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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목재,
누가 죽였나
진주강씨 종회에서 신축년 정기총회를 또다시 연기하여 2월 22일 연다고 알려왔다. 문서에 진한글씨로 표시한 ‘마스크착용 의무화’와 ‘입구에서 발열 체크하여 37.5도 이상은 회의참석이 불허됨’이 답답한 현실을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부산지하철 3호선 사직역 출입구에 거의 붙다시피한 종회건물 사무실 벽면엔 그동안 종회발전에 기여한 일가들의 사진이 내걸려 있다. 그 맨 앞자리에 강석진 전 동명목재 창업주의 얼굴도 들어있다. 부산에 살면서 동명목재 전성기를 만난 기억이 생생하여 기업몰락 비화를 전하는 마음도 그만큼 무겁다. 국가경제 발전과 고용창출에도 일익을 담당했던 동명목재가 신군부 정치권력에 무너진 비화를 소개한다.
아, 부산의 꿈
동명목재여!
부산경제 나아가 한국경제를 이끌었던 동명그룹
오늘날 영광을 누리고 있는 기업의 이면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 기업들이 있다. 몰락한 기업의 기록을 찾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과거사를 들추어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의 성장이나 몰락 과정은 한 인간의 성장과 영락만큼이나 다양한 스토리와 교훈이 담겨 있다. 1980년 6월 도산한 동명목재상사를 주축으로 한 동명그룹은 부산의 최고기업으로 성장했던 만큼 우리에게 충분히 교훈이 될 것이다. 성공비결과 추락원인 등이 배워야 할 점이다. 부산은 글로벌 도시로 도약하는 과정에 있다. 도약을 이끄는 중심에는 기업이 있다.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도약을 이끌어 생기 있는 도시로 만드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기업이 성장하고 오래 생존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생동감 있게 움직여야 이 일을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동명그룹을 살펴보는 것은 다시 한 번 한국경제, 세계경제의 리더 기업이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다. 부산경제, 나아가 한국경제를 이끌었던 동명그룹을 살펴 제2의 동명을 부산에 뿌리내리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명의 흔적과 회환
부산시 남구 용당동의 용마산. 이곳에 오르니 바닷가 쪽으로 신선대부두와 함께 부두 정문 앞에 위치한 용당세관이 눈에 들어온다. 부산의 큰 별이었던 동명목재가 수출강국을 외치며 뿌리를 내렸던 곳이다. 이 기업은 부산 좌천동에서 범일동, 범일동에서 바닷가와 맞붙은 이곳으로 공장을 확장하면서 세계최고의 목재왕국의 꿈을 키웠다. 동명그룹은 姜錫鎭이 맨주먹으로 오직 타고난 재능과 근면성실 그리고 강인한 의지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일궈낸 기업이라는 점에서 귀감이 되었다. 지역기업으로 전국수출 1위를 기록한 유일한 기업이라는 점도 부산의 꿈을 키워주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동명목재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동명학원만이 남아 그 뿌리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당시 동명목재는 바다에 목재를 보관하다가 바닷길로 용당세관 자리의 공장으로 가져와 합판을 만들었죠. 인적 드문 바닷가를 매립해 세계 최고의 공장 터전을 만든 셈이죠. 기업이 망하지 않고 지금 이 땅이 남아있었으면 수 천 억 원이 넘을 것입니다. 안타까울 뿐입니다.” 류필윤 동명문화학원 법인 이사(당시 동명목재 전무)는 한순간에 몰락한 동명에 대해 아쉬워했다. 동명그룹은 1980년 6월에 자초되어 2021년 현재 41년째를 맞았다. 용당세관과 그 일대의 동명그룹의 땅과 대부분의 재산은 국가와 다른 기업에게 넘어가 과거를 잊은 채 새로운 모습 또는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 동명의 흔적으로 남은 동명대학교를 비롯한 동명문화학원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지역경제가 도약의 언저리에서 헤매거나 불황을 겪을 때는 늘 동명목재의 추락이 아쉽게 다가온다.
동명목재는 지방기업도 경쟁력을 갖출 경우 최고의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줬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철저한 대비 부족과 군부의 군화 발에 짓밟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보여줬다. 동명목재는 부산의 대표적 기업이었다. 동명목재 이후로 매출실적 전국 1위를 차지한 지역기업은 찾아볼 수 없다. 동명목재의 자리는 부산으로서는 너무나 큰 자리였다. 동명목재 자체는 물론 부산은행 등 현재까지도 부산을 이끌고 있는 선도기업들의 터전을 마련한 역량 기업이었다. 동명목재를 살펴보는 것은 부침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힘을 길러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다. 삼화그룹, 국제그룹 등 한때 우리나라를 이끌었던 부산 리더 그룹들의 모습도 동명그룹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기업인들의 자부심을 키우고 새로운 동력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과거의 영욕을 살펴보면서 현재의 상황을 반성하고 미래를 힘차게 나아갈 터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김정웅 전 동성화학 고문(전 부산상공회의소 사무국장, 동명목재 근무)은 “동명의 아픈 추억을 기억하기보다는 지역기업들이 동명의 개척자적인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면서 “기회는 언제든지 있는 만큼 기업인들과 근로자들이 합심해 끊임없는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는 창조도시,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부산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의 광활함을 느낄 수 있는 동명목재, 부산의 도약을 위해 그 역사적 흔적을 찾아가 보자.
