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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의 말씀 22,1-7>
주님의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 요한에게
1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2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3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4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6 그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주님, 곧 예언자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당신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7 보라, 내가 곧 간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결론 부분을 들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사흘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신의 공생활을 마무리 짓는 말씀으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다림의 자세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말씀은 '스스로 조심'하되, 무엇보다도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러지다’는 것은 ‘무디어지다,’ ‘각성하지 않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물러지게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34)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들은 바로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심걱정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부족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티모 4,16)
둘째 말씀은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6)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라' 함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으며 소망하고 의탁함이요, '깨어 기도하라' 함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여 마음을 경계하고 그분을 향하여 있음이요, '늘 깨어 기도하라' 함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께 향하여 있고, 그분 앞에 서 있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음입니다.
결국 ‘주님 앞’에 서 있다면 깨어 기도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자신 앞’에 서 있다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빠져 마음이 물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것이 깨어있음의 표시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기도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깨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 주님 앞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여전히 근심걱정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처지가 ‘이방인의 땅 전쟁터’ 같아도 자신의 고집을 꺾고 주님께 의탁하면 바로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된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서 있음’, 곧 ‘하느님에 대한 현전 의식’이요, 주님 면전에 나서 있는 대면의식입니다.
그분을 향하여 있는 것이요, 그분의 눈길, 그분의 돌보심 아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있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오늘의 말 · 샘 기도>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34)
주님!
제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더라도 당신을 벗어나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당신을 붙들고 있게 하소서.
안일과 편리로 무뎌지지 않고 근심에서 벗어나 당신 사랑에 열렬하며, 늘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방심하는 날 심판을 받는다>
때로는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는데 그 말씀을 외면하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흔들비쭉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루카 21,3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육체를 따라 삽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며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몸은 예수님 앞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로마 8,5)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습니다.
아파트 베란다 밑으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유난히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등지고 유혹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한 잔술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후회할 것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자신의 꼴을 봅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는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유혹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심판 가운데에서도 재앙의 길을 피하게끔 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분께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루카 4,13).
하물며 연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자주 접근하겠습니까?
그러니 회개의 삶도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1베드 5,8-9)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따르고 그분과 일치되기 위해 깨어 있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과 시간을 모르니만큼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방심하는 순간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있으십시오.”(에페 6,18)
세상에 너무 푹 빠져 있어도 문제요, 세상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고 하늘은 세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영생을 희망하는 만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은 끝날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이 결정합니다.
천국을 희망하면 여기서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로 하느님께 몰입하면 매 순간이 기쁨과 감사의 성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종말인 우리 각자의 죽음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집약하고 또 집약하셔서, 딱 한 문장으로 만들어 건네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복음 21장 36절)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루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깨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을 두고, 그럼 대체 언제 자고, 언제 일하고, 언제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해결하라는 것인가?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밥도 먹지 말고, 사람들도 만나지 말고, 일상의 삶을 포기하며 살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삶을 기도화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상을 기도하듯이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아침 식탁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식탁을 차리는 것이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의무감에서 억지로 마지 못해 식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식사를 하게 될 가족들 한명 한명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하면, 그곳이 곧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 때, 아무 생각 없이, 아니면 잔뜩 취해서 주저리주저리 술주정을 하면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성찰하고 감사하면서, 성모송이라도 한번 바치고 잠을 청하는 것이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갑작스레 난데없이 닥쳐온 큰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절대 낙담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노력하며, 고통과 시련을 통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곧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을 매 순간 볼 줄 안다면, 우리 마음이 갈망할 수 있는 모든 것도 거기서 얻게 된다.
현재는 늘 무한한 보배로 가득 차 있다.
기도로 하느님께 몰입하면 매 순간이 기쁨과 감사의 성사가 된다.
그 순간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을 사랑으로 수용하면 성사가 이루어진다.
현 순간의 관상을 받아들이고 기도 중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대면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갈망을 채워주신다.
마음은 많이 사랑할수록 많이 갈망하고, 많이 갈망할수록 더 많이 받는다.”
(장 피에르 코사드)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늘 깨어 있어라!” - 깨어 있음, 천상의 꿈, 깨어 있기 훈련>
오늘의 연중시기 끝은 내일의 대림시기 시작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제 설치해 놓은 대림초 화관이 벌써 마음을 대림의 기쁨으로 설레게 합니다.
연중시기를 끝맺으며 대림시기를 열어 주는 결정적 말씀 주제는 “늘 깨어 있어라!”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도 영성생활도 깨어 있음을 궁극의 목표로 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대림을 앞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 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어느 말마디 하나 생략할 수 없어 복음을 통째로 전부 인용했습니다.
