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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의 충견 한신
《사기》에 따르면 한신은 회음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왕족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양친을 잃고 매우 가난한 생활을 했다. 남창정(南昌亭) 정장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는가 하면, 낚시질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며, 빨래터의 아낙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풍채도 좋고 무예에도 능했던 그가 하급 관리의 자리라도 얻으려 하지 않고 무위도식으로 세월을 보내자 사람들은 그를 멸시했다.
어느 날 마을 불량배가 큰 칼을 차고 지나가는 한신에게 시비를 걸었다. 불량배는 키도 크고 몸집도 좋은 한신이 큰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실은 그가 겁쟁이기 때문이며, 만약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자신을 칼로 찌르고 죽음이 두렵다면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며 그를 놀렸다. 이에 한신은 화가 났지만 불량배의 얼굴을 한 번 본 후 몸을 숙여 그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지나갔다. 이 일로 한신은 마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의 봉기를 시작으로 반진 세력들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항량은 조카 항우와 함께 오중에서, 유방은 패현에서 진나라 타도를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비록 마을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큰 뜻을 잃지 않았던 한신은 항량의 군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항량은 한신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향량이 전사하고 나서 항량의 군대는 조카인 항우가 이어받았다. 이에 한신은 항우의 휘하로 들어갔지만 역시나 발탁되지 못한 채 낭중이 되어 보초를 서는 등 하찮은 일을 맡았다. 한신은 항우에게 수차례 전략을 제시했지만 귀족 출신이던 항우는 평민 출신인 한신을 무시했으며, 한신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항우에게 크게 실망했다. (이상은 백과사전 인용)
항우가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를 세우자, 한신은 유방 쪽으로 갔다. 승상 소하는 한신의 능력을 즉시 알아보고 강력하게 대장군으로 추천했다. 35세 乙未년의 일이다. 이로부터 한신은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여 조나라, 위나라, 제나라를 물리치고 마지막에 항우까지 물리쳐서 항우가 오강포에서 자결하게 했다.
유방은 한나라를 세우고 한고조가 되었다. 기원전 202년 己亥년 한신의 나이 38세 때의 일이다. 2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한고조 유방은 공로로 한신에게 초나라 왕을 주었으나 9개월만 (40세 庚子)에 부하의 반역을 빌미로 체포구금하고, 증거가 없자 풀어주었으나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켜버렸다.
그후 두 사람은 한동안 서먹하게 지냈으나 유방은 한신을 죽이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정작 한신을 두려워했던 사람은 고조의 태후 여씨이다. 여씨는 소하를 시켜서 한신을 찾아가 고조가 반란을 제압했으니 가서 축하인사라도 하라고 하도록했다. 한신은 자기를 추천해주었던 소하의 말에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유방의 궁으로 들어가자 숨어있던 자객들의 칼에 죽었던 것이다.
유방보다는 여태후가 장래 한신의 능력을 더 두려워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씨는 원래 정치적 야망이 있기도 했지만, 유방이 제나라를 칠 때 유방은 제나라와의 전쟁보다는 화친을 통해 항복시키려고 했었다. 그런데 한신이 이를 무시하고 제나라를 쳐들어가 제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가왕이라고 칭했다. 유방은 한신이 허락도 없이 제나라 왕이 된 것에 대해 못마땅했지만 항우와 대치중이라 할 수 없이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인정했었던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었던 유방은 한나라 개국후 한신이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마침 누군가 반란음모 신고가 들어왔던 것이다. 유방은 이를 핑개로 회음후로 강등시키고 실권을 빼았는 정도로 그치려고 했으나 여태후는 이것으로도 불안해서 죽여버린 것이다. 결국 한신은 유방, 여태후, 소하 3인의 꾐에 빠져 죽었다.
사가들은 이를 토사구팽이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토사구팽은 과연 사악한 군주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인인가? 아니면 한신처럼 기본 성품이 문제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인가? 이것은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일단 명장 한신은 45세 乙巳년 운이 좋지 못했다.