동명목재, 설립에서 꿈을 이루기까지
동명목재를 장인정신으로 일궈낸 주역은 강석진이다. 그는 1905년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에서 아버지 강병우와 어머니 서순득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84년 10월 29일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강석진의 집안은 조부 때만 해도 한 해 수확량이 500섬을 웃돌 정도로 부유했다. 하지만 일제강점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소송까지 겹쳐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된 그는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뒤 15세가 되던 1920년 가난이 싫어 빈손으로 부산을 찾았다. 일본인 가구점에 들어가 심부름을 하면서 목공기술을 배운 그는 뛰어난 손재주와 기량을 발휘해 5년 만에 부산에선 알아주는 일류 목공이 됐다. 강석진의 사촌동생인 강기수 전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의 회고다. “나무제품은 가정에 필수품이기 때문에 제작기술만 익히면 먹고 살 수 있고 큰돈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 강 회장이 나무 분야를 선택한 이유였죠. 다점포 뒤쪽 작업장의 한 구석에서 여기저기 널브러진 대팻밥을 이리저리 긁어모아 그것으로 이불삼아 새우잠을 잤습니다. 군고구마 한두 개로 아침저녁 끼니를 때우면서 부지런히 일하고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혔습니다.”-
가구기술에 자신이 생기자 강석진은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한 푼 두 푼 아껴 창업자금 400원(현재 가치로 4000만 원 상당)의 거금을 모았다. 이 돈으로 20세가 되던 1925년 4월 1일 동명목재의 전신인 동명제재소를 부산 동구 좌천동에 세웠다. 회사 이름에 東明을 붙인 이유는 ‘동이 트는 새벽처럼 번영하라’는 염원에서였다. 강석진은 이를 상호로 사용하다 후에 아호로도 사용했다. 그는 동명제재소의 10여 명 직원과 함께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직접 원목을 켜서 판자와 각목을 만들어내고 톱질과 대패질은 물론 못질도 하면서 일심동체가 되어 목재와 가구를 만들었다. 목재의 품질이 우수하고 가구제품이 섬세하고 미려하면서 실용적이라는 소문이 나자 부산은 물론 경상남도 지역까지 주문이 쇄도했다. 사업은 번창했고 재산도 축적했다.
회사가 신용과 신의도 갖췄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번성하자 강석진은 합판사업에 뛰어들어 사활을 건 한판 승부에 나선다. 동명제재소는 우선 공장을 부산진구 범일동 862번지(지금의 범일동 부산교통공단 인근)로 확장 이전하고 제조시설을 설치했다. 이곳은 소유자가 일본인으로 팔려고 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강석진은 3년 동안 주인을 찾아다니며 결국 땅을 구입하는 의지를 보였다. 공장 적지로 판단된 만큼 이곳에 공장을 지어야 회사가 번창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합판사업은 활황기에 접어든 건축경기에 힘입어 성장을 거듭했다. 특히 구입한 땅이 가구공장이 밀집한 지역과 가까운 위치라 물류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계산이 맞아떨어졌다. 제재소의 사업은 비교적 순조로이 성장해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제재소는 새 공장을 짓고 생산시설을 확장해 가면서 광복을 맞았다. 이후 1949년 회사이름을 동명목재상사로 바꾸고 제재사업뿐만 아니라 합판생산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합판생산 사업에 나선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원자재 효용의 극대화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동안 원자재가 되는 원목은 강원도의 삼림이나 함경도 백두산의 수림에서 벌목해온 것과 일본에서 벌채된 원목을 썼으나 광복이 되고 우리의 국토가 38선으로 양분되자 원목을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격에 맞는 판재나 각목을 켜낸 뒤 남는 자투리나 토막은 화목으로 밖에 쓸모가 없었다. 동명목재는 이 자투리를 재재에 사용하려고 하였다. 이는 낭비도 막고 원가절감에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른 하나는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목재는 갈수록 귀해질 것이고 수요는 늘 것이기 때문에 질이 여물면서도 가볍고 미관상으로도 좋은 합판의 제조기술과 생산공정을 연구개발해 좋은 형태의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과 색채의 질 좋은 합판을 만들어 내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동명목재는 이 같은 예상에 따라 기계시설 설비를 갖추고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하지만 광복 정국의 혼란과 무질서한 사회정세로 판매부진이 이어져 위기를 맞았다. 공장의 이전과 시설설비에 많은 자금을 투입했으나 운영자금마저 고갈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1년 정도 어려운 시기가 지나자 동명목재의 예상이 현실화되면서 합판의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민족의 대참화였던 6·25동란이 끝나자 전쟁으로 초토화된 국토의 재건 및 전후 복구사업과 함께 동명목재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200여 종업원은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해 내느라 밤낮없이 제품생산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러나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범일동으로 공장을 이전하고 판매가 늘면서 사업이 정상괘도에 오를 즈음에 화재가 발생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도 동명은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공장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돈놀이 하는데 강석진이가 망했다고 생각하면 누가 나에게 돈을 빌려주겠느냐”며 밝은 모습을 보였다.
회사가 겨우 몸을 추스르자 1959년에는 사라호 태풍이 발생해 더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재해는 더 이상 강석진을 중심으로 뭉친 동명목재의 열정을 꺾는 방해요소가 되지 못했다. 동명목재는 불굴의 의지와 정신으로 난관을 거뜬히 헤쳐 나갔다. 강기수 당시 동명목재 부사장은 “회사는 갈수록 쌓이는 신용과 기술력 덕택에 합판품질이 우수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문이 밀려들었습니다. 공장을 확장하지 않으면 오더 물량을 소화해 내지 못할 정도로 성장속도가 빨랐습니다. 정말 좋은 시절이었죠.”라고 회고했다. 동명목재상사는 다시 공장확장을 계획했다. 회장 강석진이 직접 부산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선택한 곳이 용당동 일대다. 각 지방에서 수송되어 오는 원목의 하역과 공장까지의 운반이 쉬운 곳, 넓은 바다에 목재를 쌓아둘 수 있는 저목장을 조성할 수 있는 곳을 골랐다. 조만간 국내의 원목수급이 한계에 오면 해외에서 원목을 수입해야하는데 이때는 해상수송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감안했다. 이는 선박의 접안이 쉬운 해변지역이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목재는 부산항 2~4부두에 보관 처리했다. 공장과 떨어져 있다는 점을 감안해 용당 앞바다에 바로 원료를 수입하고 수출하기 위해 부두를 새로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한적하고 조그마한 포구에 지나지 않았던 용당동 갯가와 주변일대의 나지막한 구릉과 야산을 사들여 연차적인 계획에 따라 공장부지를 조성해 나간 것이다. 동명 시대를 열면서 용당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60년 가을 마침내 제1공장을 조성했다. 동명의 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고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겠다는 염원을 담았다. 공장설계에서부터 기계발주와 설비에 이르기까지 혼신의 힘을 쏟았다. 바닥부터 기술을 익혀온 터라 대부분의 일을 직접 처리하면서 대량 생산 체계를 구축했다. 사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1962년 정부의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과 때를 같이하면서 합판제품은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빈약한 기술과 자원밖에 없었던 한국의 1960대와 1970년대에는 오직 수출만이 살길이었다. 저임금의 값싼 노동력과 한국인의 근면 성실 뛰어난 손재주로 물건을 만들어 해외에 수출하는 것 이외에는 살길이 없었다. 수출을 위한 모든 과정은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대통령 직속으로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만들고 수출을 직접 관리 장려할 정도로 수출은 우리의 중심에 있었다.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소득수준이 1인당 78달러로 낮았고 산업구조도 제조공업이 낮은 비중을 차지하는 빈약한 상태였다. 토지와 자원에 비해 인구가 과잉상태를 보였고 인구증가율도 높았다. 보존자원과 자본축적은 빈곤한데다 국제수지의 만성적인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동명목재상사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1960년 동명목재의 합판 질이 최고수준이고 값이 싸다는 사실이 미국에까지 알려져 미국에서 합판을 수입하고 싶다는 뜻밖의 연락이 온 것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미장합판의 품질은 당시 국내에서는 상상도 못할 고급제품이었다. 당시 합판은 보통합판과 특수합판이 있었다. 특수합판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이 미장합판이었다. 주로 가구와 선박 용재, 건물의 칸막이와 주방 용품 재료로 사용했다.