언젠가의 그날은 죽음일 수도, 사고일 수도, 병일 수도, 재난의 불행일 수도, 종말일 수도 있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그러니 그날의 불행에 대비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깨어 사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참으로 깨어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 하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며 뿌리 없이 표류하며 생각 없는 삶, 의식 없는 삶, 영혼 없는 삶, 피상적인 삶, 죽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살 때 참으로 살아 있는 존엄한 품위의 삶이 됩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종입니다.
깨어 있음은 봉헌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깨어 있음은 생명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힘입니다.
깨어 있음은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깨어 있음의 은혜입니다.
흡사 깨어 있음 예찬같습니다.
깨어 있음은 모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습니까?
답은 하나, 꿈입니다.
희망입니다.
비전입니다.
셋 같지만 실은 하나입니다.
꿈 중의 꿈, 희망 중의 희망, 비전 중의 비전이 하느님 나라, 새 예루살렘의 꿈이자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이렇게 새 예루살렘 천상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깨어 있음의 원천입니다.
오늘 묵시록의 새 예루살렘의 천상 비전은, 꿈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요!
창세기 잃었던 낙원을 되찾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꿈을 앞당겨 살 때 참으로 살아 있는 삶, 깨어 있는 삶입니다.
사도 요한이 체험한 제1독서 묵시록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 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내는 생명나무가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바로 성인들의 미래요,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의 미래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영원한 천상의 꿈, 희망, 비전이 생생할수록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 이런 천상의 꿈을 앞당겨 실현하며 살게 합니다.
바로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우리 공동체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함께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입니다.
“늘 깨어 있어라!”
구체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영적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깨어 있음의 훈련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기도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감정도 기분도 마음도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의 훈련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는 열정과 순수의 깨어있는 삶이요, 새 예루살렘을 앞당겨 사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의 구체적 영적 기도 훈련을 소개합니다.
이 관상기도는 제가 40년 수도생활 하는 동안 늘 해온 기도입니다.
다시 오늘부터 심기일전 하여 새롭게 충실히 수행하려 합니다.
바로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 성구를 기도말로 하여, 즉 만트라로 삼아 수시로 마음과 몸을 고요히 한후 호흡에 맞춰 다음 만트라를 속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1코린 16,22ㄴ, 묵시 22,20ㄷ).
'마라나타', 아람어로 우리 말로 번역하면 '오소서, 주 예수님'입니다.
마-라-나-타, 들숨 “마”, 날숨 “라”, 들숨 “나”, 날숨 “타”, 끊임없이 반복하여 바치는 아주 단순한 기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들숨 “오소서”, 날숨 “주 예수님!” 끊임없이 호흡에 맞춰 일정한 장소, 일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훈련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언제 어디서나 늘 할 수 있는 참 좋은 깨어 있음의 기도 훈련입니다.
이 기도는 기도의 영성대가 지금은 타계했지만 영국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사제 존 메인 신부가 강력히 추천하는 기도입니다.
순전히 하느님 현존 안에 깨어 있기 위한 기도입니다.
영성생활은 한곁같은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기도 훈련입니다.
생생한 새 예루살렘의 천상 꿈이, 희망이, 비전이 깨어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源泉입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천상 꿈을 새로이 하며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온통 희망입니다.
"생명수"
(묵시 22,1)
"생명나무"
(묵시 22,2)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입니다.
이 강으로 매달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자라나 사람에게 열매를 내주고 그 나뭇잎으로는 치료를 합니다.
제1독서의 시작은 이처럼 주님에게서 나오는 활기 넘치는 생명의 기운을 이야기합니다.
이 생명이 사람을 어루만지고 키우고 치유하고 살립니다.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묵시 22,3-4)
주님 어좌 곁에는 그분과 얼굴을 마주하며 그분을 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지복직관의 행복은 모든 신앙인의 바람이지요.
사랑이신 분과 사랑으로 머무르는 상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모습입니다.
"주 하느님이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
(묵시 22,5)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주님의 현존으로 인공적인 빛은 물론 자연의 빛조차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빛이시고 모든 이가 골고루 그 빛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밝고 따사롭고 온화한 빛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본성의 가장 충만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에게 펼쳐 보이신 종말과 재난의 예고를 간곡한 당부로 마무리하십니다.
