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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말해줄래? 밖이 왜 이렇게 조용한지? 크큭..’
“하, 하은아!”
싸구려 오피스텔이라도 명색이 명색인지라 화장실문은 반투명이었다. 하은이는 날 쫓아 화장실쪽으로 오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쾅!
다시 문을 세차게 열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은이는 창가에, 내게 등을 보인 상태로 창가에 서 있었다.
그 목소리가 나를 조롱하는 동안 이미 창문을 열어놓은건지, 그녀의 생머리와 단추풀린 블라우스가 뒤로 나부꼈다. 그녀의 치마는 아직도 올라간 상태여서, 이 끔찍한 상황과는 언밸런스한 괴기스러움을 연출했다.
“하..하은아, 하지마, 응? 하지마..”
어린아이에게 타이르는 말투.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도통 알수 없었다.
“외로워.”
그녀가 고개만 들어 뒤돌아보았다. 아까까지의 그 광기서린 눈이 아니었다. 하은이의 눈이었다. 진짜 하은이.
그러나 나의 거절은, 그녀의 광기를 없애는 대신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외로움을 일깨운 모양인듯, 그녀의 눈은 몇백년 살아온듯한 노인의 눈보다도 더 가라앉아 있었고, 구슬질 틈도 없이 눈물들이 쏟아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은하야..”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그녀. 하은이는 다리 한쪽을 창틀 너머로 주저없이 걸쳤다. 벽을 다 채울 정도로 큰 창문은 아니었지만, 오피스텔 치고는 매우 큰 창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기까지 해서, 맘만 먹으면 밖으로 쉽게 몸을 날릴수도 있는 그런 창문.
다급해져서, 반사적으로 그녀쪽을 향해 한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내가 있잖아 하은아..응? 그러지마..”
그녀는 슬프게 고개를 내저었다. 서글픈 미소가 자조적으로 보였다.
“모자라, 너무 모자라..세상에서 나는 혼자다.”
또 그 목소리 때문에 경직되어 있는 나를 이미 돌아보지도 않은채 (자신이 그 목소리로 말했다는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듯했다), 그녀는 나머지 발을 창틀에 올리고 걸터앉는다. 아슬아슬하다!
“아니야, 아니야..서로가 있으면 점점 괜찮아질거야.”
“춥고, 외로워. 아무도 날 예전으로 돌려주진 못해…안녕, 은하야.”
그녀는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이 영원할것만 같이, 느린 동작으로 보였다. 어디선가 귀를 찢는듯한 소리가 들렸다. 사이렌 소리보다도 더 높고 끔찍한.
그리고나서, 하은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은아!!!”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또 그 꿈을 꾸었다.
기절했는데도 꿈을 꿀수 있는걸까? 이번엔 평소보다도 더 춥고, 그게 가능한건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더 어두웠다. 한참을 처음보다 훨씬 커진 외로움 때문에 허덕였다.
처음에 꾸었던 꿈 이후로 외로움의 강도는 더 심해져, 이제는 그 꿈을 꿀때면 제대로 구성된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죽는 날도 머지 않은게 분명하다고, 깰때마다 생각했다.
그리고 드는 생각. 하은이, 그녀가 죽었다. 나 때문에.
하은이가 떨어질때 들었던, 그 지옥에서 나온 듯한 귀를 찢는 소리가 또 들렸다. 아주 저 멀리서 들리는듯 하더니, 조금씩 커져 어느샌가 그때만큼 크게 들리고 있었다.
허억!
숨을 들이키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그제서야 그 소리가 내 자신이 내지른 비명이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이성의 끈을 놓은 자만이 낼수 있는 그 소리. 그것을 느끼는 순간 다시 기절했다.
얼마후인지 알수도 없는 시각에,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아무것도 생각할수 없었다.
아! 하은이는 어떻게 됐을까? 그녀의 시체는…
하은이가 뛰어내렸던 창문으로, 끔찍하지만 머리를 내밀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체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요새 유일하게 빠르게 되는게 있다면 그건 바로 시체수거였기에.
내가 얼마동안 기절해있었는지도 알수 없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그녀의 시체가 사라진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떨어진 자리에는 으레 핏자국이 있어야 마련이건만, 이 미쳐버린 세상에선, 이미 인도는 다른 이들의 피로 물들어 그녀가 떨어진 자리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도로는 매일 물로 씻겨졌지만, 피라는건 죽음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독해서, 색도 냄새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익숙해진 이 상황에서도 시뻘건 이 세상은 생지옥처럼 느껴졌다.