이 제품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목재라면 자신 있었던 기술자 강석진의 생산명령이 떨어졌다. ‘하면 된다’는 최고 경영자의 의지와 자신감이 직원들에게 먹혔고 모든 임직원은 밤낮없이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외국서적을 보면서 기술을 익혔다. 이 같은 노력과 의지 덕택에 첫 수출품을 생산하여 원하는 날짜에 제공했다. “원더풀”이라는 외국 바이어의 탄성과 함께 수출길이 열린 것이다. 일본제품보다 더 좋다며 바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 덕택에 1961년 5월 미국에 26만 3000달러어치를 수출한데 이어 1964년에는 4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이후 미주뿐 아니라 유럽과 중동지역으로도 수출했다. 동명목재는 1963년 범일동 공장의 생산시설을 용당동 새 공장으로 옮기고 일본과 독일에서 첨단기계를 들어와 신제품연구와 개발에 나섰다. 노력 끝에 다양한 형태의 무늬와 신상품을 출시하였다. 제품은 명성을 얻는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공급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77개 동명목재 대리점들은 서로 많은 물량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시절을 맞이했다. 동명목재는 내친김에 1967년 제2공장, 1968년 가공합판공장을 세우는 등 1974년까지 200여 만㎡의 시설을 확충했다. 시장을 미국은 물론 유럽 중국까지 넓혀갔다.
사업 확장은 실적으로 이어졌다. 1965년 50억 원 정도였던 매출은 13년만인 1978년에는 1000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수출은 1977년에 1억 35만 달러를 기록하여 단일 품목으로는 국내 최대의 수출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1968년 이후 3년 동안 연속으로 전국 수출액 1위에 올라 국내수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수출왕’의 칭예를 얻었다. 대한민국 산업훈장, 금탑, 은탑, 동탑을 모조리 휩쓸었고 1979년까지 대통령상을 무려 20회나 받았으며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수상하는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동명목재는 세계 최대의 합판회사로 부상하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수출산업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국내 최대의 합판매출을 기록하면서 목재왕국을 이룩한 것이었다. 합판은 한국수출상품 중에서 1961년 8위에서 1970년에는 2위로 껑충 뛰었고 1975년에는 4위 1980년에는 8위를 기록했다. 동명의 목재산업은 이처럼 선두업종에 포함됐다. 한국의 수출을 주도했고 20여 년 동안 10대 수출상품의 자리를 지켜왔다. 단일품목 중 한국 최대규모인 동명목재상사의 합판이 한국경제를 이끌었던 셈이다. 강석진 회장이 경제적 흐름을 정확히 예측하고 그 기회를 성장의 계기로 포착,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동명목재상사의 성공비결은 이뿐 아니었다. 동명목재는 강석진 회장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의 산실이었다. 합판에 사용하는 독자적인 만능접착제를 만드는가 하면 합판제조 과정에서 생겨나는 폐기물과 접착제를 혼합해 고열의 프레스로 찍어서 ‘파티클 보드’라고 불리는 신상품도 개발했다. 제품과 기업의 신용을 사풍으로 삼았다. 회사와 거래하는 모든 공급업체에 현금결제를 원칙으로 했다. 어음으로 물품대금을 지급할 경우 납품 업체의 자금사정을 악화시키는 것은 물론 가격을 높이거나 불량품을 납품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우려에서였다. 대리점과 관계회사, 하청업체의 자금난까지 염두에 두고 양심적인 기업경영을 실행한 것이었다. 고객만족 주의를 내세워 전국에 있는 대리점들을 찾아다니면서 디자인이나 무늬, 색깔, 기호, 취향이 어떤지를 묻고 앞으로의 추세나 고객이 원하는 것을 현장에서 찾아냈다. 흠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반품을 받았다.
사업으로 국가를 도약시키겠다는 사업보국주의 정신도 동명그룹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업인은 자신의 기업을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물로 여기기보다는 기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국가의 공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정신으로 일관해야 한다.”고 강석진은 강조했다. 기업인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생계를 보장해주고 세금을 납부해 국가운영을 뒷받침하는데 있다는 ‘보국주의’ 철학이 동명목재의 성장에 고스란히 스며있었다. 목재산업에 성공을 거두자 1978년부터 동명산업을 시작으로 동명개발, 동명중공업, 동명식품, 동성해운 등의 회사를 설립해 동명그룹을 탄생시켰다. 동명목재상사가 중화학공업이 중심이 되는 고도산업 사회로의 변화에 부응하는 기업변신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상철 동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당시 동명목재 근무)는 “14세의 소년이 청운의 꿈을 안고 부산에 와 일본인 밑에서 인생의 첫걸음을 시작한 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조그만 제재소를 설립하고 스스로 사업을 시작한 지 40여 년이 지난 뒤에는 200여 만㎡의 부지 위에 종업원 1만여 명, 연 매출액 1000억 원을 넘는 목재 왕국을 이룩한 것입니다.”
