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세상의 어머니들에게 02.정직과 청빈 03.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04.시간밖에서 살다 05.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06.당신은 행복한가 07.법정스님 2005년 길상사 봄 법회
법정 스님 오디오 북 다운
- 우리 시대 최고의 목소리 ‘김세원’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하는 ‘Isadora’를 들으면 지금은 사라진 동아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밤의 플랫홈’이 생각난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목소리가 떠오른다. ‘안녕하세요? 김세원입니다.’ 김세원(金世媛, 1945년 7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방송인이며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이사장을 3년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성우, DJ로 활동하면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2003년 9월에는 임기 3년의 EBS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간 음악가 김순남의 외동딸이다.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구니다치 대학 유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동양방송(TBC) 1기 성우로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차분하고 우수에 찬 목소리로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1964년부터 방송을 시작해서 40년 넘게 방송을 지켜온 김 세원은 ‘우리 시대 최고의 목소리’를 가진 방송인이다. ‘밤의 플랫홈’, ‘김세원의 영화 음악실’, MBC FM의 ‘가정음악실’, KBS_1FM의 ‘FM 가정음악실’,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 위에’ 등의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통해 청취자들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TV에선 수많은 다큐멘타리 해설을 맡았던 한국 방송의 살아있는 역사다. 또한 영화 ‘친절한 금자 씨’의 해설을 맡아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광고’를 통해서는 품위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를 전해주었다.
- 김세원이 말하는 법정 스님과의 인연 나는 천주교 신자다. 하지만 종교를 초월해서 언제나 법정스님의 책을 통해 영혼의 산소를 공급 받았다. 법정 스님이라는 시대의 스승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그 분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꼈다. 특히 [무소유]를 읽을 때의 감동은 너무나 깊은 것이었다. 당시는 CD라는 것이 나오기도 전이어서 LP판을 쓰던 시절인데, 검고 커다란 LP판에 내 목소리로 그 책을 녹음해서 영원히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존경과 ‘오디오 북’에 대한 소망을 안은 채 시간이 흘러 1993년이 되었다. 그해 MBC-TV에서는 ‘우리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법정스님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나는 해설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법정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또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2003년 여름, 이젠 정말 스님의 오디오 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길상사를 찾았다. 법정 스님은 ‘김세원 씨가 한다면 해야지’ 하시며 책을 여러 권 내어주셨다. 막상 책을 받고나니까 머리와 가슴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잘해야 할텐데, 완벽해야 될텐데, 어떻게 하면 법정 스님을 존경하는 내 마음을 잘 담을 수 있을까.. 이 CD가 나오는 데는 4년이 걸렸다. 녹음한 CD를 드렸을 때 법정 스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셨어요. 나는 생각도 못했는데 김세원 씨가 이렇게 다 해줘서 고맙고 기쁘네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해보세요.’ ‘계속해서 해보세요’하는 말씀에 나는 안도했다. 마음을 다해서 만들었으나 최선의 작품이 안나오면 어쩌나 고심했던 이 CD가 스님께 ‘그다지 맘에 안 드신 것은 아닌 작품’으로 여겨졌다는 생각이 든다. 법정 스님이 클래식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배경 음악은 모두 귀에 익은 클래식으로 썼다. 4년 동안 다듬어진 마음이 CD 안에 잘 녹아서, 법정 스님이 전하시는 맑고 향기로운 말씀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가기를 바란다. 연꽃 향기처럼...
