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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님 고별강연 자료
작성일 : 2002-01-02 오후 3:32:34
헴로크를 마신 뒤에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나 - 정보,지식,지혜
이어령(이화여대 석좌 교수)
30대에 이미 두 권의 명저를 내어 유명인사가 되었던 슘페터는 "당신은 진
정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유럽 미녀들 사이의 최고 연인, 유럽 최고의 승마인, 그 다음으
로는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로 기억되고 싶다."
그러나 66세로 그가 하버드 대학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있던 무렵 그와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그의 대답은 아주 달랐습니다.
"나는 대여섯 명의 우수한 학생을 일류 경제학자로 키운 선생으로 남고 싶
다. 나도 이제는 책이나 이론으로 기억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을 깨달을 나이가 된 것이다. 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책이
나 이론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입니다.
한국 나이로 69세에 교단을 떠나는 이 자리에서 누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면 나는 슘페터와 똑같은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흙속
에 저 바람속에>와 같은 베스트셀러로 막 유명인이 되었던 30대 무렵이었다
면 역시 슘페터처럼 그저 인기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
다. 나를 그렇게 변화시킨 것은 40년 가까이 이화여대에서 강단 생활을 해
온 체험과 그 나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 이화대학에 들어오자마자 큰 충격을 받게 된 것은 대학 입시 시험 감
독을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국어 시험문제 가운데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주제에 대한 시험 문제가 나왔는데 놀랍게도 그 사지선다의 항목 가운데 어
느 것 하나도 선택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
디에다가도 O표를 달 수 있고 어디에다가도 X표를 달 수도 있었다는 사실입
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웠던 것은 수험생들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정답을 찾
아내 동그라미를 치고 있었고, 그 뒤에 그것이 "무즙" 사건처럼 잘못된 시험
문제라고 항의하는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아
무리 복잡한 시 문제라 할지라도 OX 식으로 출제되는 사지선다식 시험 방식
에 익숙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의 언어도 수학의 숫자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하나의 정답으로 처리될 수 있는 것으로 배워왔던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한사람을 놓고서는 맞선을 볼 수 없다"는 농담이 있습니
다. 사지선다형의 시험만을 쳐 버릇해서 선을 볼 때에도 네 사람의 후보자
가 앞에 있어야만 그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웃을 일이 아니지
요. <진달래꽃>의 의미를 사지선다로 가린다는 것은 네 사람을 앉혀놓고 선
을 보는 광경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근대 산업주의의 모델은 '공장'입니다. 공장에
서는 여러 사람이 같은 시간에 모여 콘베이어 벨트의 작업라인에서 작업을
합니다. 테일러가 생각해내고 포드가 실천했던 획일성, 반복성, 그리고 분업
화와 규격화를 토대로 한 대량 생산 체제입니다. 관현악단을 음악공장이라
고 불렀던 토플러의 말대로 하자면 학교는 '교육공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농업과는 달리 시스템화한 공장 노동 작업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은 공원들이 같은 시간에 작업 라인에 모이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학교 생활
에서도 맨 처음 배우는 것이 바로 함께 모이는 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학
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여라, 선생님이 우리들 기다리신다"라는 동요인 것입
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대학과정에 이르는 그 단계별 교육과정
은 콘베이어 시스템의 공정과 같습니다. 졸업장은 제품의 보증서와 같습니
다. 번호와 도장이 찍힌 것까지도 같으며 공장 도장이 찍힌 자리에 학교장
도장이 찍힌 것까지 같습니다. 학교가 공장과 다른 것이 있다면 반품을 받
지 않는다는 것과 애프터 서비스가 없다는 점이지요. 이러한 '붕어빵 교
육'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불을 끄고도 똑같은 모양으로 가래떡을 써는
한석봉의 어머니와 만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똑같이 생긴 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헷세의 말대로 돌은
하나 하나가 완성되어 있습니다. 벽돌이나 기왓장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
나가 부서져도 규격이 같은 다른 벽돌로 갈아 끼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돌 하나가 깨지면 그 자리만큼 지구는 비어 있게 됩니다. 어떤 것으로도 대
체할 수 없는 '나'의 세계를 노래하는 것이 시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정치, 법, 경제에는 '베스트 원'을 추구하고 있지만 문학과 예술의 세계
에는 '온리 원'을 지향합니다. 장미를 맨 먼저 미녀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이
지만 그것을 두 번째 말한 사람은 바보인 것입니다.
제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라파엘의 일화를 생각해 보면 될 것입
니다. 천장화를 그리고 있는 라파엘의 사다리를 잡아주라고 하는 왕의 말에
그 재상이 불만을 표시하자 그 군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잔소리 말게. 자
네 목이 달아나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재상 자리를 대신할 수 있지만 라파
엘의 목이 부러지면 저 그림을 대신 그려줄 사람은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다네."
