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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4일 연중 제27주일 (군인 주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제1독서 : 이사 5,1-7
제2독서 : 필리 4,6-9
복 음 : 마태 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우리 믿는 이들은 누구인가?
-주님의 전사, 주님의 소작인, 주님 공동집의 수호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저에게 참 의미심장한 날입니다.
연중27주일 원래 원장수사 주례지만 제가 주례를 청했습니다.
바로 가톨릭 교회가 ‘9월1일 창조계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로부터 시작된
‘창조의 시기The Seasion of Creation’가 제 영명축일인 오늘 10월4일
성 프란치스코 축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또 한분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이콘’으로 불릴 정도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성인으로 종파를 초월하여 만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성인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지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각별한 사랑을 쏟으시는 성인은
오늘날 기후변화로 위기를 겪고 있는 공동의 집인 지구 생태계의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공동집인 지구를 살리기 위해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영성을 참으로 깊이 배워
실천해야 할 위기의 시대에 어느 성인보다 각광을 받는 성인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셋으로 요약됩니다.
주님의 전사, 주님의 소작인, 주님 공동집의 수호자로 오늘 강론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군인주일입니다.
주님의 군인, 전사하면 저는 대천사 미카엘이 생각납니다.
‘누가 하느님과 같은 가?’ 라는 뜻의 미카엘 대천사는 천상 군대의 장수, 악에 대한 수호자입니다.
9.29일 대천사 축일에 고속도로에서 불의의 대형 교통사고 시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살아나
대천사 미카엘로 부활한 느낌이라 이제 프란치스코 수도명에 대천사 미카엘을 하나 더 받았다 생각됩니다.
어제 자매님에게 보낸 카톡 답신입니다.
“대천사 축일에 하느님은 기적 은총으로 살려 주셨습니다.
상처도 경미하고 후유증도 전무하니 천사님이 꼭 품에 안아 주신 느낌입니다.
당시는 너무 평온해 몰랐다가 후에 기사분과 통화시 설명을 듣고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깨닫고 놀랐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십중팔구 중상 아니면 즉사랍니다.
대천사 축일에 대천사 미카엘로 부활한 느낌도 듭니다.
이제부터 미카엘 대천사처럼 주님의 위대한 전사, 미카엘 대천사처럼 살고 싶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현재 상태를 많은 이들은 세계 제3차 대전이라 일컫곤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전쟁이 없어졌다 합니다. 전세계가 코로나19와의 전쟁에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로서 진가를 발휘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물질주의, 소비주의의 원흉인 무지의 탐욕과 교만과의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코로나로 중상을 입고 치료중이 아닙니까?
요즘 산책 시 동요와 더불어 70년대 풍미했던
김민기 작사, 작곡의 ‘늙은 군인의 노래’ 1절을 즐겨 부르곤 합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꽃피고 눈 내리길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저는 ‘이 강산’ 대신 ‘수도원’을, ‘군인’ 대신 ‘수도자’를, 어언 ‘30’년 대신 ‘40’년을,
‘푸른 옷’ 대신 수도복 ‘검은 옷’을 넣어 부르면 더욱 실감이 나며 비장미悲壯美까지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로써 깨어 영적 전투에 전념해야할 위기의 시대입니다.
둘째,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소작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복음의 무지와 탐욕의 소작인들이 우리에게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그런데 당시의 현실을 알고 보니 소작인들의 처지가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부유한 시골 저택은 ‘성채도시’와 다를 바 없는 ‘커다란 성’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농사짓는 농노와 같은 소작인들은 토지 주인에게 추수의 1/3, 임금에게 1/3을 납부하니
부자의 횡포와 약탈에 집주인이 토지세를 징수하기 위해 보낸 종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당시 사람들에겐 자주 있는 일이였습니다.
바로 조선 시대 빈번했던 민란의 경우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포도밭 임자가 상징하는 이는
악한 주인이 아니라 참으로 인자하신 하느님입니다.