강석진은 여유가 생기자 주위와 사회도 돌아보기 시작했다. 동명목재의 발전은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한 종업원과 부산, 부산시민 덕택이라며 은혜를 갚고 보답해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62년 부산상공회의소 제4대 회장에 추대돼 잔여임기를 수행한 뒤 1967년 7월부터 제6, 7, 8대 회장을 연임했다. 이 기간 중 부산은행, 부산투자금융, 부산항만부두관리협회를 설립하고 부산데파트를 신축 개장하는 등 부산경제발전에 헌신했다. 컨테이너 전용부두와 부산역사 건립 등에 직접 참여하면서 동명왕국의 꿈과 함께 부산경제 나아가 한국경제의 도약에 힘을 쏟았다. 동명그룹은 이웃돕기에도 적극적이었다. 뜻하지 않는 화재와 여름철 수해로 졸지에 궁핍에 떨고 있는 이재민을 돕는데 앞장섰다. 강석진은 BBS부산연맹을 결성해 회관을 건립하고 불우 청소년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들의 생업자금과 학자금을 지원하는가 하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의 보호와 재기에 힘을 실어주는데 앞장섰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국토방위에 전념하는 향토의 국군장병들을 찾아가 위문격려하고 진해 해군사관학교 경내에 호국사를, 부산 남구 남천동의 군수기지사령부 안에 금련사를 지어 기부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지만 국가안보를 염원하는 호국정신의 발로였던 셈이었다. 1960년대 말 팔각회를 창립해 반공정신 고취와 호국사상 전파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그 공로로 1974년 1월 대만 중화학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동명그룹은 문화·교육·체육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강석진은 연고가 없는 부산대학교 기성회장직을 맡아 대학발전에 이바지했다. 부산에 고등법원, 고등검찰청 설립 추진운동을 펼쳐 그 뜻을 이뤘다.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 정기 운항선인 부관 페리호 취항을 성취시키는데도 일조했다. 강석진은 육영을 필생의 업으로 마음먹고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을 설립하고 재산을 내어놓았다. 기업경영은 외아들 강정남에게 맡기고 학원 일에만 전념했다. 우선 1978년과 1979년 동원공업고등학교[현 동명정보공업고등학교]와 동원공업전문대학(현 동명대학교)을 설립했다.
동명그룹에게 갑자기 불운이 찾아왔다. 1979년 10월의 국가적 변란은 동명그룹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권력을 손에 넣은 신군부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국정 전반을 장악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칼을 휘둘러 정계의 숙정에 이어 경제계의 정경 유착 비리와 부조리를 바로 잡고 반사회적인 악덕 기업인을 척결한다는 명분 아래 회장 강석진을 반사회적 악덕 기업주로 몰아 동명그룹을 강제로 해체, 도산시키고 그를 구속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언론과 상공계는 탄원과 진정으로 그의 무고함을 주장했으나 서슬이 퍼런 군부의 불순한 정치논리의 결단 앞에서는 모든 노력들이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학교법인을 제외한 강석진 회장과 부인 고고화, 아들 강정남의 재산 및 그룹 전 사업체를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강석진은 4년간 세속일과 담을 쌓고 집과 학교를 오갔다. 단지 발전하는 학원의 모습을 흐뭇하게 여기며 지내다가 1984년 10월 29일 “내가 왜 악덕 기업인이더란 말인가”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동명목재의 성장 요인, 끊임없는 기술력과 신용
동명목재 이후 부산을 비롯한 지역에서는 전국 수출 또는 매출 1위의 기업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돈과 권력이 중앙 집권화 되는 현상이 지속되고, 지역의 기업이 동명그룹이 가졌던 시대적 상황과 창조 정신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기업이 추구해야 할 동명그룹의 성장 요인은 무엇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을까. 우선 동명그룹은 강석진이라는 개인이 맨주먹으로 열정을 가지고 리더십을 발휘한데서 출발한다. 그는 여러 분야 중에서도 목재 사업에 이어 합판 분야가 돈이 된다는 안목으로 동명목재의 도약을 이끌었다. 일본과 미국 등에서 합판 산업이 사양화되면서 한국으로 이전하고 있는 점을 포착했다. 당시만 해도 경쟁력 있는 싼 인건비에다 한국 사람들의 손재주가 합쳐진다면 합판 분야의 경쟁력이 세계 최강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치 한국의 신발과 조선이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였다.
이 때문에 강석진은 목재와 가구 생산에서 최고의 질을 추구했고 당시에 고부가 가치 분야였던 합판생산에 과감히 눈을 돌렸다. 목재를 구하기 힘든 시절에 판재나 각목을 만든 뒤 남는 자투리를 합판으로 만들어 원자재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강기수 당시 동명목재 부사장은 “가구 공장을 할 때였는데 다 만들어 놓은 양복장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직원들을 모아놓고 망치로 두들겨 부셔버린 일이 있었죠.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는데도 최고가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하여간 고객의 요구에 만족시킬 제품을 만들겠다는 고집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죠. 이후 제품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강석진의 선천적으로 뛰어난 손재주와 아이디어 창출도 동명목재의 경쟁력을 높이는 기반 역할을 했다.
