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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즉영(窪卽盈)
낮은 곳에 물이 고인다는 뜻으로, 삼라만상 모든 이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기 마련이며, 물은 낮은 곳인 웅덩이에 고이게 된다. 스스로를 낮추어야 덕이 고인다는 의미의 말이다.
窪 : 웅덩이 와(穴/9)
卽 : 곧 즉(卩/7)
盈 : 찰영(皿/4)
자전육혜(我全六慧)는 나를 보전하는 6가지 지혜를 말한다. 살아가면서 나를 온전하게 보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든 나를 보전하여야 이룰 수 있다. 내가 사라진 이후는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 중에는 무리하여 자신을 온전하게 보전하지 못하고 곤혹을 겪다가 죽기도 한다. 예로부터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잘 보전하는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자신을 잘 보전한다는 것은 말은 쉬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며 인생을 지혜롭게 천명을 다하여 살라는 뜻이다.
노자(老子)가 도덕경에서 나를 보전(保全)하는 6가지 지혜를 말하였다. 그것은 곡즉전(曲卽全), 왕즉직(枉卽直), 와즉영(窪卽盈), 폐즉신(敝卽新), 소즉득(少卽得), 다즉혹(多卽惑)이다.
노자 도덕경 제22장에 나오는 말이다. '낮은 곳에 물이 고인다'는 뜻이다. 삼라만상 모든 이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기 마련이며, 물은 낮은 곳인 웅덩이에 고이게 된다. 사람의 덕(德)은 스스로를 낮출 때 쌓아지게 되며, 사람들의 마음도 그곳에 모이게 되고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면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따라서 사람을 얻으려면 스스로를 낮출 줄 알아야 한다. 자기를 낮추고 겸허하고 유연하게 살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자연의 이치이며 인간사의 덕(德)이다.
1. 높은 곳에만 오르려는 사람들
요즈음 사람들은 누구나 높은 곳으로만 오르려 하지 낮은 곳으로 가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타락한 민주주의와 퇴폐적 자본주의 방식의 성공은 항상 높은 지위를 가지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가름하는 것 같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반드시 인격이 있고 성공한 사람, 나아가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돈 많은 사람도 비인격자들이 넘치며 지위가 높은 사람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따라서 돈과 지위 등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것이 마냥 충분조건인 것처럼 착각하기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거기에 걸기도 한다.
최근에 선거가 다가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곳곳에서 출사표 소식이 들리고 출판 기념회 소식이 들린다. 자기의 업적을 내세우고 비전을 홍보하는 자기 자랑의 자리다. 거리엔 현수막이 난무한다. 자기 이름을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오늘날은 그래야 높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항상 오만한 자를 싫어한다. 그동안 오만하던 여당과 야당은 선거법 개정 문제를 논의하고 각 당은 혁신이니 뭐니 하면서 이제와서 국민에게 겸허하게 낮은 자세로 다가가겠다고 한다. 그들의 그런 말장난에 유권자들은 또 속아 넘어가 준다. 어쩌면 속으면서 믿고 믿으면서 속는 대상들이 바로 정치인들이다. 국민은 그들이 그런 줄 알면서도 또 믿어본다. 기대심리의 작용일까? 딱히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일까?
물은 낮은 곳에 고인다. 낮은 곳은 평평하다. 그리고 웅덩이가 있다. 높은 곳은 뾰족하다. 웅덩이가 없다. 그래서 높은 곳에는 물이 고이지 않는다. 덕(德)도 고이지 않는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은 항상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래서 높은 곳에 있는 자가 인심을 얻고 덕을 베풀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물은 평평하고 낮은 웅덩이에 고이듯이 덕(德)도 평평하고 낮은 웅덩이게 고이기 마련이다. 자신을 한없이 높이려는 사람은 덕이 없는 사람이다. 국민을 향해 막말을 하는 사람도 오만한 사람이며 자기가 높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출 줄 알고 낮은 곳에 서면서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자기주장만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하고 그 뜻을 헤아려 주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들은 높은 곳에서 군림하고 있다. 그들은 평소에는 늘 큰소리를 치고 오만하였기 때문이다. 일반 국민이라면 수사선상에 오르면 절절맬 텐데 그들은 검찰이 없는 죄를 만들고 있다고 호통을 친다. 이것이 오만한 곳,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것 아니고 무엇일까?
