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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3,11-14ㄱ>
형제 여러분,
11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12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14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4,37-4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있어라.”>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의 때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는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깨어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37-41절)는 노아의 홍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는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대체 끔찍하고 잔인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를 말씀하시면서, 그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심판을 받은 그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마구 먹고 마시는 사람들, 장가들고 시집가는 사람들, 들에 있는 사람들, 맷돌질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가 사람들의 타락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안일한 삶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그들의 무관심과 타성에 젖은 평범한 일상의 굴레에 젖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죄를 피한다 할지라도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 심판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선과 정의로 진리 편에 서서 이를 행하고 투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에로 나아가야 하고, 항상 빛 가운데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것이 ‘깨어있음’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집주인과 언제 올지 모르는 도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마태 24,43)
이는 어느 한 순간도 주의와 경계를 늦추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으며, 하느님을 기다려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오실 것이니,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전례에서 ‘깨어있음’의 의미는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맞이 할 ‘준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둘째는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셋째는 ‘이미’ 와 ‘아직’ 사이에서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4,42)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첫 번째 분명한 사실은 주인님이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분명 오십니다.
만약 오시지 않는다면 굳이 고대하고 기다릴 필요도, 깨어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그분이 오신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러기에 진정 믿는 자만이 진정 깨어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언제 올지를 모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요, 오실 님을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 24,44)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는 ‘이미’ 깨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깨어나라’고 하지 않으시고, ‘깨어 있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깨어난 까닭입니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잠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헛군데 눈 돌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은 얼차려 입니다.
곧 정신차려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계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깨어있음’의 둘째 의미인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깨어있음은 한편으로는 빛을 향한 깨어있음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에 대한 경계로 깨어있음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로마 13,12-13)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서야 비로소 깨어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오신 주님과 다시 오실 주님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 셋째의 의미인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깨어, 빚 속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대림초를 밝혔으니, 깨어 그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가자.”
(이사 2,5)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깨어 있어라.”
(마태 24,42)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고대하고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고 준비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잠들지 않게 하시고, 졸지도 않게 하소서
헛군데 눈 돌리지도 말게 하시고, 언제나 임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속을 걷게 하시고, 동행하시는 당신께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먼저 나를 기다리시는 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성탄축일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주님을 기다립니다.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해 봅니다.
첫째로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우리의 구원자로 탄생하셨고 실제로 인류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계시니 그날을 경축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세주를 목마르게, 4천년을 기다렸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주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대림초를 4개로 하는 것은 바로 4천년을 4주간으로 상징화하기 때문입니다.
4개의 초는 예수님께서 동서남북,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의미합니다.
초의 색깔은 어두운 자색으로 시작하여 점점 밝은색으로 불이 밝아짐으로써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기쁨을 표현하고 동시에 우리의 마음도 맑고 또 밝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죄의 허물을 벗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정작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문이 닫혀있었고 자기들만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오시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심판자 주님을 기다립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4,30) 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미사 안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날이 준비된 사람에게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날입니다.
속량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루카 21,28).
구세주 빨리오사!
어두움을 없이하실 분으로 빨리 오시면 좋으련만, 지금 당장 심판자로서 오셔도 당당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코린 1,8)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1코린 1,9)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 ‘성직자’랍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정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쓰레기가 됩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말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주 예수님 안에 머물러, 오시는 주님을 당당히 영접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비자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성당을 찾게 된 동기가 이웃에 사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부부의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성당에 가면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고, 어린 자녀에게 일찍 신앙에 눈뜨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느님 말씀 따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전교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때문에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히게 하여라.”
(마태 5,16)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영,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주신 탈랜트를 잘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자기 그릇대로 빛을 발하는 것이 주님을 잘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빛을 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 의미는 우리의 일상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희망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뜨거운 감동을 주셨던 그 기쁨을 기다립니다.
묵시록 3장20절에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하셨습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사실 성당에서는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고 영혼의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저런 핑계로 그분을 모시지 못할 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미사 안에서 성경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내가 밖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입니다.
“님은 내안에 계셨지만 나는 님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리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당신을 조배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당신 앞에서 무릎 꿇어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기를 희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지 않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에 앞서 언제나 기다려 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들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끝날, 종말이 언제 오든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기다리시는 그분이 계신데… 그날을 대비하여 지금 깨어 준비하면 됩니다.