이런 착한 주인을 무지와 탐욕으로 몰라보고
예언자들인 종들을 아들인 예수님까지 살해한 악한 소작인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간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바로 초대 교회 신자들의 우의적 해석입니다.
이들 신자들은 시편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를 읽었고 파스카 예수님의 입을 빌려 고백합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 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포도밭이 상징하는바 하늘 나라입니다.
이제 악한 이스라엘 소작인들은 그 권리가 몰수 되고 새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교회의 소작인들인 우리에게 하늘 나라 포도밭이 위임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저절로 자문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착하고 1. 진실하고 2. 성실하고 3. 절실한 삼실三實의 소작인으로
섬김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작인인 동시에 주님 포도밭의 포도나무이기도 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포도밭 노래가 이를 말해 줍니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 포도를 맺었다네.
나는 좋은 포도를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그대로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주님의 소작인들은 우리를 성찰케 하는 말씀입니다.
좋은 포도 열매인지 들포도 인지 확인하여 분발의 노력이, 회개가 참으로 절실한 때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탄식은 공정과 정의의 좋은 포도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말이냐?”
우리의 각성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 포도밭에서 ‘주님의 소작인으로 충실히 섬김의 책임과 의무를 다 했는가?’하는 것이며
‘좋은 포도 나무가 되어 공정과 정의의 좋은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 공동집인 지구의 수호자로서의 삶입니다.
하늘 나라 포도밭은 교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공동집인 지구까지 확장되었고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지구를 돌보고 지키는 수호자가 되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후위기에 따른 현재의 재난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가는
코로나 19와 기후변화를 통해 누구나 갖는 위기감입니다.
요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론 식자들의 공통적 관심사도
주님의 공동의 집은 지구를 살리는데 있습니다.
하여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프란치스코의 작음의 영성, 가난의 영성, 겸손의 영성이
참으로 화급한 때입니다. 이제 하느님과 이웃사랑에 자연사랑을 필히 덧붙여할 상황입니다.
그 어느 때 보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태양의 찬가'의 영성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장차 있을 제 장례미사 퇴장 성가로 점찍어 두고 있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태양의 찬가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 후 유행됐던
‘일터로 가자’ 노래 역시 산책 시 부르는 요즘 애창곡입니다.
참으로 디지털 시대에 오래된 미래 같은 아날로그 환경을 그리워하게 하는
가사 1절과 3절을 소개합니다.
-“저 건너 푸른 봉에 구름 걷히고 태양이 솟아오니 어화 새 날이로구나
시냇물이 굽이굽이 감도는 들엔 이슬맞어 젖은 흙은 향기를 풍긴다.
낙원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심으며 웃는 얼굴/어화 낙원이로구나
내 가슴에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내 가슴에 언제나 봄바람 분다.
어화 어화디야 일터로 가자/이 나라의 주인이 너와 나로구나.”-
주님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숭고한 의무 셋을 부과하십니다.
참으로 깨어 준비하며 단순 소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주님의 소작인으로서, 주님 공동 집인 지구의 수호자로 사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감성과 인성과 영성이 최고로 조화된 전인으로서의 인간으로의 변모입니다.
주님은 고맙게도 바오로 사도를 통해 그 답을 주십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음 여덟 가지 조목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1. 참된 것과 2. 고귀한 것과 3. 의로운 것과 4. 정결한 것과 5. 사랑스러운 것과
6. 영예로운 것과 7. 덕이 되는 것과 8.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하십시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연히 초등학교 때의 친구들과 연락이 되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랬을까요? 서로 이야기하는데 주로 이렇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 기억나니?”
이 말로 먼저 물어보고 함께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기억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의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중간에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전근 가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기억했습니다. 드디어 기억의 공통점이 생겼습니다.
모두가 좋아했던 선생님의 전근은 우리 모두의 기억에 선명하게 기록되었나 봅니다.
어느 책에 이런 말이 적혔던 것이 생각납니다.
