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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홍배 회장은… 1937년 경북 성주 生 고령농고겢倂뭅?행정학과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63~72년 청와대 총무비서실 근무 72년 삼정기업(현 ㈜삼정) 설립 88~2005년 피씨 전국대종회장 89년 재경성주신우회장 90년 가야개발 설립 91년 시화제련 설립 98년 삼정씨더블유 설립 2007년~ 최경주재단 이사장 | |
세계적 프로골퍼 최경주가 시합이 끝나면 보고 겸 안부 전화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양아버지로 삼은 피홍배(71) ㈜삼정 회장이다. 국내에서 이름이 막 알려질 무렵 최경주를 우물 안에서 벗어나 세계 무대로 나가도록 독려하고 옆에서 도와 세계적 브랜드로 키웠다. 전라남도 완도 섬 소년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배경에는 경상도 출신 중소기업인이 있었다.
섬 소년 최경주에게는 어릴 적부터 두 가지 꿈이 있었다. 하나는 골퍼로 성공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다. 이 점에서 2007년 11월 23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복지재단을 만들었고 청와대에서 체육훈장 청룡장도 받았다.
최경주는 피홍배 ㈜삼정 회장에게 복지재단 이사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피 회장은 “쟁쟁한 분들이 많은데…” 하며 사양했다. 최경주는 거듭 간청했다.
“아버님 무슨 말씀이세요. 다른 분들 모두를 합쳐도 아버님 한 분만 못합니다.”
피 회장과 최경주 선수와의 인연은 이 땅에 외환위기가 몰아친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 회장이 88골프장 운영위원장으로 있을 때 서른의 나이로 프로 입문 5년 차인 최 선수와 처음 만났다. 텃세가 대단했던 당시 골프계에서 여명현 88골프장 사장이 오로지 실력을 인정해 특별히 데려온 경우였다.
함께 운동할 기회를 가졌다. 기량도 뛰어나지만 사람 됨됨이가 마음에 들었다. 국내에서만 활동하기에는 아까운 재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넓은 세계 무대로 나가라고 권했다.
“최 프로를 도운 건 돈을 벌기 위해서도, 내 기업을 알리려고 한 것도 아니에요. 재목을 살려 사람을 키우자는 뜻이었죠. 국내 프로 생활이란 게 사실 고달파요. 당시 최경주도 국내 대회에서 5승을 했는데 그래 봤자 상금이 3,000만원도 안 됐어요. 그래 갖고 언제 집을 장만하겠어요. 내가 등을 떠밀었지요. ‘큰 물에 가서 놀아라’고.”
문제는 돈이었다. 해외 대회에 한 번 나가려면 적어도 200만원은 들어간다. 우승 확률이 낮은 선수에게 경비를 대겠다는 스폰서가 선뜻 나설 리 없다. 스스로 경비를 마련해야 하는데 섬 출신 최경주는 그럴 형편이 못 됐다.
망설이는 최경주에게 용기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갈증이 심할 때 물 한 컵, 배 고플 때 밥 한 그릇이 그렇게 고마운 법이다.
“어이, 최 프로! 이 시간부터 외국 투어에서 뛰어보게. 내 봉급을 나눠서라도 뒷바라지를 해줄게. 한 번 소신껏 해봐.” 우직한 최 선수가 속으로 큰 감동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 각오라면 되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월급 쪼개 만든 ‘한국의 움직이는 브랜드’당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로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웠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피 회장도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성격이다.
대회에 나갈 때마다 비용을 댔다. 두 번째까지는 입상하지 못했다. 1999년 세 번째로 일본 기린오픈에 출전하러 떠나는데 공항에서 전화가 왔다. “회장님, 저 지금 비행기 탑니다. 기도 좀 해주세요!”