그날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창세 49,18)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어떤 삶이 깨어 준비하는 삶일까?>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그리고 복음 내용은 깨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깨어 준비하던 이들은 구원받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를 알지 못한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교회라는 방주에 타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마태 24,38-39)
깨어 준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은 그러니까 ‘바쁨’입니다.
우선 너무 바빠서 죽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 준비하고 있으며 노아의 홍수 때처럼 망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정신이 없어 깨어 있지 못한 이유는 잘못된 ‘희망’ 때문입니다.
희망을 이 세상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죽기 일보 직전에도 용서를 청하러 온 동생에게 “내 돈 2억 갚아라, 임마!”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이런 것이 놀라운 이유는 바로 ‘죽음’ 앞이라는 조건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런 집착을 버리지 못함이 놀라운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주님께서 오실 때를 아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 지는 몰라도 매일이 주님께서 오실 수 있음을 아는 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따라서 ‘오늘 죽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다행히 할머니의 돌아가심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 어린 시절을 지냈고,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오늘도 죽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이 죽음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고, 죽음을 무서워하면 잠도 무서워하게 됩니다.
잠잘 때 기분 좋게 잘 수 있다면 깨어날 때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처럼 기분 좋은 잠을 자려면 하루가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하루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내일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천상의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힘들지 않습니다.
저는 대학교 때 이휘재 씨를 질투했습니다.
나의 희망이 이 세상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지금 희망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성공한 삶이다!’라고 생각하니 버티는 삶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희망’인데,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게 만드는 것도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을 희망하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것을 희망하면 이 세상 것들이 쓰레기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갖지 못해도 버틸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나뭇잎을 찾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더니 나뭇잎이 없는 것에 대해 더는 절망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천상의 것을 희망하게 되었고 그때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희망을 바꾸지 않으면 불러도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제의 길로 저를 아주 오래전부터 부르고 계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가 모든 사람을 배로 초대해도 그들의 희망은 이 지상 것에 있었기 때문에 노아의 부르심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차피 죽으면 사라져버릴 이 세상, 가라앉는 배에 집착하지 맙시다.
우리 희망은 하느님 나라, 천국에 있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희망을 품으면 이제 가지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주님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 주셨으면 나도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주셨기에 하느님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내가 하느님이 됩니다.
이렇게 되니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실패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많은 실패가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지상 것에 대한 희망을 접고 천상의 것을 희망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희망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이것은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천상의 것을 희망하면 내가 천상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집에는 하느님의 자녀만 삽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결국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자존감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병에 걸렸음에도 “오, 아름다워라!”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으면 내가 사랑이 됩니다.
이는 마치 태양이 태양이기 때문에 뜨거운데 우리가 그 태양 덕분으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억지로 사랑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서 사랑을 느낍니다.
나는 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준비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 때문에 위로 오르는 사랑의 몸통과 같습니다.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가 없으면 사랑은 커지지 않습니다.
내가 천상을 더 희망하고 하느님임을 더 믿어야 사랑이 더 커집니다.
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없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마치 오징어잡이 배처럼 빛을 내고 있습니다.
내가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그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더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길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은 이 향주 삼덕에 기인합니다.
향주 삼덕을 닦는 오징어와 같은 존재만이 결국 방주에 탈 수 있고 천상 시민이 됩니다.
그런데 그 희망과 믿음과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나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분 품에서 자라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16년 전 방송 출연하였던 아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가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혼자 어린 자신을 키우던 그 모습을 아들이 더 늦기 전에 눈에 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들은 다행히 어렸을 때 수술을 받아 한쪽 눈만 0.2의 시력을 가졌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해 준 희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줍니다.
아들은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이제 아버지의 눈이 되어주겠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 아들에게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들은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살 희망도 가질 수 없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을 수도 없으며, 그래서 아버지나 친구들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믿어주었고 희망했으며 사랑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희생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쏟아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머물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쏟아지는 교회에 머물 줄 아는 것이 깨어 준비하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을 뵙는 기쁨과 설렘, 그리움과 기대로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
내년 봄 화사하게 피어날 수선화며 튤립 구근을 열심히 심고 있습니다.
피정 오신 교우들이 군락을 이룬 청초한 꽃들을 보고 탄성을 올리고 사진을 찍고 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꽃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심는 입장이 되다 보니, 그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화사한 꽃 무리 그 배경에는 누군가의 노고가 있다는 것, 그래서 꽃 한 송이 앞에서도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땅을 갈아엎은 후 고랑을 내고, 고랑 사이에 구근을 일일이 꽂고 나서 흙을 덮어줍니다.