그런데 이들이 낮은 곳에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국민을 향해 개처럼 굽신거릴 때가 있다. 바로 선거를 앞두고 하는 행동이다. 국민은 그것이 가식인 줄 알면서도 또 속아 넘어가 준다. 그러면서 새로운 기대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과 몸은 실상 낮은 곳이 아닌 높은 곳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국민이 갖는 기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가진 지향성인지 모른다. 모든 인간은 천사 지향성이 있듯이 높은 곳을 향하려는 마음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라 할 정도로 강한 경쟁의식은 인간 스스로를 오만하게도 하고 자기 과장을 하게도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타인을 내려다보려고 하고 그 어떤 힘으로 누르려 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려오는 것을 싫어하고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은 인간사의 엄청난 갈등과 투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들은늘 위로 오르기만을 원한다. 그래야 군림하기 때문이다. 덕은 그런 사람에게는 머무르지 않는다.
덕은 위에 고이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인 아래에 고이며, 은혜 또한 베푸는 것이며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동도 아래에 있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의 본성이 된다. 자신이 높은 곳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측은지심이 발휘될 여력이 없다. 그래서 은혜도 자신을 내려놓고, 또 내려옴으로 낮은 자세를 취할 때 진정한 은혜를 베풀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은혜가 상대에게 감동을 준다.
정치에 관하여 말하자면, 국민은 오만한 정치인보다 겸허한 정치인을 바란다. 국민은 높은 곳에 있는 정치인보다 국민과 함께 서 있는 정치인을 바란다. 정치인이 국민과 함께 서 있으려면 스스로 낮은 곳에 설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국민과 함께 몸과 마음이 어우러지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굳이 정치뿐만 아니다. 친구 간에도 즐겁게 어울리려면 스스로를 낮은 곳에 두어야 하며, 일상생활에서도 평화를 얻고 사람을 얻으려면 스스로 낮은 것에 설 줄 알아야 한다.
높은 곳은 낮은 곳만 못할 때가 많다. 높은 곳에 있지만 스스로를 낮은 곳에 둘 줄 아는 지혜는 자기를 더 높이는 수단이 된다. 높은 곳에서는 추락하여 죽기 쉽지만 낮은 곳에서는 추락할 염려가 없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자기 몸을 보전하는 6가지 지혜의 하나로 와즉영(窪卽盈)을 설파한 것 같다.
2. 노자가 말하는 와즉영(窪卽盈)
노자가 말하는 와즉영(窪卽盈)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물은 항상 낮은 곳에 고인다. 사람은 스스로를 낮출 수 있어야 덕이 고일 수 있다. 덕이 고여야 사람들의 마음도 모여들게 되어있다. 강과 바다는 물의 왕(王)이다. 모든 것은 강과 바다로 고인다. 그 강과 바다가 왕이 될 수 있음은 능히 모든 것의 골짜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은 것들의 아래에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聖人)은 백성들의 위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말로서 그들의 아래에 서며, 백성들 앞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몸으로써 그들의 뒤에 선다. 성인은 위에 처하되 백성들은 무거워하지 않고 앞에 처하되 백성들은 해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가 낮은 마음으로 낮은 데 있으니 다툼이 생기지 않는다. 성인은 낮은 곳에 있기에 천하 사람들이 그와 다툴 수가 없다. 모든 다툼은 스스로 높은 곳에 있다고 여길 때 발생한다. (노자 도덕경 제66장 강해위백곡왕 江海爲百谷王)
위에서 말하는 성인은 군주를 지칭한다. 올바른 군주는 스스로를 낮은 곳에 두면서 존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노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체득한 사람이다. 무위자연의 도를 체득한 성인 군주는 자기 자신을 낮추어 고(孤: 나는 외로운 자)라고 부르며, 과인(寡人: 덕이 적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임금이 자기를 낮추어 일컫던 말), 불곡(不穀: 양식이 없음, 가난함) 등의 말을 하여 왔다.
누구에게 낮춘다는 말인가? 백성에게 낮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입으로는 과인(寡人)을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낮추지 않았던 군주가 얼마나 많았던가? 오늘날 국민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국민 위에 군림한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위에서 성인을 오늘날로 말하면, 정치인 즉 위정자들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위정자들이 낮은 곳에 설 줄 알면 함부로 다투지 않는다. 위정자들이 다투지 않으면 나라가 평온해지고 국민의 삶이 안정된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인들은 심하게 다투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국민도 분열되어 다투고 있다. 사실 국민 간에 편을 나누어 다투는 것의 모든 원인은 거의 다 정치인들의 다툼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늘 다투는 데 익숙하다. 심지어는 다툼을 잘하는 정치인이 화려하게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3. 와즉영(窪卽盈)의 지혜
중국 역사에서 성왕(聖王)의 시대라 일컫는 요순(堯舜)시대에 요(堯)임금은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세를 이루었다. 그러한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지도 어느덧 50년이 흘렀다. 요임금은 정말 자신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태평성세를 이루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미복(微服-지위가 높은 사람이 무엇을 몰래 살피러 다닐 때 입는 남루한 옷) 차림을 하고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러 나갔다.