이 대회에서 최경주는 보란 듯이 우승컵에 입을 맞췄다. 내친 김에 같은 해 우베고산오픈에서 우승한 최경주는 아시아권에서 자신감을 얻은 듯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 이때 “어이! 물고기도 민물고기와 바다 고기는 다른 법이여. 본고장으로 가서 승부를 걸어봐”라며 꿈을 갖고 도전하라고 몰아붙인 것도 피 회장이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사람은 태어나면 한양으로 보내라고 했잖아요. 프로로서 일단 칼을 뺐으면 바위는 못 갈라도 호박이라도 잘라야죠. 골퍼도 제대로 하려면 미국으로 가야지요. 최 프로, 미국에서 고생 많이 했어요. 모텔에서 잠 자고, 차를 직접 운전하며 골프장을 찾아 다녔지요. 최 프로는 지독한 연습벌레예요. 경기가 없는 날에도 샐러리맨들이 하루에 일하는 것처럼 8시간 시간표를 짜서 볼을 쳐요. 한 마디로 자세와 정신이 올바르게 박혀 있는 친굽니다.”
2000년 미국으로 본거지를 옮긴 최경주는 PGA 투어 참가 3년째인 2002년 첫 우승을 따낸다. 지난해 말까지 PGA 투어 통산 6승째다. 2004년 마스터즈 대회에서 단독 3위로 아시아 선수 중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때 취재진이 물었다. “귀국하면 가장 먼저 누굴 만나고 싶습니까?” “양아버지 피홍배 회장님입니다.”
피 회장은 최 프로를 막내 아들로 여긴다. 우연히도 호주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다 귀국해 입대한 후 군에서 사고로 숨진 둘째 아들 성훈과 최경주의 나이가 같다. 실제로 최 프로는 해외 투어 중에도 매주 한두 번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첫 인사는 항상 “아버님, 저 막냅니다”이다.
“모든 일이 설거지를 잘 해야 하듯 골프도 마무리 퍼팅이 중요해요. 경주가 이게 조금 약했는데 지금은 물이 오른 것 같아요. 골퍼는 40~45세가 전성기입니다. 올해 최 프로가 딱 마흔이니 앞으로 10년은 더 좋은 성적을 내리라고 믿습니다. 한국이 낳은 움직이는 세계 최고 브랜드가 더욱 밝고 큰 빛을 발할 겁니다.”
빚 못 갚으면 사기꾼, 갚으면 사업가피 회장이 최경주 선수를 돕기로 한 것은 순탄치 않았던 자신의 사업 인생과도 관련이 있다. 대학을 나온 그는 공무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총무 비서실에서 10년 동안 행정직으로 일했다.
72년 청와대를 나와 회사를 차렸다. 1차 오일쇼크에 따른 국제 원자재 파동으로 기업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당시로선 생소한 폐기물(에너지) 재생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회사가 ㈜삼정이다. ‘세 군데 우물에서 맑은 물이 나와 번창하라’는 뜻이다.
삼정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차로 변압기에서 나오는 폐절연유 재생 기술을 개발했다. 오일쇼크가 터진데다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우리나라 형편에선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사업이었다.
폐동(구리) 전선의 재생 활용, 폐PVC 전선 재활용, 고철로 팔던 변압기를 정비 수리하고 생산하는 쪽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나갔다.
시장이 돈이 조금 되는 것 같자 여기저기서 뛰어들었다. 73년 한국전력의 연간 1억700만원짜리 폐절연유 재생 입찰에 경쟁이 치열했다. 삼정보다 큰 기업에서 ℓ당 1원에 응찰할 움직임을 보였다. 일찍이 한국에서 중소기업 하기의 어려움을 체득했다.
그는 어떻게든 시장과 기술을 지키겠다는 일념에 ℓ당 단돈 1전으로 맞섰다. 당시 화폐 단위로 최저 금액이라서 바로 낙찰될 줄 알았다. 하지만 ‘교환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질질 끌어 결정이 한 달여 미뤄지기도 했다.