혹한을 잘 넘기라고 볏짚도 덮어줍니다.
그리고는 꽃대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지요.
기다림이라는 단어, 참 가슴 설레게 합니다.
오랜 세월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살다 보니 너그러움, 여유, 유유자적, 은근함, 결국 기다림의 영성, 기다림의 미학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기다림이 부족합니다.
어떤 지향을 두고 열렬히 간구하고 또 실제적인 삶 안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면 이제 여유를 갖고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빠름’을 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름’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입니다.
“인간에게 큰 죄가 두 가지 있는데 다른 죄들도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조급함과 게으름이 그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때 정말 한 3분만 참았더라면!’ 하는 교도소 수감자들 제가 한둘 만난 게 아닙니다.
이미 깨져버린 사랑,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인연들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결국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함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대단하십니다.
인내의 달인이셨습니다.
성격 급한 저 같았으면 30년 동안 나자렛에서의 숨은 세월을 못 참고 폭발했을 것입니다.
대체 이 아까운 시간 다 흘러가고 언제 공생활 시작할거냐고, 하느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아버지께서 신호를 보내실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사사건건 트집 잡고 늘어지는 적대자들, 저 같았으면 한번 싹쓸이를 하던지 판을 뒤집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또 다시 시간이 흐르고 흘러 대림 시기 첫날을 맞이했습니다.
영광스런 주님 부활에 앞서 그를 준비하는 사순시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대축제 성탄에 앞서, 그를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있습니다.
그냥 기다림이 아닙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주님을 뵙는 기쁨과 설렘, 그리움과 기대로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내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너그러운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결국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고대하는 영적인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우리에게 지침으로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 24장 42절)
많은 경우 우리는 외칩니다.
왜 빨리 하느님께서 내 이 큰 고통, 깊은 슬픔에 개입하지 않으시는지?
이 비정하고 사악한 세상을 왜 빨리 깔끔히 정리하지 않으시는지?
왜 저 악인들이 떵떵거리며 살도록 마냥 놔두시는지...
하느님은 우리처럼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몇 사람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인류 전체를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동작이 느리십니다.
대신 크고 여유로운 걸음을 걸으십니다.
우리 죄인들이 충분히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시간을 주기 위해 아주 천천히 시험지를 걷으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재림, 대림>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마태 24,37-39)
이 말씀은, “그렇게 될 것이다.” 라는 예고가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노아 때처럼 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재림이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준비 없이 갑자기 당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 회개하여라.”라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라는 말씀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태평하게 사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재림’은 그런 사람들에게만 갑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1테살 5,2-4)
평소에 늘 회개하면서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상태로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에게는 재림은 갑작스럽게 닥치는 재앙이 아닙니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는 ‘기쁜 일’입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마태 24,40-41)
이 말씀은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서 긴박하고 갑작스럽게 재림이 닥친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는 본인이 직접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들에 있는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형제입니다.
‘맷돌질을 하고 있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또는 자매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버림받을 것이다.(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가족이 함께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이 갈라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어쩌면 그날이 되면 ‘이산가족’이 많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회개는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구원의 은총이 내리더라도, 회개는 본인이 직접 해야 합니다.
구원에는 무임승차가 없습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은 뜻으로는 “지금 곧 올 수도 있으니, 지금 깨어 있어라.”입니다.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금방 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일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1테살 5,6.8)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바오로 사도의 설명을, “믿음, 사랑, 희망을 바탕으로 한기쁨, 기도, 감사의 삶”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사는 것’,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이라는 말씀의 뜻은 “도둑이 언제 올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입니다.
종말과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날은 틀림없이 옵니다.
“준비하고 있어라.” 라는 말씀에서 ‘준비’는 심판받을 준비이면서 동시에 구원받을 준비입니다.
그 준비는 회개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생각하지도 않다가 즉 아무런 준비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재림을 맞이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 잘 준비하여라.”입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임하시기를 기다린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또 예수님의 재림도 기다리면서 ‘대림 시기’를 지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기다리는가?”
우리는 ‘대림’이라는 용어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고, 약속하신 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림 시기’는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잘 맞이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이면서, 동시에 ‘나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에게로 ‘내가 잘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시기’로 지내는 것이 옳습니다.
대림 시기뿐만 아니라 언제나 항상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재중’이었던 적이 없는 분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대림의 기쁨, 대림의 희망, 대림의 평화 - 늘 깨어 있어라!>
참 기쁨은 대림의 기쁨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입니다.
