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롱불과 형광등에 대한 명상
세상의 이치 속에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호롱불과 형광등 두 가지는 밝음에 있어서 천지 차이다. 호롱불 밖에 없던 시절, 어둠이 내리자마자 먼동이 트기까지 그 호롱불 아래에서 길고 긴 밤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석유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주를 마시고 난 그 대두병을 가지고 기름집에 가서 석유를 사 가지고 오곤 했다.
사 온 석유를 희디 흰 호롱에다 채우고, 불을 붙이면 되었다. 심지는 대개 문종이나 굵은 실들을 모아서 만들었는데, 시골에서는 대부분이 문종이었다.
할머니와 어린 시절 몇 년을 함께 살았던 내가 호롱불 담당이었다. 한참을 사용하면 문종이로 만든 심지가 다 닳아서 그을음이 나기 시작하고 그때마다 심지를 조금씩 잘랐다. 심지가 너무 짧아지면 선반 위에서 문종이를 꺼내어 알맞게 자른 뒤, 돌돌 말은 심지를 호롱 뚜껑에 끼우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성냥으로 불을 지펴서 호롱에 불을 붙이면 마치 올림픽 전야에 붙이는 성화불처럼 타오르는 불꽃, 그때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랴. 조용히 타오르다가 누군가 문을 열거나 닫을 때 이리 저리 흔들리면서 타오르는 불꽃의 향연이 이어졌다. 나는 넋을 잃고 그 호롱불을 바라보았고, 어떤 날은 해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도 호롱불을 보기 위하여 어둠이 어서 들기를 기다리곤 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흔들리는 불꽃, 그 불꽃이 다양한 형상을 이루며, 어둠속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곤 했다. 그 불꽃이 만들어내는 정경, 그 정경은 그 당시 나의 삶과는 전혀 다르긴 했지만, 알 수 없는 어떤 예시豫示를 전달해주었던 지도 모른다.
가끔씩 망연히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하나의 또 다른 호롱불이 되는 듯한 그 저녁의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그 빨간 불꽃, 나는 그 불꽃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때 그 불꽃은 불의 모습이 아니고, 또 무엇이었을까? 내 가슴속에 조그맣게 타오르던 어떤 열망, 그리고 그 모습은 어둠에서 빛으로 새롭게 전이해간 또 다른 우주, 새로운 생성을 기다리는 우주, 활활 타오를 날을 기다리는 우주, 그 광활한 우주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내가 무엇인지를 나는 안다.
불꽃처럼 지칠 줄 모르고
나는 타올라 소모된다.
무엇이나 내가 닿으면 빛이 되고
무엇이나 내가 떠나면 숯이 된다.
분명히 나는 불꽃이니라.“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영혼의 자서전>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언젠가는 타오르기를 기다리는 하나의 불꽃이었는지도 모른다.
호롱불에 불꽃이 지펴지고 활활 타오르다가 바람이 불 때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모습이 얼마나 신비했던지, 그래서 성냥불로 호롱불을 지폈다가 입으로 ‘호’ 불어서 끄고 다시 피우는 것을 나는 좋아했다.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들키면 한 소리 들어야했다.
“얘야! 불가지고 재리를 많이 하면 저녁에 오줌 싼단다.”
조금 살만한 집에서는 ‘호야‘라고 부르는 램프를 켰고, 전기가 들어오기 조금 전에는 우리 집에서도 하나 장만했었다.
호롱불에서 램프로 바꾸면서 그 불꽃의 신비함도 다른 형태로 전이해갔다. 너무도 환한 램프의 불빛 속에서 호롱불만이 나타낼 수 있던 그 빛의 용량을 가늠조차 할 수 조차 없게 되었다.
“드디어 무엇인가라고 느낄 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낮 동안에 그것은 그저 어떤 것일 뿐이며 하나의 소용되는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고 손으로 벽을 따라 더듬거리면서 겨우 돌아서 몇 발자국 음직일 수 있는 정도의 어슴푸레한 빛에 힘입어, 쓸쓸한 집안을 헤매는 그때, 찾고 있는 램프, 보이지 않는 램프, 하지만 드디어는 놓아 둔 채 잊어버렸던 곳에서 찾아내고야 마는 램프, 겨우 더듬어 손으로 잡은 그 램프가 아직 불도 켜지 않았는데, 당신을 안심시키고 부드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침착하게 하고,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
보스꼬(Bosco)가 <깊지 않은 망각忘却>에서 표현했던 그 램프불의 추억이다.
장 부르데에뜨는 <꿈의 유물>이라는 책에서 “조용한 램프처럼 파란 부채 꽃이 타고 있었다.“ 고 말했고, 로덴바크는 <고향 하늘의 거울>에서 “방안의 램프는 한 송이의 흰 장미다.”고 말했다.
또한 타고르는 <반딧불>이라는 시에서 “나의 수줍은 램프를 격려하려고 광대한 밤이 그 모든 별들을 켠다.“라고 말했고, 장 드 보세르는 “하나의 등불은 그 기름의 검은 눈(眼)속에서 불타야만 하는 것이다.” 고 말했다.
그보다 더 인간의 내면을 비유해서 쓴 글이 옥타비오 빠즈의 글이다. “석유 램프의 빛, 설명하고 훈계하며 자기 자신과 의논하는 빛, 그것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게 말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관통했던 호롱불과 램프의 시절이 지나가고 어느 순간, 불쑥 전기가 들어왔다. 말 그대로 대명천지大明天地나 다름없었다. 전깃불이 들어오면서 그처럼 어둡고 침침하면서도 아스라한 기억들이 썰물과 같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표정하게 아니면 너무 환해서 그 앞에 몸을 들이미는 것조차 부끄러운 형광등 불빛은 더 이상 나에게 영감을 주지도 않고, 불꽃을 피우지도 않고, 그저 모든 사물 그 중에서도 활자의 정확성만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이른 나이부터 ’활자중독증活字中毒症‘에 걸려서 매일 매 순간, 문자를 조립하는 ’문자조립공文字組立工‘으로 삶을 유지하는 나에게 호롱불과 램프를 거쳐 형광등으로 전이해간 불빛들이 하나의 역사가 된 것이다.
오랜 나날이 지난 지금, 굳이 그 ‘호롱불과 램프를 무엇인가 하고 정의해야 한다’면 내 기억 속에 저장된 ‘우울하게 빛나던 보석 같은 꿈’이라고 하면 너무 미화하는 것은 아닐까?
2024년 7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