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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욥 9,1-12, 14-16
복 음 : 루카 9,57-62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참된 제자의 삶
-진리와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성인의 생애를 요약한
아침성무일도 5개 연의 찬미가가 참 아름다워 2개 연만 나눕니다.
-“성경의 하늘나라 푸른목장을 땀 흘려 정성 다해 가꾸신 당신
여기서 모든이게 공급하셨네 백배의 풍요로운 영혼양식을
사막의 고요함을 갈망하면서 하느님 면전에서 늘 깨어있고
육신을 괴롭히고 극기하면서 자신을 주성부께 바치셨도다.”
어제 모든 천사들의 축일에 있었던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병원에 다녀오다가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를 입었습니다.
대형 사고의 경우치고는 아주 경미한 상처였습니다.
즉시 병원 응급실로 이동하여 머리 사진을 찍고 주사를 맞은 후,
왼쪽 머리 상단 부분을 여러 바늘 꿰맨 다음 귀원하여 점심식사 후 9시경을 바쳤습니다.
사고 즉시 원장수사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다행히도 경미한 사고입니다. 전례 때는 외출 시 쓰는 검정 모자를 써야할 것 같습니다.
상처부위가 커서 분심을 줄 것 같아서요. 깨어 살라는 싸인 같습니다”
사고 즉시 떠오른 걱정은 내일 강론이었습니다.
저는 강론에 대해 남달리 집착이 큽니다. 게시판에 붙여져 있는 다짐입니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운명이자 사랑이요, 구원이자 유언이다’,
구원과 유언이란 말마디는 나중에 붙였습니다.
정말 지금은 유언처럼 생각하고 씁니다.
이어 떠오른 생각은 ‘정신 차려 깨어 살라는 회개의 싸인이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귀원하여 떠오른 생각 둘은
’아, 천사축일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통해 도와 주셨구나!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새삼스럽게 감사와 더불어 힘이 솟는 느낌이었습니다.
머리에 상처가 부끄럽고 분심을 줄 것 같아 전례 시 상처를 가리기 위해
모자를 한 번 썼다가 즉시 짧고 부족한 생각임을 깨달아 모자를 벗었습니다.
부끄러워할 것은 죄이지 상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부끄러워 모자를 썼더라면 죄를 지을 뻔 했습니다.
저나 수도형제들이 직접 다친 부분을 보면서
전달되는 메시지가 참으로 중요하다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깨어 살라는, 회개하라는 표지처럼 생각됩니다.
마침 수도형제가 십자가 앞에 서도록 한 후
사진을 찍어준 후 전달한 메시지의 재치와 유머도 고마웠습니다.
“주님의 전사, 이수철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들어도 반가운 주님의 전사라는 말마디를 들으니 힘이 불끈 솟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참 까칠한 별난 성인입니다.
그래도 당시 그 혹독한 은수 금욕생활에도 80세 장수를 누리신 것을 보면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전설적이 인물이요 파란만장한 생애였고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지닌 신비로운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힘든 성향으로 구설수에 많이 올랐을지라도
그의 학문은 당대 성 아우구스티누스외에는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 합니다.
이 두분과 성 암브로시오와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네 분은 서방 4대교부이기도 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깊은 영성과 삶의 준열한 고행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수 처엔 몇 가지 필수품에 십자가와 성서뿐이었고. 성인은 인생 후반부 거의 30년 동안은
예루살렘에서 은수자로 보내면서 성서연구와 고행생활에 전념했습니다.
특히 가톨릭의 공인 라틴어 불가타 성서는 386년에서 시작하여 404년 18년 동안의 작업이라 합니다.
또 성인은 원하지 않았던 서품이라 평생 동안 미사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성덕의 잣대는 열렬한 사랑이요 진리의 삶입니다.
성인의 굳건히 항구히 견뎌내는 견인堅忍이 놀랍고
성서연구를 통한 그 지칠 줄 모르는 하느님 사랑의 열정이 불가사의입니다.
한결같고 오롯한 사랑과 진리에 헌신했던,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았던 참 자랑스런 성인입니다.