1.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 저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中에서 ] 6:46 1.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창조력을 지닌 이는 곧 어머니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우주의 생명력을 사랑으로 빚어 탄생시킵니다. 이런 창조의 능력을 지닌 어머니이므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어머니들의 차지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이지요.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면 집에 훈기가 없습니다. 집은 아버지가 가꾸지만 집안은 어머니가 다스립니다. 어머니는 당초부터 어머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됩니다.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에 견줄 만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분들도 그 원천을 따져 보면 어머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절과 덕성을 길러 주고, 작은 일에서부터 책임감을 심어 주는 일이 긴요합니다. 작은 풀꽃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가도록, 그래서 자연의 신비에 마음이 열리도록 이끄는 것도 어머니들의 할 일입니다. 문제는 어떤 상황 아래서건 한 인간으로서, 대지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영혼과 함께 성숙해지는 일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께서 두루 복 받으십시오. 어머니들, 감사합니다. 2. 정직과 청빈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어떤 개인의 소유라 할 지라도 크게 보면 이 우주의 선물이다. 선물이란 감사히 받아 값있게 쓸 때 빛이 나고 묵혀 두면 썩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선물’을 욕심 사납게 독차지하거나 잘못 관리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당장 회수를 당한다. 이것이 우주 질서요 이 세상의 어김없는 도리다. 신이 존재하고 인과의 법칙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지는 그 누구에게도 소속될 수 없다. 땅은 수많은 생물들과 함께 우리 인류가 오랜 세월을 두고 땀 흘려 일 구고 가꾸고 거두어들이면서 의지해 온 삶의 터전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언젠가는 돌아가 묻힐 곳 또한 이 대지다. 우리는 이 대지 앞에서 항상 나그네로서 겸손함을 지녀야 한다. 3.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홀로 사는 즐거움] 그토록 부드럽고 겸손하던 물이 어떻게 저리 사나울 수 있을까? 그 부드러움이 어떤 힘을 받으면 저토록 거세고 강해지는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그 뜻이 여기에 있구나 싶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모성적인 부드러움과 온유함과 너그러움이 뭇 생명을 구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병든 현대 문명도 결국은 모성적인 부드러움과 따뜻함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다는 소식이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이 교훈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길에도 깨우침이 될 것이다. 노자도 일찍이 말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깝다.’ 4. 시간 밖에서 살다 [오두막 편지] 사람이 시계를 발명한 이래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여 사회생활에 여러 가지로 보탬이 된 것은 지난 인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 시계에 의존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늘 시간에 쫓기면서 살아야 하는 폐단도 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나는 비로소 자주적인 삶에 한 걸음 다가선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시간의 노예가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부질없이 살았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세상살이에 경험이 많은 지혜로운 노인은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급히 서두르지 말고 좀 더 기다리라고 일러준다. 