어느 고을에 이르렀다.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를 들어보니 자신을 찬양하는 노래였다. 노래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임금님의 덕이라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니 잘 살아지네...' 요임금은 마음이 흐뭇했다. 요임금은 어느새 마을 끝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마을의 노인들이 자기의 배를 두드리고(고복鼓腹), 발로 땅을 구르며(격양擊壤)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랫가락은 이러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러한 모습을 본 요임금은 무척 기뻤다. 자신의 선정(善政)이 온 백성들에게 미친 것이었다. 관리들의 수탈도 없고 관리들은 저마다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아무런 불만 없이 즐겁게 살아가며 정치의 힘이니 왕의 권력이니 하는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야말로 정치가 잘되어 백성들의 삶이 넉넉해진 것이었다.
요임금의 시대는 민생을 위해 최선의 정치를 했기에 백성들의 삶이 넉넉해졌고 법이 바로 섰기에 범죄가 사라졌으며 나라가 안정되었기에 외적들이 침범해 오질 못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안심하고 잘 살 수 있었다. 여기서 고복격양(鼓腹擊壤)이라는 고사가 나왔다.
정치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민생과 국방과 치안에 있다. 첫째, 민생이다. 민생은 백성(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국민이 마음 놓고 살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경제가 잘 돌아가야 한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수탈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경제는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세계 경제의 소용돌이 속에 활로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데 야당은 비판만 하고 있다.
둘째는 국방이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이다. 외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면 백성들은 외적들의 노예 상태에 빠진다. 임진왜란 때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죽었으며,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노예로 팔려 갔던가? 지금도 일본에 남아있는 귀 무덤에는 30만 개의 귀와 코가 매장되어 있다고 하기도 한다. 일본군들에게 끌려가 포르투갈 등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 간 조선인들이 10만 명이 넘을 것이라 한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림 조선 조정은 정쟁만 하다가 결국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또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노예로 끌려 갔는가?
우리 사회의 치욕적인 용어가 된 '화냥년'이란 말이 왜 생겼는가? '화냥년'이란 말의 유래를 안다면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될 말이다. '화냥년'은 청나라 군사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고 돌아온 조선 여인들이었다. 거기엔 주부도 있었고 처녀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 사회는 그들을 안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업신여기고 조롱하였다. 그러고도 정쟁만 하다가 일제 36년의 치욕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지금도 정쟁에 몰입한다.
셋째는 국민의 생활 안정이다. 이를 위해선 질서가 구축되어야 하며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범죄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마음 놓고 길을 걸을 수 있으며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범죄가 늘어나며 특히 '묻지마 범죄' 강력 범죄가 판을 치고 있다. 사기꾼들이 선량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뇌물 수수 부정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고위직들의 부정부패도 끊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서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각종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국가는 여기에 강력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가? 위정자들이 정쟁이 아닌 화합의 정치, 부정이 아닌, 청렴과 정의의 정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오만과 다툼 때문이다. 자신을 높은 곳에만 두려 하니 국민은 보이지 않고 권력과 자리와 이익만 보인다. 오만한 탓이며 스스로 낮은 곳에 설 줄 모르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하는 와즉영(窪卽盈)의 지혜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임금은 와즉영(窪卽盈) 할 줄 알았기에 백성들이 왕을 몰라보아도 즐거웠다. 와즉영(窪卽盈), 스스로를 낮은 곳에 둘 때 덕이 쌓이고 스스로 존귀해진다. 예수가 나귀 타고 오셨다는 것은 자신을 한없이 낮은 곳에 두었다는 것이며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것 역시 한없이 낮은 곳에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없이 존귀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와즉영(窪卽盈)의 지혜는 왕즉직(枉卽直)의 지혜처럼 아무에게나 아부하고 굽히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라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존귀해지며 주체성이 지켜진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낮은 곳에 설 줄 아는 것은 자신을 낮추므로 높임을 받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이다.
와즉영(窪卽盈), 물은 항상 낮은 웅덩이에 고인다. 덕도 낮은 곳에 고인다. 높게 되고 존귀한 대접을 받으려면 스스로 낮은 곳에서 웅덩이를 가질 줄 알아야 한다. 강과 바다는 낮은 곳에 있지만 모든 것을 품는다. 모든 것을 품을 줄 아는 것이 곧 덕(德)이다. 그것이 곧 노자가 정치인들에게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치도(治道)이다.