‘모두가 과거를 다르게 기억한다. 저마다 과거를 다르게 살기 때문이다.’
공감 가는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살았음에도 기억하는 과거가 다를 수밖에 없나 봅니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의 기억만 정답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지금 행동을 정당화시키곤 합니다.
나의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포도밭 임자가 소작인들에게 일을 맡기고 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맡긴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것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지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소작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또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모든 힘든 일을 포도밭 임자가 합니다.
얼마나 소작인들을 배려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포도밭 임자의 배려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기억을 간직합니다.
그 밭을 차지해야 한다는 기억만을 만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리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당신 자신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이고, 못된 소작인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말씀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더 많은 것을 얻지 못했다는 잘못된 기억만 하는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기억을 하는 우리는 오늘 독서에서 전해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의 기억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 4,9)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
류해욱 요셉 신부
코로나가 좀 진정세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휴가 끝나고 며칠 더 기다려 보아야겠지요.
오늘은 연중 27주일이며, 군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주 심각하게 포도나무에 대하여 듣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 주시도록 간절히 청합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선포하십니다.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포도나무는 바로 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구약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포도나무나 하느님의 포도밭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소개하면, 포도나무가 얼마나 깊이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새겨져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의 한 구절은 이렇게 읊조립니다.
“당신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뽑아 오시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자리를 마련하시니 뿌리를 내려 땅을 채웠습니다.”(시편 80, 9- 10)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친구를 위하여 나는 노래하리라.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를.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이사 5, 1 –2)
예언자 예레미야는 한탄합니다.
“나는 좋은 포도나무로, 옹골찬 씨앗으로 너를 심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낯선 들포도나무로 변해버렸느냐?”(예레2, 21)
호세아 예언자도 참담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이스라엘은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 열매를 잘 맺는다.
그러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들도 많이 만들고.”(호세 10,1)
에제키엘 예언자는 15장 전체를 ‘포도덩굴의 비유’에 할애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를 외칩니다.
“사람의 아들아, 포도나무가 다른 어떤 나무보다,
숲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덩굴보다 나은 게 무엇이냐?
보아라, 그것은 땔감으로 불에 들어간다.”(에제 15, 2 –4)
이렇게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편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징으로 가장 잘 드러난 외적 표징은
성전 중앙에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포도나무 덩굴입니다.
황금으로 만든 포도나무 덩굴은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광을 상징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 포도나무의 의미를 새겨 보십시오.
황금빛으로 빛나는 포도나무 덩굴이 아니라 보잘것없어 보이는 당신이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느껴 보십시오.
우리말로 ‘참’이라고 옮긴 희랍어 단어는 ‘에이레씨노스’입니다.
이 말을 ‘정통적인, 가짜가 아닌 진짜’, ‘순수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속내는
가짜가 판치는 그 당시 이스라엘 상황을 함축한 것입니다.
휘황찬란하게 만들어진 성전의 황금으로 만든 포도 덩굴은 가짜라는 것을 개탄하는 것이지요.
그 느낌 안에 머물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을 상상 안에서 들어보십시오.
“그대들은 이스라엘인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만일 그대들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받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대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다시 새겨보아라.
하느님께서 진짜 포도나무를 이스라엘에 심으신 것은 사실이다.
시편 말씀대로 그 좋은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빼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대로 그대들은 점점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변했다.
예언자 호세아가 애통해하면서 한탄한 대로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만 늘어갔다.
하느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제단의 향이 아니라는 것을 그대들은 모르고 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잘못 자란 포도 덩굴을 땔감으로 쓰듯이
이스라엘이 불에 던져질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이제라도 그 불을 면하려거든 제발 아버지께서 보내신 나의 말을 귀담아 들으라.