한 고비가 지나면 좋은 일이 됐건 언짢은 일이 됐건 안팎의 사정이 달라지는 수가 많다. 노인들은 풍진 세상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시간의 비밀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일수록 조급히 해결해 버리려고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 물러서서 조용히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것이 지혜로운 해결책이 될 것이다. 시간 밖에서 우리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5.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오두막 편지] 버릴 때는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언젠가는 이 몸뚱이를 버릴 거라고 생각하면 미련이나 애착이 생기지 않는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살이 아닌가. 현재의 나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없어도 좋을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버리고 또 버리고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그 인생의 내용이고 알맹이가 될 것이다. 나무들은 가을이면 걸쳤던 옷을 훨훨 벗어버린다. 그래서 그 자리에 새 옷이 돋아난다. 이런 나무들처럼 너절한 허섭스레기들을 아낌없이 치워버리고 나면 그 자리에, 텅 빈 그 자리에 비로소 맑은 기운이 감돈다. 이 맑은 기운이 오늘의 나를 새롭게 한다. 수행자는 한평생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바쳐야 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삶에 변화가 없다면 그의 인생은 이미 녹슬어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계절의 변화는 우리 삶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 고맙다.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리고 있다. 이 가을에 당신은 어떤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가. 부디 좋은 이삭 거두기를. 6. 당신은 행복한가 [홀로 사는 즐거움]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우리가 잘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기준도 행복 여하에 달린 거라고 생각된다. 행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의 일을 생각한다. 이것이 행복의 기초단위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사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 또 다른 행복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다. 남을 행복하게 하면 자신도 행복해 진다. 현대인들은 행복의 기준을 흔히 남보다 많고 큰 것을 차지하고 누리는 데 두려고 한다. 물론 행복은 주관적인 가치이므로 한 마디로 이렇다 저렇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거나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현대인들의 불행은 모자람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7. 법정 스님 2005년 길상사 봄 법회 화엄경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결코 차별이 없다. 마음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지만 이 셋은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처와 보살을 먼 데서 찾지 마십시오. 그 부처와 보살을 밖에서 만나지 말고, 때로는 자기 집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이 기쁨과 고마움으로 채워질 때 거기 향기가 납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철학자만이 탐구하는 명제가 아닙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진짜 나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근원적인 물음을 가져야 합니다. 