▶️ 窪(웅덩이 와)는 형성문자로 洼(웅덩이 와, 웅덩이 왜, 성씨 규)는 간체자, 洼(웅덩이 와, 웅덩이 왜, 성씨 규), 漥(웅덩이 와), 䨟(괸 물 와)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구멍 혈(穴: 구멍)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洼(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窪(웅덩이 와)는 ①웅덩이 ②맑은 물 ③(마소의 발자국에)괸 물 ④깊다 ⑤낮다, 우묵하다(가운데가 둥그스름하게 푹 패거나 들어가 있다)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 로는 潢(웅덩이 황)이다. 용례로는 우묵한 곳과 높은 곳 또는 쇠함과 성함을 와륭(窪隆), 움푹 패어 웅덩이가 된 땅을 와지(窪地), 개천에서 용 날까라는 속담으로 미천한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날 수 없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미유와구이산신규(未有窪溝而產神虯), 낮은 곳에 물이 고인다는 뜻으로 삼라만상 모든 이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기 마련이며 물은 낮은 곳인 웅덩이에 고이게 된다. 스스로를 낮추어야 덕이 고인다는 의미의 말을 와즉영(窪卽盈) 등에 쓰인다.
▶️ 卽(곧 즉)은 ❶회의문자로 即(즉)의 본자(本字)이고, 皍는 동자이다. 먹을 것을 많이 담은 그릇 앞에 사람이 무릎 꿇고 있음을 나타낸다. 식탁에 좌정한다는 뜻에서, 전(轉)하여 자리 잡다의 뜻으로 되고, 밀착(密着)하다의 뜻에서, 전(轉)하여 '곧', '바로'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卽자는 '곧'이나 '이제', '가깝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卽자는 皀(고소할 급)자와 卩(병부 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皀자는 의미와는 관계없이 모양자 역할만을 하고 있다. 卽자의 갑골문을 보면 식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식기에는 담겨있는 음식을 막 먹으려는 모습이다. 그래서 卽자의 본래 의미는 '이제(먹는다)'였다. 하지만 후에 '먹다'라는 뜻은 사라지고 '곧'이나 '이제'라는 뜻만 남게 되었다. 卽자는 식기 앞에 가까이 붙어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가까이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卽(즉)은 ①곧 ②이제 ③만약(萬若), 만일(萬一) ④혹은(或-: 그렇지 아니하면) ⑤가깝다 ⑥가까이하다 ⑦나아가다 ⑧끝나다 ⑨죽다 ⑩불똥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則(법칙 칙, 곧 즉)이다. 용례로는 그 자리에서나 금방이나 바로 그때나 당장에를 일컫는 말을 즉시(卽時), 진작이나 좀 더 일찍이를 진즉(趁卽),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흥치 또는 그 자리 생각이나 내킨 맘을 즉흥(卽興), 일이 진행되는 바로 그 자리를 즉석(卽席), 곧 그 시각에를 즉각(卽刻), 임금될 이가 식을 올리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일을 즉위(卽位), 곧 전하여 보냄을 즉전(卽傳), 즉시 금전을 지불함 또는 그 금전을 즉전(卽錢), 돈이나 물건을 즉시 바침을 즉납(卽納), 곧 출발함 또는 즉석에서 폭발함을 즉발(卽發), 약 같은 것의 즉시 나타나는 효력 또는 어떤 일의 즉시에 나타나는 좋은 반응을 즉효(卽效),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거기에 곧 응함 또는 곧잘 적응함을 즉응(卽應), 곧 이제 지금 당장 또는 그 자리에서 곧을 즉금(卽今), 곧 감 또는 이내나 곧 실행함을 즉행(卽行), 일이 일어난 바로 그날이나 당일 또는 바로 그날을 즉일(卽日), 사람이 죽어 이 세상을 떠나감을 즉세(卽世), 바로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죽음을 즉참(卽斬), 당장 그 자리에서의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느낌을 즉감(卽感), 당장에 멸망함을 즉멸(卽滅), 병이 곧 나음을 즉차(卽瘥), 바로 그 자리에서 곧 청함을 즉청(卽請), 그 자리에서 즉시로 의결하거나 결정함을 즉결(卽決), 당장 그 자리에서 만듦을 즉제(卽製), 즉시에 단정함을 즉단(卽斷), 즉석에서 곧 승낙함을 즉낙(卽諾), 예매나 또는 예약을 아니하고 상품이 놓인 그 자리에서 곧 파는 일을 즉매(卽賣), 곧 항하여 감을 즉향(卽向), 곧이나 때를 넘기지 아니하고 지체없이를 즉변(卽便), 그 자리에서 곧 빨리나 즉시로를 즉속(卽速), 매우 급함을 즉급(卽急), 바로 당장에 보거나 듣거나 한 일을 즉사(卽事), 즉결로 처분함을 즉처(卽處), 자리에서 곧 대답함을 즉답(卽答), 당장 그 자리에서 곧 이루어지거나 이루는 일을 즉성(卽成), 당장에 문초함을 즉초(卽招), 그 