조성제 전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은 “강 회장이 요트를 구입한 적이 있는데 더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늘려달라고 했습니다. 대한조선공사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는데 우리 팀이 강 회장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요트를 더 크게 만들어 줬죠. 하여튼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창조정신 하나만은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강석진의 생각은 동명그룹의 연구 개발정신으로 이어졌고 제품의 품질향상과 신소재 개발의 원동력이 됐다. 강석진과 종업원들의 기술개발 정신도 남달랐다. 합판의 제조기술과 생산공정을 연구하여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과 색채의 질 좋은 합판을 생산했다. 정규기술교육을 통해 배운 것도 없고 제대로 된 안내서도 없었다. 경험과 실패를 무기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과정이었다. 접착제의 개발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합판의 생명력은 접착력에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새로운 제품개발이 먼저 이뤄졌다. 합판접착제가 화공약품으로 만들어져 인체에 해가 된다는 문제점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연구결과 콩과 밀가루를 합성한 새로운 접착제인 ‘콩풀’을 개발했다. 요소 수지 등 제품의 종류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용도의 접착제도 만들어냈다. 자투리 토막과 판자조각 나무껍질 등 폐기물들을 기계로 잘게 부수어 톱밥과 함께 새로 개발한 접착제로 뒤섞어 버물어 고열압축 처리한 ‘파티클 보드’ 제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강석진은 이 같은 기술연마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백련천마百鍊千磨, 즉 배우고 익힌 지식과 기술을 천 번, 백 번 부지런히 갈고 닦는다는 뜻의 글귀를 즐겨 썼다. 동명목재상사가 구축한 현장중심의 마케팅과 생산체제도 경쟁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리점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동명합판’의 장점을 알렸다. 경상남도는 물론 경상북도 전라남도까지 도로변 포플러 가로수에 양철 판에 붓글씨로 쓴 동명제재소 간판을 달아놓았다. 당시 사업을 선전하거나 홍보인식이 부족할 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든 것을 해보자는 도전의식과 사업감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소비자의 만족도는 물론 기호와 취향의 변화 등도 조사했다. 조사결과에 맞춰 제품을 개발하고 기계설비의 확충에도 나섰다.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량품이 없어야한다며 일찌감치 제품 실명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동명목재상사의 종업원은 많을 때는 7,000명을 넘었다. 합판의 일일 생산량만 해도 수십만 매를 기록했다. 동명에서 생산되는 합판은 생산라인마다 고유의 표시를 해둬 불량이 나오면 어느 라인에서 누가 만든 합판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종업원들이 스스로 품질에 신경을 쓰는 체제를 구축한 셈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생산제품의 실명제를 실시한 것이었다. 대금결제의 현금처리로 회사의 신뢰를 쌓았다.
당시 대부분의 기업들이 어음결제를 관행화한 현실로 볼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강기수 전 동명목재상사 부사장은 “대금 지급을 현금으로 지급한 것은 동명이 정직과 신용 곧 사훈인 ‘정의’의 실천적 사례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강석진 회장의 기업 경영철학의 하나기이기도 했습니다.” 철저한 사회보국정신도 일조했다. 기업이 튼튼하면 국가가 번성한다는 것이 강석진의 생각이었다. 이 같은 정신은 제품에 혼을 불어넣었고 직원들을 최고 가치의 재산으로 여기게 했다. 기술개발과 인재교육에 최고수준의 투자비를 쏟아 넣었다. 기업성장의 다양한 동력을 갖춘 동명그룹은 성장세를 구가하면서 지역경제를 한국경제의 중심축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동명의 신화에 먹구름이 끼이다
그러나 동명그룹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단일 합판제조업체로는 세계최대 규모였던 동명목재상사를 주축으로 한 동명그룹이 왜 한순간에 무너졌을까. 한때 국내기업 수출 1위를 차지했던 목재그룹 동명의 불운은 정치핍박과 경영실패 등이 겹쳐 발생했다는 것이 동명 관계자와 경제전문가의 공통된 지적이다. 동명 근무자들은 정치핍박에 무게를 두고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정치핍박에다 경영부실이 겹쳐 발생했다고 본다. 하루아침에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것은 정치압력이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사실을 정부가 뒤늦게 발표했다. 동명의 불운은 자금난과 원자재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다. 1980년 5월 7일 새벽 4시, 동명목재가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동명목재 간부 50여 명이 12시간 동안 마라톤회의를 진행하여 8일부터 22일까지 15일 동안 공장가동을 중단하기로 했던 것이다. 회사 측은 원목 재고가 없어 임시 휴업한다는 단서를 붙였지만 1979년부터 부산시내 업계에서 나돌던 ‘동명과의 거래를 조심하라’는 소문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업계와 직원들은 사실상의 폐업으로 받아들였고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 직원들은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며 대책을 호소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합판왕국 동명이 허물어지자 실패 원인들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쏟아졌다. 우선 전 근대적인 경영방식, 즉 기업공개를 외면하고 개인기업 형태를 고수함으로써 기업이익의 80%를 세금으로 흡수당하는 등 자기자본 육성을 외면했다는 점이 지적됐다. 게다가 회장 강석진과 강정남 사장 부자의 불화, 강석진 부인 고고화와 이들 부자와의 갈등에 따른 재산싸움, 강정남 사장의 무리한 계열기업 확장 등이 그 원인으로 지적됐다. 여기에다 1978년 겨울부터 불어 닥친 국제 원목가격 파동과 국내 건축경기의 후퇴, 합판가격 규제, 수출감소 등이 치명적인 요인이 됐다. 자금부족과 은행의 융자 거절로 원목을 사들일 수 없어 공장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자신의 독특한 성실성과 근면성으로 신용을 얻어 기업을 번창시켜온 강석진은 기업공개를 권하는 정부와 주위의 권고를 뿌리쳤다. 동명목재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해온 그는 자신을 스스로 애국자로 칭할 만큼 엄청난 세금을 물어가면서까지 끝내 개인기업 형태를 유지해왔다. 강석진은 자신의 신념대로 회사를 끝까지 개인기업으로 운영했다. 세금을 많이 내지만 개인이 운영해야 시세의 탄력성과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때문에 경영의 합리화와 객관성 유지에 허술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동명목재가 1970년부터 1979년까지 납부한 세금은 222억 원이나 된다. 강석진 회장이 ‘세금 많이 내는 재미로 살아왔다’고 할 만큼 어마어마한 세금을 냈다. 이 중 소득세만 88억 원이었다. 동명목재가 공개법인이었다면 36억 원만 납부하면 됐고 비공개 법인이라도 54억 원만 납부하면 충분했을 것을 34억 원 내지 52억 원을 더 낸 셈이다. 결국 그만큼 자기자본을 스스로 갉아먹은 것이다. 호경기 때 세금 많이 내는 재미로 기업을 경영해온 강석진은 불경기를 맞을 경우 은행에서 얼마든지 융자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자본 축척을 소홀히 했던 것이다. 그가 40여 년 전에 만든 가구제품은 지금까지도 비틀어진 곳이 없고 디자인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솜씨가 대단했다. 