"방탕과 만취와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34)
이기심과 아집과 증오로 마음이 굳어지는 것 못지않게, 자기 분수와 절제와 감사를 잊은 허약한 마음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때를 가늠할 수 없게 느닷없이 들이닥칠 사람의 아들의 날을 기다리며 겪어야 할 박해와 재난에 대비해, 충실한 사랑과 굳건한 신앙, 용기와 인내를 견지하라는 촉구시지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이처럼 기도의 권고로 끝은 맺습니다.
충실한 사랑과 굳건한 신앙, 용기와 인내는 갑자기 뚝 떨어지는 마술이나 요행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랑하고 일치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형성되는 덕일 겁입니다.
기도하는 이는 기도함으로써 '힘'을 얻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지상에 사는 우리 중에는 사람의 아들의 날 이후 펼쳐질 영원한 삶을 체험한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주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기대어 더듬거리며 나아갈 수밖에요.
세속의 재물과 권력, 명예를 쟁취하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론이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 창조 때부터 우리를 위해 마련된 복된 미래를 얻는 길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사랑이 나오고 나눔이 나옵니다.
존중과 배려와 희생이 나오지요.
위로와 격려, 치유도 기도에서 흘러나옵니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흘러나와 도성을 흐르는 생명수의 강처럼 기도는 우리 자신과 타인, 세상을 살리는, 고요하고 온화하지만 매우 강력한 힘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이는 이미 주님과 하나입니다.
내면에 그분의 거처가 단단히 자리하기에, 그분의 날이 언제 어떻게 닥치든 괜찮습니다.
진즉에 그 자신의 일이 곧 하느님의 일이 되고, 하느님의 일이 그 자신의 일이 되었으니, 주님을 맞이할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기다리면 되겠지요.
그날은 주님과 누리는 사랑이 일상이 된 이에게는 그 일상의 연장이고 절정이 될 것이니, 깨어 기도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맞이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주님께서 오십니다!
지난 한 해를 정성껏 마무리하시면서, 다가오는 기다림의 시기를 잘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정말 수고하셨고, 진짜 애 많이 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라나 타! 오소서, 주 예수님!
(화답송)
- 작은형제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시기의 마지막 날입니다.
인간사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지요.
그러나 끝은 변화의 문이 닫혀버린 종착점이 아니라 또다른 출발점이요 전환점일 뿐입니다.
하느님 안에 숨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순간이 하느님의 선과 의미를 찾아가는 기도의 자리요 은총의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21,35)라고 하시면서, 세상 끝날에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21,36) ‘모든 사람’이 준비해야 함을 상기시켜주십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라.”(21,34)고 권고하십니다.
‘마음이 물러진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고 육에 길들여진 상태를 말하고, 하느님과의 관계의 끈이 약해져 세상의 가치나 흐름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잊고 현실에 안주하는 태도를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영과 육의 작용이 일어나는 곳이요 영이신 주님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마음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21,34), 탐욕과 쾌락의 추구, 게으름 등에 의해 물러집니다.
따라서 마음이 물러지지 않도록 하느님의 영을 채우려면 "스스로 조심해야"(21,34) 합니다.
매순간 무엇을 하든 하느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갖고, 마음을 물러지게 하려는 은밀한 움직임과 자극 그리고 환경에 끌려가지 않도록 주의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 안에 중심을 두는 영적 절제를 살도록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 절제란 현재를 즐겨 나쁜 행실에 빠지는 방탕이나 만취를 피하고, 과거를 하느님께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 섭리에 맡기며 근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총체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영적 절제란 주님의 말씀과 자비의 손길을 기억하는 것을 말하지요.
따라서 “이 세상 근심과 걱정 때문에 주님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지도자 편지 3)
다음으로 주님 앞에 서기 위한 준비는 “늘 깨어 기도하는 것”(21,36)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내 존재를 사랑이요 선이시며 삶의 궁극적 의미이신 주님 안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사랑이신 주님을 부르는 것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호흡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사랑의 호흡이요 사랑의 들음이며 사랑의 깨어있음입니다.
기도란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과 일치하며 사랑을 갈망하면서 멈추어 한없이 자기 시간과 자기 전부를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영원한 기다림이요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는 결정적인 힘인 셈입니다.
우리 모두 덫처럼 갑자기 들이닥칠(21,34)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기 위하여, 영적 절제를 통해 스스로 조심하여 마음이 물러지지 않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깨어 기도함으로써 사랑의 힘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의 불씨를 살려나가는 은총의 시간이 되길 희망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으며,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 4주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4주전입니다.
