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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11,1-10>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복음은 예수님의 감사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뜻 안에서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루카 10,22)
그렇습니다.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시며,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이들이 알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그들에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보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게 됩니다.
같이 보거나 들어도 자기 시선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마련입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 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잔머리를 굴리며 셈을 할 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요즘 세상의 현실을 보십시오.
길고 긴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데 여전히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이들이 제발 백성을 위한다는 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만이라도 하느님 앞에 철부지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성령의 도움을 청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어떤 메시아를?>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얘기합니다.
이 이사야서를 읽다가 저는 문득 메시아가 어떤 분이시길 사람들이 원할까 생각게 되었습니다.
능력의 메시아?
어제 백인대장의 청을 받아들여 종을 고쳐 주신 주님처럼 내가 아플 때 그리고 내가 청할 때 언제든 고쳐 주시는 메시아?
사랑의 메시아?
고쳐 주시지는 못해도 손을 얹어주시는 메시아?
고쳐 주시지는 못해도 손을 얹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평화를 주시는 메시아?
다른 건 다 없어도 마음의 평화만 있으면 되니, 다른 건 안 주셔도 마음의 평화를 주시는 메시아?
이런 메시아가 내게는 좋은 메시아겠지만 이런 메시아가 진정 메시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이 이런 메시아이기를 거부하실 겁니다.
나만을 위한 메시아이시기를 거부하실 것이고, 나만을 위한 메시아는 메시아도 아니실 겁니다.
능력의 메시아도 맞고, 사랑의 메시아도 맞고, 평화의 메시아도 맞지만, 나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메시아라고 오늘 이사야서는 얘기합니다.
그래서 먼저 정의의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메시아는 정의로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평안과 다릅니다.
평안은 나의 안정과 안전을 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얻어지는 것이기에 차라리 나 혼자 있을 때 평안하고 많은 사람이 이런 평안을 추구하고 그렇지만 그런 평안을 깨지기 십상이며 그런 평안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평화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이고 관계적이어야 합니다.
평안을 위해 관계를 피하고 배제하는 평화가 아니라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평화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평화입니다.
좋은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고, 평화도 인간끼리의 평화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짐승 사이의 평화, 짐승과 짐승 사이의 평화까지 모든 평화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평화는 모든 평화이고 메시아의 사랑도 모든 사랑입니다.
메시아는 나만을 위한 사랑은 하실 수 없고, 평화도 나만을 위한 평화는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이런 메시아를 보는 눈은 행복하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데, 나는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성령으로만 기뻐하여라>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복음 전파를 마치고 많은 성과를 내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니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 기쁨의 원천이 성과가 아닌 성령이어야 함을 우리는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복음을 전하면서도 ‘업적 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의 기쁨을 성과에 두는 것입니다.
이런 때의 특징은 1. 숫자에 집중한다, 2. 아랫사람을 다그친다, 3. 기도 시간이 줄어든다로 들 수 있습니다.
한 대전의 개신교 목사님이 10년 동안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과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기도원에 들어가서 이렇게 기도 드렸습니다.
“예수님,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
아무리 해도 신도가 늘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실패한 것이다.”
목사님은 억울해 하며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제가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신도가 많이 늘었다면 너의 신도가 는 것이냐, 나의 신도가 는 것이냐?”
우리는 그저 그분의 종일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문득 숫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이전 신자들의 숫자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복되지 않는 것을 볼 때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우울해집니다.
이렇게 숫자에 집중할 때 성령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소식을 듣고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특별히 행복을 자녀에게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의 자유를 빼앗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재 발굴단'에서도 아이들은 어머니의 강요에 혼자 방에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34회에서도 숨이 턱 막히는 엄마의 공부 강요와 꾸중 때문에 혼잣말을 계속해서 하는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참으로 예쁜 아이인데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엄마는 다 자기를 위해 해 주는 관심인데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딸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결국엔 세상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다가는 공허함만이 남고 후회만이 남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어떤 기쁜 일이 있을까라며 우리는 여전히 기쁨의 원천을 밖에서 찾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기쁨의 원천을 성령께 두어야 합니다.
저도 새로 온 본당에서 사목하며 신자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강요와 설득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자유는 건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유는 자존감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빼앗기고 강요 받으면 자존감이 줄어듭니다.
신앙도 결국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올려주는 것이기에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서는 어떤 성과도 교회적이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공부를 위해 학원은 보내면서 미사는 빠져도 괜찮게 내버려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밥을 주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는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때 신앙을 먼저 가르치지 않으면 결국 부모는 자녀 때문에 우울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은 성령으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부시켜봐야 결국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시키시고 무엇을 하셨을까요?