金 편관이 왕한 사주는 야망이 크나 편관이 크면 그만큼 식상의 세력도 왕해야 하는데 편관의 용신 丁식신은 약했고 癸巳대운에 癸 인수까지 투출해서 丁 식상을 제거하므로 한신의 운은 여기서 끝나는데 그 시점이 癸巳대운의 巳년인 것이다.
한신의 사주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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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 한신명장 BC 240년 양 8월18일 유시 8대운
98 88 78 68 58 48 38 28 18 08 時 日 月 年
丁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乙 乙 丁 辛
亥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卯 酉 酉
(32세壬辰)BC 209년 항량 찾아가나 말단직책 맡음
(35세乙未)BC 206년 항우 진나라 멸망시키고 서초패왕됨
유방은 소하(승상)의 등용요청으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 8월 관중지역을 차지함.
(36세丙申)BC 205년 반항우 전쟁 시작
(37세丁酉)BC 204년 조나라 멸망시킴
(38세戊戌)BC 203년 위나라,제나라 멸망시킴
(39세己亥)BC 202년 항우 한신에 쫒겨 오강포에서 자결, 한나라 개국
(40세庚子)BC 201년 초나라 왕으로 부임한지 9개월만에 반란죄로 체포, 증거불충분으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 그 후 한신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45세乙巳)BC 196년 소하의 꾐에 빠져 한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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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 편관이 득령, 편관이 중중하다.
월지 丁 식신이 辛 편관을 제하는 용신이지만, 卯 녹신이 酉의 충을 받아 지지의 도움을 잃었다.
丁이 작동하므로 변재와 기예, 영특한 머리가 작동하지만 丁 식상이 旺하지 못한 것이 이 명조의 단점이다.
卯酉沖으로 卯가 손상된다. 일지는 처, 직장, 사업장을 뜻하는데 언젠가 무너질 시점이 있다.
지지가 卯酉로 가득하므로 변덕, 게으름, 일확천금, 허황된 것을 노리는 사람이다.
甲午대운은 丁 식상이 힘을 얻었다.
한신은 이 10년이 가장 좋은 길대운이다.
그러나 32세 壬辰년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壬 인수가 丁 식신을 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34세 甲午년에도 전쟁에 참여는 했으나 낮은 직책이었고, 사망하지는 않았다.
길대운 길년이라고 다 행운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군계일학처럼 눈에 띄는 것은 분명하다.
35세 乙未년에야 비로소 대장군이 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午未합으로 未 재성이 작동한다.
未 재성은 子亥 인수를 제거하여 丁 식상을 도울 수 있다.
36세 丙申년, 37세 丁酉년 양년은 丙丁 식상이 투출작동하여 길운이다.
전투에 나아가 유감없이 승전에 승전을 거듭한다.
이 운이 일생 가장 좋은 때이다.
癸巳대운, 癸 인수가 丁 식신 용신을 극하니 흉대운이다.
巳酉 금국 편관까지 투출하니 암울하다. 이 운 중에 우울증이나 사망한다.
38세 戊戌년에 戌이 酉 편관을 害로 제거하고 戊재성이 癸 인수를 제하는 운이다. 길하다.
39세 己亥년은 己식상이 작동할 때이다. 목국비겁은 旺金에 극을 받는다. 길운이다.
한신은 최후의 일전까지 밀고 들어가 항우를 격멸시켰다.
그러나 이후부터 하늘은 한신에게 더이상 길운을 허락하지 않았다.
40세 庚子년, 초나라 왕으로 부임한지 9개월만에 반역을 꾀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金水 재관 흉운이다.
41세 辛丑년 금국 편관이 작동하므로 흉년이다. 강등
42세 壬寅년 壬 인수 흉운이다.
43세 癸卯년 癸 인수 흉년이다.
44세 甲辰년 甲 비겁이 작동해서 길년이다.
이때 빨리 사람을 만나서 진로에 대한 조언을 들어야 했다.