1600년 전 성인이지만 시공을 초월 지금도 신선한 자극에 열정에 불을 붙여주는 분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고난 받는 의인 욥 역시 주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주석부분을 읽다가 뒷부분이 좋아 옮깁니다.
‘선인善人의 아픔과 고통은 전혀 하느님의 불유쾌한 표지가 아니다.
이들 고통이나 시련은 때로 긍정적으로 그분과의 깊은 관계를 촉진하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표지로 보여질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우리 삶에 어떤 경우로 개입하든
수동적 비관주의에서 긍정적이고 환영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병이나 죽음은 궁극적인 악이 아니다. 정말 죄는 진리와 사랑의 부재다.‘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부끄러워할 것은 죄이지 상처나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상처나 병, 죽음보다 더 치명적인 영원한 병이나 죽음은
진리와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욥은 결코 혹독한 시련과 고통 중에도 때로 불평하고 원망했을 지언정
끝까지 견인하며 하느님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끝까지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참 제자의 길을 살았던 욥입니다.
오늘 루가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제자들의 조건을 언급합니다.
두 번의 수난과 부활 예고 후 예루살렘을 향한 절박한 상황입니다.
세 차례에 걸친 예수님 말씀에서 참 제자의 길을 배웁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여기서 강조점은 가난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난을, 단식을, 고행을 찬양하지도 않았고 노숙露宿하지도 않았습니다.
먹보요 술꾼이란 별명도 지니셨습니다.
바로 어디든 장소에 집착하지 않고 새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자유로워야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뚜렷이 부각되는 절대적 가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절박성은 가족, 전통, 문화의 필요성 모든 것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려는 결정은 결코 번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두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취해선 안됩니다.
루가복음의 참된 제자에게 무엇보다 강조된 주제는 다음입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는 결코 기회주의자가 될 수 없고,
그가 하는 일은 ‘시간제part-time’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이든 아무것도 아니든 둘중 하나(all or nothing)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제자직의 사명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에게 준엄히 요구되는 길이지만 우리가 볼 때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동시에 아가페 사랑의 요구가 언제나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최종 판단의 잣대는 아가페 사랑과 진리라는 것입니다.
하여 매순간 분별할 일은 그것이 진실로 사랑의 행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참된 제자의 길은 사랑과 진리의 길이고 사랑과 진리만이
유일한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사랑과 진리의 사람이,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집에서 자신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부담된다는 한 학생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고 부모님 기대에만 맞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답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기대가 큰 것일까요?
이제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부모는 무슨 큰 기대를 할까요?
부모는 그저 이 아이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면서 이 아이를 재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부모가 자신을 간섭한다고, 자신을 힘들게 하고만 있다고 생각하니,
부모의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하느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크게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계속해서 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혹시 자신을 간섭하고 힘들게 하는 어떤 의무감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라고 이르십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고 하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장사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때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예수님의 부르심을 짐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작별 인사도 못하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번에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짐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특별한 기대를 하고 계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도 충분히 모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당신 안에서 행복해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일보다 먼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큰 사랑을 알아채고, 하느님께서 바라는 대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 따르는 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하나의 의무감으로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길 원하실 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부르심’과 ‘따름’에 대한 세 편의 ‘상황어’입니다.
본문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는데”(루가 9,57)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는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앞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심부름꾼을 보냈는데
배척을 받게 되어 다른 마을로 길을 가신’ 것을 알려줍니다.
<루카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을 갈릴래아에서 배척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듯이,
이제 예루살렘 상경기도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당하게 될 고난을 미리 암시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게레사인들의 지방에서도 배척을 받으셨고(루카 4,28-30;8,37),
나중에는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르고자 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먼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설익은 고백을 깨우치면서 낮고 겸손한 삶에로 부르십니다.
그것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입니다.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라라”하고 초대한 사람인데,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죽은 이의 장례는 매우 중요한 일었습니다.