하.사.시.에 보면 제자들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 극기하시며 혼자 기도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분은 그 기도 덕분으로 성령으로 가득 차서 기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도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을 일 때문에 줄이지 않으려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 시간을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쁨임을 믿는다면 적어도 대죄는 짓지 않고 기쁨으로 살 수 있는 정도의 기도 시간은 내가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하면서 그 기도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성령이 기쁨임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과 살 때 어떤 때가 제일 기뻤을까요?
부모님께서 하라고 가르치시는 대로 했는데 일이 잘되어 기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른들에게 인사를 잘하라고 해서 잘하고 다녔는데 정말 인사성 밝다고 칭찬받았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것이 부모에게 오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말씀을 통해서도 받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노트 한 권 씩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하루를 살 말씀의 양식을 먼저 적게 할 것입니다.
한 문장이면 족합니다.
성경 말씀이면 좋고 하.사.시. 혹은 기도하다 떠오른 말이나 유튜브를 보다 느낀 말도 좋습니다.
그 한마디를 적고 하루 동안 되새기며 살면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기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부모님의 굳은살을 보았을 때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때 행복합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그래서 한 말씀 쓴 다음 밑에다가는 감사일기를 쓰게 할 것입니다.
결국 은총은 감사를 낳기 때문입니다.
물론 강요할 마음은 없지만 잘하면 상을 주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성령으로 기쁨을 느끼며 살도록 해 주어야 하는 사제의 몫인 듯싶습니다.
모든 기쁨은 성령에게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예수님의 육화강생을 통해 온 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통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그 누구도 천상잔치에 소외되거나 차별대우 받지 않는 공평한 곳입니다.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축복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기쁨의 장소입니다.
언젠가 한 수녀원 본원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참으로 잘 준비된 전례였습니다.
모든 성가는 장중한 그레고리안 성가였습니다.
빛의 예식에 이어, 말씀의 전례가 시작되었는데, 일곱 개 독서를 모두 봉독했고, 독서 끝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성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사제석에 앉아 있는데,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이겠지.
성삼위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성모님을 비롯한 천상의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둘러 계시고, 거룩한 무리에 든 사람들과 함께 끝도 없이 말씀이 선포되고, 찬가가 울려 퍼지고..
그러니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들, 그저 세상 좋은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천상잔치 그 자체가 별 의미가 없겠구나, 정말 지루하겠구나, 거기 있는 그 자체가 지옥이겠구나. 그러니 지상에 있을 때부터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오늘 이사야 예언자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살짝 설명해주십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이사야 예언서 11장 6~8절)
보십시오.
혼자만,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 어떤 편법을 써서라도 목숨 걸고 돈을 모으는 사람들, 독식(獨食)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천국에 없을 것입니다.
틈만 나면 분노하고 무력을 일삼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침묵 속에 헌신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의 몫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철부지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
이 말씀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기득권층 사람들’을 뜻하고, ‘철부지들’은 ‘소외계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리시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것을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철부지들’이라는 말은 원문 단어에 대한 사전의 뜻풀이와는 상관없이 복음서의 전체 내용 안에서 해석해야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라고 말씀하셨고, 또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라고 말씀하셨고, 또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에 들어 있는 ‘어린이, 가난한 사람들, 작은 이들’이 바로 ‘철부지들’입니다.
‘철부지들’은 소외계층에 속해 있으면서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처지에서 살고 있지만, 단순하고 순수하고 겸손하게,
또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불행 선언’에 나오는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입니다(루카 6,24-25).
즉 인간 세상에서 기득권층에 속해 있고,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린다고 해서,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차별도 없고, 역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인간 세상에서 기득권층에 속했던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소외당하지 않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에는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아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감추시고” 라는 말씀에서 ‘이것’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감추시고’는 하느님께서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막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구원의 길’을 외면했다는 뜻입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는 하느님께서 소외계층 사람들만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려고 하시는데,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구원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원하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성모님의 감사기도에 연결됩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루카 1,50-53)
이 찬미가는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뜻이 같습니다.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 즉 소외계층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기도인데,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 즉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께서는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기득권을 내려놓기를 거부하는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고집과 탐욕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고 슬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은 귀한 예물들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경배했는데(마태 2,11), 헤로데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마태 2,16).