그가 설계하고 만든 책상과 대문은 아직까지도 훌륭한 문양을 간직한 채 실용성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생산공장을 건설할 때도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혼자서 감리할 정도로 정열을 보였다. 이 같은 그의 장점이 동명을 굴지의 회사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강석진은 기업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외부인의 간섭을 싫어하는 경영방식 때문에 전문 경영인을 육성하지 못했고 자신의 후계자조차 길러내지 못했다. 1979년 6월 73세의 강석진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의 외아들 강정남이 동명목재 사장으로 부임하자 사장과 임원진간의 불화로 간부가 회사를 떠나는 바람에 업무공백이 생겼고 강정남을 따르는 직원들이 요직을 차지하면서 관리의 허점이 노출되고 경영부실을 재촉했다. 강정남이 회사를 맡은 뒤 국내 건축경기 후퇴로 국내외 판매가 부진했고 목재사업은 지속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국제 원목가격의 폭등도 동명목재의 추락을 부채질했다. 국제 원목가격은 1975년까지 1㎥당 40~50달러였으나 1980년 4월에는 169달러로 폭등했다. 반면 1㎥의 원목이 생산할 수 있는 합판(1000스퀘어피트∙S/F 기준)의 수출가격은 137달러에 그쳤다. 만들어 팔면 더 손해인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이르자 본격적으로 추진했던 사업확장이 큰 타격을 받았다. 동명목재는 1974년 동명산업, 1977년 동명해운과 동명개발, 1978년 동명중공업을 설립했다. 그리고 1979년 6월에는 남진식품을 인수하여 동명식품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기업을 확장했다. 그 결과 재정출혈이 심각해졌다. 추락하는 목재산업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데다 동명목재의 부서를 분리해 자회사를 만들기는 했으나 경기하락기인 상황에서 새로운 회사를 계속 확장해나가는 것 자체가 자금순환을 막고 기업에 어려움을 가중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이 여파로 1979년 한 해 동안 125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동명그룹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업 확장은 장사가 돼가는 것을 봐가며 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고 않았다면서 문어발식 확장으로 회사존립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했다.
회사 문제뿐만 아니라 정부정책도 동명의 추락을 부채질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정부가 물가 안정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독과점품목의 가격규제와 은행 여신한도규제 등도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 제도시행으로 동명은 판매부진과 함께 자금난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인건비가 올라가고 목재비용이 폭등하는 등 목재산업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점도 동명그룹의 좌초원인으로 꼽힌다. 이 같은 문제점은 고스란히 동명목재를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1980년 3월 말 운전자금의 대출이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의 여신한도액을 초과하는 300억 원에 이르러 더 이상 추가 대출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이처럼 회사경영이 최악의 상태에 빠지자 동명목재는 재무부와 제일은행에 세 차례에 걸쳐 정상화 건의서를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더 이상 아니 되겠다고 생각한 강석진이 다시 회사를 맡았다. 하지만 때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1980년 2월 동명목재의 부채는 총자산 761억 원 중 600억 원, 1979년 발생한 적자 125억 원을 포함해 총 185억 원의 결손을 안고 있었다.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과 부산은행의 융자금 500억 원대 상환기일이 다가왔지만 이미 상환능력도 상실하고 있었다. 휴업결정 이틀 전까지의 연체 및 지급금액은 90억 원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연 30% 이상의 높은 이자를 물어야 했다. 동명목재는 비상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재무부와 제일은행을 방문, 회생건의서를 제출했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회사 및 개인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것을 결정했지만 관계당국은 “자구책을 강구해 계속 국민경제에 협조하라는 뜻으로 기업을 유지 발전시켜 줄 것”을 부탁하면서 헌납의사를 반려했다. 결국 1980년 5월 7일 휴업을 선포했고 조업을 중단한 지 50일 만에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동명의 신화는 막을 내렸다.
또 다른 추락 이유, 신군부에 짓밟혀
하지만 동명이 이 정도 어려움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정도로 허약한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이 많다. 그러면 동명그룹이 왜 한순간에 무너졌을까. 한때 국내 수출 1위를 차지했던 목재그룹 동명의 불운은 경영실패 외에 결정적으로 정치핍박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동명 관계자와 경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래도 하루아침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정치압력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것을 모두 공감하고 있다. 동명의 불운은 박정희 시대 말기부터 시작됐다. 당시 제2대 김대만 부산시장이 수뢰혐의로 구속되자 “큰돈도 아닌데 받았다고 해서 잘리기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한 강석진의 말이 언론을 통해 중앙에 전달되자 박 대통령이 노발대발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는 공직자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부산에 오면 수출역군으로 반드시 강석진 회장을 찾을 정도로 좋아했던 점이 감안되어 그럭저럭 사태가 무마되는 듯 했으나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의 끈질긴 뒷조사가 계속되면서 강석진이 차기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출마를 포기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동명목재상사의 위기가 시작된 셈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호화분묘사건’이 터졌다. 독실한 불교신도였던 강석진은 용당동의 1만 여㎡에 30억여 원을 들여 동명불원을 건립했다. 이와 함께 생전에 효도 한 번 변변히 못한 자신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보고 싶은 효심과 부모님의 은공에 대한 보답으로 동명불원 경내 뒤꼍 비룡산 중턱에 묘소를 마련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가난했던 시절 경상북도 청도군 고향 마을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묻힌 부모님의 묘소가 마음에 걸려 유해를 이장해올 계획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인의 지탄을 받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당시 유신시절 일부 정권 실세들과 정상·모리배들이 부정한 수단으로 치부한 돈으로 도에 넘치는 호화주택을 짓고 조상들의 묘원을 법을 어기면서까지 야단스럽게 치장해 부와 권세를 과시했다. 이런 몰지각한 짓거리가 사회문제로 대두돼 큰 물의를 빚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의 노여움을 사게 돼 이들 모두가 정치적인 실각과 함께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석진도 부모의 묘소가 호화 분묘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부산시에 동명불원을 헌납하는 수모를 당했다.
