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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일 한가위
제1독서 : 요엘 2,22-24.26ㄱㄴㄷ
제2독서 : 묵시 14,13-16
복 음 : 루카 12,16-21
그때에 예수님께서
15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지혜로운 삶
-찬양, 종말, 이웃-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참 좋은 날입니다. 두루두루 경사가 겹친 축복 충만한 날입니다.
10월 묵주기도 성월이자 전교의 달 첫날, 첫 주일이자 성녀 소화 데레사 학자 기념일이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입니다.
제가 늘 감동하는 바는 가톨릭 교회 전례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전례의 아름다움이요,
전례의 은총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삶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한가위 하루를 활짝 연 성무일도시 새벽 초대송과 찬미가,
그리고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과 시편은 얼마나 한가위 축제에 잘 어울리고 아름다운지요!
-“한가위를 맞이하여 오곡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올해도 우리일손 축복하여서 이모든 곡식들을 거두어들여
우리 삶 이어가게 힘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리세
마음을 곱게 곱게 가다듬어서 이 세상 열매들을 추수하면서
천상의 주님잔치 참여하는 날 고운 옷 차려입게 보살피소서.”
-“오곡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우리 주 하느님이 복을 주심이로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 창생이 하느님을 높여 기리게 하소서.”-
온통 찬미와 감사로 가득한 아름다운 축제일인 오늘
한가위 추석이 우리를 한껏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고무시킵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삶입니까? 지혜로운 삶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울 삶은 지혜로운 삶이자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탐욕을 경계하라’는 말씀과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음 주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우리의 탐욕을 경계하게 하고 어리석음을 일깨워 줍니다.
역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복음의 예화가 꿈 중에 이뤄진 일이라면
어리석은 부자는 꿈을 깨는 순간 회개하여 하느님과 이웃에 활짝 개방하여 나눴지 싶습니다.
문득 부자 스쿠르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스크루지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돈 욕심이 아주 많은 고리대금업자로 남에게 늘 인색하게 굴었으나,
어느 날 밤, 죽은 친구의 유령과 함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본 뒤
깨달음을 얻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는 인물입니다.
좌우간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는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역시 무지의 병, 무지의 죄를 깨닫습니다.
탐욕에 눈 먼 무지의 어리석은 부자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녹색평론 잡지 표지 그림 안에 글귀가 좋아 나눕니다.
“내 목소리부터 낮춰야 새들의 노래도, 벌레들의 소리도 들린다.
그래야만 풀들의 웃음과 울음도 들리고, 세상이 진실로 풍요로워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 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세상 모두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지옥은 장소 개념이기 보다는 관계 개념입니다.
연결되어 있지 않고 끊어져 있는 고립단절의 관계라면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바로 오늘 어리석은 부자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단절이요, 이웃으로부터의 단절이요,
참 자기로부터의 단절이요, 역사로부터의 단절입니다.
더불어가 아닌 혼자의 삶입니다. 완전히 이기적인 자기 안에 갇힌 수인의 삶 같습니다.
저는 오늘 2개의 독서와 말씀을 묵상 중 십자가 안의 원이 떠올랐습니다.
십자가 수직선이 상징하는바 하느님 찬양과 감사이고.
십자가 수평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상징하며,
십자가의 중심을 에워싸고 있는 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 이웃과 더불어의 삶을 상징합니다.
바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 차원의 삶을 삽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십자가 형상으로 하면 하늘과 땅을 잇는 수직선입니다.
바로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하늘길이, 하늘문이 닫혔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전무합니다. 완전히 하느님과 연결이 끊긴 단절된 삶입니다.
하여 어리석은 부자는 하늘에 쌓아야 할 보물을 땅에 쌓고 독백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고 즐겨라.”
완전히 육적인 삶입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영적 삶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참 무지한 현실주의의 육적 만족의 탐욕의 삶입니다. 이렇게 산다면 참으로 인생 허무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지 않습니다. 제1독서 요엘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셨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바로 어리석은 부자에겐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삶은 찬미와 감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과거와 현재, 미래의 종말을 아우르는 깊고 넓은 안목의 시야입니다.