이때는 누구든지 돕는다.
학이 깊은 명리학자의 면담을 신청해야 한다.
유방의 복권을 막연히 기다리지 말고 권력을 버리고 초야로 멀리 떠나야 했다.
그러나 한신은 그의 게으름과 일확천금을 꿈꾸는 기질,
웅대한 한나라를 일으켜 세운 공적에 연연하여 초야에 떠나지 못했다.
인수가 없어서 철학이 없었던 것이다.
45세 乙巳년 겉으로 보기에는 길년이다.
만약 한신이 사주를 배웠다면 木火 비겁식상이 작동하고 곧 남방 세운으로 3년을 지나가므로
복권의 시점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원래 죽을 운에는 활로가 보이지 않고 사로만 보이는 법이다.
乙巳년에는 巳酉 금국이 작동하는 시점이 있다. 바로 가을겨울이다.
가을 겨울에는 어떻게 되는가?
巳火 식상은 시들해지고 金局 편관은 왕성하게 드러난다.
乙 비겁은 금국에 무너져서 乙 녹신 지인은 배반자로 둔갑한다.
그러하니 살아날 계책이 없다!
하늘은 내려준 운명은 때가 되면 야속하게 걷어가 버린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다.
어찌 운명이 없다하겠는가?
청운
===참고========
토사구팽
기원전 5세기 무렵 춘추시대의 패자는 초나라였다. 패자의 속국이었던 오왕 합려는 왕위에 오른 직후 오자서, 손무와 같은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초나라를 공격 했다. 오는 5번의 전투 끝에 초나라 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승자가 된다. 그리고 제나라와 사돈 관계를 맺음으로서 오나라는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패자가 된 오왕 합려는 기원전 496년 오나라의 동쪽에서 점점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월나라에게 전쟁을 걸었다. 이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과 관련해서 여러 개의 사자성어가 나왔는데 와신상담(臥薪嘗膽), 구천지한(九踐之恨), 서시미간(西施眉間), 토사구팽(兎死狗烹), 오월동주(吳越同舟) 같은 것들이다. 사자성어가 생긴 데에는 나름 특별한 사연이 있고 사가들도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기록할 정도로 오월 전쟁은 사람들의 관심과 교훈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오월전쟁은 총 3번의 전투를 치렀다. 양국은 평소 사이가 좋지 못했다. 오왕 합려는 초나라와 전쟁에서 이기고 기고만장하여 월나라를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월나라의 군사 범려가 사형수들을 이용한 지략으로 오군을 물리치므로 합려는 부상을 입고 도망쳤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고 오의 태자 부차가 왕을 이었다.
한편 오나라를 위해서 일했던 손무는 초나라를 격파한 후 일선에서 물러나 쉬고 있었다. 오나라의 오자서는 오월 1차 전투에서 패배한 후 손무를 찾아가서 월나라를 이길 방법을 묻고 드디어 오월 2차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2차 전투에서 월나라 구천은 결국 패배했고 회계산으로 쫓겨가 숨어있다가 항복했다. 패전의 왕 구천은 사망한 합려 왕의 석실을 지키고 오왕 부차의 말을 끌어주는 등 종이 되어 환심을 사고 3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고국에 돌아온 구천은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서 왕신상담했다. 장작 위에서 잠을 자고 곰의 쓸개를 먹으면서 ‘구천아! 지난 날 부차에게 항복하던 그 때의 수치를 잊었는가! 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7년 동안 세금을 감면해주었고, 스스로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직접 논에 나가 벼를 베고 백성의 문상을 다니는 한편, 매달 오나라에 선물을 보내었다. 이때 미인들도 보내게 되었는데 천하 절세미인 서시(西施)와 정단(鄭丹)을 보낸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초나라와 월나라를 제압한 오왕 부차는 점점 자만해져서 제나라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고, 제나라와 전쟁을 반대하던 충신 오자서도 죽였다. 그리고 모든 나라의 제후를 불러 황지로 가서 맹주가 되는 대회를 열려는 순간, 월나라 구천은 범여와 문종을 좌우 장군으로 삼아 오에 쳐들어갔다. 오월 3차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오나라의 도성은 순식간에 월의 군사에게 함락되었고, 멀리서 돌아오던 오왕 부차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격국 스스로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목을 찔러 자결했다. 20여년을 벼르던 구천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이 오월 3차 전쟁의 승리로 월나라 구천은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구천은 오나라로 들어가 문대(文臺)에서 잔치를 벌리고 신하들과 술을 마셨다. 그런데 신하들이 범여와 문종의 공로를 칭찬하는 말을 할 때마다 구천은 안색이 달라지며 몹시 불쾌해 하는 것을 보았다. 범여는 구천이 고생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전쟁의 승리를 함께 나눌 인물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돌연 사직했다.
