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찌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물만 마셔도 살이 찐다고 한다. 먹고 싶은 것 다 마다하고 새 모이 같은 식단대로 먹는데도 한 번 찌워진 살이 줄어들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의 입장에서 이보다 억울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왜 누군 날 때부터 날씬하고 누군 뚱뚱해야 하는 건지, 그것이 정말 알고 싶다.
♧뚱뚱한 것도 집안 내림
학교 다닐 때 보면 한 반에 뚱뚱한 아이들이 꼭 한 두 명씩 있었다. 짓궂은 아이들이 뚱보라고 놀려대도 흔들리지 않고 늘 손에서 간식이 끊이지 않던 아이들. 그런 친구의 집에 가면 신기하게도 그 아이와 똑같이 생긴 엄마와 아빠가 계셨다. 심지어는 오빠와 동생까지 한결같았다. 그 놀라운 가족력 앞에서 입을 다물 줄 몰랐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비만에 관해 전문가들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주된 원흉으로 꼽는다. 유전적 요인이 있다는 것은 비만 환자의 가계도 조사, 일란성 또는 이란성 쌍생아 연구, 입양된 소아에 대한 조사 등을 통해 알게 됐는데, 그 결과 비만의 경우 고혈압 버금가는 유전성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일례로, 양자 등록제도가 있는 네덜란드에서 생후 바로 양자로 입적되어 길러진 아이들 중 키와 체중에 따라 네 개의 무리로 선발해 낳은 부모와 기른 부모의 비만 여부를 조사한 결과 양자의 비만 정도가 높을수록 낳은 부모의 비만 정도가 높지만 기른 부모의 비만 정도와는 무관한 것으로 나왔다.
현재 '부산대 비만연구소'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중인 이상엽 부산의대 가정의학교실 조교수에 따르면 현재 우리 나라 비만아의 30%는 유전성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부모 중 어느 한쪽만 뚱뚱한 경우 자녀도 뚱뚱할 확률은 40∼50%, 부모 양쪽이 다 비만이면 70∼80%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국내 및 외국의 조사를 보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쪽의 영향을 더 받는다는 보고도 많은 편이다.
그러나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 중 어느 쪽 영향이 더 강한가에 대한 판결은 아직도 미정상태이다. 실제로 미국의 애리조나 사막에 사는 파마인디언은 마른 사람들이 많았지만 생활환경이 급격히 변화되어 비만과 당뇨병이 높은 비율로 나타나게 되었다.
♧비만 유전자
비만유전자의 정체는 몸 속에 들어있는 지방의 양에 관한 정보 전달 경로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밝혀졌다. 우리 뇌 속의 시상하부에는 비만의 발생과 진행을 방지하기 위해 체중의 증가와 감소를 조절하는 조절장치가 들어 있는데, 시상하부에서 몸 안의 여러 가지 정보를 받아 신체의 지방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시킨다. 만약 시상하부에 고장이 나거나, 각종 신체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몸 안에 지방이 많이 쌓여도 이를 감지하지 못해 계속 먹게 된다. 머리를 다치거나 머리 속에 이상이 있을 때 비만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비만의 원인이 이처럼 분명히 확인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1994년 미국 프리드만이란 학자는 비만한 생쥐에서 'ob 유전자'를 발견하고 이름을 '비만 유전자'라고 붙였다. 그는 또 혈액 속에서 ob 유전자가 만드는 '렙틴'이란 단백질을 밝혀냈다. 즉 비만한 생쥐는 ob 유전자에 이상이 있으며, 이런 생쥐에 렙틴을 투여하면 체중이 감소하고 혈중 콜레스테롤이 떨어지며 증가했던 혈당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일단 정상 체중이 되면 더 이상 체중이 줄지 않고 일정량의 음식을 섭취하며 정상 대사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렙틴의 발견으로 비만 치료에 큰 기대를 가지고 사람에게 투여해 보았지만 생쥐와는 달리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ob 유전자 이후 다른 유전자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돼서 최근까지 렙틴 수용체의 작용을 방해하는 db 유전자, 렙틴의 효과를 방해하는 fa 유전자, 멜라노사이트 자극 호르몬의 작용을 방해하는 아고티 유전자, 아직 역할은 잘 모르지만 터비 유전자, 그 외 fat 유전자, Do 유전자, Mob 유전자 등 비만과 관련된 여러 유전자들이 발견되었다. 앞으로 이러한 연구가 잘 진행된다면 비만 환자의 치료 뿐 아니라 비만이 되기 전에 조기에 진단해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환경에 더 신경 써야
대개 뚱뚱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가 즐겨 먹는 염분이나 설탕이 많이 든 음식과 튀김, 라면 등 기름진 음식들을 똑같이 좋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비만에는 유전적 인자가 기본적으로 있지만 그와 함께 환경적 요인도 상호작용 한다는 증거이다. 이 말은 유전적인 요인이 있다고 해도 환경적 요인을 잘 조절해서 적극적이고 바람직한 식이습관과 운동습관을 통해 얼마든지 체중을 관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부모들은 비만이 아니었지만 현재 자신의 나쁜 생활습관으로 배가 나오고 뚱뚱해졌다면 자식에게 그러한 경향이 전달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건전한 생활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뚱뚱해서 난 어쩔 수 없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환경적 요소를 개선하면 비만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도움말·심우영 경희의료원 피부과 교수, 유원상 서울 백병원 내과 부장, 이상엽 부산의대 가정의학교실 조교수, 이호준 을지병원 의과학연구소 소장, 진동규 삼성의료원 소아과 교수, 조율희 한양대병원 의학유전학교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