당시에 동방박사들이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텐데,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 그리고 목숨까지 걸고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철부지들’이 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왕권을 지키려는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던 헤로데는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칭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성모님의 감사기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숙제’와도 같습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하고 힘없는 소외계층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가장 힘없는 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면, 예수님께서 계시는 ‘가장 낮은 곳’으로 먼저 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1코린 1,27)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오소서, 성령이여!" - 주 성령님께 마음을 열라>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시편 72,7ㄴㄷ 참조)
3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대구가대 연구과 시절, 철학교수 정달용 신부님의 오늘 미사 강론 중 제1독서 이사야서에 대한 찬탄입니다.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에 대한 유토피아, 이상향에 대한 내용이 예언자들은 물론 혁명가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인류의 염원이 담긴 평화의 꿈이 참 아름다운 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정말 이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이상향에 대한 시는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아름다운 이상향에 대한 꿈이 예수님 성탄을 통해 그대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 밤미사 제1독서는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11,1-10) 내용을 그대로 노래합니다.
대림시기 바로 평화의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성령칠은을 노래한 “오소서 성령이여”(성가 142장)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이사야서에 성령의 여섯가지 은사에 자비의 영을 덧붙여 성령칠은이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야말로 성령칠은의 메시아라할 수 있습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대로 이런 성령 충만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세상에 대한 묘사가 뒤를 잇고 있습니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판단하고,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어제 주석을 읽다보니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를 ‘예수님의 초상화’라 언급했는데 공감이 갑니다.
이어지는 이상향의 풍경은 얼마나 평화롭고 조화로운 모습인지요!
그대로 인용하니 소리내어 낭독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유토피아 세상을 노래한 시도 없을 것입니다.
생존경쟁 치열한 약육강식, 적자생존, 각자도생, 승자독식, 아비규환의 지옥같은 세상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위에서 장난하며 젖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이사 11,6-10)
그날이 바로 대림시기의 오늘입니다.
모두가 생략할 수 없는 귀한 내용이라 전부 인용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메시아의 꿈인 평화를 앞당겨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바로 예언자들이, 우리 주 예수님이 꿈꾼 하늘나라의 모습이 바로 이런 평화가 완전히 실현된 세상입니다.
참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세상입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송가 142장을 노래 해보시기 바랍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맘에 오소서.
위로자신 이여, 주님 찾는 슬기를, 우리에게 주소서.
맘의 위로자여.”
1절에 이어 7절까지 성령칠은의 은혜를 간청하는 성가입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과 더불어, “오소서, 주 성령님” 호흡에 맞춰 기도로 바쳐도 좋겠습니다.
정말 간절히 청할 바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에 따라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온전한 참나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도 참 아름답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성령충만함 중에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바칩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눈이 열릴 때 선물로 가득한 세상에 저절로 감사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기도로 바치고 싶은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참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철부지 72제자들의 성공적 귀환에 마냥 감사하며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런 감사로 가득한 마음, 그대로 성령충만한 삶임을 입증합니다.
참 많이도 인용했던 제 감사기도 일부 내용도 다시 나눕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감사기도 역시 깊고 아름답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고백하는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된 예수님의 신원을 보여줍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성령의 은총으로 날로 이런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일치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며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 10,23-24)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밝고 경쾌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퍼집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루카 10,21)
이 말씀에 머무르는데 예수님의 기쁨이 전해지는지 입꼬리가 올라가며 마음에 흥이 일어납니다.
문맥으로 보면, 파견하셨던 일흔두 제자가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기뻐하며 성과를 아뢰자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깨닫는데 있어서 아직 많이 미숙하고 부족한 제자들입니다.
오죽하면 "철부지"(루카 10,21)라 표현하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만큼 주님께 철저히 의탁하는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가 철부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루카 10.23)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기쁨에 차 성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일치를 이루는 이때는 신적 희열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드러난 신비적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채 그분의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세상이 기대하는 영웅적 메시아가 아닌, 근본마저 모호한 떠돌이 가난뱅이 설교가에게서 하느님의 현존을 관상하는 은총을 받았으니까요.
제1독서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노래합니다.
이사이의 아들 다윗이 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끌었듯이, 새로운 다윗이라 할 수 있는 메시아를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이사11,1)의 이미지로 연결짓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아 위에는 "지혜, 슬기, 경륜, 용맹, 지식, 경외"라는 주님의 영이 머무릅니다(이사 11,2 참조).
그리고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이사 11,3)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 안의 예수님처럼 말이죠.
그가 이룰 정의와 공정, 신의와 평화의 세상은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따사롭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대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영혼에 온기가 돌고 마음이 활짝 펴질 정도지요.
누구도 누구를 해치거나 긴장시키지 않습니다.
억압도 폭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천적이라 일컫는 존재들이 함께 뛰놀고 장난치고 뒹굴며 창조의 본성인 사랑을 회복합니다.
그날에는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11,9)
주님을 알면 평화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툼, 경쟁, 폭력, 억압에 무능해집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체험하고 사랑하며 그분을 닮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주님을 아는 이는 별볼일없는 존재로 뒤쳐질 수도 있겠네요.
