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추억이 말을 건다.
아버지 묘소에 벌초를 하고 오다가 막내 동생인 형교에게 물었다.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절 중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뭐지?” “아버지하고 고기 잡았던 추억일거야.” 나 역시 아버지와 보낸 시절을 되돌아보며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밤에 횃불을 들고 섬진강 상류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며 보냈던 여러 추억들이다.
“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한다면 무엇이지?” 하고 묻자, 동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버지가 일 년에 한 번씩 닭 한 마리를 사가지고 오셔서 삶아주셨잖아, 그때가 가끔 생각나,” 그 말을 하며 눈시울을 적시던 동생을 바라보며 ‘어쩌면 나와 추억이 똑 같지?“ 하면서 물이 스펀지에 스며들듯 아련한 옛 추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 여름의 끝 무렵, 임실 장에서 닭 한 마리를 사가지고 오셨다.
길갓집이고, 어디 변변한 땅도 없이 방 한 간에 부엌 한 간이라 닭을 키울 수도 없었을 뿐더러, 두 분 다 장날마다 돌아다니시기 때문에, 토종개 외에 짐승을 키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닭을 삶아 몸보신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토실토실 살이 진 암탉을 사오셨다. 닭을 사가지고 돌아오신 날이면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신양 무척 기분이 좋으셨다. 가장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해 본 적이 없으시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낼 시간이 별로 없으셨던 아버지, 그렇다고 어머니에게 주눅이 들어서 사셨던 것은 아니지만 그날만큼은 목소리에도 힘이 더 들어가 있었고, 걸음걸이도 몹시 경쾌했다.
아버지는 닭을 장독대 뒤에 묵어놓으시고, 매일 아침마다 모이를 주곤 하셨다. 낯선 곳으로 팔려온 닭은 낯이 설어서 그런지,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예감해서 그런지, 저녁 내내 울었다. 사나흘이 지나서 고적감과 적막감을 깨우는 닭 울음소리가 조금씩 귀찮아질 무렵, 초저녁에 아버지는 닭을 잡으셨다.
닭의 털을 뽑고, 잔털을 제거한 뒤, 배를 가르면 배안에 가득 들어찬 알들, 제일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가지런히 들어 있는 알들, 며칠만 더 살았더라면 ‘꼬끼오’ 하고 울면서 세상에 달걀로 나왔을 알들을 바라보면 얼마나 신기한지,
가끔 아버지는 큰 알부터 차례로 우리 남매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말했다.“ 그냥 먹어도 좋은 것이 바로 알이란다.” 입에 놓고서 툭하고 터치면 따스하면서도 달착지근한 그 맛이 어찌 그리도 감미로웠던지, 비위가 약한 미숙이는 안 먹겠다고 하고, 그러면 그 알을 백숙에 넣어서 끓이셨다.
그 날 만큼은 그 모든 것을 아버지 혼자 하셨다. 당신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팔을 걷어 부치고 닭을 삼았다. 닭은 삶는 불을 지피는 나무도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마른 장작을 사용했다. 연기도 나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 그 불꽃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나에게 주었는지, 나는 훗날에야 그 불꽃이 내게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바슐라르가 <촛불의 미학>에서 “불꽃은 은유다.”라고 평했고, 주베르는 “불꽃은 젖은 불이다.”라고 평했던 그 의미를 그 당시 어린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다만 그 불꽃이 타오를 때, 그 불빛들을 주시하던 가족, 형제와 아버지라는 이름의 그 관계 속에서도 서로 다른 상념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불꽃 속에 드러나는 몇 명안 되는 가족, 그때만큼 ‘가족’이라는 것이 하나의 떼어내고 싶어도 떼어낼 수 없는 우주 속에 작은 공동체라는 것이 실감나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부엌의 천장에서 금세라도 떨어질 것 같이 매달려 있던 새카만 그을음도, 방 한 칸, 부엌 한 칸에 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도, 거기다 아버지 때문에 학교에도 못 간 채 음울하게 책만 보고 살고 있는 현실까지도 다 잊을 수가 있었다.
어떤 궁정의 만찬도, 부러워 할 것이 없는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가족을 꾸리고 아이들을 셋이나 낳고서도 그런 ‘결속’과 ‘함께’라는 것을 느꼈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작은 부엌이 아들과 딸이 넷에다 아버지까지, 다섯이 들어차면 어머니는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때만큼은 부엌에서 해방이 되었다. 얼마쯤 불을 지폈을까?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닭이 익는 냄새가 서서히 부엌을 다 채우고, 그때쯤이 가장 배가 고픈 시간이다. 목구멍에서 쪼르륵 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릴 때쯤이면, 불도 사위고, 아버지는 솥을 여신다. “잘 익었구나.”어서 방으로 들어가거라.“ 아버지만 남고 식구들은 방으로 들어간다.
곧 이어서 아버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을 양은 양푼에 담아 가지고 오셔서 닭을 발라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서 먹어라.“ 하였다. 그때는 눈치고 코치고 차릴 틈이 없다. 하지만 닭이 얼마나 큰지 여섯 식구가 다 먹고도 남을 정도라 누구 한 사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날 그 시간만큼은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약주 몇 잔에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얼굴이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지금껏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우리가족’이라는 이름의 모든 구성원이 그날만큼은 같은 생각으로 서로 즐거워하고 그 시간이 영원하기를 기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과 가정의 주변에서 인간 사회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우위에 있는 덕목들이 만들어지고, 강화되고, 유지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말은 그 때 우리 가족들을 위해 남겨놓은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일 년에 한 번 있는 그 잔치가 끝나고 나면 아버지는 바르고 남은 닭의 뼈다귀를 모아 솥에다 놓고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 안에다는 마늘을 아끼지 않고 듬뿍 넣었다. 그리고 그 뼈를 다시 끓이고 끓여서 얼마나 여러 날을 우려먹었던지,
그 어두운 시절을 투영投映해간 그 추억, ‘닭 한 마리의 추억’들이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불쑥불쑥 뛰쳐나오고, 또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 동생과 내가 공유하고 있다니, 그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그 당시 그 추억들이 가슴속에 깊은 인상을 남겨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노릇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지내시던 아버지가 일 년에 꼭 한 차례씩 ‘당신 식대로’ 식구들을 위해 ‘닭 잔치’라는 이벤트를 만들어 주셨다. 그날 그 순간의 아버지를 회고해보면 진정한 식도락가였고, 풍류객이었으며 말 그대로 ‘아버지’였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는 멋있고, 재치 있고 영리한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 가족들에게는 하나도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으므로 기피의 대상이자, 원망의 대상이 바로 아버지였다.
고통스럽게 살았던 날들도 지나고 나면 다 아름다웠던 날들로 기억되는 것은 인간이 망각하기를 잘하기 때문일까?
로마의 정치가인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떻게든지 우리의 불행을 영원한 망각 속에 깊이 매장하고, 번영하던 시절의 유쾌하고 감미롭던 추억을 환기시킴은 우리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능력이 있고 없고는 별개의 문제로 우리들은 대부분 내가 원치 않을 때에도 아름다웠거나 혹은 고통뿐인 추억일지라도 그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내가 잊고자 원할지라도 지나간 날에 가슴속에 깊은 흔적을 남긴 추억들은 잊히지를 않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나간 날들을 회상 할 때 느끼는 안타까움, 그것들이 어쩌면 그렇게 눈물겹도록 아스라한 그리움인지,
2024년 7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