그러므로 시의 의미를 단순화하여 사지선다 식으로 풀어 가는 한국의 교
육 풍토에 분노를 느끼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 대학과 내 강의의 존재 이유라
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지적으로 자유로워야 할 대학마저도, 다
른 학문보다도 상상력과 독창성에 있어서 창조적이고 다채로워야 할 문학 강
의실마저도 획일화된 이데올로기나 정형화한 학설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솔
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근대화나 산업화의 여파
만이 아니라 식민주의 전쟁, 그리고 독재와 같은 불행한 상황을 겪는 동안
절대에 가까운 정치적 명제와 그 이슈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고
그 틀에 의해서 문학이 재단되는 일을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
다. 문학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재단되고 순수냐 참여냐, 좌냐 우냐
하는 이분법의 흑백 논리에 의해서 머리도 가슴도 도배되고 있었던 때인 것
입니다
그래서 나는 교양국어나 시론 시간에는 으레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분석
하는 일부터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한국사람이라면 <진달래꽃>을 모르는 사
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이면 백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이별을 노래
한 시'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학생 정도의 국어실력 정도만
가지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조심스럽게 이 시를 다시 읽어보면 그것
이 단순한 '이별가'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우선 <진달래꽃>은 모든 시제가 미래추정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
게 될 것입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 그렇고, "말없이 고이 보
내오리다"가 그렇습니다. "뿌리우리다", "흘리우리다"의 모두가 예외 없이
미래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를 노래하고 있는 시의 화자는
이별과는 정 반대로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현재의 님은
역겨워 하지도, 떠나지도 않고 있지요. "If you go away"라고 번역된 영시에
는 분명히 'If'의 가정법으로 시작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쪽을 가
리키고 서쪽을 치는 '지동격서(指東擊西)'의 구조로 되어 있는 시인 것입니
다. 종래의 <가시리> 형의 이별가로 고쳐 쓴다면 "나보기 역겨워 가시는 님
이여,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옵니다"가 아니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신 그대
를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었지요"와 같이 현재형이나 과거형의 진술로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이별가입니다. 하지만 미래 추정형의 가정
적 체험을 읊은 <진달래꽃>은 현실적으로는 이별 아닌 사랑 체험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가 아니라 러브레터에 이 같은 사연이
적혀 있다면 누구나 이별의 슬픔을 예고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기를 사랑
하고 있는가하는 사랑의 고백으로 느낄 것입니다.
그렇지요. 가장 지고한 사랑의 기쁨을 가장 슬픈 이별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는 이 시는 모든 언어의 뜻이 이중적으로 되어 있는 아이러니의 구조임을
알려줍니다. 산문의 언어가 한가지 의미로 되어 있는 '모노 세믹(단일 기
호)'이라고 한다면, 시의 언어는 <진달래꽃>의 경우처럼 구조적으로 '폴리
세믹(복합 기호)'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의 이중적이고 아이
러닉한 의미 파악에 익숙하게 되면 사물의 의미나 느낌을 흑백으로 재단하
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다기호체
계인 시의 공화국에서는 흑백 사이에 존재하는 어렴풋한 반원에 해당하
는 '회색'이 기회주의자를 상징하는 빛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
다. 시의 공화국에서는 그 '그레이 존(gray zone)'이야 말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삶의 체험을 깊게 하는 이상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정한을 복합적으로 담고 있는 노래인 김소
월의 시를 사지선다 식의 단문으로 예스(yes)냐 노우(no)냐로 물을 때 그 어
느것에도 동그라미나 가위표를 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의 구조를
무시하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표현이 문자그대로 눈물을 참
는 한국 여성의 부덕(婦德)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되고 맙니다. 시의 수사와
그 구조 속에서는 부정을 강하게 할수록 그 전달은 긍정으로 들리게 됩니
다. "죽어도"와 "아니 눈물"의 강력한 겹치기의 부정은 거꾸로 도저히 눈물
을 흘리지 않고서는 맞을 수 없을 것 같은 이별의 절실한 슬픔을 전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시의 복합적인 아이러니를 모르면 떠나는 님을 위해서
눈물조차 보이지 않으려는, 그리고 그 이별의 슬픔을 감추고 참는 한국 여성
의 부덕을 노래한 것이라고 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딱하게도 음악을
모르는 음치처럼 시치(詩痴)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김소월은 <진달래꽃>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시에서 반대의 일치를 노래하
고 있는 아이러니의 시적 구조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높이 평가를 받는 국민
적인 시인이 된 것입니다. '피다'와 '지다'는 흑백 양분법의 세계에서는 서
로 양립 불가능한 반대말입니다. 하지만 김소월의 시적 공간인 "청산"에 들
어오면 '피다'와 '지다'는 동일어가 되고 맙니다. 그 유명한 <산유화>의 시
작 연에는 "꽃이 피네 꽃피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라고 되어 있고,
끝 연에는 정 반대로 "꽃이 지네 꽃지네 갈봄 여름없이 꽃이 지네" 라고 되
어 있습니다. 동일한 구조의 진술문인데 하나는 '피다'로, 하나는 '지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어느 시치가 편찬한 소월 시집에는 그것이 오식
인 줄 알고 마지막 연의 "지네"를 "피네"로 정정해서 꾸민 두찬도 있습니
다.
피고 지는 것이 하나가 되는 소월의 '청산 구조' 속에서는 만남과 이별
도, 삶과 죽음도 하나가 됩니다. 이 '반대의 일치'는 님과 만나던 때도 비
단 안개였고 님과 헤어지던 때도 비단 안개라고 말한 시 구절에서도 잘 드러
나 있습니다. 만남과 헤어짐이 비단 안개라는 하나의 촉매어에 의해서 연결
되어 있습니다. 이 때의 비단 안개는 기쁨인가요 슬픔인가요. 소월의 시는
OX로 답할 수 없는 '그레이 존'에서 탄생하고 있는 것이지요.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비단 안개처럼 이별을 노래한 시도 사랑의 만남을
찬미하는 시도 아닌, 그 어느 쪽의 시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만남 속에 이
별이, 이별 속에 만남이 있는 사람의 복합적인 '그레이 존'에 도달하기 위해
서 우리는 그것을 이별가라고 단정하고 동그라미를 치는 교육과 고정관념에
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김소월 읽기요, 시
읽기요, 나아가서는 삶의 읽기입니다.