각자 한 번 물어보십시오. 내 자신 자아의 실현을 위해서 무슨 일을 지금 하고 있는가? 한정된 세월을 소모하고 있는데 과연 내 자아실현을 위해서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는 건강한 나무가 아닙니다. 상록수인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도 다 꽃을 피웁니다. 삶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거듭거듭 물어야 합니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과일에 씨앗이 박혀 있듯이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묻지 않으면 해답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1970년대 동아방송에서 ‘밤의 플랫폼’을 진행
7,80년대, 많은 청취자들의 귀와 마음을 머물게 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밤의 플랫폼> <영화음악실>을 기억하세요? 디스크자키 김세원 씨의 첼로 연주 같은 감성적인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밤이면, 잠시 고민을 잊고 달콤한 꿈에 빠지기도 했는데요. 당시 김세원 씨를 만나기 위해, 방송국으로 찾아와 무작정 기다리거나 심지어 프러포즈까지 하는 열혈 팬들이 있을 정도로 DJ 김세원 씨 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죠. 동양방송 1기 성우로 데뷔해, 성우와 디스크자키로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온 김세원 씨. 그녀는 40년 넘게 활동하면서, 방송을 비롯해 ‘친절한 금자씨’에서 내레이션을 맡아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EBS 이사장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녀는 ‘산유화’ ‘자장가’를 작곡하 신 김순남 선생의 따님으로도 유명하죠.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신춘특집 ‘라디오 스타’ 영화음악 방송의 독보적인 존재 김세원 씨를 3월 10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 습니다.
◇ 11년 동안 진행했던 <밤의 플랫폼> ▶ 김세원 씨 목소리는 속삭이듯 다정다감하고 차분한 첼로 같다고 할까요?
정말 매력적인 목소리인데 그런 이야기 많이 들으시죠? 고맙습니다. 사람도 잘생겼다거나 예쁘다는 말보다는 매력 있다는 말이 더 어필하는 것 같아요. 그게 더 오래가기도 하고요. ▶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김세원 씨 목소리를 듣고 반가워하는 팬들이 많으실 텐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70년대의 음악프로그램 <밤의 플랫폼>을 기억할 거예요. ‘이 사도라’ 폴모리아 악단의 연주였는데, 앞에 먼저 풀벌레 소리가 있고 먼 곳에서 기차가 기적소리를 내면서 플랫폼으로 들어와요. 그러면서 이사도라 음악과 오버랩 되었죠. 사실 그때는 라디오 시대였으니까 밤에 모든 사람들이 라디오 듣는 게 굉장한 오락이었어요. 그 시간에 하루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시간인데 음악들도 좋았고. 또 제가 11년을 했으니까 오래하기도 했고요. ▶ <밤의 플랫폼>은 몇 분짜리 프로그램이었나요? 원래는 15분짜리였는데 20분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다시 15분으로 줄기도 했어요. 옛날 AM은 지금처럼 그렇게 긴 시간을 하지 않았거든요. 특별한 프로그램 외에는 짧아야 10분에서 15분, 길면 30분짜리였죠. 그 15분짜리가 아마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아요. ▶ 당시에는 방송 프로그램이 정서와 문화에 영향을 많이 미쳤잖아요? 지금은 미디어의 홍수지만 예전에는 프로그램이나 채널이 별로 없었어요. 더군다나 서울, 경기, 충청도 정도였고 지금처럼 전국 네트워크가 아니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레터는 제가 제일 많이 받았어요.(웃음) ◇ 팬레터부터 막무가내 청혼자까지 ‘인기 초절정’ ▶ 처음에 어떻게 해서 그 프로그램을 맡게 되신 거예요? TBC(동양방송) 1기로 입사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동아방송에서 제가 프리랜서가 되길 기다렸다고 하더라고요. 1970년 1월 1일부터 프리랜서가 되었는데, 당시에는 개편을 4월에 했거든요. 그런데 2월에 다른 사람이 하는 프로그램을 저더러 하라는 거예요. 결국 개편도 아닌데 제가 들어가는 바람에 원래 프로그램을 하고 있던 사람이 상처를 받았어요. 그래서 그 프로그램은 프로그램대로 맡아서 진행하고 정식 프로그램 시작할 때 <밤의 플랫폼>을 하게 된 거죠. 