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아름다운 땅이란 없고, 온전히 아름다운 사람도 없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난리가 아니다. 벌집을 쑤신 듯 여기저기 불협화음이 분출되고 있다. 모든 게 다 권력에 대한 과도한 욕심 때문이다. 저마다 자기만 잘 난 세상, 그러나 세상의 이치가 어디 그런가?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다 결함이 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온전하게 되고자 노력하다가 가는 게 모든 사람의 생사生死가 아니겠는가’
풍수지리의 명제에 이런 말이 있다. “명산에 명당 없다” 그리고 “온전히 아름다운 땅이란 없다.(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라는 말이 있다. 이 말과 같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나 땅이건 간에 결함 없는 사람이나 땅이 그 어디에 있겠으며, 완벽한 땅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찍이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영웅에게는 아름다움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어렵다. 아름다움이란 어떠한 격렬한 의지로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넘치기도 하고, 조금 모자라기도 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에서 중요하고도 중요한 것이다.”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도 없고, 추한 것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땅도 역시 마찬가지다. 완전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조금 모자라기도 하고, 조금 넘치기도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며, 명당도 그와 같다는 말이다.
“한 나라와 한 지역의 자연조건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평가를 할 때, 완벽하게 절대적으로 좋은 지방이나, 일말의 가치도 없는 불모의 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지역의 자연조건에는 결국 그 지역의 장점과 단점이 있다.” 〈차이나 프로젝트〉에 실린 후자오량의 글이다.
이 말은 대체적으로 맞다. 지역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삶에서도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으며 절대적인 선이나 절대적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손해라고 생각되어 돌아서서 보면 금세 이익이 되기도 하고, 패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날 문득 이겼다는 생각으로 바뀌기도 한다. 매우 낙후되었던 곳이 어느 날 문득 개발바람이 불면서 땅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도 한다. 뿐인가? 매일 비실거리는가 싶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기도 한다. 세상에 어디 정한 공식이 있겠는가?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사람이 태어나고 돌아감은 공평한데 살아가는 형태나 과정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뒤돌아보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었고 세상은 언제나 말세였다. 결국 어느 곳 어느 나라나 불평등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는 사회는 요순堯舜시대에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사회를 갈망하기 때문에 요순시대를 그리워할 뿐일 것이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명당과 갈지>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다른 우주로 살다가 어느 순간 광대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간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욕심부리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다. 2024년 7월 19일.
송시열묘, 박문수 묘, 남연군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