그런데도 '역사 바로 세우기'의 국민 운동은 일어나도 '시 바로 세우기 운
동'이 벌어졌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역사의 고정관념이라는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혁명과 같은 망치(권력)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
의 의미를 가두는 고정 관념의 철조망을 끊기 위해서는 강철의 가위를 마련
해야 할 것입니다. 비유가 아닙니다. '가위 바위 보'의 그 가위말입니다. 어
렸을 때부터 어떤 틀이나 일정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문학을 읽도록 훈련된
사람들에게 흑백 논리의 가시 철망을 끊고 무한한 상상의 벌판으로 나가도
록 하기 위해서는 역시 어렸을 때부터 몸에 익힌 '가위 바위 보'의 그 가위
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손가락을 모두 닫으면 주먹이 되고 그것을 반대로 모두 펴면 보
자기가 됩니다. 이런 게임에서는 결론이 아주 쉽고 뻔합니다. 주먹 아니면
보자기의 흑백에서는 이기고 지는 관계가 이자(二者)로 되어 있어 결정적입
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손가락의 반은 닫고 반을 열면 주먹과 보자기 사
이에 가위가 생겨나게 되고 그 가위 때문에 그 게임은 다이나믹한 순환운동
을 하게 됩니다. 보자기는 주먹을 이기고 주먹은 가위를 이깁니다. 그러나
거꾸로 가위는 주먹을 이긴 보자기를 이깁니다. '가위 바위 보'에는 관계만
이 있을 뿐 그 어떤 것도 정상에 선 절대적인 승자는 될 수 없습니다.
뉴턴 물리학은 주먹과 보자기 같은 이자(二者) 간의 천체 운동을 법칙화
한 것입니다. 그것은 숫자에 의해서 계산되고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공식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먹과 보자기의 가운데에 가위가 낀 삼자(三者)
사이의 운동은 숫자로 기술하거나 하나의 공식으로 묶어 둘 수가 없는 것이
지요. 포앙칼레는 그것을 풀어보려고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컴퓨터를 이용하면 삼자 간 운동의 복잡한 운동을 그래픽으로 도형
화할 수가 있고 퍼지 이론을 이용하면 무질서 속의 질서를 찾아낼 수도 있습
니다. 오늘날에는 과학에서도 주먹과 보자기만의 흑백의 세계는 통용되지 않
습니다. 실체론에서 관계론으로 옮겨가고 있는 상대성 이론이나 삼자 간 운
동의 카오스 이론, 그리고 여러 분야가 함께 링크되어 복잡 과학으로 변화
해 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보십시오. 누가 주먹을 내밉니다. 대체 그 실체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
까. '가위 바위 보'의 게임 구조 속에서만 비로소 그것은 하나의 의미를 지
니게 됩니다. 상대가 가위를 내면 이기는 주먹이 되고, 상대가 보자기를 내
면 반대로 지는 주먹이 됩니다. 이 관계의 그물 망에서 건져내는 무수한 의
미의 변화와 복합성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야 할 탈근대, 탈산업사회의 조건
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위 바위 보'는 동양에서 서양으로 건너간 거의 유일한 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오늘날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한국 홈페이지
에는 눈에 별로 띄지 않지만 영어 홈페이지에는 "TELL AND SHOW"라는 키워드
로 제법 많이 뜨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가위 바위 보'의 놀이가
유치원 아이들에게 서로 상대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오늘날의 네트
워크 사회를 인식시키고 체험하게 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이용되기도
하고, 실체론에서 관계론으로 변해가는 문명 패러다임에 적응하기 위한 정
신 치료의 요법으로 응용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내가 이화대학에서 30년 이상 가르쳐 온 문학강의 또는 그 문화론들
은 즐거운 '가위 바위 보' 놀이였다고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HOMEO
STATIC"한 근대체험을 "HOMEO DYNAMIC"한 후기 근대의 문명체험으로 바꾸어
놓는 작업이자 "두 눈으로 봐도 보이는 사물은 하나다"라는 복안의 사유였
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가능케 하는 것이 김소월의 시 읽기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최루탄과 대자보 사이에서 잠시도 편할 날이 없었던 학원
에서는 흑백 아니고는 어디에도 발을 디딜 만한 '그레이 존'이 없었던 것입
니다. 그런 상황에서 시적 아이러니와 복합적인 언어 체험에 대해서 말한다
는 것은 역사적 체험에서 도피하는 것이 되며, 치열한 흑백 대결 속에서 기
회를 엿보는 비겁한 회색분자로 오해되거나 지탄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
리 정의로운 싸움이라고 해도 동물과 새가 패를 갈라 싸우는 것 같은 양극
의 갈등 구조 속에서는 진리의 진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평화의
길을 놓는 것은 '역 박쥐'의 역할입니다. 새들에게는 자기가 쥐처럼 생겼지
만 그들과 같은 날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동물들에게는 새처럼
생겼지만 그들과 같은 짐승의 몸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알려주는 것
입니다. 새와 동물 속에 있는 '그레이 존'으로 그들을 융합하고 화합하여 보
다 넓은 생명의 계보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역 박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정보'입니다. 새와 짐승에게 있
어 고정 관념과 자신이 속한 영역의 벽을 허물 수 있게 하는 것이 '역 박
쥐'의 정보 역할입니다. 정보는 지식처럼 축적하는데 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낯선 것의 새로운 유통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박쥐
는 짐승이나 새의 한 영역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영역과 '더불
어'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식인을
정의한대로 "live in"이 아니라 "live with"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별의 노래는 과거가 아니면 현재형으로 진술되어 있습
니다. 그러나 김소월의 <진달래꽃>만은 그것이 미래 추정형으로 되어 있습니
다. 말하자면 이별의 슬픔이 현실 체험이 아니라 가상 체험으로 되어 있다
는 것입니다. 사랑의 만남과 기쁨이 정반대로 이별의 고통과 슬픔으로 표현
될 때 그 만남과 이별의 그 중간에는 참으로 오묘하고 깊은 '그레이 존'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생으로, 이별을 죽음으로 대치해 보면 김
소월의 시적 아이러니는 인간의 삶 전체의 공간으로 확대될 수가 있는 것입
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생'을 말하는 역설의 발상인 것입