당시에는 다들 프리랜서 생활을 빨리 하던 시절이었어요. ▶ <밤의 플랫폼>을 진행하실 때 기억에 남는 사연들이 많으실 것 같아요. 아주 많죠. 사람이 죽은 극적인 일도 있고요. 이 일은 남편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일인데 3년 뒤에 남편이 제자한테 듣고 와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오히려 이야기한 일이에요. 어느날 수도경비사에서 형사 두 사람이 찾아왔어요. 제 앞에 어떤 사람이 쓴 편지를 가져와서 보여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이 사람 잘 아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모른다고 했더니 잘 알거라는 거예요.알고 보니까 편지의 주인공이 군인이었는데 우울증이 있었나 봐요. 우울증 있는 사람이 그 시간에 멜랑꼴리한 음악을 매일 들으면서 제 앞으로 편지를 썼던 거예요. 그래서 저하고는 상관없다는 조서를 동아방송 스튜디오에서 써야 했어요.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19살 된 어린 친구가 군대 가기 전인데 자기 키는 몇 센티이고 자기가 군대를 갔다 오면 나하고 결혼하겠다는 사연도 있었어요. 사춘기 시절의 친구가 프로그램에 마음을 뺏겨서 그런가 보다 했죠.(웃음) ▶ 남성 청취자들한테 인기가 대단하셨는데 혹시 결혼하자고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나요? 제가 27살 겨울에 <밤의 플랫폼>을 하고 있을 때인데 29살 먹은 총각이 와서 결혼하자고 하고 갔대요. 그래서 PD가 김세원 씨 결혼했다고 하니까 거짓말이라고 하고 갔다는 거예요. 그런 일도 있었고 결혼하자고 금반지 세 돈을 보낸 사람도 있었고요. 금반지는 PD를 주면서 돌려줄 수 있다면 돌려주라고 했었어요.
◇ ‘물 만난 물고기’ 시작하면 방송 10년은 기본 ▶ 그 때는 특유의 저음 그런 것이 없던 시절인데요? 그때들은 다 말들을 빨리할 땐데, 보통 때 제가 집에서 막 열을 올려서 얘기를 하고 설명을 하고 그럴 때 저희 남편이 숨 좀 쉬고 얘기하라고 할만큼 제가 말이 빨라요. 방송이라는 것은 하나의 연기에요. 그것은 어떻게 해야 사람을 잘 끌 수 있는 지 그것을 생각을 해야하는데, 저는 그 때 포즈를 제가 참 좋아했어요. 그 때 당시에 사람들이 날 놀리느라고 광화문에서 ‘낙엽이...’ 이러면 아현동 쯤에서 ‘떨어집니다.’제가 그런대요. 그럴 정도로 제가 포즈를 많이 두거든요.방송이 밤 10시에도 나가고 10시 25분에도 나가고 그랬는데 아침 9시에 녹음을 했어요. 녹음할 때 제일 큰 오케스트라 연주하는 A스튜디오에서 했는데 불을 딱 하나만 켜고 했어요. 형광등말고 백열등 하나만 켜고 어두운데서 녹음을 했죠. ▶ 감성적인 감각이 돋보이셨는데, 라디오 드라마는 별로 활동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제가 라디오 드라마를 못한 이유가 성우로는 들어왔는데 연기하는 게 부끄러웠어요. 대학 방송국에 있다가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거기서 DJ프로를 했었어요. 직접 대본도 쓰고 음악도 고르곤 했거든요. 그래서 들어왔더니 시험볼 때 했는데도 불구하고 드라마를 하는데 도저히 부끄러워서 못하겠더라고요. 결국 우리 1기 중에서 제일 일이 없었어요. 당시에는 드라마 시대이기도 했어요. 그 중에서 사극이 많았는데 기생은 더더욱 못하겠는 거예요.기생 1은 한 두 마디, 2는 한마디, 3은 합창으로 예~이러는데 매번 기생 3에 걸리더라고요. 보통 말하듯이 하는 프로그램을 하라면 잘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매일 했었어요. 그러다가 드디어 물을 만났죠. <세계의 뒷골목>이라는 프로였어요.아주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사회자인 곽규석 씨와 같이 일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이 분을 모르면 간첩이었어요. 그리고 작가는 광복 20년을 쓰시던 김교식 씨가 글을 썼어요. 김교식 씨도 방송이 처음이셨어요. 그렇게 셋이 출발을 했는데 곽규석 씨가 참 즐거워하셨어요. 제가 애드리브를 많이 했는데 그걸 하니까 제가 물을 만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조금 고개를 들었죠.(웃음) ▶ DJ는 어떤 계기로 하시게 되셨어요? 말하자면 운이에요. 시작한지 1년쯤 후에 운이 온 거예요. 원래는 우리 동기가 했다가 갑자기 결혼을 하는 바람에 그만 둔 것을 제가 대타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시작을 한 거죠. 그걸 하면서 오승룡 선생님과 <이것이 그것이다> 라는 프로그램도 했어요. ▶ 그러면서 콩트 프로그램도 하시고 ‘김세원의 영화음악실’도 하신 거죠? 1970 년대 후반인데 프리랜서가 되기 전부터 이미 디스크자키 프로인 ‘가요중계실’에서 TBC 피세영 씨와 일을 했었어요. 그러다가 프리랜서가 되면서 FM에 처음 나왔을 때, 음악방송을 했죠. 기분에 물을 만난 것 같더라고요.