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을 항복시키신 하나님 (창32:21-32)
하나님은 우리들 향해 기다려 주시는 분, 인내 해 주시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그러시겠습니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를 택할 만 했으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것이 아니냐’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9:7-13의 내용을 보면 대표적인 예로 야곱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야곱은 무슨 선한 일을 해서 택한 것이 아니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셨다고 언급합니다. 롬9:7-13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우리는 야곱이라는 인물을 대 할 때마다 ‘아니 하나님이 왜 야곱을 택하셨을까?’ 성경이 진술하는 바는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인생을 놓아서 기르지 아니하시고 일일이 간섭해서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택했기 때문에 그에게 그의 인생을 맡기지 않고 택하신 하나님이 이루시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그의 인생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꾸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끌고 오시려고 하는 것이 야곱의 인생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이에 비하여 야곱은 불순종하며 계속 도망치는 갈등의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야곱은 하나님이 그를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미 정하여 졌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운명이 결정지어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전생애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생애입니다.
야곱이 누구입니까? 여기 야곱은 정말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사람의 모델입니다. 그의 태생이 바로 그러합니다, 형에게 지기 싫어서 발을 붙잡고 늘어질 정도로 싫어합니다. 한마디로 자기 인생을 자기의 의지와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가겠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바로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씨름을 걸으셨습니다(창32: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4절을 보니 “어떤 사람이”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란 즉 하나님의 사자 , 하나님이 씨름을 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야곱의 기도의 내용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이 씨름이 야곱이 건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 즉 하나님이 걸으셨기 때문에 판정의 기준도 야곱을 기준으로 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준으로 해서 납니다.
25절“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씨름은 야곱이 하나님께 무슨 요구조건이 있어서 하나님께 매달렸고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아서 나중에 기를 써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쪽에서 야곱에게 요구 할 것이 있어서 씨름을 걸었고 그것이 제대로 의도한대로 되지 않아서 가려고 했다는 내용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야곱이 붙잡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출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아내 사래가 아이를 낳는데 쌍둥이입니다.
에서가 나오고 곧바로 이어서 둘째가 나오는데 가만히 보니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얼마나 지기 싫었으면 그렇겠습니까? 그래서 그가 한 짓도 형 에서가 배고픈 것을 이용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바꾸자고 합니다. 그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으려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장자가 그 집안의 계보를 잇는 것이요 축복이라고 것이 장자에게만 더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장자권을 얻으려 했던 사람입니다. 유대의 풍습에 장자는 그 집안의 계보를 잇는 것입니다. 두 아들이 있으면 두 아들 전부 족보에 오른 것이 아니라 장자만 들어갑니다. 에서가 들어가야 되는데 야곱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창25:35절에 보니 에서는 야곱이 준 팥죽을 얻기 위해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망령되이 여겼다)라고 하면서 영적인 의미를 조명해 주는데 야곱이 장자명분을 얻으려 한 것을 신약적으로 풀면 “나는 예수가 필요하다” 그런 고백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살겠다고 그 마음속에 작정하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부름 받고 하나님에 의하여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건가 하는 것이 아직은 그의 삶에 나타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즉 야곱의 생애는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고 구원의 의미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주인대접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두 가지로 요구합니다. 하나는 구세주요, 또 하나는 주인입니다. 신자의 생애 중에 예수를 구세주로 알고 믿는 다고 고백하기는 쉽습니다만 주인으로 알게 하는데는 전 생애가 걸립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을 동의해 놓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하나님을 그의 인생을 자기 각본대로 끌고 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이전 것은 용납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만 얻어내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모든 것이 다 잘 풀리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자기 맘대로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의 전 생애동안 하나님을 그의 시종으로 대동하고 다닌 것입니다. 그가 자기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때도 자기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아 낼 때도 말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명분을 받고 형이 두려워 하란으로 도망갑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다가 벧엘이라는 곳에서 이르러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자고 있는데 꿈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하늘에서부터 자기가 누운데까지 닿아 있는 데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신 것을 봅니다. 그래서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서 “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인지 몰랐구나” 하고는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짓습니다.