2022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 한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주님 앞에, 이웃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겸손하게 뉘우치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10월에 대한민국에서는 이태원 참사가 있었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예상했지만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할로윈 축제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예상했고, 경찰들이 질서유지를 했다고 합니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못했기에 이번에는 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시와 구청 그리고 경찰은 그에 대한 안전대책을 세우지 못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도 별일 없이 끝났으니 이번에도 별일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백조가 호수 위를 우아하게 떠 있는 것은 물 밑에서 힘차게 노를 젓는 오리 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중이 모이는 축제가 안전하게 마무리 될 수 있는 것 또한 질서 유지를 위해서 활동하는 안전요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후의 약방문일 수 있지만 다시는 이런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책임있는 사람들은 안전대책을 숙지하고 실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봉화의 아연 광산의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광부 2사람이 매몰되었지만 9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캄캄한 갱도에서 9일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20년 경력의 노련한 광부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기가 많은 갱도에서 위험한 것은 저체온증이라고 합니다.
광부는 입사한지 5일 된 신임광부와 비닐을 모아서 작은 천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천막 안에서 지내면서 저체온증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변에 있는 나무를 모아서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
습기를 먹은 나무른 산소 용접기를 사용해서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커피포트의 플라스틱 부분을 떼어내고 물을 끓였다고 합니다.
일하면서 먹는 커피믹스는 허기를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아연광산은 통풍이 잘 되었고 호흡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주변의 물건들을 적극 활용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캄캄한 갱도에서 9일을 버틸 수 있었고 마침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적성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본당에 25인승 버스가 있었습니다.
차량을 운전하기 위해서는 대형버스 면허가 있어야 했습니다.
본당 교우 두 분과 함께 운전학원에 등록을 했습니다.
열심히 연습을 했지만 교우분들은 합격을 했고, 저는 시간 초과로 불합격했습니다.
다시 한 번 도전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아버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노력할 만큼 했으니 이제 운전면허 시험은 그만두고, 합격하신 분들이 버스 운행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버님은 제가 불합격 한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차량 봉사자들을 위해서 주일 아침이면 커피를 준비해드렸고, 잘 다녀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9인승 승합차를 운전하였고, 동네의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곤 했습니다.
신발은 발의 크기에 맞추어야 하듯이, 제게는 9인승이 적합했던 것 같습니다.
스키를 배울 때도 그랬습니다.
강사는 스키를 잘 타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넘어지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억지로 스키를 타려고 하지 말고 넘어지는 것이 안전을 위해서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넘어진 다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우면 스키를 재미있고 안전하게 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강사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잘 넘어지고 곧 일어날 수 있으면 스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 성공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 부자청년, 대사제, 빌라도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을 팔았던 여인도, 눈이 멀었던 소경도, 나병환자도, 하혈하던 여인도, 중풍병자도, 듣지 못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죄인으로 불렸지만 예수님을 만났고, 그들은 살아서 참된 행복을 느꼈고, 영원한 삶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따른다면 그곳이 바로 ‘꽃자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다면 그곳이 바로 ‘가시방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 몇 명을 만났습니다.
초등학생 때면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입니다.
너무나 긴 시간이 지난 것만 같은데, 중년의 나이에 다시 만났는데도 엊그제 만난 것처럼 친숙하고 반가웠습니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자리에 있는 친구들, 그 자리에서 나름의 위엄을 보이면서 지냈을 텐데 이곳에서는 모두 초등학생 애가 되어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저녁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한 뒤,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놀자고 노래방에 갔습니다.
바쁘게 일만 하면서 지냈던 친구들, 그래서인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몰라 노래방 책자를 한참이나 뒤적이다가 겨우 번호를 찍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쎄 모두 느린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때도 분명히 빠른 노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느린 노래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어느 책에서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글쎄 나이가 들면 박자 맞추기가 힘들어서 느린 노래만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은 다시 초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데, 역시 나이는 모두 먹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합니다.
받아들여야 “그러려니” 할 텐데, 받아들이지 않으니 세상의 모든 불공평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니’라는 마음이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요?
마지막 주님의 날에 대해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날은 갑자기 찾아오며,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치게 된다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이날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시 ‘그날은 절대로 와서는 안 됩니다’라면서 거부하면 될까요?
아니면 그냥 포기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주님의 날에 주님 앞에 설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지막 주님의 날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날은 무조건 거부하고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변화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고, 또 불평불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도 안 됩니다.
그보다 마지막 주님의 날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일 우리는 교회력으로 새해라고 말하는 대림 제1주일을 보냅니다.
이 땅에 강생하여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잘 준비하는 방법은 깨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1독서의 묵시록 말씀처럼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묵시 22,5 참조) 다른 어떤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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