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풍속
도시로 떠났던 자식들이 자가용 승용차를 몰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자식의 자식들까지 한데 모여 시골집은 오래만 에 떠들썩해진다. 간수했던 제기(祭器)를 꺼내 매만지고, 병풍을 손질하고, 정성껏 차린 제상 앞에서 다들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모습들이 정겨워 보인다.
익숙하고 전형적인 명절 풍속이었지만 지금은 갈수록 보기 힘들어지는 풍경이기도 하다.
부뚜막과 안 뜨락 에서는 명절 채비를 하시던 할머니 어머니 등 집안 아낙들의 분주하던 모습들이 아련하다. 맑은 밤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둥근 달을 머리에 이고 뒤꼍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는다. 가족과 집안의 안위(安慰)를 빌며 정성을 드리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어른대는 것 같다. 세월 가고 시간이 흐르면서 추석 명절 풍경도 변해 가는 게 눈에 보인다.
차례를 지내지 않는 집이 늘어나고, 고속도로가 귀성 차량으로 붐비듯 공항이 해외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탓에 이제는 아예 모이지 않고 만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세상이다. 가족이 모이지 않는, 정확히 말해 모이지 말라는 ‘비대면 명절’은 그동안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금년 추석은 세 번째 맞는 비대면 명절로 이어지고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는 경구(警句)는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이 국민단합을 호소한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경험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듯 명절 풍속도 이제는 바뀌고 있다. 가족의 모임을 억제한다고 식구들이 안 모여도 되나 고심했지만 올해는 생각이 바뀌었다.
정부가 권장하는 ‘비대면 추석’이 자연스럽고 평안하게 느껴진다. 이미 국민 대다수가 비대면 명절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 같다.
추석 선물을 택배로 보내고, 명절 인사는 문자나 SNS 매체를 이용한다.
지자체가 앞장 서 벌초대행 서비스와 온라인 성묘를 권장한다. 벌초한 산소를 영상으로 둘러보며 성묘를 대신 해도 별로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다.
택배로 배송된 제수로 상을 차리고 ‘랜선 차례’(현실공간이 아닌 온라인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를 지내는 것도 거부감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풍속이란 이처럼 어떤 계기가 되면 거부감 없이 바뀌게 마련이다.
계속되는 ‘코로나 팬데믹’ 은 이렇게 명절 풍속을 바꾸어 놓고 있다. 비대면 명절에 대해 일각에서는 한탄과 걱정의 목소리가 역시 높다. 이러다가는 가족이 해체되고 가족 간의 사랑도 식어갈 것이라는 걱정이다.
그러나 실제로 비대면 명절로 가족이 해체된다는 것은 기우인 것 같다.
오히려 가족문제와 관련해선 긍정적 신호가 있다고 한다. 코로나 발생 이전에는 ‘명절증후군’ 이혼이라는 게 있었다, 명절만 되면 주부들은 심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고통이 지나쳐 이혼과 가족 해체로 치닫는 악순환이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다.
‘조상을 기리고, 가족 간 우애를 쌓는다’ 는 아름다운 명분 뒤에서 여성들은 노동으로 내몰리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 간 갈등이 증폭되는 명절의 역기능도 분명히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흔히 세시풍속을 얘기할 때면 역사와 전통을 들먹이지만, 실제로 풍속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저절로 바뀌는 것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명절 풍속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는 분기점이 될 것 같다. 계속되는 비대면 명절이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만 반짝했다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주부들의 제사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더 강하게 요구될 전망이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늘 바뀌고 인류문화도 계속 변해왔다. 변화를 ‘좋다’ 거나 ‘나쁘다’ 고 평가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슴을 열고 변하는 것은 변한대로, 흘러가는 것은 흘러간 대로 받아들이며 새로 시작될 명절을 더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을 것이다.
온 가족이 다 모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명절, 가족들의 여유로운 개인생활을 존중하는 방식, 가족 간 새로운 소통 방식을 만드는 일 ,,,
새로운 명절 풍속은 누군가의 헌신에만 기대지 않는 모두가 즐거운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과 정이 바탕인 우리의 전통 가족제도는 결코 해체되지 않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모임이나 화려한 차례 상이 명절의 본질은 아니다.
50년 100년 전의 밝고 둥근 달이 그대로이듯 우리의 한가위도 가족 간 사랑과 정으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