지구의 인구의 반이 죽은데다, 은평구는, 아니 서울을 통틀어 어른들은 몇백명 남지 않았으니 피의 원천은 당연히 수많은 자살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오피스텔만 해도 요새는 묘지보다도 더 적막했다. 최근엔 이러다가 그냥 지구 자체가 인류의 거대한 무덤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하은이가 죽었다는 사실은 묘하게 현실성이 없었다. 허공에 떠 있는 그녀의 몸의 일부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공포보다는 치솟는 외로움이 내 몸과 정신을 지배했다.
추워서 코트를 다시 꺼내고, 창문을 닫고 히터도 켜봤지만, 별로 달라질건 없었다. 냉기는 이 비이상적인 외로움을 느끼는 자들의 몸 안에서 발산되는 것이었으니까.
세계가 전체적으로 평균 기온이 적어도 십도씩은 떨어졌다는 보도는 거짓이 아닐게 분명했다.
나는 습관마냥 무의식적으로 708호쪽의 벽을 바라보았다. 한쪽 구석에 담요 면적쯤을 제외하고는 온통 살얼음에 점령당해있었다. 저 정도의 냉기를 뿜는 옆집남자는 역시 이 일의 근원지임이 분명했다. 저만큼 외롭고도 아직 자살하지 않은채 냉기만 뿜고 있다는건 확실히 비정상이었으니까.
신고할수도 없었다. 경찰은 시체수거에 바빴고,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할수 있다고 해도 다들 우울증 때문에 남의 말에 제대로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제일 끔찍한 점은,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그닥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걸 애타게, 간절히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태가 좋고 싫고를 떠나 그들은 이미 극도의 포기와 이기심에 시달렸다.
텅 빈 사고. 아무것도 생각할수 없었다. 코트를 입은채로 두꺼운 겨울 이불에 들어가, 이번엔 하은이도 없이 혼자 커다란 담요를 뒤집어썼다. 몇시간 동안 누워있다가 잠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 옆집 남자는 어째서 저렇게 외로울까. 이 일은 왜 시작된걸까.
11월 28일. 내 생일이 되었다. 한번도 축하해보지 않은 그 저주스러운 날. 하은이가 죽고나서 벌써 두주쯤이 흘렀다. 그녀가 사라진 후로는, 당연히 외로움이 퍼지는 정도가 훨씬 더 빨라졌었다.
나는 내가 남들보다 빨리 죽지 않는 이유가, 나는 내 존재를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증명하길 원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었는데, 하은이가 죽고나서는 내 존재에 대한 자신감이 다시 사라져버렸다.
곧 나도 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야 말겠지. 어렸을때 외로움은 사치라고 생각했던 그런 것마저도 뛰어넘을 정도로 심해진 외로움. 곧 다가올 죽음을 느낄수 있을 정도였다.
엄마가 나를 위해 죽어준 보람도 없이, 죽고야 말겠지. 엄마, 미안해요. 나도 사람인걸. 이 외로움은 참기 어려워요. 아무리 다른 사람들과 생학하는 방식이 다르다고해도, 결국은 나도 사람인걸. 어쩔수 없잖아요…
하은이가 준비했었던 그 붉은 촛불들은 그 후로 단 한번도 불이 켜져본적 없이 그 하트의 정렬에서 벗어나, 조금은 무질서하게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를 키고 무릎을 안은채로 주저앉아, 흔들리는 그 불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연약한 불빛.
마치 지금 사람들의 마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슬픔과 외로움에 잠겨, 남들의 외로움은 봐줄줄 모르는 차가운 사람들. 포용이나 사랑따위는 지금 저 불빛처럼 곧 나가버릴듯 깜빡거리고 있겠지.
이젠 습관이 되어버린, 708호쪽 벽을 바라보는 일을 또 시작했다. 살얼음은 이제 어린아이 손바닥 크기도 안될만큼 아주아주 좁은 면적만을 남겨둔채 그 벽을 다 뒤덮고 있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잎새’라는 이야기가 무의식중에 떠올랐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나는 죽을거라 말하던 그 여자처럼, 나도 왠지 저 살얼음이 저 벽을 다 덮는 순간 죽을것만 같았다.
