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제1독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4,1-8
형제 여러분, 1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5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
6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7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8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
복음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7
그때에 1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2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4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5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공포 아니면 축복?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신다고 믿는 것이 나에게 공포일까요, 축복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선은 거짓말입니다. 자기 속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모조리 아는 분이 계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지은 후의 아담을 부르시는 하느님께서 이미 그들이 죄지은 사실을 알고 계심을 믿었더라면 그들은 솔직히 자신들의 잘못을 주님의 자비에 맡겨야만 했을 것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7)는 줄거리는 몰라도 제목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공포영화입니다. 내용보다 그냥 제목 자체가 공포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이야기는 4명의 고등학교 친구가 7월 4일과 다가오는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면서 시작됩니다. 축하 행사를 마치고 구불구불한 해안 도로를 따라 운전하던 중 우연히 보행자를 들이받았습니다. 당황하고 반향을 두려워한 그룹은 시체를 바다에 버리고 다시는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 쥴리는 1년 후 집으로 돌아와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소름 끼치는 쪽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복수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갈고리를 휘두르는 한 인물이 친구들을 표적으로 삼는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헬렌과 배리는 갈고리를 휘두르는 신비한 살인자의 손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쥴리는 겁에 질려 자신들이 때린 남자가 물에 빠졌을 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미스터리를 더 깊이 파헤쳐가면서 쥴리는 그들이 때린 남자의 이름이 데이비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쥴리는 그날 밤까지 일어난 사건을 종합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그 사고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절정은 살인자가 데이비드가 아니라 오히려 딸, 수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데이비드를 죽인 후 우연히 위 네 명에게 사고를 당하고 수장당할 뻔한 수지의 아버지 벤 월리스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차로 치고도 수장시키려 했던 이들에 대해 복수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누군가 우리가 한 일을 알고 있다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도 우리가 한 일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서로 멀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끔찍한 기억이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다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알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그 닥쳐올 징벌로부터 피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솔직히 의견을 나누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라도 이전보다 훨씬 솔직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놓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거짓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아신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이니 더욱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다 아시고 계신다는 믿음은 나를 솔직하게 그분의 자비에 맡기게 만듭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 가서 헌금하라고 어머니께서 주신 50원으로 오락실에 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제가 성당 안 가고 오락실 간 것을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보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주보를 가지고 오락실에 가서 주보를 가져다드렸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제일 싫다고 솔직하여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헌금은 안 하고 동전을 헌금함에 넣는 척만 하고 그것으로 오락실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꼼짝없이 성당 주일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다 아시고 계시다는 사실은 공포가 아니라 축복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만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서 거짓이 없도록 합시다. 위선은 우리가 정말 그러한 존재로 알게 만들어서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잠시라도 어떠한 존재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믿어봅시다. 그러면 두렵겠지만, 그냥 숨기고 살며 하느님과 이웃과의 단절을 체험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를 솔직함과 회개, 구원의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올해 11월 16일이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접고 대신 주님 안에서 평화와 위로의 마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수능을 생각하다 보니, 요즘에도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 때 이런 말을 선생님께 많이 들었습니다.
‘사당오락’ 네 시간을 자면서 공부하면 합격하고, 다섯 시간을 자면서 공부하면 불합격한다는 말입니다. 참, 이런 말도 있었다.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마누라(남편) 얼굴이 바뀐다.’, ‘공부 안 하면 거지 된다.’, ‘이 교실에 앉은 애 중 태반은 남의 들러리로 살 게다.’
실제로 많은 학생이 잠을 줄여가면서 또 하고 싶은 것도 꾹 참으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말을 듣게 되지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대학교에 들어갑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제는 취업 공부에 진입하게 됩니다. 취업에 성공한 뒤에도 끝이 아니지요. 이제 직장에 들어가 승진 시험 속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행복의 실체 안에서 행복과는 더 멀어지는 것만 같다고 말하는 많은 젊은이를 봅니다. 행복은 언제 올까요?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행복은 체험이다.”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행복을 많이 겪어본 사람만이 더 자주, 더 쉽게 행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스펙을 쌓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종잣돈을 모으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적금을 붓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재테크에 뛰어들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불합리한 일과 고된 노동을 참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행복을 찾기 위해 지금 전혀 노력하지 않고, 또 지금 행복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과연 그런 준비를 했다고 미래에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막연한 미래가 아닌 확실하고 구체적인 미래를 살펴볼 수 있어야 지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육신이 죽은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시지요. 바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은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만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대상은 하느님보다 결코 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뛰어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지금의 행복을 만들어 가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오늘의 명언: 낙관적인 사람은 고난에서 기회를 보고 비관적인 사람은 기회에서 고난을 본다(윈스턴 처칠).
사진설명: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