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제1독서
<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5,6-10ㄱ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제2독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4,12-14.19-20
형제 여러분,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19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20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걸음마를 멈춘다는 말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세례를 받고 보통 1년 정도 뒤에 견진 성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견진 성사를 미루기도 합니다. 세례와 견진을 마치 별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면 견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예식에 이미 이마에 기름을 바르는 견진 성사 예식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설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드님의 혼인 잔치에 아무나 초대합니다. 처음 초대했던 이들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였습니다. 이에 이방인들이 초대받게 됩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아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서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혼인하는 날 잠옷 바람으로 왔다면 그것이 혼인 준비가 안 된 것을 증명해줍니다. 옷은 그 자리에 합당한 준비와 노력을 했음을 알려주는 표징입니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성체 성사를 의미합니다. 그 성체 성사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은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세례 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도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자신도 뛰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혼인 예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어 다니는 아기가 자기도 부모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바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의 오랜 싸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견진의 과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는 세례를 받고 40년의 견진을 거칩니다. 그들은 이전의 파라오를 섬기기 위해 노예 살이 했던 본성인 소유욕, 성욕, 지배욕을 포기하고 청빈과 정결과 겸손의 열매를 맺는 자신과의 싸움을 평생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부를 찾으라고 종을 하란 땅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부르심에 응답한 여인이 레베카입니다. 레베카는 착한 여인이었고 그래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지만, 또한 그의 종이 주는 옷과 장신구로 몸을 꾸며야 했습니다. 이사악은 레베카의 얼굴을 몰랐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준 옷과 예물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자기 처소로 맞아 들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종이 선물한 옷과 장신구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세례를 주며 물은 견진을 상징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를 끊을 결심을 하고 견진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수없는 넘어짐이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뱀에 물렸습니다. 파라오의 종살이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불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상징하는 구리뱀을 장대에 달아 그들이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들도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덴젤 워싱턴은 “앞으로 넘어지라”라고 말합니다. 대학에서 퇴학 당하고 군대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며 어머니 미장원에서 앉아 있을 때 한 손님이 종이에 이런 말을 적어줍니다. “소년이여, 넌 세계를 돌아다닐 거야.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거야.” 덴젤 워싱턴은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끝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세례와 같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견진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세례 받은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그 다음은 자신에게 그러한 믿음을 준 이와 결국 하나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 성사입니다. 같은 죄로 수천 번 고해 성사 하십시오. 이것이 세례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혼인 예복을 만들어 입는 견진 성사를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걸음마를 멈춘 아기는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경외과의사가 쥐를 가지고 행복 중추에 관한 연구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쥐의 행복 중추에 전극봉을 삽입했습니다. 그리고 쥐들이 앞의 레바를 누르면 자기의 행복 중추를 자극할 수 있게 했습니다. 즉, 자기 행복(쾌락)을 스스로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기 조절을 하면서 레바를 눌렀을까요? 쥐는 계속해서 레바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 누르는 것입니다. 결국 정신 없이 누르느라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쾌락에 사로잡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인간은 다를까요? 쾌락에 빠져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합니다. 쾌락이 주는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역시 계속 쾌락 레바를 누르고 있습니다.
계속 행복감을 느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지독한 우울감에 빠지게 됩니다. 행복 중추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우울 중추가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 중추의 자극이 계속 강하게 주어지면, 바로 옆의 우울 중추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100% 행복으로 보이는 쾌락을 목표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쾌락에서 벗어나는 삶이 중요했습니다. 순간의 만족뿐인 것을 계속 가지기 위해 행복 중추 레바를 계속 누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 행복을 가르쳐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의 뜻인 사랑에 집중하며 부작용 없는 진짜 행복을 만들어야 합니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서 왕자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초대장은 미리 보내는 것이 당시 풍속이었고, 임금의 손님이니 그 지위는 전혀 낮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임금이 다른 종을 보내서 다시 초대했지만, 이 초대에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 종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임금의 권위를 부정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왜 그들은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요? 임금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야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임금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하느님과 사람들이 맺는 새로운 계약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임금이 군대를 보내서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리게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이 더 좋다면서 이 초대를 무시하고, 하느님의 권위를 무시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은 예복을 입고 와야 하듯이,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 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존 드라이든).
사진설명: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주일에 우니따스 운동회 잘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