참 희망은 대림의 희망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입니다.
참 평화는 대림의 평화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대리는 평화입니다.
이런 대림의 기쁨이, 이런 대림의 희망이, 대림의 평화가 맑은 정신으로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며 살게 합니다.
대림시기 새벽 성무일도 다음 초대송 후렴으로 기쁘게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오실 임금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이어지는 찬미가도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와 함께 우리 마음을 기쁨과 희망의 빛으로 환히 밝혔습니다.
“맑고도 맑은 소리 메아리친다,
어두움 물러가라 울려퍼진다.
깊은잠 깨어나라 밝혀주시듯,
예수님 하늘에서 비춰주신다.”
이어지는 아침기도 첫 후렴도 참 흥겨웠습니다.
해마다 대림시기 짧은 기도로 끊임없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그날이 오늘입니다.
주님이 오실 그날의 기쁨을 앞당겨 살아가는 대림시기 우리들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아름다운 전례가 대림의 기쁨을, 대림의 희망을, 대림의 평화를 한껏 고무합니다.
대림의 여정입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요, 주님을 찾아 가는 우리의 순례 여정이요, 이런 깨달음이 역동적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마중 나가는 우리들이요, 주님과의 상봉시간도 날로 가까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대림에 앞서 온통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러니 그날과 그 시간에 대비하여 늘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에 대비하여 집중적 깨어 살기 영적 훈련 기간이 오늘부터 시작한 대림시기입니다.
이어지는 노아때의 홍수의 비유도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려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나 오늘이나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노아만이 깨어 살다가 이런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외적 환경에서 내적 삶도 참 판이함을 봅니다.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며, 맷돌질 하는 두 여자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 합니다.
바로 내적으로 깨어 살았던 자만이 구원 받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복음의 결론 말씀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막연히 깨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전사’로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회심으로 이끌었던 말씀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대림시기에 잘 드러맞는 권고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절박한, 절실한 심정으로 깨어 준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답게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러 나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빛의 갑옷을 입혀 주시고, 당신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학인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주님의 학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환시가 우리의 삶이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배움의 여정’임을 일깨웁니다.
참으로 평생 주님을 공부하는 수행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께 대한 공부뿐입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주님께 배우고자 주님의 산, 불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주님의 집, 요셉 수도원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대림의 꿈은 평화의 꿈입니다.
오실 대림의 주님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평화의 꿈이 바야흐로 오실 주님을 통해 실현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며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으리라.”
얼마나 많이 회자되고 있는, 얼마나 고무적인 평화의 주님인지요!
하느님의 염원이, 우리 인류의 궁극적 염원이 이런 평화의 꿈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평화의 전사로, 평화의 일꾼으로, 평화의 도구로 살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대림시기만이라도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이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대림시기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대림의 기쁨, 대림의 희망, 대림의 평화를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영적 야곱 집안인 우리 모두를 격려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사 2,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묵은 어둠을 밀어내고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버겁고 힘겨운 현실을 벗어버리지 않고, 한걸음도 건너뜀 없이 타박타박 오늘 여기까지 걸어오신 여러분을 축복하며 새 날 새 빛의 기쁨을 전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4,42)
예수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첫날 복음은 우리에게 종말을 상기시킵니다.
깨어 있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다는 건 잠들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잠시의 휴식이랄 수 있는 육신의 잠은 정지와 멈춤, 죽음의 상태로 보이지만, 그 안에 휴식과 생성, 회복 등 긍정적 움직임도 함께 지니고 있지요.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
(아가 5,2)
아가의 신부가 고백하는 신비로운 이 상태가 곧 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깨어 있음을 가리키지 않을까 싶습니다.
몸은 휴식하고 있어도 영혼은 오시는 님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 기척, 향기의 미세한 변화도 포착할만큼 민감히 열린 상태입니다.
주인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 무지로 인해 영혼이 더 섬세하고 영롱하게 벼리어집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분을 언제라도 맞이하려면 그래야 합니다.
제1독서는 모든 이가 평화를 누리는 구원의 날을 노래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이사 2,1)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외적으로는 강대국 사이에서, 내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정과 정의가 훼손된 상태에서 위협과 대립, 갈등 상황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민중의 마음에 싹튼 평화에 대한 열망은 주님께서 오시어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이사 2,4)는 그날을 향합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사 2,5)
아직 신산하고 어두운 현실을 걷는 이들을 독려하는 목소리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오실 빛!