니다. 그리고 그것이 김소월의 특징만이 아니라 한국 문화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기저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국인들은 기쁠 때도 슬플 때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
다. 슬퍼죽겠다는 말과 함께 좋아 죽겠다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때
로 죽음은 부정이 아니라 극상의 긍정어가 되기도 합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공연을 보거나 감동적인 광경을 볼 때 한국인의 감탄사는 "죽여준다"는 것입
니다. 이렇게 한국말에서는 무엇을 강조하거나 최상급의 상태로 말할 때
에 "죽는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진달래꽃>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월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것은 시
적 표현이라기보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잘 쓰는 관용어인 것입니다. "죽어도
아니 한다", "죽어도 안 가겠다"처럼 아주 흔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한국적 표현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이 대목을 영어로 번역하면 "I
will weep no tears, though l die without you." 와 같은 기상천외의 시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다시 옮겨보면 "당신 없이 내가 죽는다 해
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울겠노라"가 될 것입니다. 저명한 영문학자가, 그것
도 김소월의 시집 전체를 번역한 전문가가 한 번역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오역이 생겨나게 된 것은 번역자의 잘못만이 아니라 그만
큼 '죽음'이라는 말을 유별나게 쓰고 있는 한국 문화의 특성에서 생겨난 것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말은 어느 나라에서도 조금씩은
다 금기어로 되어 있습니다. 아침에는 졸려 죽겠다고 말하면서 일어나고, 저
녁에는 피곤해 죽겠다고 말하며 직장에서 돌아오는 한국인들도 4층이 없는
아파트에서 사는 일이 많습니다. 4층의 4가 '죽을 사(死)'자와 음이 같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이 금기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극약 처방과도 같은 효과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의 "죽어도"는 눈물을 흘
리지 않겠다는 "아니"의 부정어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증폭기의 역할을 하
고 있는 관용어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절대로"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야 말로 <진달래꽃>
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심가를 다시 한번 읊어 보십시오. 대
체 죽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고 있는가. "이 몸이 죽고 죽어"라고
죽음을 반복하고서도 부족하여 "일백 번 고쳐" 죽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몇 마디 안 되는 시조에 죽음이라는 말이 백 번도 더 나오는
셈입니다. 죽고 난 뒤의 백골까지 진토가 되고 무형의 넋까지 없어지는 그
극한 상황 절대의 빙점까지 몰아가는 죽음의 증폭작용을 보여주고 있습니
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의 증폭 장치는 바로 "임 향한 일편단심"을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몽주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백골과 진토를 불사
르며 붉게 타오릅니다.
정몽주의 후예들은 지금도 일상적으로 어떤 생각이나 마음의 절대 상태를
나타내려고 할 때 죽는다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서구 사람들은 신
을 두고 맹세하지만 한국 사람은 죽음을 두고 맹세하는 일이 많습니다. 죽으
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도 "앞으로는 죽어도 하지 않겠다"라든가 "죽어
도 널 버리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 습관을 보아도 한
국말에서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서열상 앞에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
자 살자로 사랑한다"거나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어에
서는 생사결단이라고 하지 않고 사생결단이라고 합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의 그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도 한국말로 번
역되면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로 바뀝니다. 그래야 자연
스러운 한국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고 하는 일본이지만
명번역이라고 하는 쓰보우지의 햄릿 번역본에는 한국어 번역본과는 달리 "사
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이용하여 무엇을 강조하거나 그 극한적인 부정을 통해
서 오히려 긍정을 끌어내는 역설을 나는 '헴로크 효과'라고 부르려고 합니
다. 헴로크는 아시다시피 소크라테스가 처형될 때 마신 독약 이름입니다. 한
국말로는 '독미나리'라고 부르지만 유럽이 원산지인 이 헴로크는 진통제로
쓰이기도 하는 약초입니다.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언어를 구체적인 사물로
바꿔놓으면 독약이 될 것입니다. 독극물이 들어 있는 약병에 해골 그림을 그
려놓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다'의 반대말은 '살다'이
고 '살다'의 구체적인 행위는 먹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헴로크는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면서도 그 정반대의 삶의 동사인 '먹다'와 관련됩니
다. 헴로크는 죽는 것이며 동시에 먹는 것(마시는 것)입니다.
'죽다'와 마찬가지로 그와 대립항을 이루는 '먹다' 역시 한국말에서는 아
주 다양하고 다의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대
표적인 세 가지 교환 구조 역시 '먹다'의 동사로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남
녀의 육체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피의 교환에서 가족이라는 집단이 만들
어집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밥을 먹는 일, 말하자면 '한 솥의 밥을
먹는 식구'입니다. 가족을 의미하는 식구는 곧 '먹는 입'이 아니겠습니까.
