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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요하강 (4) 청나라 보정군관학교의 개교 와 육군준장 송00
군사력 강화에 노력했던 청나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국에 침입하자 청나라는 산업화와 군사력 강화에 많은 국력을 기울였습니다.
1881년에는 속국이던 조선에서도 영선사 등이 파견되어 중국의 군사기술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서양의 과학기술 뿐만이 아니라 군국주의·제국주의와 한통속이 된 대자본을 이기는 것은 당시 중국으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일인들에 의해 무너지는 조선의 공장 <잔내비표 성냥>
조선에서는 개화 초기
서울에 잔내비표 다항(성냥)이라는 유명한 공장이 있었습니다.
잔내비와 복숭아
잔내비가 탐스러운 복상(복숭아) 가지를 입에 물고 오르는 유명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성냥이었는데,
고려말 조선시대에 이미 황, 질산칼륨을 추출할 능력이 있던 조선이 성냥 정도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성냥은 불씨를 간직할 필요가 없어 그 무렵 매우 귀한 상품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잔내비표가 얼마나 유명한 성냥이었던지,
일본 성냥 공장이 아무리 만들어 팔려고 해도 조선에서는 ‘잔내비표 다항’이 석권을 하고 있어서 일본 자본과 성냥은 조선 진출이 불가능한 판국이었습니다.
일본 자본이 온갖 방법을 써봐도 ‘잔내비표 성냥’을 이길 방법이 도저히 없자,
일인들은 잔내비표 다항 수천통씩 사서
한강 무인도에 들어가,
성냥을 바닷물에 적신 후 말려서 다시 팔았다고 합니다.
그뒤 잔내비표 다항은 조선인들에게 일본 제품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게 되었고 결국에는 일본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고 합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앞선 일본 제국주의의 등장
청나라의 부국강병과 근대화 노력도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먼저 시작한 서양을 따라잡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서양보다 뒤진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제국주의 군국주의 자본주의 체제를 가동시킨 상태인지라
서양과 함께 본격적으로 조선, 만주, 연해주, 사할린주, 캄차트카, 대만, 남양군도, 태평양으로 가는 침략주의 노선을 가기 시작했고,
청나라는 1895년 청일전쟁 패전후에도 국방력을 강화하려고 하였으나
서양, 일본, 러시아의 침입에 제대로 된 저항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1895년 왕궁의 왕비도 일본 사무라이가 습격해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고
1900년에는 청나라의 수도 북경이 8개국 연합군에 함락되기도 하였습니다.
과거, 아시아의 종주국으로 ‘중화 대국’으로 인정 받던
중국이 이제는 본국의 수도도 지키기 힘든 나라이며, 외세에 의해 반식민지 국가가 된 것이었습니다.
일제가 가장 먼저 노리는 지역은 조선과 가까운 만주, 화북, 산동, 대만에서 시작해 중국 산업의 중심지 강소, 절강 등이었으며,
'혼세마왕', '일제의 개' 등으로 불려지며
본격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는 중국의 친일파와 일뽕주의자’ 양성에 나섰고 결국에는 중국내 할양지와 조차지, 대만, 사할린섬 남부 획부, 만주 획득이라는 성과를 얻어가게 됩니다.
제정 러시아에 의한 만주 동청철도의 건설 (1897~1903)
청일전쟁 이후
과거 잦은 국경분쟁으로 오락가락하던 러시아와 다시 가까워진 청나라는 1898년경 요동반도의 일부를 러시아에 조차하고
만주에서는 청나라 영토임에도 러시아가 자기 땅인양 동청철도(중동로 철도)를 개설하기 시작하였고, 요동반도로도 남만주 철도(1898~1903, 하르빈과 여순간)가 개통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한 하르빈이 봉천(심양)에 이어 만주의 대도회로 본격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만주를 놓고도 러시아, 일본, 미국, 영국, 이태리, 프랑스, 독일??? 등의 각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한족의 만주 이주와 인구의 급증
동청철도가 만들어질 무렵, 중국도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과
서구화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과 만주 침략에 대응해 한족의 만주이주를 장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울의 강추위와 낙후된 지역이었던 만주는 철도망과 아무르강, 요하,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일대의 해운교통 확대와 광활하고 비옥한 만주의 생산력으로 인해
중국 본토로부터 인구가 본격 유입되었고
1908년까지 7년 정도 만에 약 810만여명에서 약 1580만여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청나라 말엽 무렵 만주 동북3성의 인구가 조선을 추월하였고,
농업생산력도 조선을 추월하였습니다.