이런 시야를 지닐 때 지혜로운 삶입니다.
십자가 형상으로 하면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수평선입니다.
복음의 탐욕에 눈먼 어리석은 부자는 완전히 이런 시야가 차단되어 있습니다.
과거는 물론 미래도 없고 온통 현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종말 의식이 전무합니다.
언젠가 있을 죽음의 종말을, 심판과 죽음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땅에 재물을 쌓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이 우리의 종말의식을 일깨웁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천사의 보고 후 사람의 아들이 수확하는 장면은 역시 그대로 최후심판의 상징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언젠가 우리 삶을 수확하실 죽음의 종말입니다.
하여 깊고 넓은 영적 시야를 지닌 이런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의 조상들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더불어 미래의 죽음의 종말을 생각하며 깨어 준비된 삶을 삽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종말을 두루 조망하는 넓고 깊은 영적 시야를 지닌 사람입니다.
부단히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종말의 미래를 내다보며 하루하루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탐욕에 눈이 멀어 이런 영적 시야가 없습니다.
셋째, 오늘 지금 이웃과 더불어의 삶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십자가 중심을 에워싼 원의 형상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는 이웃이 없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을 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선과 나눔의 삶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삶은
위로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삶이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삶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삶입니다.
주고giving, 배려하고caring, 섬기고serving, 지지하고supporting, 나누는sharing 삶입니다.
여기에다 4s의 행복한 삶도 추가하고 싶습니다.
작고small, 단순하고simple, 느리고slow, 미소 짓는smile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면에서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한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삶, 미래의 종말을 내다보는 영적 시야를 지닌 삶,
주변의 이웃과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선명히 드러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지혜로운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
추석
류해욱 요셉 신부
추석을 맞으며..
올해는 늦은 추석입니다. 제가 추석에 관한 시 두 개 나누며 몇 마디 보탭니다.
추석은
-김사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집 뒷마당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름달이다.
달밤에 달구 잡기 하다 넘어져
무릎이 깨어져 울던 일곱 살이다
한참 잊고 살다 생활에 지쳐
고향 생각나면 달려가던
뒷동산에 만나던 첫사랑이다.
큰어머니가 해주던 찹쌀 강정과
송화 가루로 만든 다식이다
울담 안에서 오가던 정을
건네주던 푸성귀 같은
내 사랑 여인아
책갈피 속에 곱게 간직한
진달래 꽃잎 같은 내 친구야
괴롭고 힘들 때
영혼의 안식처
내 쉼터인 것을
코로나로 힘든 우리는 정말 쉼터가 필요합니다.
이 '추석'은 ‘영혼의 쉼터’라는 지금은 이름뿐인 제 카페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는 시이지요.
‘홍천 영혼의 쉼터’는 바로 그렇게 괴롭고 힘들 때, 서로 쉼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회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하여 이름을 바꿔었지요. ‘만레사의 집’으로.
그래서 저는 원래의 ‘영혼의 쉼터’의 의미를 살려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추석은 바로 그런 쉼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제 마음이기도 합니다.
추석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서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러분 모두 그런 추석이 되시기 바랍니다.
추석(秋夕)
-박민철
시원한 바람이 온 몸을 감싸고
아늑한 풀벌레소리 꿈속으로 이어지면
한적한 오솔길 저녁 따라 간다
귀뚜라미 모여 사는 그리운 초가
책 보따리 동여매고 동구 밖 어귀 서성이면
십리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
석양 길 때때옷을 입혔다
고대 때부터 내려왔던 달의 신앙은
아버지의 손등을 붙잡고
만월이라는 축제의 자리로 초대되어
팔월의 가부새 바람으로 슬슬 거린다
매달리었던 만큼 매달려 왔던 한가위의 포근함
탕숫국 국물이 퇴주 그릇에 빠지지 않도록
조상의 풍요로운 은덕 시접을 가지런히 놓았다
성묘를 끝낸 신곡주의 송편이
뒷 집의 순이를 불렀다
저는 뒷집 순이가 아닌 어머니를 가만히 불러 보지만 메아리만 들려옵니다.
시인이 노래하듯 제가 어린 시절 장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때때옷을 입혀 주셨었지요.