동지를 뜻하는 영어의 '컴패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컴'은 '함께'를 나타
내는 말이고 '패니언'은 '팬' 즉 '빵'을 의미하는 말로 '빵을 함께 먹는
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화폐를 통하여 물질을 교환하는 시장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것
을 가능케 하는 힘이 이윤을 먹는 일로 자본의 축적입니다. "꿩꿩 꿩서방
뭘 먹고 사니 이웃집에서 쌀 한 되박 꿔다 먹고 산다. 언제 언제 갚니 내
일 모레 장보아 갚지"의 그 장터, 꾸고 갚고 사고 파는 그 시장의 삶 말입니
다.
세 번째는 언어를 통해서 마음을 교환하는 지식 정보 지혜의 소통공간의
구조입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힘 역시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나는 이
래서 한국에 절망하다가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에 나이
도 먹고 욕도 먹고 이렇게 '마음까지 먹고 사는' 것이 한국인입니다. 아이
가 돌날이 되면 으레 온 마을에 밤새도록 떡을 돌립니다. 이때의 떡은 단순
한 떡이 아니라 하나의 정보요 마음의 덩어리인 것입니다. 떡을 보고 사람들
은 이게 웬 떡이냐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떡이 누구네 집 아이의 돌떡이라
고 합니다. "어 그녀석이 벌써 그렇게 컸나." 이렇게 해서 온 동네사람이 돌
을 축복하면서 떡이 아니라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어려워
도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가족의 피도, 시장의 화폐도 이
언어의 교환원리인 마음 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농업사회가 피의 원리 산업
사회가 화폐의 시장원리에 의존하여 살아왔다면 앞으로의 정보지식 사회의
원리는 마음을 교환하는 소통 원리에 의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크게 떠오르는 것이 '헴로크 효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열었을 때의 빵과 포도주 그리고 소
크라테스가 옥중에서 역시 그의 제자들과 최후의 담론을 나눈 헴로크-. 이것
이 바로 세 번째 지식 정보의 소통인 '마음을 먹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최후 만찬의 빵과 포도주는 여럿이서 나눠 먹을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도 성
찬식으로 되풀이되고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마신 헴로크는 분명 먹는 것이면
서도 절대로 남과 함께 나눠 먹을 수 없는 음식인 것입니다. 여럿이 함께 있
지만 혼자 마셔야 하는 것이 아주 특이한 '헴로크의 효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헴로크 효과'의 패러다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소크
라테스입니다. 옥중에서 친구와 제자들 앞에서 마지막 강의를 한 소크라테스
의 담론은 전적으로 이 헴로크에 의한 것입니다. 재판장에서 악법이라도 법
을 지켜야 한다고 11집행 위원회의 결정을 따른 소크라테스보다 우리에게 가
장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호소해 오는 것
은 '헴로크를 마시고 그는 무엇을 말했는가'하는 것입니다. 즉 죽음을 앞에
둔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체험하고 그 메시지를 어떻
게 증명해 보였는가 하는 것이지요. 삶에 대한 정보 지식 지혜의 모든 것이
이 헴로크의 독배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한국의 선비들 가운데
특히 자신이 신념을 가지고 선비로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사약을 받고 죽
은 사람이 많습니다. 사약 문화가 곧 지식인의 문화였던 한국인에게 있어서
더욱 헴로크의 담론과 그 효과는 지식인이 대학에서 다루어야 하는 최종적
인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문학의 경우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나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며 더더구나 소크라테스에 대
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만 젊은 시절에 옥중에서 독약을 마
시고 죽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담론과 행적을 상세하게 적은 플라톤의 <파
이돈>을 읽었던 어렴풋한 기억뿐입니다. 30년이 넘도록 한번도 강의실에서
는 꺼내본 적이 없는 이 화두를 젊은 시절에 경탄과 회의 속에서 읽었던 그
기억이 오늘 고별강연을 하면서 되살아난 것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제
자와 친구들 앞에서 헴로크를 마시며 강의를 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한마디도 강의실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생소한 화두라 할 것입니다.
이제 미완의 김소월 시 강의를 소크라테스의 헴로크의 효과, 즉 '소크라테
스는 헴로크를 마시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합
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철학자의 생애를 마치는 최후의 담론이
바로 헴로크에 대한 옥리의 말을 전하는 크리톤의 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는 점입니다. 크리톤은 "옥리가 아까부터 나에게 부탁한 것인데 자네가 독약
을 마신 뒤 너무 말을 많이 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라는 걸세. 말을 하면 열
이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독약의 힘이 잘 듣지 않아 두 배 혹은 세배까지 마
셔야 한다는군 "이라고 소크라테스에게 말을 합니다.
제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말을 많이 하면 헴로크의 효과가 줄어든다는 대
목과, 과연 소크라테스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그 충고를 받아들였는가 아
니면 거부했는가 하는 궁금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헴로크를 건네
주는 옥리에 대한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일은
옥리의 몫이지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의 친구와 제자들 앞에서 자신이 왜 헴로크(죽음)를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증명하겠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헴로크는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담론에 발
화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파이돈>은 헴로크가 아니었으
면 불가능했을 담론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파이돈>에는 독약(POISON)이
란 말이 18번이나 등장하고 있으며 담론의 대목을 이어가는 중요한 숨은 장
치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철학자에게 있어 헴로크가 얼마나 무력한 것이며 무의미한 것
인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 그의 마지막 강연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최후를 그린 <파이돈>은 헴로크와의 게임이요 그 행동이었던 것이지
요.