반항심이 일어났다. 내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강박관념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해주면 좋겠다는. 그냥 이렇게 죽을순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는 해보고 죽고 싶었다. 그냥 이렇게 바보같이 살얼음이 벽을 다 뒤덮고 내가 죽기만을 카운트다운하고 있기는 싫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죽을거라면, 이 외로움의 근원이 왜 생겼나 그 호기심이라도 풀고 죽자. 대체 왜 인류에게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를.
그러나, 공포. 아무리 죽음 앞에 놓여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는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그렇게 끔찍한 흐느낌을 내는 존재를 내가 마주칠 수 있을까? 그런 한기를 내는 괴기스러운 존재를? 차라리 보지 않고 죽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그런 괴물이지는 않을까?
살얼음이 얼어있는 벽을 향해 다가가, 그것을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그런데…
그런데, 벽에 가까이 다가가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무언가를 구슬프게 흥얼거리는 소리.
살얼음에 닿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귀를 그쪽으로 돌려 최대한 벽에 밀착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흐윽..흐윽..세상에서 나는 혼자다. 생일 축..생..세상에서 나는 혼자다.”
이해할수 없는 소리였다. 생일 축하한다는 노래를 부르려고 애쓰는 목소리는 분명 옆집남자의 목소리였고, 도중에 그 노래를 끊고 울면서 세상에서 나는 혼자라고 외치는 그 목소리는, 초자연적인 그 목소리였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말하는듯한, 성별조차 알수 없는 그 괴기스런 목소리.
현관문에서 몇달전 들었던 생각이 다시 났다. 마치 두 인격이 컨트롤을 잡기 위해 서로를 싸우고 있는것 같다는. 옆집 남자의 인격, 그리고 이 세상의 외로움을 다 모아놓은것만 같은 그 집합체의 인격!
그거다!
옆집 남자가 그렇게 엄청난 한기를 뿜으면서도, 이 일의 근원이 되었으면서도 죽지 않았던 이유! 여태 인류가 느꼈던 외로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모이고 모여, 더 이상 그저 감정 하나로만은 남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것이다.
현대 인류에게 있어 외로움은 아마 다른 감정들보다도 더욱 더 클 것이다. 그 외로움들이 모여 아예 하나가 되어버린것이고, 어쩌다가 옆집 남자에게 깃들어버린것이다. 옆집 남자는 그것의 ‘집’이었기 때문에 여지껏 죽지 않았던 것이고, 옆집 남자는 그걸 싸우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왜? 그 사람은 외롭지 않을까? 고작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기 위해 그렇게 힘든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것일까?
무언가 퍼즐이 맞추어질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내 머릿속은 이미 혼란스러웠다. 벽의 구석을 바라보니 살얼음은 내 죽음을 감지한듯, 가속도가 붙어 구석을 거의 모두 덮고 있었다. 이젠 문구점에서 파는 조그만 지우개만큼도 자리가 남지 않았다.
저 벽이 모두 덮이면 나는 죽을것이다. 외로움으로 인해서.
살얼음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점점 빨라졌다. 몇초 있으면 아마 다 덮일것이다! 그럼 나의 죽음은 무의미해진다. 옆집남자는 계속 알수없는 주도권 싸움을 할것이고, 인류는 그 사실도 모른채 다 죽어갈것이다! 아무도 옆집 남자에게 그 외로움이 몰려갔다는걸 알지도 못한채로.
달렸다.
무엇을 해야할지는 몰랐다. 그저 본능대로 달렸다.
문을 열어제꼈고, 708호쪽으로 내리 달렸다. 문이 활짝 열려있으면 히터값이 엄청 나오겠지만, 이제 그런게 무슨 상관이랴!
쿵쿵쿵.
708호 문을 두드렸다.
“열어요, 열어!”
난 무엇을 하려고 하는걸까? 상관없었다. 이래야만 할것이다.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이젠 30초도 남지 않았을것이다, 살얼음이 벽을 모두 덮는것은.
708호에선 대답이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이게 왠일인가? 문은 열려있었다! 하기사 오피스텔 사람들도 다 죽었고 범죄도 없는데다, 전세계 인류가 여태 느꼈던 모든 외로움이 다 집합된 장소인데 뭐가 두려우랴.