내가 참 포도나무다, 그대들이 구원을 얻으려거든 모두 나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
단순히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느냐고? 내 말을 실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더 이상 형식과 허례허식으로 전락한 율법, 그중에서도 안식일법. 겅결례법. 제사 등의
외적인 것에 매달리지 말고 그대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정의가 바로 서도록 해야 한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침잠하십시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포도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포도밭을 떠올리면, 술에 취하듯 푹 빠져버린 사랑이 떠오릅니다.
사랑에 포로가 되어버려, 거부하려 해도 거부되지 않는 사랑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술 도가니에 빠져버리듯 흠뻑 젖은 사랑의 향기에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가 부르는 사랑의 연가(戀歌)인 <제1독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이사 5,1)
여기서, 포도밭을 공들여 가꾸는 “포도원 지기”는 하느님으로,
“포도밭”은 유다 민족으로 비유됩니다.
그런데 포도밭을 사랑하는 포도원 지기의 사랑을 배반하고,
포도밭은 엉뚱하게도 들 포도를 맺었습니다.
이에 포도원 지기는 사랑에 상처받고, 무너져 내리는 실망과 쓰라림에 빠졌습니다.
사랑이 배신당한 아픔에 어찌할 바를 몰라 비탄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격려합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운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
<복음>은 <제1독서>와 마찬가지로 ‘포도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화하시자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권위에 대해 따져 묻자,
들려주신 세 가지 비유 중 ‘두 번째 비유’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첫 번째 비유’ 말씀을 들었고,
다음 주일에는 ‘세 번째 비유’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자비가 더욱더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몇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직접 보내주시기까지 믿음과 자비를 베풉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했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하신 사랑을 드러냅니다.
오히려 살해당한 당신의 아들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는
오묘한 섭리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자비를 베풉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비록 유대인들에게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펼치셨습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버려진 돌”인 당신의 아들을 머릿돌로 삼아 새로운 집, 새로운 백성을 세우십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외적이고,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것에 얽매여 예언자들을 죽였고,
아들 예수님마저 죽이고 말았습니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웠던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제때에 도조를 바치지 않고
엉뚱한 착각에 빠져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처럼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약점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약점을 감추는 것이 문제요,
우리의 실수가 아니라 우리가 실수를 통해서도 배우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것이 문제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완전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잘 맺은 포도밭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먼저 결실을 맺을 모든 준비를 우리에게 다 해 주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보듯이,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어서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이사 5,2)하여 모든 준비를 다 해주셨고,
<복음>에서 보듯이,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워”(마태 21,33),
이미 모든 준비를 다 해 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하여도, 우리의 죄를 뛰어넘는 당신의 큰 사랑이 있습니다.
이 큰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제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토록,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참으로 놀랍습니다.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분명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졌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신비요, 구원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결코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도조를 잘 내는 소작인이 되어야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행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내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치는 새 백성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고,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주일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아는 은총이 우리에게까지 닿게 된 까닭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마태 21,33)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기 시작하십니다.
이 비유의 배경은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대목을 그대로 언급하신 것입니다.
포도밭을 만드는 주인을 관상합니다. 그분이 얼마나 신이 나고 흥겨워하시는지요.
그분에게 포도밭은 단순한 소유지를 넘어, 애인이고 신부이며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해 당신 짝으로 삼으실 때의 기쁨과 환희가
우리 가슴까지 떨리게 하는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39)
그런데 포도밭 소작인들은 처음 밭을 경작할 수 있게 선택되었을 때의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은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넘보지요.
합당한 소출을 바치지 않으면서 주인의 종들을 해치고 아들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내 포도밭을 위해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이사 5,4)
포도밭 주인이신 주님의 눈물 어린 탄식이 들립니다.
주인은 좋은 터를 잡아 온갖 시설을 다 짓고 지극 정성으로 포도밭을 마련했습니다.
사랑을 퍼부었으니 사랑 가득한 열매를 맺으리라 기대했지요.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시고 떫고 볼품없는 야생 들 포도가 열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로 무엇을 더 어떻게 해주어야 했을까요...
