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파나고니아의 최고봉이자 비경으로 손꼽히는 피츠로이산은 상어의 이빨처럼 하늘을 물어뜯을 것처럼 우뚝 서 있다. “나무는 별에 가 닿고자 하는 대지의 꿈이다.” 고흐의 말인데, 고흐가 살아생전 이곳에 와서 피츠로이산을 보았다면 그 말이 “피츠로이산은 별에 가 닿고자 하는 대지의 꿈이다”라고 정정되었을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이 산을 남아메리카 대항해 기록을 세운 영국 비글호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의 이름을 따서 피츠로이로 부르고 있다.
1805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피츠로이는 영국의 해군이자 지리학자로 1831년 찰스 다윈이 참여한 두 번째 비글호 항해 때의 함장이다. 그때 비글호의 임무는 영국 상선의 안전 항해를 위한 해로海路 조사였고, 남미 바다를 탐사할 때 지리학과 자연사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고 여행경비를 자비로 부담할 수 있는 사교적인 인물을 물색하다가 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과학교수인 조지 괴콕으로부터 다윈을 추천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다윈은 외삼촌에게 영국 왕실 함대 소속의 비글호에 승선하여 세계 일주계획을 얘기하자 외삼촌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계획이라고 찬성했고 두 사람이 런던에서 만난 것은 9월 5일이었다. 처음에 피츠로이는 다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윈의 코가 너무 작고 들창코였기 때문이다. 피츠로이는 찰스 2세의 자손이었고, 코도 크고 휘어져서 귀족적으로 보이는 코를 가지고 있었으며, 코의 생김새로 사람의 됨됨이까지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허약해 보이는 코를 가진 다윈이 몇년 간에 걸친 세계 일주 탐험을 잘 마칠 수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서 다윈이 열정과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탐험대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하고 탐험에 나섰다. 그들이 타고 간 비글호는 예상외로 작은 배였다. 배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열 차 한 량 정도의 배에 70여 명이 타고 지난한 탐험 길에 나섰다. 사람의 일생에서 어느 시기에 인생의 항로를 바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인연이고 행운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그 인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내 키 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네, 사람의 키 높이란 늘 같은 게 아니라서 말일세.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네."
이 말에 합당한 인연으로 다윈이 피츠로이를 만난 것이다.
“비글호 탐험으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대한 결정은 조스 외삼촌이 슈루스베리까지 기차를 태워서 보내준 일에서 시작되었다.”다윈이 회고한 글이다.
다윈이 지은 <비글로 항해기>에 피츠로이에 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온다. 훗날 뉴질랜드 총독을 지냈던 피츠로이는 1863년 재정적인 문제와 우울증을 앓다가 면도날로 목을 그어 자살하고 말았는데, 다윈은 <자서전>에서 피츠로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피츠로이는 의무에 충실하고 실패에 관대하고, 용감하고, 의지가 강하고, 불굴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지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열성적인 친구였다 ... 큰 단점으로는 욱하는 성질이 있었지만 그의 성격의 일부는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훌륭했다.”
그 때 피츠로이가 다윈의 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혹은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윈을 비글호에 승선시키지 않았다면, 세계사를 바꾼 <종의 기원>과 <진화론>은 탄생하지 않았다.
어느 시기에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특히 여행이 그렇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이고, 지역이나 사물 역시 그를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날 때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