기억만으로도 한가위의 포근함을 느낍니다.
모두 그런 기억을 되새기며 풍요로운 달맞이하기로 해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 친구와 놀다 보면 종종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구름 사이를 지나는 비행기를 보면서,
이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마치 명나라 때의 장편소설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이 타고 다니는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있는 느낌이 아닐까 싶었지요.
부제 때, 졸업 여행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요.
긴장되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꿈꾸었던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에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서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어땠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생각처럼 근두운을 타는 느낌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구름 사이를 지나가는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을 통과할 때는 마치 옅은 연기 사이를 지나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실제와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생각이 실제에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실망에 이르게 될 때가 참 많습니다.
또 이로 인해 갖지 않을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울 때도 많아집니다.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의 한 형태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보다는 나의 욕심을 채울 탐욕에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지금 약간의 손해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랑 대신 탐욕을 취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선물 받은 것을 쌓아 둘 뿐이었지요.
지금의 행복이 재물을 쌓아 두는 것에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물 받는 것을 나누는 것만이 탐욕의 죄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특히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이들은 준비 없이 최후를 맞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것이란 재물이 아니라 덕행을 사랑하는 것이며,
생명과 구원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일까요?
오늘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중의 하나인 한가위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고 수확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웃과 서로 나누며 살아왔던 조상님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보름달처럼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멋지고, 축복 가득 찬 한가위 되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는 <입당송>으로 시작하여,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줍니다.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하고,
<복음>에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인류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는 그 베풂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로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보은지정의 감사).
또한 그렇게 하여 은혜를 입고 이미 새 생명으로 태어난 구원된 존재라는 사실에
더 더욱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존재론적 감사).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현존과 활동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종말론적 감사).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전례>는 이 모든 은혜를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인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의탁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것인 양 여겼고 이웃들에게 무관심하고,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오만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자신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입니다.
곧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이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이 무엇인가를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오늘,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주 너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요엘 2, 2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날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사진을 모아 놓은 앨범을 보곤 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 후배들이 만들어 준 ‘추억록’이라는 앨범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 동창들과 함께 했던 앨범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간직하신 몇 장 안 되는 사진도 있습니다.
동생 수녀님과 고양이를 앞에 두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저는 6살, 수녀님은 4살 때인 것 같습니다.
형들과 장화를 신고 뒤뜰에서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저는 4살, 작은 형은 7살, 큰 형은 9살 때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시간이 흘러 빛바랜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예전에는 사진을 찍을 일이 많지 않았고, 찍었던 사진들도 이사를 다니면서 없어지곤 하였습니다.
사진기에 필름을 넣고 뚜껑을 닫고, 사진을 찍으면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그렇게 바빴는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본당 별로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이 8권의 앨범에 사제생활 29년이 담겨있습니다.
보좌 신부 때의 사진에서는 열정과 순수함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주일학교 교사, 청년, 주일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행사에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사진 속의 모습은 모두 밝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젊은 날이었고,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나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본당 신부 때의 사진에는 여유와 웃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어른들과 함께한 사진이 많았습니다.
사목위원, 노인대학, 구역 봉사자, 성가대, 전례 봉사자, 구청직원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식사하는 자리, 마이크 잡는 모습이 많았습니다.
본당에는 행사가 많고, 사람 좋아하는 저는 가능하면 함께 했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는 사진 찍을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사목이기보다는 직장과 같았습니다.
교구장님과 교구청 신부님들과 함께 낚시 가서 찍은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5년 동안 교구청에 있으면서 1번 여행을 같이 갔습니다. 그만큼 각자의 자리가 바빴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사진 찍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저장하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에는 너무 많은 사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안 보게 됩니다.
스마트폰 때문인지, 게을러서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앨범도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지만 나의 삶이 저장되는 곳이 있습니다.
나의 글이 저장되는 곳이 있습니다. 인터넷의 공간입니다.