그들의 불문율법을 해설한 미쉬나에 따르면,
“장례를 치르는 사람은 쉐마(신앙고백문)나 18기도문(축복기도문)이나
기타 기도들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되어 있으며,
후대에는 “율법에 명시된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바빌론 탈무드)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장례를 선행의 극치로 여겼습니다(토빗 4,3-4;6,15).
그러니 그가 장례를 먼저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율법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를 거절한 것은 장례를 치르는 일보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루카 9,60) 일을 더 중하게 여기십니다.
죽음의 나라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늘나라가 더 중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람>도 스스로 먼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되돌아보는 자는 하느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을 따르는 삶은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 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인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요,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그 무엇에게도 첫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는 말씀이요,
뒤를 돌아다보지도 말며, 오로지 임을 향하여 진리를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제자 됨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 본질인지,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잘 아는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배척과 고난을 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죽으시러 가시는 길에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당신과 함께 가야 할 고난을 암시해줍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주님!
당신은 저의 탯줄, 저의 보금자리, 저의 무덤이오니
제 머리가 항상 당신 가슴에 기대어 있게 하소서.
제 몸이 당신 밭에 머물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진리의 밭을 갈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형님은 책을 좋아하셨습니다. 가끔씩 형님이 읽은 책을 읽곤 했습니다.
이광수의 흙, 펄벅의 대지, 스탕달의 적과 흑,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현실이라는 벽을 넘어서려는 내용이었습니다.
농촌의 계몽을 위해서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농민들과 함께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가족의 이야기였습니다.
비천한 신분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고독한 영혼의 이야기였습니다.
단순히 살기 위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가치를 향해서 날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장미꽃을 담은 종이에서는 장미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담은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형님이 있어서 문학의 향기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2020년 나는 이웃에게 어떤 향기를 나누어 주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에 간직한 것이 ‘분노, 시기, 욕심, 절망, 편견’이었다면
아마도 코를 찡그리게 하는 냄새가 났을 겁니다.
내 마음에 간직한 것이 ‘인내, 친절, 온유, 나눔, 겸손’이었다면
지친 마음에 위로를 주는 향이 났을 겁니다.
오늘은 예로니모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 성인과 더불어
존경받는 서방교회의 4대 교부입니다.
무엇보다 예로니모 성인은 평생을 성서를 번역하고, 성서를 연구하면서 지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서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활동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은 구약성서를 통해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심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멀리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이방의 신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지고 타락한 사람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평화를 주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믿는 이들의 구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를 가까이하면 믿음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사랑으로 꽃이 필 것입니다.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탔습니다. 추운 겨울이었고, 바람도 불었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버스 안이 너무 좋아서 그냥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학교로 왔습니다.
저는 당연히 내려야 하는지 알았지만 어렵게 잡은 자리가 좋았고,
버스에서 내리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만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살면서 중학생 때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는 않지만
다른 면에서 중학생 때와 비슷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담배를 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17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지금은 담배를 끊은 지 25년이 되었지만, 처음에 담배를 끊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담배가 가지는 중독성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술도 그렇습니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다음 날 일을 하는데도 지장을 줍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잔 술의 알뜰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기도,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의 정거장을 지나치곤합니다.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나누겠다고 하면서 지금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성당에서 주어지는 희생과 봉사의 시간들과 나의 여가 시간이 겹쳐지면
내 몸과 마음은 희생과 봉사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여가 시간으로 기울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문제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루카 9, 6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치열한 사랑 없이는
말씀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말씀은 모든 시간의
마디마디와 함께한다.
말씀이 돋아나고
점점 자라난 말씀은
드디어 익어간다.
말씀 하나로
모든 것은
사랑으로 소통된다.
사람의 길은
말씀의 길이다.
말씀이 익어 가면
마음도 익어간다.
말씀의 길은
소통과 진정한 자유의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향해
뜨겁게 타들어간다.
말씀에 자신을 봉헌한
성 예로니모 사제의 축일이다.
하느님의 빛은
말씀의 빛으로 우리를 밝힌다.
말씀의 빛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등불이다.
말씀을 사랑한 삶이
은총의 삶이다.
