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장례식
공원묘지에선 엄숙하게 하관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망자가 든 관은 이미 땅속 구덩이에 들어갔고 이제 흙으로 덮기만 하면 매장절차는 끝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관속에서 똑, 똑, 똑, 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잠깐만, 여기가 어디야? 나 좀 꺼내줘요. 제기랄 여긴 너무 깜깜해요, 제발 좀 나가게 해줘요. 그런데 왜 모두들 나한테 기도를 하고 있는 거야?” 망자의 생전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검정색 예복을 갖춰 입고 관을 중심으로 둘러선 유가족과 친척들은 망자를 떠나보내는 슬픔에 눈물짓거나 망연자실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망자의 또렷한 목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움도 잠시, 이어서 들리는 망자의 목소리는 “내 이름은 셰이, 지금은 관속에 있지. 여러분은 아마 제가 안 보이겠죠. 저는 딴 세상에 와있으니까요. 모두들 안녕, 이제는 노래로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네요. ♬…” 식장은 순간 웃음바다로 바뀌고 말았다. 더러는 박수를 치기도 했다. 엄숙한 분위기로 시작된 하관의식을 웃음판으로 만든 건 망자 자신이었다. 셰이 브레들리는 직업군인으로 평소 코믹함을 즐기며 살아왔고 죽기 전 특별한 유언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장에서도 모두가 웃을 수 있기를 바랐고 자신이 죽거든 그가 만들어 놓은 녹음파일을 장례식장에서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오랫동안 지병을 앓았던 그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았고 행복한 장례식을 만들기 위해 핸드폰에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마치 관속에서 내는 듯한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했고 그의 유언대로 장지에서 녹음된 목소리는 재생되었다. 한마디씩 재치 있는 말이 관속에서 들릴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슬프기만 했던 장례식장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죽는 순간까지도 웃음을 선사한 그의 재치 덕분에 슬프기만 한 장례식장은 웃음으로 가득 찰 수 있었다. 장례가 끝난 후 망자의 딸 안드레아는 아버지의 유쾌함이 남아 있는 이 영상을 SNS에 올리자 많은 이들에게 그 웃음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망자의 손자 벤은 트위터에다 “할아버지는 세상에 웃음이라는 유산을 남기고 가셨어요”라 했고 딸 안드레아는 “우리가 가장 슬퍼할 날에도 웃음을 주는 것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었어요.”라고 말했다. 로마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라 식장에는 장례식을 주관한 사제의 모습도 보였다. 망자가 완벽하게 본인이 남기고 싶은 말을 녹음해서 들려준 것은 성공했으나 그 장면을 영상으로 갈무리한 데는 허점이 많아 아쉬웠다. 여럿이서 폰으로 찍은 사진을 합성해서 영상을 만든 것 같은데 망자의 생전 모습 말고는 대부분 흐릿했고 각도도 많이 빗나가 있었다. 코로나 병마가 세상을 덮치기 두 달 전인 2019년 10월 15일이라 미리 알았더라면 나라도 함께해서 도와줄 수 있었는데 그랬다.
웃음꽃 가득 피운 특이한 장례를 접하고 보니 밥 호프가 남긴 “웃음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을 참을 수 있게 하고 나아가 희망적인 것으로 바꾸어주기도 한다.”는 말도 떠오른다. 2006년 1월, 뉴욕에서 거행된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유쾌한 장례식도 있다. 슬프고 엄숙한 일반 장례식과 달리 위트와 농담으로 가득했다. 세계적인 미술가와 무용가, 비디오 아티스트, 설치미술가가 저마다 마이크를 잡고 추모사를 하는데 “남준, 나한테 빌려간 200달러 기억하지? 그냥 잊어버리게” 같은 농담을 해서 웃음이 터졌다. 비록 삶을 끝내고 떠나는 망자에게라도 이처럼 유머는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인생의 시계는 단 한 번 멈춘다. 그러나 언제 멈출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일을 믿지 말고 오늘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십여 년 전부터 사전장례식이 화제였다. 미국에선가 시작되어 지구촌으로 퍼졌고 우리나라에서도 거행하여 언론에 소개된 사례도 있었다. 사전장례식이 생긴 초기에 캐나다에서 평생 의사로 살아온 한인 교포는 “죽어서 치루는 장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지인들의 손을 잡고 웃을 수 있을 때 생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다”며 사전장례식을 연 이유를 밝혔다. 그는 사전장례식 3개월 후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은 그의 유언대로 가족끼리만 조용하게 치렀다.