계약한 대로 일 년 동안 차질 없이 폐유를 재생해 한전에 납품했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친척에게서 꾼 돈에다 다른 이들에게 빌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빚쟁이가 진을 치고 있는 집에 몇 달 동안 들어가지도 못한 채 여인숙 생활을 했다.
견디다 못한 부인이 자녀들을 한 방에 모아 놓고 연탄불을 들여놓아 동반 자살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다. 그 자리에서 부인이 깨우쳐 일가족 자살을 면했다고. 이 대목에서 피 회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4월인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라고요. 서울 을지로4가 근처 육교를 건너가는데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 타이어에 몸을 싣고 다니면서 뭔가를 팔더라고요. 물건을 살 돈은 없고 갖고 있던 차비 몇 푼을 다 털어줬어요. 비가 더 쏟아지면 저 사람은 그래도 청계천 땅굴이라도 돌아가 함께 할 가족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쭈그리고 앉아 펑펑 울었어요. 그리곤 ‘손겧?눈 멀쩡한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 ‘죽기 아니면 살기다’라고 작심했죠.”
그는 뼈가 부서지도록 전국을 누볐다. 하루에 700~1,000리를 돌아다니며 재기를 꾀했다. 더 나갈래야 갈 수도 없는 벼랑 끝에 선 각오로 전국 거래처를 밤낮없이 찾아 다녔다. 그전에 성실하게 계약을 이행한 것을 본 한전 직원들이 도와줬다.
“양반은 입 덕이고 상놈은 발 덕이란 말도 있잖아요. 이것저것 다 갖춘 기업이야 전화로 해도 되지만, 밑천도 없는 저로선 발로 뛰는 수밖에요. 역시 신용과 사람이 가장 큰 밑천이란 것을 새삼 깨달았고요.”
발품 덕분인지 회사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변압기에서 빼낸 기름을 공장에서 새 것처럼 정제한 뒤 탱크로리에 싣고 한전에 가져다 주는 일을 직접 했다. 작업복 살 돈이 없어 제대한 조카의 예비군복을 몇 년 동안 입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빚을 전부 갚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골프나 사업이나 초심(初心) 지켜야이 시절 그의 ‘회사 부도→자살 기도→재기’에 이르는 과정은 85년 기독교방송의 다큐 드라마 <열망>으로 전파를 탔다. 91년에는 반공연맹에서 전방 부대를 돌며 이 이야기로 장병들에게 사기 앙양을 위한 정신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시간을 내지 못했다.
“배운 것도 적고, 말 주변도 없어 강의를 할 만한 주제도 못 됩니다. 그 옛날에는 약을 살 돈이 없어서 자살을 못 했는데, 지금은 죽을 시간이 없어서 못 죽습니다. 빚을 지더라도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내 돈이 귀하면 남의 돈도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했지요. 이 빚을 다 갚고 난 뒤 제 영혼을 불러 주십사고 말이지요.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사기꾼과 사업가는 백지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못 갚으면 사기꾼이고, 갚으면 사업가에요.”
그런데 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93년 진천공장에서 일하다가 쓰러졌다. 중풍이었다. 몸을 너무 혹사한 탓이다. 왼쪽 몸이 마비돼 걷지도, 왼손을 쓰지도 못했다. 자포자기했다. 그러나 라디오 드라마 제목처럼 절망은 없었다. 당시 고려병원 주치의 이상종 박사의 설득으로 뇌수술을 받았다.
기적처럼 수술이 성공했다. 이때부터 그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골프채를 잡았다. 건강을 찾기 위해 시작한 골프가 그를 살렸다. 더구나 97년에는 환갑의 나이에 남성대CC에서 클럽 챔피언이 됐다. 당시 코스 레코더는 69타. 프로 선수급이었다.
“골프나 사업이나 초심을 잘 지켜야 합니다. 골프코스에 벙커가 있듯 사업에도 진폭과 리스크가 있죠. 벙커에서 빠져 나오며 골프 기량이 늘 듯 사업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고비를 넘기며 몇 단계 도약하는 것이지요.”