딸칵!
신들린 사람처럼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극심한 아드레날린으로 인해 온 방의 모습이 사진처럼 눈과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빙하기인것마냥 온통 얼음에 뒤덮여, 하늘색을 풍기는 짙은 하얀 얼음에 쌓인 얼마 없는 가구들, 그 얼음탁자 위에 놓여진 케이크 하나.
그리고, 그 케이크를 바라보며 두 손을 얼음탁자 위에 짚고, 고개를 푹 숙인채 계속 두 목소리를 번갈아 내고 있는 남자의 뒷 모습.
엄청난 한기가 내 몸을 휩싸는걸 느꼈다. 그 남자에게서 나오는것이리라. 그 남자인지, 외로움의 집합체인지 알수 없는 그 존재는 내가 커다란 소리로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내면의 외로움과 그 싸움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는것이다.
흐느끼는 남자의 뒷모습. 목소리로 보아하면, 그 남자도, 외로움도 모두 울고 있었다.
연민. 그리고 공감. 마치 어렸을때부터 내가 부인해온, 내 내면을 보고 있는것 같았다. 어린 은하, 생일마다 죄책감에 시달리고, 아버지의 울음을 들으며 방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고있는 유치원생. 아직도 내 안의 어디선가에서는 울고 있을 아이.
내 존재를 합리화시켜야겠다는 생각도, 그래서 오직 그 이유로 남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도 모두 날아가버렸다.
다만 이번엔, 정말 누군가를 안아주고 싶어서, 그저 안아주고 싶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을 안아주고 싶다. 저 외로움이 찾아오기 전에도 외로웠던 옆집 남자를.
저 외로움을 안아주고 싶다. 여태 전 인류가 느껴야만 했던 외로움을, 이 시각이 오기 전까지도 점점 늘어나서, 악순환을 반복하며 평생 혼자여야만하는, 저 알수 없는 존재조차 안아주고 싶다. 그 한없이 슬픈 감정을 없애주고 싶다.
묻어두었던 본능이, 그 살얼음이 벽을 모두 덮기엔 이제 정말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걸 알려주었다.
5초.
나는 그를 향해, 그 외로움을 향해, 달려간다.
4초.
신발도 벗지 않은채, 어렸을 적 내 모습같이 한없이 떨고 있는 그를 향해.
3초.
지금 내가 사라진대도, 저 끔찍한 슬픔과 외로움만은 사라지길바래.
2초.
사진에서만 봤던 엄마의 얼굴, 외로움을 외치던 하은이의 얼굴.
1초.
혹시 내가 자길 밀어낼까 초조히, 슬프지만 따스하게 웃어주던 오빠의 얼굴. 내게 꼭 해줄말이 있다며 택시를 따라 달리던 오빠의 모습.
0초.
나는 그를 돌려 안으려 하지도 않고,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그를 한껏 껴안았다. 내게 남은 온기를 모두 주려는듯이. 서서히 힘이 빠진다.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그 외로움을 받아들이기를 부정하며, 계속 주도권 싸움을 하던 옆집 남자에게서부터, 내게로 그 외로움이 흘러들어왔다. 그 외로움마저 다 감싸주고 싶었던, 더 그 외로움을 원하는 내게로, 반갑다는듯이 옆집 남자에게서부터 내게로 모조리 다 흘러들어왔다.
그 한기는 끔찍했다. 액체처럼 몰려들어와 내 몸 구석구석까지를 모두 한껏 얼렸고, 옆집 남자처럼 그것을 몰아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몸은 금새 얼기 시작했다.
내게로 그 외로움이 흘러들어오는 시점, 서서히 주도권을 잡게된 옆집 남자는 자신을 뒤에서부터 안은 존재를 보기 위해 케이크에서부터 내게로 눈을 돌렸다.
“은하야!!!!!”
놀라움과 알수없는 감정들로 가득 뒤섟여 커진 그 눈. 내가 평범해서 알아보지 못하는거라고 생각하던 목소리. 정말 낯이 익던 목소리. 그리고, 외로움을 항상 부정하던 그 성격.
11월 28일에 케이크까지 갖다놓고, 이길수 없는 싸움을 하며 생일축하 노래를 끝까지 부르려고 애썼던 그 사람.
