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선생의 휘는 광조요 자는 효직이며 한양조씨의 문중에서 1482년(성종 13년)에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에 魚川(지금의 평안북도 영변)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평안도 희천에 귀양 와 있던 寒喧 金宏弼(1454-1504)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뒷날 김종직의 대를 이어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1510년(중종 5년)에 진사 장원하고 1515년에 알성시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선 조광조는 벼슬로는 성균관전적,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고, 홍문관으로 옮겨 수찬과 부제학을 역임하면서는 왕 앞에 나아가 학문을 강의하는 등 임금의 신임을 얻어 중종14년 (1519) 대사헌에 이르렀다.
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하는 유신의 정치를 펴면서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을 장려했다. 조광조는 이러한 새 기운 속에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신진 사류 가운데 대표적인 존재였다.
조광조는 '도학을 존숭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고 성현을 본받음으로써 至治를 일으킬 것', 즉 성리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고대 중국 3대(하, 은, 주)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지치주의 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지치주의란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를 현실에서 건설하려는 것이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지치가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조광조는 왕에게 성현을 본받아 수양에 힘 쓸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기존 훈구세력의 부패와 비리를 공격했다.
또 현실의 여러 요소들을 이상적인 상태로 끌어올리기 위한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혁신 정치를 방해하는 요소는 학문적으로는 이단, 인격적으로는 소인으로 지목하여 냉엄하게 배척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조광조는 도교의 제사를 주관해 온 소격서(昭格署)를 철폐시키는 등 이단을 타파하는 데 힘썼고 인심을 교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향약을 실시했다.
한편 중종14년(1519)에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본격적인 혁신정치를 담당할 인적 자원을 선발하여 각 부문에 배치했다. 현량과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류들은 기존의 관리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다. 더구나 이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실시될 혁신정치는 장차 기성 관리들의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릴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동안 소인배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거나 지방으로 좌천되거나 하면서 조광조 등 사림파에 대한 반발을 키워 오던 훈구세력은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훈구세력의 반발에 불을 당긴 것은 위훈삭탈 사건이었다. 중종은 반정에 성공한 후 반정 참가자 103명을 공로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어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봉했다. 정국 공신들은 대대로 귀족의 지위를 받고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를 받는 등 특권을 누렸다. 조광조는 부당하게 공신으로 책정된 사람이 있으니 재심사하여 자격없는 사람들은 빼 버리자고 왕에게 건의했고, 결국 103명 가운데 78명의 훈적이 삭제되었다.
이 사건으로 보수 세력의 불만은 극도에 다다랐다. 이 무렵 중종도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 주장에 차츰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판을 뒤집을 기회를 엿보던 홍경주, 김전, 남곤 등 훈구 공신들은 그 낌새를 포착했다. 그들은 우선 희빈인 홍경주의 딸을 시켜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으니 지금 꺾지 않으면 장차 그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자주 왕에게 하도록 하고, 대궐 안의 나뭇잎에 走肖爲王(주초가 왕이 된다, 走자와 肖자를 합하면 趙자가 됨)이라는 글자를 꿀물로 써 놓아 벌레가 갉아먹게 한 후에 왕에게 보이도록 했다. 그 자신이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이었으니 그 심리적 효과은 컸을 것이다.
마침내 중종 14년(1519) 11월 15일 밤, 홍경주는 은밀히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지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벌을 주라고 청했다. 왕은 거기에 응했다.
이른바 기묘사화가 터진 것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는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성균관 유생 1000여명이 광화문 앞에 모여 석방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엇고 관련자들을 국문을 받은 후 각지로 유배되었다. 현량과 출신의 관리들은 축출되엇고 조광조를 두둔하던 관리들은 파직되었다. 일단 능주로 유배되었던 조광조는 한 달 후에 사약을 받았다. 노련한 훈구 세력들이 그를 죽이고 그의지지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아 후환을 없애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 김정, 기준, 한충, 김식, 김구, 박세희, 박순, 윤자임 등을 기묘명현이라 불렀다.
흔히 조광조가 실패한 것은 너무 저돌적이고 급진적으로 개혁정치를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비타협성이 시기를 앞당겼는지는 몰라도, 기득권 세력이 저절로 물러나는 일은 결코 없음은 역사를 통해 익히 알 수 있는 일이다.