피 회장은 자신의 36년 장년의 삶이 밴 ㈜삼정 외에 낡은 PVC의 피복선을 소각해 구리 전선으로 재활용하는 시화제련, 케이블 전선을 만드는 삼정CW, 골프장(해인컨츄리) 개발업체인 가야개발 등 네 개의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연간 매출은 4,500억~5,000억원으로 어지간한 중견기업 수준이다.
국가 차원의 폐기물 재활용 규정이 시행되기 이전에 회사를 세워 계속 앞서가는 것은 꾸준한 연구·개발(R&D) 투자로 정제 및 재활용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기름 한 방울 안 나오고, 지하자원도 변변치 않은 나라에서 뭐든지 재활용하는 기술을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삼정의 사훈(社訓)은 ‘사랑·성실·창의’다. 마치 시골학교 교훈 같다. 경영목표는 ‘예산 운영의 효율화, 민수(民需) 판매 확대’다. 얼핏 보면 사훈과 경영목표가 첨단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것처럼 보이지만, ‘옛 것이 좋은 것이여’란 교훈처럼 삼정의 네 회사는 오늘도 잡음 없이 잘 돌아간다.
피 회장은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처음으로 전개한 인물이다. 당시 서울대 경영대학 최고경영자 과정 31기 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97년 12월 5일 관행적으로 해온 송년회 대신 ‘IMF 시대의 경제 현황과 전망’ 세미나를 열기로 했다.
세미나 사흘 전인 12월 2일 집에서 ‘어려운 시기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며 부인 김춘자 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부인이 장롱에서 금반지와 목걸이 등을 꺼내 들고 나왔다. “금도 수입을 많이 한다는데 장롱 속 돌 반지랑 금붙이를 갖고 나오는 사람에게서 우리 돈으로 사주면 달러를 절약할 수 있잖아요?”
환란 때 맨 처음 금 모으기 운동피 회장은 즉각 회원들에게 연락했다. 다들 기꺼이 호응했다. 금반지와 목걸이, 금 거북, 행운의 열쇠 등 655만여 원어치를 모았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고, 언론사와 은행들이 나서 민간 차원의 범국민 운동으로 번졌다. 금 모으기 운동은 외신을 타고 세계로 알려져 환란을 극복하는 한국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마누라가 나보다 나아요. 어찌 보면 환란 극복의 숨은 공로자지요. 최경주가 성공한 것도 아마 부인의 뒷바라지가 90%는 될 거에요.”
그는 부인에게 늘 고마움을 느낀다. 회사를 부도 낸 뒤 피해 다닐 적에 가장 역할까지 도맡아 하며 자식 농사까지 잘 지어서다. 맏사위는 장군이고, 둘째 사위는 판·검사를 거쳐 변호사 개업을 했다.
36년째 기업을 경영해온 피 회장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부(富)에 대한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요즘 기업가 정신이 약해졌다는 지적도 이런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돈을 조금 벌면 전부 도적놈으로 취급하잖아요. 그래 갖고 어떻게 기업이 일어나겠어요. 국가와 정부에서 기업인의 권익을 확실하게 보장해야 돼요. 그래야 능력과 기량을 발휘해서 기업을 일구지요. 한국 사람이 국내 여건이 괜찮으면 기업을 한국에 두지 어디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민주주의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지요. 자본주의 경제가 뿌리를 내리면 민주주의는 자동으로 따라오는 겁니다. 성경에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했듯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재산은 국가가 보호해 줘야지요.”