사실 벧엘 사건은 야곱이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이 있는 곳을 찾아 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늘 야곱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그가 그곳을 떠나가서 삼촌인 라반집에 이르러 그곳에 지내면서 삼촌을 속여 거부가 되었고, 레아와 라헬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전 재산을 가지고 그의 가족과 함께 돌아오는데 형 에서가 마중나온다고 벌벌 떨면서 옵니다. 떼를 나누어서 형앞에 보내고 일곱 번씩 절을 하면서 호칭도 형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주여 저는 주의 종입니다”라고 부르면서 형을 만납니다. 기껏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 놓고 한다는 말이 호칭도 “주의 종”이 되었으니 정말 안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이 오늘본문에 나오는 얍복나루터 사건입니다. 목숨이 위태롭게 되니까 온 성의를 다해서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하인들을 시켜서 떼를 나누어서 보내면서 에서를 만나 이게 뭐냐 물으면 “이는 주의 종 야곱이 자기 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입니다”라고 하라고 일러 보냅니다. 몽땅 보내고 마지막에 아내와 자식들을 보내고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자기 인생이 자기 손에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도 아직도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인생이 자기 손에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드디어 찿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쫓아다니던 것 보이는 것만이 축복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참된 축복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려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네 인생의 주인이고 내가 삶과 죽음 복과 화를 주관한다. 네 인생과 목숨아 져도 너는 네 것이라 믿고 있는데 천만말씀 네 것이 아니다 내것이다. 내가 너를 택했다.” 이것을 확인 시켜 주시러 오셔서 그 씨름을 하신 것입니다. 그걸 알리려고 오셨는데 야곱이 항복을 안 하더라는 것이 얍복나루 사건의 씨름입니다. 끝까지 자기의 주인이 자기라고 고집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은 ‘ 내가 떠나면 너는 끝이야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 그의 환도 뼈를 치고 가십니다. 즉, 심판 선언하신 것입니다. 거기서 야곱은 비로소 무릎을 꿇습니다. ‘이런 문제였구나’ 하고 처음으로 붙잡습니다. “축복 안 하시면 내가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제 정신이 든 것입니다. 드디어 도와 달라고 붙잡습니다. 울며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묻습니다. 27절“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이야기인즉, 하나님께서 지금 야곱에게 그의 생애가 그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줄을 확인시켜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바로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바로 그런 사실을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항복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간섭하셨습니다. 그래도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가려합니다. 그러자 이제야 알아듣습니다. 그리고는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이 문제를 확실하게 야곱에게 확인 시켜 인식할 수 있도록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이 뭡니까? 사기꾼 약탈자, 강도, 하나님이 지금 확인 시켜 주시고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가 강도가 아니냐 약탈자가 아니냐, 사기꾼이 아니냐”
여러분 !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행세를 하고 다녔습니다만 그러나 한번도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 인생이 만들어지도록 애쓴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 자기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이름 속에 숨어진 사실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네 이름을 이후로는 이스라엘이라 하라 네가 하나님과 겨루워 싸워서 이겼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말씀은 그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굴복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얍복나루터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우리의 생애가 내 손에 있소이다 한다면 우리 역시 조만간 얍복나루터에 걸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경우에든 자기가 주님이 되시지 않는 그런 신앙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은 각종 징계를 주십니다. 우리로 공포심을 불러 일으켜서 우리로 항복하게 만드시는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으로부터 굴복하게 하시어 항복을 받아내시는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간섭하시면서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우리로 깨닫게 하십니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비로소 새로운 아침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창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밤새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옳다 내가 네 주인이다” 확인시키기 위하여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야곱의 환도 뼈가 부러 졌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옵니다. 이제 그는 환도뼈가 위골되어서 절었습니다. 다리를 절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아침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인생을 혼자서 살려고 하던 그 고달픔을, 그 헛됨을 깨닫고 드디어 자신이 하나님의 정말 사랑하는 자녀라는 확인하는 아침을 맞이하였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것 , 보이는 것만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혼자서 발버둥치는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야곱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야곱 같은 사람도 항복시키셨습니다. 야곱을 항복시키신 그 은혜로운신 하나님. 그가 항복하지 않자 씨름하러 내려오신 하나님, 우리에게 인생의 주인이시기를 기대하시며 우리의 주인되신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시기 위해 무수한 얍복나루들을 앞에 놓아두시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우리 됨을 자각하는 날,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만이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어 내게 항복을 받아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분명히 언젠가 야곱처럼 항복하여 얍복나루의 아침, 그 축복의 아침을 맞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