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의 ‘꿈꾸는 아버지’
보험 설계사 김선생이 새로 나온 연금에 대해 설명하다가 내 방에 있는 작은 조각품을 보더니 불쑥 말한다.
“선생님, 저는 정말이지 꼭 조각가가 되고 싶었어요. 애가 하나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꿈을 꿨지만 지금은 애가 둘이니------.” 하고 말끝을 흐린다.
미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TV 토크쇼인 오프라 윈프리 쇼의 지난 주 주제는 ‘꿈꾸는 아버지’였다. 30대에서 50대에 걸친 가장(家長) 예닐곱 명이 모여 이제껏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회라는 거대한 메카니즘 속에 던져져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혼자만의 삶도 버거운데, 몇 사람의 행복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무거운 책임감, 자연히 ‘나’는 없어지고 ‘가족’이 삶의 전부가 되지만 늘 ‘밖에 있는 존재’로서 가족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소외감, 아이들의 꿈, 가족 공동의 꿈에 밀려 자신이 가슴 속에 갖고 있는 꿈을 비밀에 부칠 수 밖에 없는 좌절감 등을 그들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후에 비데오로 그 모습을 본 아내들은 이구동성으로 ‘놀랐다’고 말했다. 남들은 단지 남편이며 아버지일 뿐, 그들도 두려움을 느끼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도 가족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 나름대로의 꿈이 있다는 것에 미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고 했다.
테네시 윌리암스, 유진 오닐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받는 아서 밀러(1915-2005)의 대표작 ‘세일즈 맨의 죽음’(1949)은 바로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월리 로우맨은 예순세 살이 된 세일즈 맨이다. 그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세일즈맨으로 성공하고 자기의 사업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을 갖고 있다. 가정적이고 상냥한 아내 린다가 있고, 월부로 집 한 채도 샀으니 몇 십 년 후면 그것도 자기 소유가 될 것이다. 게다가 이웃이 부러워하는 두 아들까지, ‘행복한 삶’의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윌리의 꿈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세일즈맨으로서의 성과급은 자꾸 줄어들고, 결국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한다. 희망의 상징이던 두 아들도 무능한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빗나가기 시작한다. 배반감, 슬픔, 피로 그리고 깨어진 꿈에 대한 절망감은 윌리를 거의 정신착란으로까지 몰고 간다.
윌리는 결국 두 아들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기기 위해 자동차를 폭주해서 자살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타게 된 보험금은 겨우 집의 마지막 월부금을 낼 수 있을 만한 액수였다.
‘세일즈 맨의 죽음’은 산업화되고, 물질주의화된 현대문명 속에서 마치 하나의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소시민의 삶을 그리고 있다.
처음 막이 오르면 윌리는 견본이 가득 든 무거운 가방을 양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세일즈 여행에서 돌아오는 그의 어깨는 축 처지고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그러나 밀러는 윌리가 파는 물건이 무엇이며, 그 가방 안에는 어떤 견본이 들어 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 내용물이 무엇이든, 궁극적으로 윌리가 팔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자신인지도 모른다.
아들들이 사회적으로 ‘성공’이라는 것을 하지 못한 아버지에게 등을 돌릴 때 끝까지 깊은 연민과 이해로 남편을 지키는 린다는 말한다.
“너희 아버지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란 건 아니야. 윌리 로우맨은 큰 돈을 번 일도 없고, 신문에 이름이 난 적도 없어. 하지만 네 아버지도 인간이야. 그러니까 소중히 대해 드려야 해, 늙은 개처럼 객사를 시켜서는 안돼.”
대부분의 아버지는 윌리 로우맨처럼 큰 돈을 버는 일도, 신문에 이름이 나는 일도 없다. 가끔씩 ‘인생역전’의 허무맹랑한 꿈도 꾸어 보지만, 매일 매일 가족을 위해 더러워도 허리 굽히고 손 비비며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도 아버지들은 가슴속에 꿈 하나를 숨기고 자신을 팔기 위해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정글 같은 세상으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