부산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부모를 생각하는 효심이 깊어 만든 절로 인해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강석진이 이렇게 목을 죌 정도로 악덕기업인 취급을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상황에서 강석진은 절을 헌납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던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떳떳하게 번 돈으로 생전에 못한 부모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상징물을 조금 고급스럽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어찌해 그 행위가 죄가 되고 흠이 된단 말인가라는 동정론과 사치였고 과했다는 부정론이 있었지만 결국은 인정받을 수 없는 행위로 비판을 받은 것이었다. 이후 공적인 관계는 물론 사사로운 교분도 두터워 부산에 올 때마다 강석진을 찾던 박정희 대통령의 발길도 끊어지게 됐다. 군사정권에 한번 찍히면 그 위력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황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동명불원이 기증된 지 3년이 지나고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로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1월, 강석진이 동명불원이 강탈된 것이라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일명 국보위)에 반환 요청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행은 겹쳐서 찾아온다고 했던가. 군사정권과의 악연은 계속 이어졌다. 동명그룹은 글로벌 환경 등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해 어려운 환경에 처하고 있었다. 이 당시 상황은 류필윤 당시 동명목재 전무의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돈이 모자라긴 했지만 당시 전문경영인이었던 강기수 부사장이 서울에서 부총리를 만나 긴급자금 200억 원을 요구했습니다.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이 우리에게 50억 원씩 나눠 지원하기로 합의했죠. 그런데 갑자기 저녁에 호텔에 쉬고 있는데 안기부 요원들이 들이닥쳤고 다음날 부산으로 호송돼 왔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말입니다. 강 회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모두 잡혀오는 바람에 은행거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은행이 돌아오는 어음을 못 막아 부도를 내버리고…정말 현재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로 법무부 장관과 정부 고위층이 있었지만 손 쓸 틈도 없이 한순간에 사태가 악화되어 버렸습니다, 강회장과 간부들이 15일 동안 보안사 지하실에 갇혀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외부와 완전 연락 두절 상태였습니다.”
이 같은 동명의 억울함은 회장 강석진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동명문화학원 등이 명예 회복을 주장하면서 설득력을 얻었다. 법원과 국가로부터 동명목재와 강석진의 명예가 회복된 것이었다. 동명 측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불량기업 손보기 케이스에 동명이 걸려들었다”고 주장했다. 부산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주도하는 야당 도시인데다 강석진이 신군부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했다는 것이었다. 동명 측은 동명목재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나 부도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총자산 761억 원, 부채 600억 원의 흑자 도산이었다는 것이었다. 동명 측은 “1980년 6월 21일 보안사는 이 모 씨를 부산지부 수사과로 소환하여 보관중인 동명그룹의 주식 전부와 주식판매대금 지급잔액(18억 원)을 압수했다. 결과 만기된 어음과 수표가 돌아와도 결제할 자금을 조달하기가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제일은행이 6월 26일 동명목재를 부도처리했다는 것이다. 천덕호 동명전문대학 교수(작고)는 『동명 강석진 전기』에서 “강 회장은 합판사업이 1980년대 중반부터 쇠퇴할 것으로 보고 합판공장 중심에서 항만, 해양사업 위주로 사업전환을 준비했다. 외국 상사와 외자 1억 달러 도입 교섭을 진행할 정도로 미래를 내다보는 기업가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회사가 어렵긴 했지만 기업이 겪는 일반적인 어려움에 불과했다며 제2의 변신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법원이 군부의 강압을 선언하여 동명의 명예가 되살아나 강석진의 원한을 달래주고 있다. 동명그룹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동명과 회사의 명예는 회복됐다. 1997년 11월 19일 서울지법 민사합의 14부(재판장 나종대 부장 판사)는 “신군부에 의해 전 재산을 빼앗긴 전 사주 측의 재산반환소송에서 당시의 재산헌납이 강압에 의한 것으로 법률상 원인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재산헌납의 동기가 합동수사본부 부산지부가 신군부의 지시에 따라 원고들의 전 재산을 강제처분하게 해 동명목재 계열사의 채권채무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어서 건전한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동명목재 회장 강석진과 아들 강정남이 작성한 위임각서는 백지각서로 그 내용을 모두 합수부 직원들이 작성했다. 위임각서도 모든 재산을 처분한다는 취지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의사결정의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라고 말했다.