피 회장은 여간해서 남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 최경주재단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기자회견이란 것도 했다. 조용히, 그러나 알차게 기업을 일구는 게 중요하지 밖으로 나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본분에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어두운 데 살필 줄 알아야
피 회장은 매해 1월 AT&T PGA 투어가 시작되면 미국에 가 최경주를 응원한다. 이때 최 프로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골프 기술보다 인간으로서 근본을 갖추는 게 더 중요하다”고. 최경주재단을 만든 것도 최 프로의 따뜻한 마음에 피 회장의 가르침이 더해진 결과다. 골프부도 없는 고등학교에서 전담 코치 대신 비디오 속 유명 프로를 스승 삼아 독학한 최 프로는 진즉 골프 꿈나무를 키우고 싶어 했다.
“그 놈아가 내보다 나아요.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국내 대회에서 우승하면 상금을 한 푼도 안 갖고 갔어요. 전부 결손가정 아동을 위한 장학금이나 미숙아를 위한 기금으로 내놓곤 했어요. 저 놈은 복 받을 거예요. 이제 재단을 세웠으니 본인은 물론 최 프로를 좋아하는 주변에서도 힘을 합쳐 ‘영원히 가는 재단’이 될 겝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교회 장로인 피 회장은 상이군경회 보은용사촌의 자활을 지원하는 등 불우이웃을 돕는 데 앞장선다. 그러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구절을 늘 강조한다.
“인생이란 공수래공수거 아닙니까. 여건만 되면 어두운 데를 살필 줄 알아야지요. 그렇다고 누구 좀 도와 줬다고 떠벌리지 말고. 아무개를 도와 줬다고 죽기 전에, 아니 죽어서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피 회장은 기업 경영의 큰 원칙도 이 범주 안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혼자 보따리 장사를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기업을 움직이려면 오너가 내 것이란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는 직원들의 것입니다. 이것을 말로만 하지 말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피 회장의 기업 경영 방식은 독특하다. 그 첫째가 위보다 아래 사람들을 대우하는 ‘상박하후(上薄下厚)’ 원칙이다.
“회사에 나와 몸 바쳐서 일하는 데 조금 잘 되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을 쓰고, 그렇지 않다고 바꿔서는 안 돼요. 전 직원이 한마음이 돼서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회사가 하기에 달려 있는 겁니다.”
둘째, 노사가 편 가르기 하지 말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 확고하다. 암으로 투명하면서 몇 년째 출근하지 않는 직원도 있는데 아직까지 월급을 깎은 적이 없다. 명절 때면 작은 선물이나마 꼭 챙겨 보내고.
“일을 조금 못 한다고 해서 그만두라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대신 채용한 적이 없어요. 정 스스로 떠나겠다는 직원도 격려해서 보냈지만….”
그래서인지 네 개 회사에 직원들이 650여 명인데 노조가 없다. 30년 이상 근속자가 수십 명이다. 외환위기 때 일감이 없어 2교대 근무 시간이 하루 5~6시간으로 줄었는데도 “있는 것으로 함께 나눠 먹자”며 함께 보듬고 갔다. 이런 뜻이 통했는지 몇 차례 고비도 있었는데 전 직원이 몇 달씩 월급을 안 받고 일해 극복해냈다.
“우리나라 기업인들의 사고방식을 바꿔야 해요. 기업이 조금 크는 것 같으면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려고 드는데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직원들을 내 식구, 핏줄로 생각하고 더불어 살아야 기업도 더 잘 됩니다.”
2007년 시무식 때 피 회장은 “We are One Family! 삼정은 네 것도, 내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목표를 달성하자”고 강조했다.
피홍배 회장은 2남2녀를 뒀다. 장남 성희(43)는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불렀다.
“공부를 더 할래, 아니면 기업을 이어받을래? 공부하고 싶다면 외국에 보내주꼬마. 기업을 하고 싶으면 지금 와서 밑에서부터 배우고. 외국에서 석사, 박사를 따려면 7~8년은 걸릴 것이고, 회사에 와서 배우려면 10년은 걸릴 게다.”
“한 열흘 시간을 주십시오.”