나중에 들은 이야기였는데 정인섭 선생님이 신참 성우한테 제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언젠가 스튜디오에 들어갔다가 무슨 소리가 나서 가봤더니 다들 밥 먹으러 가고 저 혼자 연습을 하고 있더라는 내용이었어요. 다 그런 아픈 과정이 있었죠. ▶ <김세원의 영화음악실> <김세원의 가정음악실> 이렇게 진행자 이름을 거는 것도 김세원 씨가 처음이었죠? <안녕하세요 김세원이에요>라는 프로가 MBC에서 있었어요. 제가 일단 시작하면 10년씩 했어요. 당시 한 프로그램을 10년 동안 한 경우는 많았는데 저는 운이 좋아서 동시다발로 했죠. 여기에서는 영화음악실, 다른데서 가정음악실, 아침 프로 하나 밤 프로 하나 이렇게 했어요. ▶ 프로그램마다 인기를 누렸던 비결이 뭐였어요? 방송국에서 그 프로가 괜찮으니까 오래했겠죠.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운이 좋았기도 했지만 사실 프로그램을 골라서 했어요. 오는 대로 다 할 수는 없으니까 가장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골라요. 예를 들면 공개방송을 하라고 하면 저는 죽어도 못해요. 이 프로는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공개방송을 들어간다고 하면 안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자신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것을 하기 때문에 오래가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오래 하잖아요. ▶ 수많은 프로그램을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 있다면요? 40 여년 동안, 대한민국에 사는 동안 제 목소리가 안 나간 날이 없었어요. 심지어는 CM으로라도 나갔으니까요. 물론 해외에 1년 동안 가 있을 때는 못 나갔지만요. 그게 엄청난 혜택이라고 봐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죠. 단 한 번도 내 목소리가 안 나간 적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프로그램을 한 번 시작하면 오래 하기 때문에 갯수로는 많지 않아요. 40여년을 해도 다 꼽을 수 있을 정도죠. <밤의 플랫폼> <안녕하세요 김세원이에요> <김세원의 가정음악실> <김세원의 노래음악실> <노래의 날개위에> <당신의 밤과 음악> 등 손가락을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다 내 분신 같은 느낌이에요. ◇ 해금 이후 봇물처럼 터진 사부곡 ‘나의 아버지’
▶ 피난가면서도 피아노를 사달라고 졸랐다던데요? 아버지가 작곡가신데 피난 가는데 피아노를 갖고 싶은 거예요. 대구에 있는 친구 하나가 부잣집 딸인데, 그 집에 피아노가 있어요. 너무 피아노가 치고 싶어서 어머니가 마분지에 건반을 그려주시면 그걸로 놀곤 했죠. 그때 먹고 살기도 힘들 때인데 무슨 피아노겠어요. ▶ 아버님이 유명하신 김순남 선생님이신데, 예전에 아버님을 찾는 다큐멘터리를 의미 깊게 봤어요. 그동안 아버님 얘기를 자유롭게 못했죠? 절대 못했죠. 그 얘기를 하면 나한테 연좌제라는 게 오잖아요. 그러다가 1988년에 해금이 돼서 봇물이 터졌어요. 그야말로 잊은 듯 없는 듯 가슴 밑바닥에 아버지라는 존재를 묻어놓고 있었는데 1988년에 해금되면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밤낮으로 울었어요. 제어가 안 되더라고요. 그 전에는 얘기도 못하니까 없는 듯 살았는데 말이죠. ▶ 형제는 어떻게 되세요? 전 무남독녀인데 굉장히 밝은 성격이에요. 다행히 어머니가 학교 선생님이셔서 먹고 살았죠. 그때는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먹고 사는 게 중요할 때죠. 요즘은 그런 거 잘 모를꺼에요.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어머니는 굉장히 내성적이세요. 어머니가 저를 임신하셨을 때 제발 내 성격 말고 제 아버지 성격을 닮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셨대요. 그런데 저하고 싸울 때 너는 네 아버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닮았다고 화를 내세요.(웃음)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말씀은 안 하셨지만 1988년 해금된 이후에 경성사범의 동창이던 일본 분들이 앨범을 만들어서 저에게 주신 적이 있어요. 그 분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아버지는 열정적이고 뜨거우신 분이셨어요. 다큐멘터리 촬영을 다닐 때도 많이 울었어요. 두 살 때니까 아버지를 기억 못해요. 많은 분들이 아버지 얘기를 하면 그 이야기를 종합해서 이미지를 만드는 거예요. 성격은 어떻고 아이들을 좋아하셨고 피아노를 13시간을 치다가 쓰러지셨다는 등등의 이야기들을 조합을 해서 아버지를 만드는 거죠. ▶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무겁게 느끼면서 성장하셨겠어요. 