사직하면서 문종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그 유명한 토사구팽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토사구팽은 원래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의 약어이다. 교활한 토기를 잡은 뒤에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말이다. 그러하니 빨리 사직하라는 뜻이었다. 문종은 이 충언을 듣지 아니하고 구천을 믿고 있다가 결국 촉루검에 자결하라는 영을 받아 죽어야 했다.
토사구팽은 오월 전쟁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제 여러 번 일어났다. 최후의 승자는 공신들을 믿지 못하고 숙청시키거나 죽였던 것이다. 진나라를 제패하고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하여 한나라를 세우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명장 한신도, 한고조 유방이 반역을 꾀했다는 명분을 만들어 죽였던 것이다.
한신은 감옥에 갖히자, 문종이 범려에게 받았던 토사구팽의 문귀를 떠올리면서 오늘날 자신이 그 희생양이 되었다고 울분을 토했었다고 한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많은 공신을 죽였고, 조선을 건국한 후 조선의 법도를 정비하고 세웠던 정도전도 이방원의 칼에 죽어야했다. 모두 토사구팽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글 : 청운
첫댓글 재미있는 글입니다 사주공부와 더불어서 이런 양념을 곁들이면 역학동에 많은 손님이 찾아들것입니다
98 88 78 68 58 48 38 28 18 08 --- 時 日 月 年
丁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 乙 乙 丁 辛 : 명장 한신 명조
亥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 酉 卯 酉 酉
<金 편관이 왕한 사주는 야망이 크나 편관이 크면 그만큼 식상의 세력도 왕해야 하는데 편관의 용신 丁식신은 약했고>
[궁금증] - 용신 丁식신은 약했다면 어찌 대장군이 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어찌 제후가(초나라 왕) 될 수 있었을까요?
[궁금증] - 제후가 될 수 있는 명조라면 정화 용신이 강력하다는 것인데 어찌하여 정화가 강력할까요?
[궁금증] - 39세 癸巳대운 己亥년 항우 한신에 쫒겨 오강포에서 자결, 한나라 개국했다고 하는데, 癸巳대운은 癸水가 최악기신
네, 조흔님 원국은 약하지만 갑오에는 식상이 왕해졌잖아요. 식상이 왕해지면 길대운이 됩니다.
98 88 78 68 58 48 38 28 18 08 --- 時 日 月 年
丁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 乙 乙 丁 辛 : 명장 한신 명조
亥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 酉 卯 酉 酉
<39세 癸巳대운 己亥년 항우 한신에 쫒겨 오강포에서 자결, 한나라 개국했다.>
[궁금증] - 癸巳대운은 癸水가 최악기신인데 단지 己亥년의 己土가 癸대운을 극제해서 발전했을까요? 다른 뭔가는 없을까요?
己亥년은 己 재성은 길신, 해묘목국 비겁은 흉신이지만 이 비겁 흉이 과연 작동할까에 대한 생각을 해보시면 될 듯합니다. 저는 비겁이 작동하지 못한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청운선생님. 축미충을 어찌 보시나요?
네, 축중에 신금이 미중에 을목을 극합니다. 연해자평, 삼명통회에 나오는 개고론을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