일주일 뒤 아들이 안방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아버님 회사에서 지금부터 일하겠습니다.”
“니 각오했제?”
“각오했습니다.”
“군대 가서 훈련병 교육 받던 것보다 더 심할 게다. 정말 각오 단단히 해라.”
회장의 장남이 입사한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출근해 보니 이사와 상무 중 어떤 자리를 주느냐, 방은 어디에 마련하느냐를 놓고 난리법석이었다. 피 회장은 임원들을 불러 혼을 냈다. “무슨 소리냐, 내게 맡기라”면서.
아들을 불러 일렀다. “지금 보따리 싸 들고 공장에 내려가라. 기숙사에 들어가 직원들이랑 함께 자고. 아직 배운 게 없으니 화장실 청소부터 해라. 잡일부터 하고 상차(上車) 일을 배워라. 그리 해야 말단 직원, 젊은 얘들 심정을 안다.”
밑바닥부터 10년 배운 장남이 가업 승계그 해 겨울이 몹시 추웠다. 아들의 귀가 빨갛게 얼고 볼때기에도 얼음이 박혔다. 아내가 “자식 하나 있는 것 죽인다”고 야단이었다. 피 회장은 “무슨 소리냐! 그런다고 죽으면 사람 못 된다. 옛말에 미운 자식 밥으로 키우고, 예쁜 자식 매로 키운다고 했어”란 논리로 맞섰다.
공장마다 2~3년씩 돌리는 식으로 교육을 시켰다. 몇 년 뒤 아들이 이렇게 말하더라고 피 회장이 전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회사의 기본이 근로자요, 모든 게 거기서 나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처음에 막일을 시켜 줘 고맙습니다. 중역분들 잘 모시고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삼정에 입사해 만 10년이 되던 해 장남 성희는 삼정CW의 엔지니어가 됐고, 지금은 그 회사 경영을 맡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전체 회사 경영을 책임지기에는 배울 게 많다고 피 회장은 생각한다.
그는 또 장손부터의 집안 서열을 존중한다. 그래서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큰형의 장남 피주환(58) 전선사업단장에게 회사 통장과 도장, 개인 인감까지 다 맡겨 놓은 상태다. 그만큼 장조카를 믿는다.
“미국을 보면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그대로 전부 자식에게 안 주잖아요. 많이 주면 쥐약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사고방식이 올바른 사람들은 자식에게 스스로 뭔가를 개척하도록 하지요. 한국도 그런 쪽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피주환 단장이 사촌 동생인 피홍배 회장의 맏딸 결혼식 때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말이 있다. “효도는 어렵다. 다만 불효는 하지 말자”고. 피씨 집안은 모두 이 말을 기억한다고.
피 회장은 37년 소띠다. 소처럼 뚝심으로 살아온 그는스스로 60점짜리라고 하며 항상 자세를 낮춘다. 그는 요즘 쉬운 일만 하려 드는 젊은이들에게 한 마디 충고한다. “너무 큰 욕심 내지 말고 먼저 자기 맡은 일을 다하고, 자기가 한 일만큼 대접을 받아라”고.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흰 머리가 거의 없다. 돋보기 없이 신문도 읽는다. 자연스런 포즈를 요구하며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기자에게 피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생긴 대로 찍으소. 사진 너무 잘 나오면 이 나이에 바람 나는디.”
첫댓글 아~ 이제 알앗습니다 피 회장님 노고 감사드립니다
여럿이 도왔네요 ... 나도 한몫 했었는디 .............. ㅎㅎ 열심응원 ..........
우리초카 최고~~ 옛골 친고모 손주 거든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사심을 버리고 종업원과 하나되고 서로 돕는 사람은 드물죠......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훌륭한 스승아래 좋은 제자가 있는법 ... 피회장님 뜻을 져버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경주는 결코 회장님을 잊지 않을거에요 ... 항상 존경받는 그런 분은 건강하시고 행복하실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