헴로크를 마신 것은 아니지만 나의 마지막 고별 강연도 되도록 말을 많이
하지 않기 위해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축약해 갈까 합니다.
실은 오늘 이 고별 강연회를 마련하면서 내 사랑하는 제자들이 나에게 여러
번 부탁한 것도 옥리의 말처럼 되도록 말을 많이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
니다. 또 정해진 시간을 초과해 행사를 망칠까봐 두려워했던 것이지요. 그래
요. 착한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헴로크를 마시고 말을 많이 하게 되면 그
효과가 더디 나타나 그만큼 고통을 더 겪어야 한다는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
다. (정말 그랬어요. 희랍의 사형수들은 헴로크의 약효가 금시 나타나 고통
을 단축할 수 있도록 옥리들에게 뇌물을 쓰기도 했다는 거지요.) 헴로크와
의 게임에서 소크라테스가 이기는 것보다 즉 철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증명을 위해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는 마음씨 착한 크리톤에게 있어서
는 그가 겪을 육신의 고통을 일초라도 더 덜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약속대로 내 이야기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몇 구절만을 <파이돈>에서 인
용해 보겠습니다. 헴로크에 대한 크리톤과 대화를 끝내자마자 곧 바로 그
의 담론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자, 그러면 나의 재판관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참 철학자란 죽음이 임
박했을 때 기쁜 마음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고, 또 죽은 후에는 저 세상에
서 최대의 선을 얻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오. 어떻게 그
럴 수가 있는지, 심미아스와 케베스여, 이제부터 증명해 보기로 합시다. 참
으로 철학에 몸을 바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기 쉽소.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항상 죽음을 추구하고 있고 또 사실 죽은 상
태에 거의 가깝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니 말이오. 이제 사실이 그렇다고 하
면, 일생 동안 죽기를 원해 온 사람이, 어찌하여 그때가 왔을 때 그가 항상
추구하고 원해 오던 것을 마다하겠소? "
그리고는 철학자란 육체를 치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에서 분리
된 영혼을 아름답게 꾸미는 사람인 것을 실례를 들어 증명해 보입니다. 그렇
지요. 지금이라도 젊은이들처럼 머리에 노랑물을 들이고 이상한 몸치장을 하
고 다니는 대학 교수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가 지식인인지 의심을 할지 모릅
니다.
소크라테스는 "값진 옷이나 신발이나 혹은 이 밖의 여러 가지 몸치장을 야
단스럽게 추구하며 그것에 큰 가치를 둘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이런 것들
을 경시해야 할 것인가?" 라고 물으면서 철학자는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인
가 라고 묻습니다. 철학자는 영혼에 마음을 쓰고 육체에 관해서는 마음을 쓰
지 않는 사람,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보면 처음부터 죽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지요. 육체의 쾌락도 느끼지 않는 사람의 인생이란 살 만한 것
이 못되며, 육체적인 쾌락을 모르는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자는 신체에서 분리되기 위해서 해방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매일매
일 조금씩 죽어가는 연습을 하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나는 매일매일 죽
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말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또 묻습니다. 신체가 지식의 탐구에 가담할 때, 그것은 방해
가 되겠는가 도움이 되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물음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진
리를 발견하는 지식에 있어서 감각에 의존하는 부정확한 신체 정보나 지식
은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는 동의를 유도해 냅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예술을 부정하고 시인을 그들의 공화국에서 추방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예술
이 이데아의 산물이 아니라 신체의 감성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기 때
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체가 없어지면 영혼도 따라서 사라진다는 심미아스나 케베
스의 말을 부정합니다. 영혼의 불사설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거
문고가 부서지고 그 줄이 끊기게 되면 어찌 아름다운 음악의 조화를 들을
수 있겠는가라는 심미아스의 반론이나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육체가 항
상 소모되고 소멸하지만 영혼은 항상 새로운 옷을 짜서 입으며 소모된 것을
보충해 가는 것이라는 케베스의 신체관에 대해서도 고개를 흔듭니다. "영혼
이 사멸하는 날에는 영혼이 그 최후의 옷을 입겠고 이 옷은 그 영혼보다 오
래 있을 것"이라는 아름다운 시적 표현에 대해서도 속지 않고 소크라테스는
영혼 불사를 증명하기 위해 파이돈을 대상으로 그 유명한 영혼상기설을 끌
어 냅니다. 한마디로 헴로크와의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체
성-육신을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내어 멸각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과 신체성을 철저하게 분리해야만 헴로크에 의해서 멸해지는
것이 신체일 뿐 영혼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영혼
을 신체와 분리하고 그와 대립시킬 때 우리는 비로소 헴로크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서구 사상의 전통이 이렇게 영과 육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이항
대립체계(BINARY OPPOSITION)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언젠가 롤랑 바르트
도 솔직히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신체성에서 지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을 풀
이한 이화대학의 선배 교수였던 김흥호 목사님은, 귀납법이나 연역법 혹은