1901년 11월, 청나라의 중신이었던 이홍장은 병으로 죽었고,
원세개의 직예총독 및 북양대신 임명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와서 세도를 부린 적 있는) 원세개(위안스카이)가 보정으로 가서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 되었습니다.
신축조약에 따라 군사훈련교원들은 천진 근처에는 주둔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도 보정으로 옮겼가게 되었습니다.
원세개의 신군창설
1902년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인 원세개는 보정 동관 밖에 상비군(신군)을 창설하고 군정사(나중에는 독련공소)를 설치했습니다.
병비, 참모, 교련의 3처를 설치하였고,
유영경, 단기서, 풍국장이 간부에 임명되었고,
5월에는 원세개의 승인을 받아 보정 외곽에 <북양행영장판학당> 이 설립되었고 풍국장이 총판(즉 교장)이 되었습니다.
보정 군사학당의 입학 시작
1903년 8월경, 군사 학당의 첫 등록을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일명 '보정군관학교'라고 불려진다.)
이 무렵 청나라는 무과제도 등의 과거제도를 폐지하기 시작했고, 관료체계와 군사체계를 갱신하려는 시대인지라
그 보정 군사학당의 인기와 입학 경쟁은 엄청났다고 합니다.
특히
일제의 만주 진출과 청일전쟁, 열강들의 이권다툼,
온갖 마적, 비적떼가 들끓던 무법천지 ‘만주’출신에게 군관학교는 곧 출세의 길이며, 입신양명과 인생 성공이 보장된 길로만 보여졌습니다.
청나라 최초의 정규 장교 양성교육 기관이자 최초의 정규 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일명 ‘보정학당(나중에는 일명 <보정군관학교>)’ 은 청나라 뿐만이 아니라,
조선, 안남, 대만, 몽골 등지에서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이은
아시아의 대표적인 근대적인 군대 사관(장관 혹은 장교)교육 기관이 되었고
한국에서는 1900년대 초기부터 1990년대 군부 독재시기까지 사회를 움직이던 ‘육군사관학교’라는 군 장교양성 조직의 모범이 된 곳 중 하나였습니다.
육군 준장 송00과 김00
일명 '보정군관학교'를 다녔다고 알려진 사람중 육군 준장 송00과 김00은 근현대사를 다룸에 있어서 간혹 나오는 사람이었지만
1990년대 이전 남한에서 크게 알려진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둘 다 북한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지만
월북의 낙인이 찍혔던 송00의 경우에는 억울한 점도 약간 있어 보입니다.
김0의 인맥으로 일방적으로 간주된 송00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직후 대통령이 된 이00에 의해 이00이 싫어하던 김0의 중국 인맥으로 일방적으로 간주된 송00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대통령 이00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해 독재로 가는 길을 쉽게 열어준 일본군 하급장교 출신이나, 만주국군 출신들과 달리 한국 군부의 건군 초기에 벌써 밀려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청나라 보정육군군관학교는 다음편에서 계속됩니다.)
첫댓글 잔나비표 다항을 이길려고 일본이 꼼수를 썼군요 만주 동청철도 건설과 한족의 만주이주 장려로 인구가 늘고 농업생산력이 조선을 추월했군요
근대 일본도 서양의 것을 베낀 것인지라
조선을 상품시장화 하고서부터 본격적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입니다.
한국전쟁만 없었어도 일본의 전후복구는 더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