제가 있던 본당 홈페이지에, 교구청 성소국의 홈페이지에 저의 글과 사진이 저장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억하는 자리에, 기억하지 못하는 자리에 삶의 추억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내가 저장하는 곳의 추억과 기억들은 더 오래 간직할 수 있고,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원하지 않아도 계속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걱정되거나 두려워서는 아니지만 이왕 세상에 왔으니 좋은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따듯한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위로해 주었던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가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들 보내고 계시는지요?
여성분들은 음식 준비를 하시느라 바쁘실 것입니다.
남성분들은 모처럼 가족들과 만나서 한잔 하시느라 즐거우실 것입니다.
남성분들이 설거지를 도와 드린다면 더욱 행복한 추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윷놀이, 고스톱을 하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 대화를 나누고, 시간이 있으면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둥근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고향 가는 모든 분들이 가족들과 정겨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안전하게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도 자기가 살던 곳으로 가서 다시 안 오면 좋겠습니다.
치료약과 백신이 개발되면 좋겠습니다.
예전처럼 일상의 기쁨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마음으로 바라는 것들을 하느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쌓아 놓은 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어쩌면 하늘에도 앨범으로 기록되는 것은 아닐까?
부자가 세상의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보관하며 즐거워했지만,
우리가 쌓아야 할 것은 하늘의 창고가 아닐까?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창고에 보물을 쌓으려하지 마십시오.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안전한 하늘의 창고에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모든 재물과 물질의 진정한 소유주는 바로 하느님이심을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물과 물질을 이웃과 나누며 우리 마음의 창고에 사랑과 희생
그리고 나눔과 섬김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추석을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조상과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풍요와 여유로움의 이면에는 땀 흘리는 노력과 수고가 있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겠습니다.
아울러 말뿐인 사랑보다는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추석이 감사와 고마움의 축제가 되고,
풍요와 기쁨의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조상을 공경하며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 안에 생명이 있고
한가위가 있다.
빠르게 지나가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우리들 삶을 바라본다.
생명을 돌보아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한가위 날이다.
감사와 사랑 사이에
우리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을 함께 기뻐하고
기도하는 날이다.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는 마음의 날이다.
마음은 하느님을 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이란
욕심을 통과하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좋은 것을 빼앗고 죽이는
우리들 아픈 욕심이다.
그리하여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 사랑임을 깨닫고
그 사랑을 잊지 않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깊고 깊은 의미를
다시 묻게 되는 시간이다.
생명의 질서는
서로를 위하는 사랑의 질서이다.
사랑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곡한 뜻이다.
사람의 생명은 신비롭게도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
더욱 충만할 수 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닌
하느님께 머물러야
아름다운 사랑과 존중이 된다.
한가위 마음에서
생명의 길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한다.
생명의 마음
감사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한가위의 미사이다.
무너진 감사를 다시 일으키는
뜻깊은 올해의 한가위 날이다.
주님,
한가위를 통해 찬미 받으소서.
명절은 자녀에게 감사를 교육하는 장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축제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함께 모이는 것도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가족끼리 오랜만에 모이지 못하고
사람들이 더 많은 곳에 놀러 가는 것도 썩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나라의 큰 명절을 잘 지키며 힘을 얻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축제를 지내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축제라도 어떤 때는 뒤끝이 좋지 않고, 어떤 때는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끝이 좋은 축제를 지향해야 합니다.
뒤끝이 좋지 않은 축제 안에는 항상 인간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946년 미국의 한 의과대학 2학년생 ‘모턴’은 실험을 하던 중
강력한 마취기능을 가진 에테르라는 약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마취 없이 수술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에테르의 발견은 외과 수술 역사상 획기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해 낸 사람은 축제를 즐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에 에테르 특허를 신청하려 했던 모턴은
그의 지도교수인 ‘웰치’와 그에게 실험실을 내어준 화학과 교수 ‘잭슨’에게 저지를 당했습니다.
서로 자신의 이름이 의학 역사에 기록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은 결국 법정 싸움까지 갔고 축제가 되어야 했던 이 발명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잭슨은 정신병에 걸렸고, 웰치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모턴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마취시키는 물질을 개발해 낸 그들이
명예욕으로 곪은 정신은 마취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참조: 『멈추어야 할 때 나아가야 할 때 돌아봐야 할 때』, 쑤쑤, 유튜브 채널: 책읽는 다락방]
아무리 축제날이 되어도 인간의 욕심이 개입하면 축제가 비극으로 끝납니다.