국내에서 벌어진 사전장례식도 있다. 동화작가는 어느 날 폐암으로 고생하는 고향 친구의 문자를 받는다. 장례식에 그를 초대한다는 문자였다. 언뜻 부고소식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전장례식이었다. 우중충한 색깔 대신 밝은 옷 입고 오기, 좋은 이야기와 얼굴엔 슬픈 표정 담지 않기 등 추신이 문자에 달려있었다. 작가는 친구의 소원을 곱씹으며 고교시절 교련복 차림으로 함께 트위스트를 추던 추억 사진 몇 장도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그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친구의 소원대로 해주리라며 입술을 꾹꾹 깨물었지만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친구는 바짝 야윈 얼굴에다 화사하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나비넥타이를 메고 휠체어에 앉아 손님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목이 메어 말을 못 잇는 그에게 친구는 손수건을 건네주기도 했다. 참석자는 서른 명 정도로 친구와 친척들이었다. 사전장례식은 그 옛날 함께 불렀던 포크송도 시 낭송도 하고 아재 개그까지 선보이며 웃음으로 끝났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웃음 뒤엔 슬픔을 참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친구는 담담했다. “죽은 뒤에는 다 부질없는 일이야. 죽기 전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웃고 지내는 시간이 더 값지지 않겠어?” 돌아서서 그는 참았던 눈물을 결국 뚝뚝 떨구고 말았다. 작가가 돌아오는 길 하늘엔 보름달이 걸려있었다. 그러고 친구가 보름달로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리 평정심을 찾으려 해도 되질 않았다. 작가는 나도 다가온 죽음 앞에서 친구처럼 웃을 수 있을까, 도대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 걸까, 정말 죽음은 끝이 아니며 삶의 연장이고 삶의 일부일까, 죽음과 사전장례식이라는 말이 이명처럼 들려오더라며 사전장례식 참석 소회를 끝냈다. 또 다른 인사의 사전장례식은 팔순잔치를 겸해서 열렸다. 부의금은 받지 않고 친구 친지들을 초대했다. 그가 좋아하는 꽃으로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살아온 흔적이 묻은 추억의 물품들을 진열해놓고 사진으로 만든 자서전을 전시하거나 화면에 띄웠다. 남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감사의 마음이나 용서와 화해의 마음이 담긴 영상편지도 내보냈다.
자신이 남기고 싶은 묘비명과 사전의료의향서 장례의향서도 식장에 비치했다. 마지막으로 참가자들이 오늘의 주인공인 고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관에 넣는 순서도 마련됐다. 주인공은 부부가 가벼운 마음으로 실비양로원에 입소할 것이라 했다. 그러고 요양원에서 맞이할 셀프장례로 마지막 길을 갈 거라고도 했다. 얼마 전에도 외국에서 사전장례식을 치르고 곧 의료진 도움으로 생을 마친 보도가 있었다. 그는 종교 영향인지 죽음에 대해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간간히 했다면서 가능한 더 많은 것을 기부하고 싶다고 했다. 장기도 기증하는 것으로 아들에게 알렸고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많으니 내 삶을 평안하게 유지하면서 잉여금이나 시간을 나눌 거라고 했다.
가진 것 별로 없지만 나눌 것은 적지 않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또 다른 사연 하나. 엄마가 환갑에 돌아가시면서 이웃에게 드린 것은 언니 오빠들이 때때로 사다 드린 옷가지들이었다. 몸이 약했던 엄마는 헌 옷을 입고 새 옷은 사온 그대로 농에 담아 두셨다. 언니와 오빠는 얼마나 산다고 만날 헌옷을 입느냐고 타박을 했지만 엄마는 이웃에게 줄 거면 새 옷을 줘야 받아 입는 사람 기분이 거시기하지 않다고 응수했다. 배움이 없고 가진 돈도 없어 어렵게 살다 가셨지만 그 선한 마음과 사랑은 내 삶을 부끄럽게 한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엄마의 삶을 나도 따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