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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 (이민의 날)
제1독서 : 에제 18,25-28
제2독서 : 필리 2,1-11
복 음 : 마태 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
-끊임없는 회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자 제106차 이민의 날입니다.
가톨릭 평화신문과 가톨릭 신문도 1면은 이민의 날에 대한 기사로 가득했습니다.
교황님은 이민의 날 담화문에서 2018년 제시했던 ‘환대하기, 보호하기, 증진하기, 통합하기’라는
사목과제에다 이번은 구체적인 목표의 실천 6가지를 제안했습니다.
비단 이민자뿐 아니라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 건설을 위해 귀기울여할 적절한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이해하기 위해 알기, 봉사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기, 화해하기 위해 귀 기울여 듣기,
성장하기 위해 함께 나누기, 발전하기 위해 참여하기, 건설하기 위해 협력하기’입니다.
참 재미있었던 것은 가톨릭 신문 1면 1/4을 차지하고 있는 교황님의 사진이었습니다.
바로 지난 9월16일 교황청 성 마다소 정원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 전,
한 순례자가 하얀 주케토(모자)를 쓴 것을 보고,
교황님은 “제 것보다 좋아보이는데요?” 유머와 더불어 자신의 것과 바꿔 써 본 뒤
다시 되돌려 주는 참으로 인간미 넘치는 장면이었습니다.
교황님의 모자를 썼던 순례자나 이 장면을 본 모든 이들은 평생 잊지 못할
보물 같은 체험이자 참 따뜻한 구원체험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착안한 오늘 강론 제목,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시대의 예언자요 살아 있는 성인으로 세계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참 멋지고 아름다운 영적 지도자가 교황님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누구나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은 근원적 갈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일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무지의 어둠으로부터의 답도 역시 회개뿐입니다.
빛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갈수록 참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참 나의 회복에 빛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 펼쳐집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끊임없는 회개이기에 우리 삶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과 2개의 독서 말씀 주제도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하고 일렀을 때,
“싫습니다.”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
참으로 회개의 실천으로 드러나는 결과의 중요성을 말해 줍니다. 바로 세리와 창녀들을 지칭합니다.
반면 작은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는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회개로 응답하지 않은 무책임한 작은 아들이 지칭하는 바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인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하겠는지요?
주님의 엄중한 선언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아무리 과거에 잘 살았어도 오늘 지금 여기서 회개의 실천이 있어야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미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현재의 나를 보십니다.
회개 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묻지 않고 불문에 붙입니다.
그러니 회개하면 언제나 늦지 않고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하느님의 심중을 그대로 반영하는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영원한 의인도, 영원한 악인도 없습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끝까지 깨어 의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코 악인이라 절망할 것이 아니라 회개하면 언제나 구원의 기회이니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살라는 것입니다.
결론하여 절망은 없다는 것이며 누구에나 열린 구원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낙인찍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문을 열어두시고 회개하여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어느 농부과학자의 고백입니다. 들으며 농부 하느님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농부입니다. 기다림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지만 농사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다릴 줄 모르거나 기다릴 여유가 없어 중도에 포기하고 말죠.”
얼마 전 읽은 예언자적 삶을 살아가는 어느 저명한 시인의 고백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끝에 석방되었고,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2000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국가보상금을 단연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이어 ‘생명 평화 나눔’을 기치로 한 사회운동단체 <나눔 문화>를 설립하여
평화활동에 전념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 이 말마디를 읽고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사는 이들’ 소위 ‘꼰대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하느님은 이런 이들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과거에 맡기고 일체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영원한 현역’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회개의 삶을 사는 이들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회개는 참으로 역동적 실재이며 현실입니다.
바로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이 강조하는바 역시 오늘 지금 여기서의 회개입니다.
완고한 마음을 활짝 열고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벌, 심판, 구원에 대해 어제 읽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의 자기 추구, 미움, 분노, 공격, 폭력, 질투, 증오, 욕심, 탐욕 이 모두의 죄는
우리를 고립, 외로움, 타인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종종 육체적, 심리적 긴장과 좌절로 이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응답의 거부인 죄는 그 자신의 필연적 벌을 가져온다.
우리의 죄는 오랫동안 치유할 시간이 걸리는 상처를 남긴다. 하느님이 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자초하는 벌이요 심판이요 지옥이다.