나를 둘러싼 어둠에서 한 발 밖으로 내디딜 때 이미 빛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도 여전히 복잡하고 버거운 현실에 묶여 있다고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화답송)
기쁨은 반드시 기쁠 이유가 있어야 생기는 감정적 반응을 넘어서, 주님을 향해 깨어 있는 영혼에게서 흘러나오는 생기입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된 평화, 구원, 하나 됨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율하는 영혼의 설레임이 곧 기쁨입니다.
"기뻐하여라."
(루카 1,28).
마리아가 천사에게서 들은 첫마디입니다.
하느님께서 벌이시는 일이 자신에게 인간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녀는 기뻐하라는 과제를 받습니다.
그 말씀이 전달되는 순간 기쁨이 이미 그녀 안에서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정결하고 신심 깊은 유다 처녀로서 메시아를 깨어 기다려온 마리아는 이미 오시는 주님을 향해 깨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촉구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로마 13,11)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로마 13,12) 입는 것입니다.
어둠을 헤치고 번지는 빛은 포말처럼 퍼져 나가는 기쁨과 같습니다.
기쁨을 소유한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은"(로마 13,14)은 사람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으로 열린 상태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 안의 기쁨이 '오시는 기쁨'을 알아보고 맞이할 것입니다.
이 기쁨이 서로를 끌어당겨 하나가 되면 더 큰 기쁨이 이웃과 온 누리를 향해 번져나갈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말씀께서 기쁨을 선사해 주십니다.
깨어 있는 이는 기쁨을 잉태할 "태"가 준비된 영혼입니다.
그 "태" 역시 기쁨입니다.
그러니 기쁠 일 없이, 힘겹고 고통스럽고 신산한 가운데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와버렸다고 황망해하기보다, 내 존재 어딘가에 숨죽이고 있는 기쁨, 길어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기쁨을 찾읍시다.
그 기쁨의 "태"는 오시는 주님을 껴안을 희망으로 설레며 일렁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러할 것입니다.
새해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영혼을 온통 차지하시길 빕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뉴저지 가톨릭방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방송미사 녹화를 부탁하였습니다.
아직 9월인데 대림 1주와 2주의 미사를 녹화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미리 준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기에 기꺼이 함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2023년 대림 제1주일은 다른 해보다 3달 먼저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시작합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을 ‘대림(待臨)’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해방 시켜주실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교회는 그 메시아가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 메시아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림은 2,000년 전에 오셨던 메시아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다시 오실 메시아를 깨어서 기다라는 것입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는 데에도 참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붉게 익은 대추 한 알에도 참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차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강물을 거꾸로 올라갑니다.
새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 부릅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수학, 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으로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미는 진, 선, 미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의미는 욕망이라는 전차가 되어 문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차원입니다.
종교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이를 도와줍니다.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건 겸손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깨어 있음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깨어 있는 걸까요?
가치의 차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제로 살아가며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자주 깨닫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는 생각에 눈물의 기도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제 생활을 20년 넘게 하면서 주님께서 저를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만약 저 같은 사람이 짝꿍을 만나 결혼했다면 잘 살았을까요?
저의 부족한 능력과 저도 파악하기 힘든 성격을 볼 때, 마누라와 자식들 모두에게 큰 시련을 줬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을 저를 맡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의 품 안에 있어야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겠지요.
이제 사제가 되어서는 특히 여성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극성스러운 여성 몇 분을 보내주셨습니다.
저 좋다고 쫓아오시는 그분 덕택에 여성이라면 근처에도 가기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이 오십이 넘어가니, 여성의 유혹도 없어졌습니다.
아마 이러면서 웃으실 것 같습니다.
‘이제는 네가 뭘 하겠니? 나 아니면 먹고나 살 수 있겠어?’
불러주신 그분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특히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주님밖에 모릅니다.
미리 알면 시간에 맞춰 잘 준비하겠지만, 주님께서는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순간만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열심히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새해라고 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이 땅에 강생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지요.
이 기간에 주님 오심을 잘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12월 25일이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성탄 대축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 판공성사도 보고, 구유와 성탄 트리를 만들면서 예수님 오심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시 오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언제일까요?
만약 노아 시대에 대홍수가 날 것을 사람들이 미리 알았다면 너도나도 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살면 될까요?
다시 오시는 날에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것보다, 주님의 합당한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지금 당장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준비하며 사는 삶을 통해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구원에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단호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사 2,5)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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