내 오빠였다.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입은 이미 얼어있었다. 머리에까지 한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어두워진다. 하지만 내 꿈에서같은, 그런 차갑고 외로운 어두움은 아니었다.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을 몰아냈지만, 내 속에 들어와 하나가 됨으로서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은 외로움이 되었고, 점점 치유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외로움의 포스를 한번의 포옹으로 다 받아내야했던 나는 어떻게 될까. 이게 죽음일까? 그렇다면 죽음치고는 매우 편안한 느낌이다.
내가 죽으면 오빠는 또 혼자가 될텐데.. 불쌍한 내 오빠. 이제 그렇게 내게 해주고 싶어했던 말은 못하겠네. 울지마, 제발. 어렸을땐 날 그렇게 싫어했잖아. 이제와서 날 사랑하게 되니까 또 날 떠나보내게 되는, 불쌍한 오빠. 엄마를 내게 잃고, 이젠 나도 잃는, 불쌍한 오빠.
미친듯이 나를 껴안고 내 이름을 부르는 오빠,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케이크.
정신을 잃은건지 죽은건지 알수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편안하다. 내 몸 속에 있는 외로움도, 스스로를 치유하는 따스함이 느껴진다.
나는 그저 내 존재만을 입증하려는 이기심을 버린 후에야, 진정한 나를 되찾았다.
첫눈이 오기 전에는 , The End.
지나치게 낡고 허름해서 오피스텔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건물의 7층은, 그 건물의 다른 층들과 매한가지로 T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T자의 짧은 쪽,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있는 곳에는 707호와 708호가 있었다.
쥐죽은듯 괴기스러운 적막함이 감도는 건물. 그 이유는 이제 이 오피스텔 건물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두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707호 여자와 708호 남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707호 여자는 살아있다고 볼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707호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그 안에서는 아직 별로 쓰이지 않은 붉은색의 초들이 바닥을 마음껏 휘젓고 있었다. 꽤나 많은 갯수들이라, 자칫하면 보는 사람이 어지러울수도 있겠으나, 자세히 관찰한 사람들이라면 그 초들이 한때는 커다란 하트를 그리며 그 방바닥을 거의 대부분 점령했었다는 사실을 눈치챌수 있으리라.
또 하나 707호에서 쉽게 눈치챌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708호와 맞대고 있는 벽쪽의 바닥에는 물이 마른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벽 자체도 아직은 조금 젖어있었다. 마치 한때 그 벽에 얼음이 얼어있다가 그것이 녹아내린듯한 모습이었다. 707호의 여자는 그 집에 없었다.
그와 반해 복도의 맨 끝에 있는 708호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그곳이 707호의 여자가 ‘살아있는듯 마는듯’한상태로 있는곳이었다. 708호의 남자는 707호의 여자를, 놓치면 깨뜨릴듯한 몇억짜리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12월달임에도 불구하고 708호 안의 온도는 적도 부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708호의 창문 밖으로는 눈이 오는것이 보였다. 그 눈은 그 해의 첫눈이었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겐 여러가지 혼란한 감정을 가져다주었지만, 708호의 남자는 그 창문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능은 대부분 신기한것을 좋아하게 되어있고, 따라서 눈을 좋아하니까. 더군다나 이 오피스텔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괴상한 이유로, 굉장히 큰 창문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707호의 여자만 안고 있을뿐이었다.
708호의 남자. 그는 괴상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준수했을법한 얼굴이나, 지금은 몇일은 밥을 한술 뜨지도 못한듯 핼쑥한 얼굴과 해골마냥 푹 들어가버린 퀭한 두 눈을 하고서, 헝클어진 머리를 빗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초점없는 눈은 한결같이 그가 안고있는 707호 여자의 얼굴로 향해있었다.
그는 마치 그녀를 일초라도 놓치면 그녀가 사라질것같은 태세로, 보호하는듯 그녀를 아주 가까이 감싸고 있었다. 이런 온도에서 덥고 답답해서 여자가 짜증을 낼법했지만, 사실 707호 여자는 지금 별로 그런 사소한일에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꽁꽁 얼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추워서 얼어있는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더운 온도에도 불구하고, 정말 한토막의 얼음같이 딱딱했고, 자세를 바꿀수도 없었다. 얼굴에서는 혈색이 전혀 돌지 않았고, 실제로도 이 온도에서도 절대 녹지 않는 살얼음이 그녀의 몸을 잔뜩 뒤덮고 있었다. 그녀는 굉장히 괴상한 자세로 얼어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자면 그녀는 마치 어떤 사람을 뒤에서 안다가 얼어버린듯한 자세였다.