파스가 '제삼의 논리'라고 명명했던 아부덕션과 같은 추론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서도 애너그램-소쉬르가 시적 언어의 본질이라고 믿었던-과 비슷한 방법
에 의해서 신체의 멸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쌀에서 ㅅ자를 하나 빼면 살이 되고 살에서 다시 시옷을 빼면 알이 된
다. 거기에서 다시 ㅏ자를 빼면 이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선비들이
한자를 해체하여 여러 가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破字놀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쌀과 살의 물질적 신체성으로부터 어느덧 추상적 인지-어쩌면 소크
라테스가 말하는 愛知의 그 知와 다를 것이 없는 영혼의 세계-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역시 헴로크를 마시고 난 뒤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
고 침묵하게 됩니다. 발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배로, 배에서 심장으로 서서
히 올라오는 죽음의 마비를 지켜보면서 말입니다. 옥리가 찾아와서 물으면
어디까지 차가워졌는지를 말하는 정도였지요. 그리고 헴로크를 마시고 난 뒤
에 말한 것은 "크리토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진 것이 있
네. 기억해 두었다가 갚아주게나"라는 한마디 말뿐이었습니다.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 말을 위대한 철학자의 미덕을 한층 더 강화
하는 항목으로 추가하려고 합니다. 임종의 자리에서도 외상값을 걱정하고 그
것을 갚으려 했다는 점이 악법도 법이라고 하여 지키려 한 소크라테스의 착
한 아테네의 시민 정신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해석을
하자면 내가 이화대학에 갚아야할 빚은 닭 한 마리로 될 이야기가 아닙니
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스클레피오스는 사람이 아니라 희랍 신화에 나오
는 의신(醫神)이었던 거지요. 희랍 사람들은 병을 고쳐주는 의사들에게 감사
하는 뜻으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 닭 한 마리씩을 받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헴로크를 마신 뒤 숨을 거
두면서 닭 한 마리를 의신의 신전에 바쳐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은 처음으로
영혼의 신이 아닌 신체의 신-육체의 병을 고치는 신-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
려고 했다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 고별 강연의 주제가 된 헴로크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전후 문맥으로 보아 분명한 것은 그것
을 마시기 전에 그토록 헴로크와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한 소크라테스가 그것
을 마시고 난 뒤에는 의신에게 신세를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자신이 마신 헴로크 자체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영역 하에 있는 것이
니까요. 헴로크는 원래 진통제나 해소에 듣는 약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지
막 죽을 때 헴로크를 갈아서 독약을 만드는 것도 의술에 속합니다. 인간의
신체를 다루는 최고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의술은 인간
의 몸을 살리는 기술일 뿐만이 아니라 죽이는 약도 만들어내는 기술이니까
요. 이것이 헴로크의 효과이며 헴로크의 담론이며 소크라테스와 헴로크의 관
계를 나타내는 역설이라고 할 것입니다.
의신에게 닭 한 마리를 공양해 달라는 소크라테스의 이 헴로크의 효과가
무엇인지 지루하지만 조금만 더 참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헴로크는 지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그 영혼의 반대말이면서도 동시에 신체의 반대말이기
도 한 것입니다.
소크타테스가 헴로크를 먹고 아무렇지 않게 죽은 것. 그 이전에는 사형언
도를 받고 도망칠 수 있음에도 법을 그대로 따른 이유가 모두 이 말 한마디
를 남긴 그 태도에 있었던 것입니다. 콜린 윌슨의 지적대로 소크라테스의 순
교는 종교나 국가를 위한 자기 희생같은 순교와는 다른 형태라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순교라고나 할까요. 영혼을 오히려 흐리게 하고 방해하는 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신체의 죽음에 초연할 수 있는 순교에 속한다는 겁니다. 옥
중 강의는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
한 담론으로 일관해 있습니다. 마지막 강의라기보다 친구와 제자들에게 마
치 배심원들 앞에서 무죄의 변론을 한 것처럼 그들을 재판관이라고 하면서
죽음의 멸각을 증명해 보이는 과학 실험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가 독배를 마실 때 제자들은 훌쩍거리
고 울었으며 절망하여 땅을 칩니다. 노예 출신 파이돈은 스승을 잃은 아테네
를 버리고 길손이 되었지요. 소크라테스의 영혼불사와 신체부정론이 정말 증
명되었다면 그의 말대로 육신에서 자유로워진 소크라테스의 순수한 영혼이
나 찬란한 보석들이 지상의 돌자갈처럼 흔하게 굴러다니는 신들의 세계, 우
리의 신체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는 삶의 본질에 도달하는 지의 능력
에 대해서 축배를 들었어야 합니다.
더구나 소크라테스가 장시간에 걸쳐 영혼불사론을 펴고 철학자는 육체에
대해서 연연하거나 가치를 두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누누이 설명하였음에
도 그와 가장 가까운 크리톤은 그의 담론이 끝나고 독약을 마실 준비를 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죽은 뒤에 그 시체를 어떻게 매장해 줄
까?"라고 말입니다. 여전히 크리톤의 관심은 그의 영혼이 찾아가는 신의 세
계보다 그가 죽고 난 뒤의 시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신체의 딱딱하고도 구
체적인 몸뚱어리-의 세계에 쏠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에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허탈한 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한탄합니
다. "나는 크리톤으로 하여금 내가 여기에서 자네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리고 우리들의 토론을 이끌고 있는 바로 그 소크라테스임을 믿게 하지 못
했네. 그는 나를 얼마 있다가 그가 보게 될 송장이라 생각하고서, 어떻게 나
를 파묻을까 하고 묻고 있네. 나는 내가 독약을 마시고 죽으면 자네들을 남
겨 두고 축복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 기쁨에 참여하리라는 것을 누
누이 말해 왔는데, 크리톤은 이것이 그저 나 자신과 자네들을 위안하기 위
한 아무 실속 없는 소리인 줄로만 알고 있군 그래."