물론 장례식은 축제는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어떤 장례식에서는 돈 문제로 가족들이 다투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모습은 아닌듯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합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듯이,
돈을 사랑하면 믿음에서 멀어지고 결국 고통으로 끝나고 맙니다.
아마 모든 것이 가장 풍성할 때 추수감사절이나 추석 명절이 있는 이유는
돈에 대한 욕심이 가장 줄어드는 풍요의 시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브라질은 삼바축제로 엄청난 관광소득을 올리는 나라입니다.
매년 2월에 열리는 이 축제에 약 4천만 명이 몰립니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축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올해 2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확산할 위험에 있었습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축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나는 무렵에 첫 확진자가 발생했고, 현재 확진자가 470만 명을 넘었습니다.
사망자도 14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코로나는 그저 감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걸리고 가족도 걸렸습니다.
그런데도 마스크 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등 거친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겉만 보고 이렇게 말해서는 온전한 판단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삼바 축제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라는 명확한 근거도 없습니다.
다만 그런 축제를 지내는 정신이 코로나 확산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제가 오염되었음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보통 삼바축제라고 하는 ‘카니발’은 ‘카르네 발레’(Carne val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카르네 발레는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에 당분간 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그 전에 충분히 먹어두려고 하는 가톨릭 전통이 축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로 시작된 이 축제가
그 정신은 사라지고 돈과 쾌락의 축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뒤끝이 좋지는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명절과 축제의 참된 의미를 되살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전통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축제’는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그 기억을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교육’적인 차원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식 때마다 자녀들이 그 예식은 왜 행하는 것이냐고 부모에게 묻고,
부모는 하느님께서 이래 저래서 그 감사를 잊지 않기 위해
이런 예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자녀를 교육합니다. 교육하면서도 부모 자신도 더 배우고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2천 년간 나라 없이 떠돌면서도 이런 축제 기간을 중요시 여기며
후대에도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잊지 않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 없이 살면서도 축제를 통해
하느님은 감사한 분이심을 자녀들에게 교육했기 때문에
지금의 이스라엘이 있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설과 추석이라는 좋은 명절이 있습니다.
설에는 세배하며 감사하고 추석에는 풍요로움이 있게 해 준 조상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왜 그런 제사를 지내야 하고 성묘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하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부모와 조상들의 덕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제주도에 30만 명이 몰린다고 합니다.
제주도 주민은 자녀들에게도 이번 명절엔 오지 말라고 했는데,
30만 명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아름다운 전통의 축제 정신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명절이 어떤 교육보다 자녀들에게 큰 교육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부모를 공경하고 물려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을 여러 번의 명절을 거치며 배워왔던 것 같습니다.
놀러 가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이런 특별한 때야만 가능합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부모도 자신들도 없었음을 깨닫게 하십시오.
그 감사가 진정한 예배로 이루어질 때, 명절은 기쁘게 끝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명절이 자녀에게 감사를 교육하는 장으로 길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오늘 복음은 재물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제목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라고 한다.
재물을 많이 가짐이 왜 어리석은가?
여기 재물의 어리석음은 영원성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영원성이 없는, 없어질 것을 왜 쌓아두려 하는가?
없어질 것을 쌓아두기 위해 온갖 생각과 시간, 에너지를 낭비해 가면서 투신하는 우리.
재물은 모두 주님의 것.
주님이 주셨고 우리는 소작인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우리는 어리석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재물을 곳간에 쌓아둔다면
그 곳간에서 매일 매순간 온갖 보화를 하나씩 꺼내어 쓸 수 있으련만
없어질 것을 위해 온갖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
늘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욕심으로 작아지는 우리
내 것인 양 무엇이든 손에 잡으려고만 애쓰는 우리
내려놓지 못하는 우리
내려오지 못하는 우리
똘똘한 우리
빈손으로
주님으로 가득 찬 우리
주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된 우리
욕심을 버리는 부유한 우리
영원한 생명은 욕심을 버림에 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