세상은 "철부지"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으니까요.
메시아가 오시어 구원된 세상은 결국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성공 논리가 아닌 십자가 논리가 주도하는 나라, 모두가 하느님을 닮아가느라 앞다투어 사랑하고 희생하는 나라, 그래서 약육강식의 위계가 자취를 감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초라한 마굿간, 구유 안에 누운 한 아기에게서 봅니다.
저 높고 화려하고 견고한 성 안에서가 아니라 가난과 약함의 현장 한가운데서 발견합니다.
이렇듯 가장 연약한 모습에서 메시아를 알아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한"(루카 10,24)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의 존재 속 가장 약한 부분에 오십니다.
우리 공동체 안의 가장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고 버림받은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 철부지들이 가슴 쭉 펴고 활짝 웃으며 당당히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때가 메시아의 시대이고 구원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유대 랍비였던 시드니 그린버그는 이렇게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을 믿고 사람을 신뢰할 줄 알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러나 사람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면 당신은 노인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행복을 갈망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있으면 청년이다.
그러나 과거만을 회상하면 노인이다.
남을 사랑할 줄 안다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남에게 사랑받기만 원하고 있다면 당신은 노인이다.”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나이로만 생각했는데 랍비는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생각과 인식의 차이로 구분하였습니다.
저도 이제 60이 되면서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늙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인식을 바꾸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어도, 아마에 주름이 깊이 패었어도, 근력이 예전 같지 않아도 청년입니다.
꿈이 있다면, 신뢰가 있다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오늘 주어진 일에 감사할 수 있다면, 꿈을 위해서 거친 들판을 걸어갈 수 있다면 청년입니다.
생각하니 대림시기는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이가 청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꿈, 예수님의 나눔, 예수님의 헌신,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청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다시 오시는 청년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대림시기에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는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손을 잡고 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치는 꿈을 꾸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청년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청년입니다.
평생 성전에서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는 비록 나이가 80이 넘었어도 청년입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마리아는 나이 때문에 청년이 아닙니다.
권세 있는 자리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하느님을 찬미했기에 청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은 나이가 많았어도 청년입니다.
저는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언제나 대림시기를 지내는 ‘청년’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법대를 졸업하고 평생 판사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나눔의 집’을 운영했습니다.
비록 부모님의 권유로 법대엘 갔고 판사가 되었지만, 정년퇴임을 한 후에 60이 넘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학생 때 좋아했던 물리학을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80의 생일잔치에는 작은 음악회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틈틈이 악기를 배웠고, 그동안 함께 했던 이웃들을 위해서 80 생일에 작은 음악회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배우려는 의지, 가진 것을 나누려는 선행,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는 자선의 마음이 있기에 80이 넘었지만 그분은 청년입니다.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나올 수 없다며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많은 지식이 있었지만 노인입니다.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였던 헤로데는 권력을 가졌지만 노인입니다.
1년 가까이 전쟁으로 러시아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는 푸틴은 노인입니다.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이 땅에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꿈 꿀 수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고난과 시련을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청년 예수의 제자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 서비스 기업인 ‘구글’의 뉴욕 사무실에는 간식 휴게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간식 휴게실로 인해 직원들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말이 많아졌습니다.
휴게실에는 각종 초콜릿을 비롯한 견과류, 쿠키, 과자, 맥주 등이 잔뜩 있는데, 직원들은 물 한 번 가지러 왔다가 간식을 한 움큼 집어 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직원의 몸으로 나타났습니다.
허리둘레가 늘어났고, 체력은 떨어져 갔습니다.
간식 담당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간식인데, 오히려 건강이 안 좋아지니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걱정이 커졌습니다.
오랫동안의 고민 끝에 간식 담당자는 간식 위치를 바꿨습니다.
직원의 눈높이에 간식이 있어서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고 판단해서, 눈높이 선반에는 생수를 놓고 설탕이 들어간 탄산수와 초콜릿 등의 간식은 냉장고 아래나 반투명 유리 뒤에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위치를 바꾸고 7주가 지나자 직원들이 생수만을 주로 가져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허리둘레를 늘려주는 초콜릿이나 탄산수의 소비량이 엄청나게 줄어들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대상이 달라지자, 행동도 변한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을 보는 사람은 자기 행동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세상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에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세상 안에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 제자를 비롯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시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간이 가까울수록 구원의 열쇠를 들고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따르는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일상 안에서 알아보고 있을까요?
아니 주님을 잘 바라볼 수 있도록, 내 눈높이를 맞추고 있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이사야 예언자는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이사 11,2)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세상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말을 들으려고 주님을 보지 않는 어리석은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구원의 길에 가까워지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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