠을 자는데 도토리가 떨어졌습니다.
토끼는 그것이 지진이 난 것으로 착각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동물들도 토끼가 도망가지 덩달아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지진은 나지 않았고. 땅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걱정들도 그런 것이 많습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 벌어지지 않을 일 때문에 우리는 늘 걱정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십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고,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용기는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용기는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용기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만용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준비되지 않은 용기는 실패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정의롭지 않은 용기는 상처가 되어 돌아옵니다.
용기가 정의를 만날 때, 용기가 신의를 만날 때 용기는 사랑으로 열매 맺습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당신은 평생 함께 할 배우자가 지니고 있었으면 하는 특성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할 특성은 무엇일까요?
영국 스완지대 연구진은 59개국 젊은이 2,400명을 대상으로 평생 함께할 배우자가 지녔으면 하는 특성을 조사했습니다.
선택지에는 외모, 재력, 종교, 유머, 자녀 계획, 창의성…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가장 많은 이가 ‘친절’을 꼽은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평생의 만족을 따져보니, ‘친절함’이 제일 중요한 덕목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친절한 사람은 실제로 인기가 많아서 주변에서 많은 이가 함께 합니다.
그에 반해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면서 자기만을 챙기려는 사람에 대해서는 함께 하기 힘들다며 거리를 두지요.
종종 외모도 괜찮고, 능력도 많고, 재산도 있는데도 왜 결혼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평생 함께 할 사람이기에 보이지 않는 부분, 특히 함께 할 때의 편한 마음을 줄 수 있는 ‘친절’ 등의 가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을 전 세계 젊은이 모두 공통으로 본다는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외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보다 내적으로 숨겨져 있는 부분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결혼만을 위해 내적 성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점이 바로 친절 등의 내적 가치에 있기에 모두 실천해야 할 덕목이 되는 것입니다.
종말에 일어날 일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어떤 일에도 대처할 각오를 하라고 이르십니다.
특히 박해에 대해 말씀하시지요.
임금과 총독 앞에 끌려가고,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예수님 따르는 사람을 넘겨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 ‘인내’라고 하십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희망을 바라보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이 ‘인내’가 영원한 생명인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모든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실컷 부려 먹으려는 꼬봉(종)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함께할 친구로서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께하려는 주님 모습에 우리는 어떻게 함께하고 있습니까?
혹시 자기 자신만 챙겨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인내’를 갖춰, 진정한 내적 성장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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