죄는 법이나 규칙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자기 본성에 대한 폭력으로 일종의 자해自害 행위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참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하느님은, 진리와 사랑은 어느 종교에만 속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필요로 하는 진리와 사랑에 대한 폭력의 죄는
오직 고통과 상실을 초래할 뿐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어느 분의 지옥에 대한 설명에 그대로 공감했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지옥은
“인간이 행사하는 자유의지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존중’이며,
인간 편에서 지옥이란 ‘인간이 자기 죄과를 두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후회!’일 것이니
지옥 또한 스스로 자초한 눈먼 자유의지의 업보임을,
결국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와 겸손만이 구원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영성생활에 얼마나 핵심적인 수행이 회개인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은 회개의 삶이자 자기 비움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여정은 동시에 비움의 여정을 뜻합니다.
제2독서 비움의 찬가를 통한 바오로의 가르침입니다.
평생 매주일 제1저녁기도 때마다 바치는 비움의 찬가입니다.
회개의 여정, 비움의 여정을 통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새삼 회개의 여정은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 순종의 여정임을 봅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참 멋지고 아름다운 구원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영적 순발력을 발휘하여 삶에서 오는 모든 고통이나 시련, 어려움들을 회개의 계기로,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순종의 계기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날로 영적 성장에 성숙에 예수님을 닮아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의 실현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구원의 여정에 참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며
언제나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분이 실수로 회사 동료의 바지에 콜라를 쏟았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떻게 해요? 엉덩이까지 홀딱 젖었어요.”라고 말하자
회사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괜찮아요. 엉덩이가 조금 더 달콤해졌을 뿐이에요.”
바지에 콜라를 쏟은 사람은 이 회사 동료를 앞으로 어떻게 볼까요?
이제까지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 바지에 콜라를 쏟았다고 화를 낸다면 좋은 감정을 갖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화내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유머로 넘기는 모습에서 좋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며칠 전, 성지를 방문하신 자매님으로부터 자기 본당에 찾아온 손님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론하시는데 본당 신부님을 계속 칭찬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순간 누가 다르게 보였을까요?
칭찬의 대상인 본당 신부님이 아니라, 칭찬하는 손님 신부님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다르게 보일 때는, 지금 자신을 높이려고 할 때가 아닙니다.
또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고 할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좋고 선한 일을 행할 때였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특히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좋고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분명 나의 이웃들에게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서로 정반대인 두 아들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두 아들에게 일렀는데,
맏아들은 싫다고 했다가 생각을 바꿔서 일하러 갑니다.
반면 또 다른 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이 그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고서 이행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고서 나중에 생각을 바꾼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했습니다.
일하러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은 아들은 꾸지람을 듣습니다.
이처럼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믿은 뒤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은 그들에게가 아니라 너희에게 먼저 왔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았다.
그들은 거부하지 않고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지금 당장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사제와 창녀와 세리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두 아들에 관한 비유 이야기를 듣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자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같은 말을 하였는데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은 하였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고.
그들이 물론 맏아들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이 비유의 뜻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을 보면,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신 비유입니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성전 정화를 하신 것이지요.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와서 말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께서는 되물으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에 모르겠다고 답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이 두려워서 모른다고 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하시고 나서
바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당신에게 도전을 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고 세리와 창녀들이 맏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와 창녀들이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했던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의 법, 율법을 지키기에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수석 사제들, 원로들, 바리사이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차표를 구하는 조건이
수석 사제들, 원로들, 바리사이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율법을 지키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하는가,
한마디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 바라사이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이 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을 때
그 말은 진정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인들은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서 남을 단죄하는 사람들보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회개하라는 요한의 외침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겨야 할 것입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의 믿음도 익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 ‘회개의 행동’와 ‘믿음의 행동’에로의 초대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음의 뉘우침만 있는 회개가 아니라 행실로 돌아오는 회개와 말로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행하는 믿음에 대한 촉구입니다.
<제1독서>는 그릇된 견해로부터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를 당하게 되자, 조상들의 죄 때문에 자신들을 벌하시는 하느님은
공정하지 않고 복수심이 많아 자신들을 멸하신다고 여기고 불신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에제케엘 예언자를 보내시어
그들을 그러한 그릇된 견해로부터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정하지 않다는 말이야?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27.32)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공동체의 불화에 대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면서,
예수님의 낮춤과 순명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대한 순종으로 누리시는 영광을
필리피 신자들이 깨닫기를 촉구하며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지 그 상황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수석사제들과 원로 백성들의 재정수입과 권위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지 추궁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위에 대해 반문하시고
이를 대답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는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간 아들과,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서도 일하러 가지 않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원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예수님께서는 ‘누가 “예”라고 응답한 사람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뜻”은 “예”라는 응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응답에 따르는 순명의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당신의 양식’(요한 4,3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야고보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26)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계명을 매일 행동으로 채워라.”(4,63) 하시고,
창설자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성인은
‘실행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았으며, 말한 바는 모두 실행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실행’에 대한 주제를 대할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니,
히틀러 암살에 연루되어 처형된 예언자적 신학자인 본회퍼입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너무도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당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존경받는 이들이었고,
직업적, 형식적으로 이미 부르심에 응답한 의인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의 잘못보다 남들의 허물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어쩌면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창녀들은 그 당시 천시를 받던 이들이었고,
드러난 자신의 죄를 항상 부끄럽게 여기며 사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남들의 허물보다 자신들의 잘못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곧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들과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종은 이런 풍자를 들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면, 놀랄 일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기 같은 죄인이 천국에 오다니 하고 놀라고,
둘째는 교황, 주교, 신부들, 독실하기로 유명했던 신도회장들이 천국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놀라고,
셋째는 평소에는 소위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천국에 많이 와 있는데 놀란다.”