이 탄식은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태 21,37) 하며
끝까지 소작인들을 믿은 순진하다 못해 바보스런 복음 속 주인의 탄식입니다.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던 주인이 당신 백성에게서 배척받는 적반하장의 극치일 겁니다.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은 내줄 것입니다."(마태 21,41)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바른 소리를 합니다. 누가 들어도 불의한 상황이기 때문이니까요.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소작인들"
새로운 소작인들은 이 포도밭의 주인이 누구이며,
자기들은 그와 맺은 계약을 통해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일꾼들입니다.
자기들 노동의 몫을 가져가더라도,
땅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합당한 소출을 바칠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지요.
주님과 백성의 계약은 종이 한 장으로 남기 이전에 먼저 서로의 영혼과 마음에 새겨집니다.
둘 사이에는 부르심과 응답이 있었고, 그에 따른 선택과 책임이 있습니다.
이를 잊은 존재는 결국 포도밭을 빼앗길 것입니다. 사랑으로 시작된 계약은 사랑을 맺어야 하니까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단호하고 냉정한 선언입니다.
이대로라면 비유 속 소작인들처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은
결국 하느님 나라를 빼앗길 터입니다.
그리고 이천 년 전 그들의 마음속에 떠오른 적도 없었던
지구 반대편의 우리에게까지 하느님의 나라가 전해지게 되지요.
이스라엘의 거부로 인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받은 우리 모두는
"제때에 소출을 내는 민족"으로 불리움 받았습니다. 이 은총에 우리의 공로는 없습니다.
다만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작용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합니다.
필리피서의 짧은 대목 안에 거룩한 영적 단어들이 보석처럼 촘촘이 박혀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기도, 간구, 하느님께 아룀"
"참되고 고귀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영예롭고 덕이 되고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에 간직하고, 그대로 실천함"
오늘 필리피서 대목 안에 나오는 말씀들을 모으니,
이야말로 우리가 바쳐야 하는 소출임을 알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고 그분과 깊은 관계 안에 머무르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직접적인 소출이지요.
온갖 덕과 선을 간직해 실천하는 것은 형제자매와 이웃을 이롭게 하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결국은 이조차도 하느님께 돌아갈 소출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복음 환호송)
우리는 제때에 소출을 내는 소작인으로서, 주인의 부르심에 감사하며,
그에 맞갖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열매가 우리 자신들만 배불리고 풍요롭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소출은 주님의 공정과 정의가 이루어지는데 쓰여야 합니다.(이사 5,7 참조)
포도밭을 짓고 꾸밀 때 주인이 가졌던 설렘과 기대, 사랑을 떠올린다면
그분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지요.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시리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우리에게까지 다가온 주님의 부르심과 기대를 경이롭게, 감사히 받아들입시다.
가장 먼저 선택하신 이들에게 모질게 배척받으신 그분 마음을 위로해 드리면서,
부족하지만 풍성히 열매 맺고 소출을 바치는 신실한 백성이 되도록 애를 씁시다.
우리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과 함께면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 4,6.9)
오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를 사부로 모시고 살아가는 저희 모든 프란치스칸들을 축하해 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작음과 형제애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제때에 맺는 하늘나라의 소작인들이 될 수 있도록... 아멘.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태 21,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
교만과 존중 사이에
어리석은 우리가 살고 있다.
존중은
또 다른 존중을 불러들인다.
존중이 빠져버리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서로를
아름답게 하는 존중이다.
다양성과 차이점을
인정하는 존중이다.
존중은
생명의 질서이다.
존중을 통해
생명의 힘을 다시 얻는다.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고 존중하는 것이
회개의 핵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존중으로 이 땅에 오셨다.
존중은
생명을 살린다.
바뀌어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이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존중이다.
존중은
모든 관계의 열쇠이다.
소중하게 받아들여지는
기쁨이 존중이다.
복음은 존중으로
우리를 부른다.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우리들 여정이다.
겸손의 또 다른 이름이
존중임을 믿는다.