일단 아버지 없이 자란 게 참 고통이죠. 팔 하나가 태어날 때부터 없는 거와 마찬가지에요. 우리 때는 호구조사라는 게 있었어요. “아버지 없는 사람, 손들어” “아버지 돌아가신 분, 손들어” “납치된 사람, 손들어” 그러면 나는 어디에 들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화를 냈죠. 사람은 누구나 비밀을 갖고 있는데 어른은 그 비밀을 잘 견딜 수 있어도 아이한테는 참 어려워 요. 그래서 어렸을 땐 그게 힘들었어요. 하지만 1988년도부터 ‘나도 사생아가 아니다, 나도 아버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었어요. ▶ 김순남 선생님이 작곡하신 자장가 <새봄이 돌아오면 아버지도 온단다> 이 노래의 가사가 딸을 그리워하면서 작곡하신 거라고 하던데요. 아버지가 자장가 몇 곡을 지으셨는데, 그중에서 본인이 작사 작곡을 한 게 있어요. 그게 딸을 염두에 두고 한 게 아닐까 생각해서 그 자장가가 가슴에 제일 와 닿아요. 제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이라면 제 몸하고 이름밖에 없어요. 아버지가 피아노를 치는데 할머니께서 “딸이란다”하니까 아버지가 한참 있다가 “그럼, 세원이라고 하세요.”그러셨대요. 그래서 제가 세원이 된 거예요. ▶ 아버님 돌아가신 게 1986년인가요? 그래서 제가 문을 닫고 울었어요. 제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거의 안했었는데, 마치 아이가 고무풍선을 쥐고 놀다가 그것을 가위로 잘려버린 느낌이었죠. 희망이 없어진 거에요.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했는데, 돌아가셨다니까 이젠 날아간 풍선이구나 하고요.지금은 많이 담담해졌어요. 저도 이름을 내놓고 일하는 사람이고, 아버지도 작곡을 하셨던 유명하신 분이셨으니까. 그렇지 않은 분들 중에 가슴 아픈 분들이 너무 많으실 거예요. ◇ 보이지 않는 라디오의 매력‘라디오여 영원하라’ ▶ 한때는 TV가 나오면서 라디오는 죽었다는 말까지 있었어요. 라디오는 절대 안 죽어요. 라디오처럼 매력 있는 미디어가 어디 있어요? 얼마나 상상력을 키워주는데요. 사람들이 목소리만 듣고 제가 굉장히 큰 줄 알아요. 그렇게 마음껏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은 거잖아요.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매력이 얼마나 큰 데요. 그래서 난 라디오는 영원하다고 봐요. ▶ 그 당시 라디오 스타들은 어떤 분들이 있었죠? 그땐 라디오 프로들이 많았죠. 최동욱, 이장희, 윤형주 씨도 했고, MBC는 임국희, 이종환 씨, TBC는 황인용 씨 같은 좋은 라디오 스타들이 많았죠. ▶ 김세원 씨만의 독특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당시에는 모든 프로가 주는 대로 읽던 시절이었어요. 제가 1972년도 동아방송에서 <가요 드라이브>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을 할 때였어요. 그 프로를 하면서 일부러 커피도 마시고 의자소리도 내고 자연스럽게 말도 더듬었어요. 라디오는 자연스러워야 하니까 자연스럽게 하자고, PD랑 마음이 딱 맞아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해프닝이 굉장히 많았어요. 1972년이면 제가 프리랜서가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그게 최고 인기였어요. 그런 프로가 없었으니까요. 생방송인데 하다가 물도 먹고 그랬죠. 그런데 그 날 끝나고 마지막 멘트로 지금까지 엔지니어 누구라는 말까지 하고서 제 이름을 잊어버린 거예요. “저는....”까지 하고 1, 2, 3초 지나가는데, 녹음실 밖에서는 끝났으니까 딴 데 보다가 아무 소리 도 안 나니까 저를 쳐다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제 이름은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끝난 적도 있어요.(웃음)생방송은 해프닝도 가끔 있어야 맛도 나고, 사실 방송은 생방송이 최고죠. 힘들고 긴장도 되지만 그래서 또 좋은 거잖아요. ▶ 또 다른 방송사고는 없으셨어요? 생 방송 중이었는데 중국집 배달원이 문을 열고 자장면 가져왔다기에 “전 짬뽕시켰는데요. 그리고 지금 방송 중이에요.” 그런 적도 있고 또 어떤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뉴스 프로그램에 들어가서는 대답을 제 맘대로 막 했더니 그 아나운서가 떨더라고요.(웃음) ▶ 영화도 많이 좋아하시죠? 일 찍이 해외에 나가기 어려울 때 다녔어요. 그때는 해외에 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때니까 한 번 나갔다 오면 방송에 나가서 풍물을 얘기해 줘야 했어요.저는 <영화음악실>을 맡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못 들어오는 영화가 있으면 프로에 음악 소개를 해요. 지금이야 못 들어오는 영화가 거의 없지만. 그래서 여행을 가면 가고 오는 시간을 다 합해서 4시간 정도 영화보기에 할애해요.