이러한 말씀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마태 21,32)
끝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겠느냐?”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주님!
당신의 뜻을 제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응답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실행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고, 당신 의로움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 방법은 거리 지키기와 마스크 착용입니다.
꼭 필요한 모임만 참석하고 가능하면 모임을 자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을 자주 씻는 것도 코로나19의 감염을 막는 방법입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고 방역지침을 지키고 있습니다.
답답함을 감수하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코로나19의 확산이 멈추지 않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박해도, 두려움도, 환난도, 칼도 그리스도와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확진된 목회자가 예배를 통해서 신도들을 감염시킨다면 결코 착한 목자가 아닙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중세에 페스트는 많은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페스트는 신앙을 통해서는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이웃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은 광신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규모 모임을 가지면서 거리두기를 하지 않기도 합니다.
위치 정보를 감추기 위해서 휴대폰의 전원을 꺼놓기도 합니다.
확진되었으면서도 동선을 알려주지 않기도 합니다. 검사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코로나19는 정치적인 대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코로나19는 사상과 이념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무고한 사람이 감염되어 사망한다면 반드시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손실을 주고,
삶에 불편을 준다면 이 또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서, 종교인이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죄인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바이러스가 사람을 구별하지 않듯이 하느님께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바이러스는 정부의 방역지침을 준수하고, 개인위생을 철저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방인일지라도, 죄인일지라도 회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바이러스는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해도,
재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 개인위생을 소홀히 하면
쉽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듯이
바이러스는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삶에 커다란 피해를 주게 됩니다.
율법학자라고 해도, 바이사리파라고 해도, 종교인이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기름부음 받았던 다윗도,
하느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였습니다.
다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본당에서도 여러 교육기회가 있습니다.
성서공부, 레지오, 성령기도회, 대림특강 같은 기회입니다.
평일미사는 하루의 삶을 돌아보고 말씀 안에서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 자리에 열심히 참여하는 분들은 축복의 말씀을 듣기 때문에 신앙이 더욱 강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기회에 함께 하지 못하면 뜨거웠던 신앙도 점차 식어가는 것을 봅니다.
저의 동창 중에서도 교구의 행사나, 피정, 교육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교육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기 때문에 본당에서의 사목도 기쁘게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교육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친구들은
동창 모임에도 자주 오지 않는 친구들은 나중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거의 표시가 나지 않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훨씬 기쁘게 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받은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 예배를 강행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빙자한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검사를 거부하고, 동선을 알리지 않는 것도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자가 격리의 대상으로 통보를 받았으면서도 공공장소에 다니는 것도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확진 판정을 받고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코로나19는 나만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웃을 아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라고 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나의 건강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가 대구와 경북에 심각한 피해를 줄 때였습니다.
전국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대구와 경북으로 달려갔습니다.
전국의 소방대원들이 자원해서 달려갔습니다.
우한에서 온 교민들을 받아들인 천안과 아산의 주민들이 있었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을 우선적으로 보듬어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해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 21, 31)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지상의 모든 시간은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남긴 것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을 통해
온 세상이 환해진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이 사랑을 맛보게 된다.
예수님은 맑은 실천이다.
맑은 실천은
믿음을 동반한다.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으로 가득차기에
너무나도 뜨겁다.
다시 일어난 이들의
뜨거운 이야기로 가득 찬 나라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이다.
그들을
먼저 알아보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먼저 예수님께로
달려 온 세리와 창녀들이였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죄인들의 마음을 읽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먼저 알고 계셨다.
맑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길을
사랑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먼저 마음이 가는 것에
맑은 기도가 있다.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주는 가난함이 있다.
예수님과
먼저 만나는
세리와 창녀들이다.
끝내 그들을 되찾으시는
주님의 따뜻한 구원이다.
믿음을 먹고 사랑을 만나는
생명의 기쁜 소식이다.