그에게서 성경의 번역은
가장 적극적인 말씀의 실천이었다.
말씀의 대중화는
귀한 말씀의 보편적 만남이며
새로운 시작이 된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말씀은 사랑처럼
가까이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풍요롭게 전하여 져야한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말씀의 번역은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기도였다.
말씀으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 물들이길 기도한다.
내일 세상을 떠나도 오늘 꽃에 물을 주세요.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 시작합니다.
작게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직장, 결혼이나
수많은 인간관계도 우리의 결정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은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전체 인생도, 물론 처음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결국 내가 잘살아보려고 결정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도 중도 포기하거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얼마 전, ‘유퀴즈온더블럭’에 고독사, 자살, 범죄현장의 특수 청소 전문가 김새별씨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죽음 뒤에 남겨진 쓸쓸한 집을 수습하고 청소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도 감정이 북받쳐 일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도 딸을 키우는 처지에서, 딸의 죽음을 이기지 못해
딸의 자리에 인형들을 동그랗게 둘러놓고 아빠가 죽음을 선택한 집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한번 시작한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을까요?
‘당신도 그런 처지를 당하면 어쩔 수 없을걸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지 못했나요?’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왜 딸이 사라진 뒤에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놓지 못했나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닥쳐왔을 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이제 길어야 3개월 남았습니다.”라는 어쩌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처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런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꽃길이 아닙니다.
햇빛이 좋은 날도 있지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라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세상인데
우리에게야 어떤 일이든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타임」지의 수석 기자 아만다 리플리는
1917년 몽블랑 군선의 폭발에서부터 2001년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1만 5천 명의 생환기까지,
역사적인 재난의 생존자들을 추적해 『언씽커블』이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제목은 우리말로 ‘상상도 못 할 일’ 정도로 번역이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쓰나미나 테러와 같은 재난을 당했을 경우
당연히 가능한 한 빨리 현장을 빠져나가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생존자들은 재난 신호를 감지한 후 ‘한참 뒤에야’ 대피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닥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9·11 테러 당시에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있던 사람 중 많은 비율이,
비상계단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고,
곧바로 대피해야 하지만 이리저리 전화하거나 사소한 물건들을 챙기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했습니다.
‘몸이 얼어붙는’ 반응 때문에 허둥대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불행은 남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암에 걸리기라도 하면 ‘왜 하필 나야?’라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누구에게 일어날까요? 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만 꽃길을 가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도 가시밭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이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길이 절대로 순탄치만은 않을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멀미하는 사람도 자신이 운전하면 멀미하지 않습니다. 예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 닥칠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음을 먼저 예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나에게 닥쳐올 일들에 대해 예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도 훈련해 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몸이 얼어붙는 상황에서도 훈련된 대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을 종용하십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예상하는 것은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예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단호해야 합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특정한 위기 상황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일이에요.
그리고 정말로 위기가 닥쳤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단호한 태도도 필요하고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미적대는 이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그 일을 하기로 했다면 단호하게 그것만 행할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히노 오키오’의 『내일 세상을 떠나도 오늘 꽃에 물을 주세요』란 책이 있습니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조금 바꾼 제목입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환자들에게 죽음보다 삶에 더 충실하여지자고 말하는 책입니다.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으려면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해야 할 오늘의 일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는 당당히 십자가를 지셨고 수많은 성인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소명은 이웃의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내일 죽더라도 꽃에 물을 줄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에 지배당해
얼음이 되어버리는 삶을 살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활기찰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하느님 나라로 님 따라
김 요나단 수녀
늘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는 예수님을
멀리서나마 늘 지켜보던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자,
단지 당신을 스승으로 여기며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추구하는 그의 속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은 이 지상에 없고 하느님 나라임을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시자,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산 이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자,
“주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얹고 앞을 바라보고 똑바르고 힘차게 밭을 가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다.“라고...
첫째 사람은 예수님을 단순히 세상의 스승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은 모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몰랐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쟁기를 손에 얹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네 마음 밭을 잘 갈고,
지나간 일들은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여라.“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