‘살아있는듯 마는듯’한 상태라는것은, 그녀는 얼음인 상태이기 때문에, 심장박동수를 확인할수 없기 때문이었다. 분명 사람이 그만큼 얼면 죽은게 확실하지만, 남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고, 아마 그녀가 자기 눈 앞에서 눈을 까뒤집고 죽지만 않았다면 여자는 살았다고 믿었을것이다. 그는 그만큼 절박했다.
708호 남자가 마치 울듯한 소리를 냈지만,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꺽꺽’거림에서 그쳤다. 아마도 그는 지나치게 많이 울어버려서, 더 이상 나올 눈물도 없기 때문일 것이리라.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테이블 위에는 벌써 적어도 일이주는 된듯한 아기자기한 케이크가 놓여있었지만, 그 케이크는 단 한입도 먹히지 못한채 그 더운 온도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줄곧 707호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는 말이 맞겠다. 그녀는 머리카락조차 모두 얼어버려서, 단 한올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얼음을 쓰다듬을수 있다면 쓰다듬는다는 말이 옳을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건 있을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차피 학자들은 아직 그런 일에서 쓰일수 있는 종류의 단어를 개발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쓰다듬는다는 말을 써야한다. 학자들이 그 단어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는건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도 미래에도, 얼음을 그렇게 애절하게 쓰다듬어본 사람은 708호 남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한사람을 위해서 단어를 만들어내는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는 곧 영양부족으로 죽을것같아 보였다. 사실 그의 문제는 신체적인것만이 아니었다. 정신적인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정신적 문제는 매우 복잡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로 줄이자면 현재 그의 정신적문제 제공자는 이 여자 단 한 사람이리라.
앉아있을 힘도 없어진 남자는, 그녀를 안은 그 상태로 그녀의 차가운 머리 위에 자신의 머리를 올려놓았다. 밖에서 오는 첫눈보다도 더 차가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그는 자신의 인생동안 그녀에게 단 한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사랑해.”
벌써 48시간이 넘게 눈을 단 한번도 붙이지 못한 남자는, 그 말과 함께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그는 자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그의 몸은 지금 상당한 불만이 쌓여있었다. 영양부족, 스트레스, 기타 등등. 말만 해라, 그 남자는 그 문제를 모두 갖고있을테니. 요 두달동안 느끼지 못한 신체적인 문제들은 근래 몇주사이에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는 잠드는 바람에, 그는 그가 그렇게 고대하던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기사 하도 작게 들려서, 일어나있었다고 해도 듣지 못했을수도 있겠다. 그것은 동물들도 듣기 힘들 정도로 아주아주 작게 얼음 사이로 들려왔고, 점점 얼음이 녹을수록 커져갔다.
그것은 707호 여자의 심장박동소리였다.
첫댓글 어흙.. 너무 슬프잖아요..... ㅠㅠ
사랑해 라는 말이 오빠가 여동생한테 하는말인지 아님 이성적인 감정인지 ..혹 이거보신다면 답해주세요.. 아니면 그냥 독자에 따라 해석하는건지요. 너무 재밌네요 어떻게 이런 스타일의 글을 쓰실 생각을 했는지..정말 잘봤습니다 앞부분은 넘길어서 포기할까 하다가 끝까지 읽었는데 완전 재밌습니다 이런글 또 부탁해요 !!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했으니, 가족간의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항상 어렸을때 원망만 해서, 여동생 마음에 상처를 냈으니, 드디어 사랑한다고 하는거죠.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 ^ㅇ^
답글까지..너무 감사해요. 다른글 많이 부탁해요. 글흐름이 섬세해서 참 맘에 들었습니다 여자분이신가;; 암튼 감사!
너무 잘읽었습니다>ㅅ<!
결국 살아 나는 거죠?????? 넘 안타까워서....
네, 나중엔 둘 다 살아나는겁니다!
굉장히 신비한느낌이네요 미스터리하고 ㅎㅎ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