자리에서 곧 죽음을 즉사(卽死), 그 자리에서 보는 광경이나 경치를 즉경(卽景),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음을 즉살(卽殺), 곧 바로를 일컫는 말을 입즉(立卽), 그날 밤을 일컫는 말을 즉야(卽夜), 형체는 헛 것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 형태가 있는 것은 모두 인연으로 생기는 것인데 그 본질은 본래 허무한 존재임을 이르는 말을 색즉시공(色卽是空),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뜻으로 조그만 자극에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를 이르는 말을 일촉즉발(一觸卽發), 우주 만물은 다 실체가 없는 공허한 것이지만 인연의 상관 관계에 의해 그대로 제각기 별개의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반야심경을 이르는 말을 공즉시색(空卽是色), 사물의 관계가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음 또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 또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를 이르는 말을 부즉불리(不卽不離), 사람을 만나는 족족 이야기하여 세상에 널리 퍼뜨림을 이르는 말을 봉인즉설(逢人卽說), 그 경우에 적합한 재치를 그 자리에서 부림 곧 임기응변 또는 그 자리의 분위기에 맞추어 즉각 재치 있는 언동을 함을 이르는 말을 당의즉묘(當意卽妙), 싸움을 오래 끌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재빨리 싸워 전국을 결정함을 이르는 말을 속전즉결(速戰卽決),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으로 깨달아서 얻는 나의 마음이 부처 마음과 같으며 따로 부처가 없다를 이르는 말을 즉심시불(卽心是佛),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맑지 않다는 뜻으로 윗사람이 옳지 않으면 아랫사람도 이를 본받아서 행실이 옳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상즉불리(相卽不離),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이라는 뜻으로 어떤 일의 시기가 임박했음을 이르는 말을 비조즉석(非朝卽夕), 돈이나 재물이 많으면 일도 많음을 이르는 말을 부즉다사(富卽多事) 등에 쓰인다.
▶️ 盈(찰 영)은 형성문자로 盁(영)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그릇 명(皿; 그릇)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夃(영)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①차다 ②가득하다 ③충만(充滿)하다, 피둥피둥하다 ④남다, 여유(餘裕)가 있다 ⑤불어나다, 증가(增加)하다 ⑥채우다,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⑦교만(驕慢)하다 ⑧이루다 ⑨예쁜 모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채울 충(充), 메울 전(塡), 찰 만(滿),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다. 용례로는 가득 참을 영만(盈滿), 남음과 모자람을 영축(盈縮), 둥근 달을 영월(盈月), 한 자 남짓이나 한 자 미만의 넓이 즉 협소함을 뜻함을 영척(盈尺), 충만함과 공허함을 영허(盈虛), 가득차고 성함을 영성(盈盛), 짐을 실은 화차를 영차(盈車), 물이 가득 차서 찰랑찰랑한 모양을 영영(盈盈), 가득 차서 넘침을 영일(盈溢), 이지러짐과 꽉 참 또는 모자람과 가득함을 휴영(虧盈), 지나친 욕심을 가지지 말도록 타이름을 계영(誡盈), 풍성하게 꽉 차서 그득함을 풍영(豐盈), 모두 가득 참 또는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음을 관영(貫盈), 가득 차면 기울고 넘친다는 뜻으로 만사가 다 이루어지면 도리어 화를 가져오게 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을 영만지구(盈滿之咎), 섬에 가득히 채워서 보내 준 선물이라는 뜻으로 썩 많이 보내 준 음식이나 물건을 이르는 말을 영석지궤(盈石之饋), 한 자 남짓한 글이라는 뜻으로 매우 짧은 글을 이르는 말을 영척지서(盈尺之書),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점차 이지러진다는 말을 일월영측(日月盈昃), 달이 꽉 차서 보름달이 되고 나면 줄어들어 밤하늘에 안보이게 된다는 뜻으로 한번 흥하면 한번은 망함을 비유하는 말을 월영즉식(月盈則食),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다는 뜻으로 변화무쌍하여 헤아리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일허일영(一虛一盈)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