교만은
욕심과 살인으로 얼룩져가지만
존중은
믿음과 행복 성숙으로 충만케 한다.
모든 여정은
존중을 필요로 한다.
감사도 연습해야 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입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맡기고 간 포도밭을 자신들의 것인 양,
합당한 소출 일부도 주인에게 내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이기 때문에 예외가 없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다 가진 자는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기에 더 감사한 일이 일어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초등학교 때 저능아 취급을 받았고
학교에서 수업을 가르칠 수준이 아니라며 그를 쫓아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른 나이에 청력을 잃고 청각 장애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 가지 않게 된 덕에 연구할 시간이 많았고,
청력을 잃어 실험에만 집중할 수 있어 감사한다고 회고록에 남겼습니다.
감사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오게 만드는 문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 은총이 세상에 전달되게 하십니다.
일본 ‘내쇼날’ 창업자 마쓰시다는 아흔넷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
산하 570개 기업에 종업원 13만 명을 거느린 대기업 총수입니다.
그도 아버지의 파산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 점포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도 항상 감사한 것이 있었는데,
“1. 가난한 것, 2. 허약한 것, 3. 못 배운 것”이라 말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가지고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그것이 하늘의 은혜였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찍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지금 아흔이 넘었는데도 30대의 건강을 유지하며 겨울철에도 냉수마찰을 합니다.
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저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남들이 말하는 불행은 하늘이 저를 성장시키기 위해 마련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다 보면 큰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우리가 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혹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그런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한 수녀님에게 자그마한 건물을 지으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물론 본원에서도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돈 때문에 걱정이 많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전에 알던 후원자분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또 그분을 위해 기도를 해 주니 그분에게도 남는 이익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기부하겠다고 하여 통장 액수를 보니 3억 원이었습니다.
수녀님은 수중에 그렇게 큰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다음부터는 불안함에 떨어야 했습니다.
누가 통장을 훔쳐 가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 돈을 써버리지 않으면 불안증에 시달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6개월 뒤, 건물을 짓는 계약금으로 그 돈을 먼저 써 버렸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수녀님들은 청빈서원을 하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불안합니다.
그런데 수녀님이 아닌 분들도 복권에 당첨되거나 땅값이 올라 갑자기 많은 돈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많은 액수의 돈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왜 불안할까요? 평상시에 감사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돈을 다 잃어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 돈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수억 원의 돈을 가지고 있다면 여간 불안하지 않습니다.
돈 한 푼도 없이 편안할 때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그렇게 돈이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수녀님들이야 할 수 없지만 보통 사람들은 감사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들어오는 모든 것들의 십 분의 일을 바치며 그 모든 것이 하느님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의 하인들은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이것을 연습시키기 위해 오는 사람들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십일조를 내지 못해도 갑자기 돈이 들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주신 것, 주님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을 찬미할 마음을 갖고 잃어도 감사할 수 있는 훈련을 한다면
나중에 하느님의 아드님까지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행복한 줄 알면서도 잘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훈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련도 안 하며 김연아 선수처럼 스케이트를 잘 탈 수 있으면 감사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도, 사랑도 훈련해야 합니다. 연료만 주어진다고 아이가 차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이 감사일기와 십일조입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몸에 지방이 저절로 많아지는 것처럼,
감사도 정해놓고 운동처럼 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정해놓고 내고 미사 때 주님을 찬미하면 됩니다.
‘시간 날 때 운동해야지!’라고 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정해놓고 감사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하느님 나라를 사는 은총표입니다. 은총 표는 하나하나 모아야 합니다.
감사도 하려고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연습을 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현 캐트린 수녀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마태21,42)
우리 주님이 모퉁이 머릿돌이시니
나는
그 어디쯤에
아랫돌 '하석'이 되고 싶었다.
下石
그래서 참 행복하다.
나의 구원자 주님 곁에
영원히 머물 하석이 되었다.
이것으로 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