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들을 봐요. 이 음악이 어느 장면에서 나왔다는 것은 알아야 다음에 그 영화를 소개할 때 이야기를 하죠. 그게 투자라면 투자에요. ▶ 대학교 때 전공이 뭐였어요? 잘하지는 않지만 제 전공을 물으면 국문과 나왔다고 해요.(웃음) 사실 제가 외대 불어과를 나왔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면 타이틀 대고 감독 이름 정도는 아는 수준이에요. ▶ EBS 방송국 이사장으로도 지내셨어요? 제 방송 생활에 또 다른 경험이었어요. 우리 방송인들이 방송 일선에서 일한다면, 이사장이란 직함은 방송 뒤쪽에서 일하는 거죠. 난생처음으로 조직 속에 들어가서 조직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제가 프리랜서 생활만 40년을 하다가 3년 동안 했는데 참 좋은 인생경험이었고, 제 방송인생의 한 챕터로 기록될 것 같아요. ◇ 청취자와 동고동락 40년,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 남편되시는 분이 그 유명한 강현두 교수님이시죠?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였다가 은퇴하기 전에 스카이라이프 초대사장으로 갔어요. 그런데 가기 전에 사표를 내고 가더라고요. 후배들도 많고 박사들도 와서 줄서 있다고. 지금은 스카이라이프에서 나와서 그림 그리고 전시회도 하고 있어요. ▶ 아이들도 훌륭하게 잘 자란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방목했어요. 아이가 고3 때 몇 달 동안 독일을 갔으니까요. 지금 청취자 분들 중에도 아이와 직업 중에 고민하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 기회는 뒤로 미루면 안 와요. 우리 후배가 결혼과 유학 중에 고민할 때, 기회는 미루면 안 오니까 유학이든 결혼이든 먼저 오는 것을 하라고 했어요. 그때 우리 애들이 고3 인데 독일을 갈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은 반대하는 데, 우리 딸이 “엄마, 요새 기침도 하고 독일 공기가 좋다는데 가야지”하더라고요. 남편도 생각 해 보자고 그러고. 그래서 제가 12월 1일 추운 날 독일에 도착해서 애들한테 미안하니까 열심히 하고 있다고 엽서도 띄웠어요. ▶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셨는데, 기회 활용을 잘했다 싶은 때가 있나요? 기 회가 왔을 때 그것을 취하려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해요. 내가 방송을 하다가 어딜 가야한다 싶을 때, 방송 없어질까 못 가면 생전 못 가죠. 내가 돌아와서 이 자리에 못 앉더라도 가야겠다 싶어서 떠났던 거고,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지만 결과적으로 돌이켜보면 저한테 그것이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어요. ▶ 요즘도 5시간 이상은 잠을 안 주무신다고요? 왜냐 하면 제가 40년 동안 생방송을 했어요. 녹음을 해도 아침에 하고. 그리고 제가 차 막히는 걸 싫어해서 새벽에 나와요. 전 낮에 햇빛 아래에서는 아까워서 못 자요. 가만히 앉아있더라도 자면 안 될 것 같아요. 그게 습관이 된 거죠. ▶ 라디오 스타 김세원 씨를 사랑하는 청취자분들께 한 마디 해 주세요. 제 인생은 청취자와 함께 하는 인생이에요. 다른 재주가 없어서 방송을 오래했는데 청취자가 없으면 제가 어떻게 이렇게 오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청취자 여러분한테 항상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라디오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TV를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TV는 한정 되어 있어서 보이는 게 전부지만 라디오는 그 이면에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라디오 를 들으시면 머리도 좋아져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라디오를 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앞으로의 계획과 소망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 생활의 모토는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참 중요하다고 봐요. 제가 하는 일이 남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면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우선 정직한 것. 정직이 참 중요하죠. |
출처: 시나브로 원문보기 글쓴이: Sim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