올바른 믿음이 있고
실천이 있는 곳에
하느님 나라가 아름답게 있다.
복음은 그래서
하느님 사랑을 찾으려고
다시 일어서는 이들의
가장 큰 기쁨이다.
그 복음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나 담배 끊었어”와 “나 비흡연자야”라는 말의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런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습니다.
맏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고 이릅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일하러 갑니다.
둘째는 처음엔 간다고 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는 싶었지만, 몸이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맏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상징하고, 둘째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상징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처음엔 따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뜻을 받아들여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은 처음엔 하느님 뜻을 따르는 듯하였지만
실제로는 계속 죄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일어난 것일까요?
어째서 어떤 사람은 변하고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는 행위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 행위에 대한 태도는 ‘믿음’에 의해 좌우됩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도자들이 요한이 가르치는 길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가리켰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삶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분을 믿으면 행위에 대한 시각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젊을 때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현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발언을 하였다가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사형 집행인은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5분을 주었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러시아 황제가 계획한 일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사형시키느니 그런 척하면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 5분은 평생만큼 소중한 시간이었고 1분씩 쪼개어 많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인생은 신의 선물이고,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다”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순간마다 그 5분처럼 아껴 쓰며 의미 있게 살고자 결심했습니다.
4년간의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종이 대신 머리로 소설을 쓴 그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그는 훌륭하게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책을 판 돈을 마약과 술, 도박에 탕진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사람은 변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변한 이유는 아내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그에게 도박 자금으로 줄 것이 없다며,
‘마지막으로 시집올 때 가져온 반지와 보석’을 내어주었습니다. 이 선물은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녜요. 나는 당신이 언젠가 돌아올 것을 믿어요”라는 말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믿음을 받아들여 모든 것을 끊고 새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버리면 지금 하는 행위들은
마치 사람이 개같이 네 발로 걷는 것처럼 어색해집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은 머리로 변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 없이 계명을 지키며 변하려는 사람은 마치 “나는 담배를 끊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는 원래 담배를 안 피워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또 피울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원래 자신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란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래 안 피우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어색하게 됩니다.
실수로 피워도 곧 영원히 피우지 않게 될 것을 압니다.
유다인들이 열에 하나 계명을 지키면, ‘나 하느님 자녀 맞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자녀는 ‘어 이상하다? 앞으론 죄 안 짓겠지!’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걷는 것이 이상했을까요, 물에 빠지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을까요?
‘당연히 걸어야 하는데 왜 빠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두세 발 걸은 것으로 물 위를 걸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죄짓는 게 당연한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고,
“하느님 자녀이기에 죄짓는 게 이상한 거지!”라고 반박하는 사람은
곧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도 계획을 세워놓고는 실행을 못 하는 의지 박약자였습니다.
1년 안에 책을 써서 주겠다고 계약을 해 놓고 좀처럼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830년 여름까지도 빈둥대던 빅토르 위고를 보고 출판사는 1831년 2월로 마감을 못 박았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옷장 안의 모든 옷을 꺼내 봉인한 뒤 치워버렸습니다. 속옷까지 치워버렸습니다.
옷을 치워서 외출을 할 수 없게 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던 것입니다.
그가 걸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숄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마감 시한보다 2주 빨리 『노트르담의 꼽추』를 탈고하여 제출했습니다.
이전의 행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임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물 위를 당연히 걸을 수 있는 존재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행위는 그 사람의 존재입니다.
의사가 치료하지 않고, 선생이 가르치지 않고, 사제가 미사 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존재와 직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치료를 몇 번 해서 의사가 되는 게 아니고, 가르쳐서 선생이 되는 게 아니며,
미사를 거행한다고 사제가 아닙니다.
먼저 의사이고, 선생이고, 사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언젠가 다시 물속으로 우리를 빠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행동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오늘 복음에서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일을 가기 싫다고 했지만 결국 일을 가는 아들과 일을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은 아들..
하지만 정말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 일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완벽한 아들은 없나요?... ^ㅡ^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세리와 창녀들이 아니라 요한이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그를 믿고 그를 따라 생각을 바꾼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또한 수석사제들, 백성들, 세리, 창녀들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중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여 살아 갈 것인가!...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드러나지 않은 아들(?) -예수님- “가겠습니다.” 하고
일을 가는 완벽한 사람”은 극히 드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 될 때 생각을 바꾸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
다시 나의 선택과 삶을 점검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사도바오로는 로마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로마 7,18~19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로마 7,24~25
사도 바오로조차도 선과 악에 대해 이런 고백을 한다면 우리도 실수는 하겠지요?
하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다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걸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