동명목재 사주들이 국가에 강제 헌납한 재산은 부산시와 한국토지공사가 매매 및 무상증여로 받은 토지 약 3.17㎢(96만평)를 비롯해 부산투자금융과 부산은행의 주식 약 700만 주, 강석진 및 강정남의 배우자와 자녀 명의 예금액 16억 원 등이다. 부산 용당세관과 부경대학교 용당캠퍼스, KBS 부산방송총국 뒤쪽의 땅 등 많은 곳이 동명의 땅이었다. 동명목재 측은 빼앗긴 재산이 당시 시가로 4000~5000억 원이었으며 현재 가치로는 1조원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동명목재는 군부의 시퍼런 칼날에 쓰러져 순식간에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본 셈이었다. 동명목재 창업주의 장남 강정남 전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은 2006년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전두환 정권에 의한 동명목재 강제해산과 사주재산 강탈사건을 둘러싼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신청했다. 이 같은 요청은 받아들여져 동명의 명예는 확실하게 회복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또다시 2008년 10월 22일 동명의 손을 들어주었다. 신군부가 동명목재를 강제 해체하고 재산을 빼앗았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부산지부 수사관들이 1980년 6월 15일경부터 사주일가와 회사 임원들을 연행해 15일 내지 2개월 간 불법 구금하고 수사과정에서 폭행 및 전기고문 위협 등 가혹 행위를 가했고 동명목재 사주들에게는 재산포기 위임각서 작성을 강요했다고 밝혀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동명목재 사건은 1980년 5월 31일 신군부 세력이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각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해 국가행정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강압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면서 저지른 사건이다. 국보위가 악덕 기업주의 개인재산 몰수라는 사회정화 명분을 달성하려는 의도 하에 자행됐으며 폭력적인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 전형적인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진실화해위원회는 국보위 설치와 같은 돌발적 정치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무고한 서민이나 약점이 있는 사람 및 비판적 세력이 사소한 잘못이 빌미가 되어 정치적으로 탄압받고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평소 민주적 시민의식을 신장시킬 수 있는 꾸준한 노력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동시에 동명목재 사건의 진실이 규명됨에 따라 불법구금과 가혹행위, 동명 사주들을 악덕기업인으로 매도하고 재산권을 침해한 점 등에 대해 피해자들과 그 가족에게 사과할 것을 국가에 권고했다. 비록 빼앗긴 재산을 찾지 못했지만 강압에 의한 재산 침탈이라는 점을 밝혀 명예를 회복한 것이었다. “이제라도 억울하게 눈을 감으신 선대 회장님의 누명을 벗겨드릴 수 있게 돼 다행입니다” 강정남 전 동명문화학원 이사장(당시 동명목재 사장)은 진실위로부터 발표가 나오자 이같이 말하며 눈물을 쏟았다. 회장 강석진의 장남으로 자신도 보안사에 끌려가 두 달 여에 걸쳐 고문과 불법감금에 시달렸던 그는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0년 넘게 외국 생활을 하다 1990년대 말에 귀국한 뒤 2004년부터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참 긴 시간이 지났네요.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이 없어야 합니다.” 동명목재의 파산은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왔다. 부산경제가 급속하게 침몰하는 서곡이 됐다. 종업원 3,700여 명이 일자리를 잃는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했다. 월평균 인건비 4억 5000만 원과 퇴직금 22억 원, 휴업수당 등 자금조성이 극히 어려워 종업원 가족 2만여 명의 생계유지가 당장 어렵게 됐다. 전국에 있는 대리점 150여 곳은 판매기능을 잃고 도산했다. 미리 제품 값으로 내놓은 28억 원을 받지 못했고 보증금으로 담보된 50여억 원의 부동산 회수도 어려움을 겪었다. 동명에 부품을 공급한 200여 개의 중소기업들도 대금을 받지 못해 연쇄적으로 도산하거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부산최대의 기업이 무너지면서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강정남은 “기업이 경영을 하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군부의 군화 발에 짓밟혀 평생을 피땀 흘려 일군 기업을 하루아침에 공중 분해시킬 수는 없다”면서 “부친의 명예를 뒤늦게나마 회복하고 학교가 터전을 부산에서 잡아가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동명목재 사람과 동명의 흔적, 그리고 제2의 동명을 꿈꾸며
회장 강석진 사후 가족들은 신군부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동명문화학원만은 지켰다. 현재 동명공업고등학교와 동명대학교를 운영 중이며 ‘동명 인재양성’이라는 강석진의 이념을 실현시켜가고 있다. 아들인 강정남은 동명문화학원 상임이사와 총장, 사위인 배명인은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 이들은 학원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 강석진의 사촌동생인 강기수(작고)는 동명문화학원 3대 이사장을 거쳤다. 동명목재 출신들도 부산경제를 위해 활동했거나 활동하고 있다. 당시 총무 상무였던 김만수 동아타이어 회장은 1971년 동명목재를 나온 뒤 회사를 설립, 산업용 튜브 전문생산업체를 이끌고 있다. 이대은 조광페인트 대표도 동명목재가 도산한 뒤 입사해 최고경영자로 일하고 있다. 김오수 동영물산 대표, 김용덕 삼오기업 대표, 박종익 삼익TR 회장, 부산상의 처장을 거친 뒤 동성화학 고문을 지낸 김정웅도 부산경제 발전에 헌신하고 있다. 동명중공업 상무였던 유원산업 권정호 회장(작고)도 동명의 뜻을 담아 조선 기자재산업 발전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동명목재에서 일했던 이상철 박민생도 동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거나 재직했다.
현재 동명의 흔적은 터전을 잡은 교육계에 남아있다. 동명학원의 인재들이 지역을 위해 뿌리를 내리면서 정보통신과 항만분야를 중심으로 새로운 동명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동명문화학원과 동명대학교는 2009년 ‘동명대상’을 제정, 동명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이 상은 산업화시대 수출 및 경제발전을 주도한 강석진 동명목재 회장의 도전·창의·봉사 정신을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구현한 사람에게 수여하고 있다. 이는 기술 강국과 미래부산의 꿈을 이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동명대학교 본관 중앙도서관 2층에 2009년 마련된 동명기념관도 강석진의 사상과 삶을 재조명하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강석진은 그가 만든 동명대학교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산업화시대에 국가수출과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등의 이유로 2003년 2월 15일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명 이후 동명만큼 전국에서 매출규모로 우뚝 선 부산기업을 찾아볼 수 없다. 부산은 해양과 조선 자동차 기계 등 제조업분야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관광분야로 부산의 역량을 집중하고 확장하고 있다. 현대는 가치의 시대다. 동명이 남긴 철학과 유산은 급변하는 글로벌 변화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부산경제에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동명의 창의성과 포기할 줄 모르는 끈질김으로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기술력을 연마해 현장과 현실, 삶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명이 놓친 글로벌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고 정치탄압에도 견딜 수 있는 민주적인 환경과 인권강화에도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제대로 된 철학과 성장성을 갖춘 기업, 시민이 일자리를 가지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부산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동명이 있다면 그 점을 우리들에게 충고할 것 같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