이 말에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마시기도 전에 소크라테스의 몸 안으로 번
져 가는 헴로크의 효과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빈치가 그린 최
후의 만찬과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옥중의 최후 장면을 비교해 보면
헴로크 효과가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최후 만찬에는 빵과
포도주가 있었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었습니다. 음식을 함
께 나눠 먹는 향연의 자리는 너와 나가 하나가 되는 소통의 자리인 것입니
다. 그러나 헴로크의 독배를 매개로 한 말 잔치는 비록 대화라고 해도 함께
나누기 힘든 담론으로 끝나게 됩니다.
내 마지막 강연의 결론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헴로크를 마신 뒤 우리가 무
엇을 말해야 하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왜 중요한지를 아주 극명하게 알릴 수
가 있기 때문입니다. 헴로크 효과에 '그레이 존'이나 아이러니, 역설과 같
은 복합적인 의미가 없을 때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플라톤의 이데아는 예술
만을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를 영과 육의 양극화로 파악하게 만듭
니다. 우리는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너무나도 오래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되풀이 합니다마는 일제식민지 시대 해방 후의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결사적
갈등 그리고 전쟁과 독재 정치에 대한 민주화 투쟁 등은 우리에게는 생명이
걸린 문제였지만 그로 인해 상상력과 지식이 만들어내는 '그레이 존'이 폭격
을 당해 황폐할 대로 황폐해지고 말았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아이러니와 역설의 복합적 구조가 없었다면 "죽어
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의 그 "죽어도"는 우리가 흔히 보는 죽기 아니면
살기의 극한적 양극화의 투쟁을 의미하는 언어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시 분석만이 아니라 문학의 이론 구조 전체를 좌우 이데올로기나 참여 순
수의 흑백논리로 황무지를 만들어 놓은 대학가의 문과 교실을 '그레이 존'으
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여러 가지 전략과 여러 가지 이론으로 무장하면서 30
여년 이상을 지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양극화한 투
쟁 속에서 사람들이 민중문학을 운운할 때 나는 집단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
람의 인간의 완결성과 지존함을 이야기하려 했으며, 친체제와 반체제의 OX
의 시험 답안이 강요되는 세상에서 나는 친도 반도 아닌 비체제의 새로운 답
지를 만들어 넣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거문고를 부셔 장작불을 지피
는 사람들 사이에 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역사의식이란 장작
과 재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꽃이었던 것이지요. 장작만 보는 사람이나 타고
난 재만을 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는 역사의식이 없는 정적주의자로 비쳤
을 것입니다. 불은 타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의 언어만
으로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부재하는 것과 다름없게 보였을 것입니
다.
이러한 고정관념과 양분법의 풍토에서 흑백논리에 대한 가위의 세계를 가
르치는 외로움은 요즘 유행하는 속어로 '왕따'가 되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
다. 그렇습니다. 정말 나는 문단에서도 대학가에서도 심지어 제자들 사이에
서도 소외된 작은 섬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조류가 바삐 내 곁
을 스쳐 지나고 있을 때 나만이 한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었습니다. 고도처
럼…….
뉴크리티시즘, 현상학적인 의식비평, 그리고 구조주의와 기호학, 이것이
내가 맡았던 과목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학생들은 시류를 타지 않고 내
희미한 '그레이 존'에서 조금씩 자라고 있었으며 이제 내가 대학을 떠날 무
렵에는 무성한 푸른 잎이 피어 쉬어갈 만한 그늘이 생겼습니다. 나야말로 이
제 다섯 명이 아니라 단 한사람이라도 좋으니 창조적 상상력을 지닌 인간을
길러낸 교수로 기억된다면 나는 전 생애를 두고 문화계에서 해 왔던 모든 일
들이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강의가 '헴로크를 마신
뒤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답이 되어 주기를 희망합니다. 물론
사지선다 식의 답지 위에 동그라미를 치는 그런 답이 아닌 것으로 말입니다.
강의를 끝마치면서 나는 가난한 농부가 산에서 산신령을 만나 소원을 말하
라고 했더니 금덩이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옛날 이야기가 떠오릅니
다. 신선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지팡이로 돌을 건드리니까 그것이 금
시 금덩이로 변합니다. 그것을 보고 놀란 농부는 금덩이에는 눈도 팔지 않
고 그 지팡이를 달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만약 그런 지팡이가 있다면 나는
지식이라는 금덩어리가 아니라 지식을 창조하는 상상력의 지팡이, 지혜의 지
팡이를 놓고 가려는 것입니다.
이화는 내 젊음을 묻은 곳입니다. 눈을 감으면 가을날 샐비어가 붉게 불타
오르는 교정이 보입니다. 아직도 나에게는 샐비어의 꽃들이 가슴속에 남아있
지만 벌써 겨울 바람소리가 들려옵니다. 겨울이 되기 전에 그 뜰에서 내려
와 내 방의 창문을 닫아 걸어야 합니다. 헴로크를 마신 사람처럼 온몸으로
점점 냉기가 올라오는 겨울을 맞이해야 합니다. 외로운 섬처럼 어딘가에 있
을 내 작은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학생들의 웃음소리도 혹은 무
슨 구호를 외치는 분노의 소리도 없을 것입니다. 훌쩍거리며 우는 울음소리
도 회한의 한숨소리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타다 남은 불덩이가 하얀 재 속
에서 사위어 가는 화롯불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영혼이 입어야 할 마지막 빛
나고 아름다운 옷을 장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헴로크로 시작하는 말 잔치에서는 함께 그 말을 나눌 수가 없습니
다. 대화 없이 일방적인 강연이 된 것을 사과하면서 끝까지 자리를 함께 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