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용어로 나와 너,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헤아려서 판단하는 마음으로
악(惡)은 분별심(分別心)이요,
선(善)은 무분별심(無分別心)의 뜻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오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중생들의 번뇌는 분별심을 없애야 벗어난다는 뜻이지요.
예를 들어 서울이 크다는 것은 분별입니다.
왜냐하면 더 큰 것에 비하면 작고, 더 작은 것에 비하면 크기 때문이지요.
즉 서울이 크다고 하는 것은 비교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서울이 크다고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서울이 크다는 관념에 집착하면 분쟁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도쿄에서 살다가 온 사람이
서울은 작은 도시라고 하는 데 대해
서울이 왜 작으냐고 우기면 두 사람 사이에는 필요 없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시비나 호오(好惡), 대소, 고저, 장단, 선악 등도
상대적 관념일 때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에 집착하면 번뇌가 일어납니다.
지혜로운 자는 누가 ‘이 음식은 맛있다’거나
‘이 옷은 멋있다’고 하면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맛있다거나 멋있다고 하는 것은
너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으로 인해 고뇌하면
그것이 허상임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들은 형상(形相)에 이끌리어 웃고 웁니다.
사랑하는 일도, 미워하는 일도,
시비와 갈등도 모두가 바깥으로 드러난 상(相)에 집착(執着)하는 데서 옵니다.
불법(佛法)의 세계에서는 이 상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우리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슬이며,
행복을 차단하는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화창한 봄날에 들에 핀 아름다운 수많은 꽃과 풀들이
그 나름대로의 각기의 자태(姿態)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한 폭의 아름다운 정경(情景) 속에서
굳이 시비하고 분별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고 작거나, 붉고 노랗고 하얗거나 예쁘고
그렇지 못하다는 등등,
구분(區分)하고 분별한다면,
어떤 것은 뽑아버리고,
어떤 것은 그냥 놔두어야 하는 선택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분별 심 때문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생기며,
이로 인하여 마음이 요동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선 먼저 인정(認定)하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합당한지 아닌지는 그 다음의 문제이지요.
선하다, 악하다, 혹은 옳다, 그르다, 깨끗하다, 더럽다고
단정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는 무아(無我)요 무상(無相)
이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분별심이란
반드시 상대적인 것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므로,
상대적인 것은 객관적인 것, 대상, 경계라고 하며
나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생각(나)을 내려놓으면
모든 것은 저절로 만들어 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라고 하는데
만물이 하나 되어
너와 나라는 분별이 없어지고 평등해 지는 것
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내려놓지 않은 마음은 나와 관련된 것만을 이익 되게 하지만,
나를 내려놓은 마음은 모두를 이익 되게 합니다.
나를 버린 마음은 전체를 보고,
나를 버리지 못한 마음은 부분 밖에 보지 못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됩니다.
따라서 내 생각을 내려 놓는다는 것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버려서 전체를 봄으로써
모두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 마음만을 쓰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지혜라고 합니다.
인도의 <간디>는 늘 전체를 보기 때문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는 `무저항주의자' 였습니다.
간디의 전체를 보는 것에 대한 실화는 많이 있습니다.
그중 한 사례를 소개 하면,
어느 날 간디는 열차를 타고가다
신고 있던 신발을 한 짝 떨어트렸습니다.
열차가 달리고 있는지라 신발을 주울 수가 없자 간디는
한쪽 신발을 재빨리 벗어 열차 밖으로 던졌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신고있는 한 짝의 신발은 이미 쓸모가 없어 졌습니다.
떨어진 신발을 누군가 주웠을 때
그 한 짝의 신발 또한 쓸모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한 짝을 마저 버린 것입니다."
전체를 보는 지혜를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삼라만상은 중도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중도는 진리의 다른 이름입니다.
또한
불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보리’ 이지요.
‘보리’ 는 지혜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도(修道)의 한 과정이며
불교에서 ‘보리’를 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지만,
그 또한 자신의 근기(根基)에 알맞은 길을 찾아 행하면 됩니다.
마치 가는 길은 다르지만 종착역이 매 한가지이지요.
그런데 법회에 왔다 며칠만 지나면
보리심이 온대간데 없어지며
이는 수행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근기(根基)가 모자란 탓이고
분별심을 버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심지어 법당에 와서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다투는 마음이나
조그만 불편을 이기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을 놓아버리고 비워버리는 것은
‘좋다, 나쁘다’라는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뜻인데
곧 분별심이 갈등과 번뇌와 탐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장염불과 지장경 독송은
그러한 분별심을 버리는 하나의 과정
이며
‘보리’를 구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법구경(法句經)을 보면
故世有福(고세유복)
-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복이 있고
(할수 있어, 정말 잘돼)
念思紹行(염사소행)
- 그 생각을 이어서 생각하고 행하면
(분별심을 갖지 않으면)
善致其願(선치기원)
- 착하여 그 바라는 것에 이르게 되고
(소원성취가 되고)
福祿轉勝(복록전승)
- 복록이 뛰어나게 변한다
(복과 나라에서 주는 벼슬이 이어진다)
분별심의 마음을 줄이려면,
조금 안다고 설치지 말고, 미운소리, 우는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리,
불평일랑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알고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적당히 아는 척,
좀 어수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꼭 이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당히 져 주는 것이지요.
그냥 너그럽고 부드럽게 덕을 베풀고 사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옳다 그르다, 밉다 곱다 착하다 못됐다’
이런
상대적인 마음을 내지 말라는 뜻이니까요!
첫댓글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분별심이 궁금하였는데
상대적인마음을 내지말라는것이라고
정의하여주심에 감사합니다
선생님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분별심! 일으키지 않도록 다시한번 저자신을 돌아봅니다
고맙습니다
아미타불()
선생님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가정에도 무량대복 받으시길
바랍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든든하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사랑합니다
봉사도 할 수 있는 안심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잘돼!!
할수있어!!
나모대원본존지장왕보살마하살()()()
선생님 새해에도 훌륭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항상 어려운 뜻도 쉽게 풀이해 주시니 배움에 큰 도움이 됩니다.
분별심이 일어날 때마다 꺼내 읽어야 하는 보석 같은 가르침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늘 행복한마음으로 공부합니딘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
선생님
자세한 설명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아미타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