후세에 율곡 이이는 "하늘이 그의 이상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내었을까"하고 조광조의 실패를 안타까워했으며, 그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東方四賢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조광조는 선조 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후 능주의 죽수서원 등 각지에 그를 기리는 사당과 서원이 섰다. 마침내 광해군 때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한국문화유적답사회 엮음, 답사여행의 길잡이 5 전남, 돌베개,1995, 87-91)
2. 적려유허비와 죽수서원
화순은 조선 시대 기묘사회(己卯士禍)로 능주에 귀양을 왔다 사약을 마시고 죽임을 당한 조광조와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관직을 삭탈당한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의 충절과 의리의 정신이 깃들여 있는 곳이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년) 11월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 재상이 조광조, 김정 등의 젊은 사림들을 몰아내어 죽이고 혹은 귀양보낸 사건이다. 당시 조광조는 38세에 대사헌(大司憲)에 올라 소장 사림들의 지도자였는데,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 중에서 76명의 공을 깎은 위훈삭제사건을 계기로 훈구세력의 미움을 받아 현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1개월 5일만인 1519년 12월 20일 사약을 받았다.
정암 조광조는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성을 밝게밝게 비추리
그의 시신은 같은 사림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현 도곡면 월곡리(道谷面 月谷里)에 내려와 있던 학포 양팽손의 손으로 현 이양면 증리(梨陽面 甑里)에 가매장했다가이듬해 정암의 유족에게 인도하였다.
능주면 남정리 정암의 유적지에는 1667년(현종 9)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이 글씨를 쓰고 능주목사 민여로(閔汝老)가 세운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가 있으며 한천면 모산리에는 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을 배향한 죽수서원이 있다.
1)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41호 소유자 : 사유(한양조씨 문중) 관리자 : 정암회(대표 조성후) 소재지 :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 규모 : 비각일원 시대 : 1667년 (조선시대) 지정 : 1979. 8. 3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능성에 귀양을 왔던 정암 조광조(1482∼1519)선생을 추모코자 세운것이 적려유허비이다. 적려란 귀양또는 유배를 말한다.
이 적려유허비는 능성현 당시 북문이 있었던 곳 부근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만 갖추었고 귀두도 형상만 다듬었다. 비신은 전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 하여 해서체 종서2행으로 썼다. 비신뒷면은 상단에 〔정암조선생추모비〕라 전액하고 그 밑으로는 정암선생의 유배 내력을 기록하였다.
비문은 의정부우찬겸성균관제주세자이사 우암 송시열이 짓고 전서는 충청도관찰사겸수군절도사 순찰사 민유중이, 글씨는 의정부좌참찬 동춘 송준길이 썼으며 현종8년(1667) 4월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건립하였다. 이수는 반원형인데 전면에는 쌍룡이 엉키어 있으며 배면에는 한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총 높이는 295cm, 귀부의 높이는 164cm 폭은81cm 두께는 29cm 이수의 높이는 71cm 이다.
비각은 정면1칸, 측면1칸 맞배지붕으로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우물천정을 하였으며 방풍판을 달았다. 이 비각은 1982년, 1983년, 1997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1986년에 강당(정면5칸 측면2칸)과 영정각(정면3칸 측면1칸) 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유배생활했던 초가를 복원하여 적려유허비 주위를 정화를 하였다.
2) 죽수서원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30호 소유자 : 사유(한양조씨 문중) 소재지 :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 15-3 규모 : 일곽 시대 : 조선시대(1570년) 지정 : 1986. 9. 29
죽수서원은 문정공 정암 조광조(l482~1519) 와 혜강공 학포 양팽손(l488 ~l545) 을 배향한 서원으로 전남지방에서는 순천의 옥천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l570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정암은 중종 l4년(l5l9) 기묘사화의 화를 입어 능성현에 유배되었다. 이때 평소 정암선생을 흠모하고 생원시와 현량과에 함께 등용되는 등 여러모로 인연이 깊었던 학포선생도 관직을 삭탈당하여 고향인 능성현(능주)에 와 있었다.
이에 자연히 조석으로 만날 수 있게 된 정암과 학포는 서론 강론하면서 의리를 교환하였다. 그러나 정암선생이 유배된지 1개월 정도에 사사를 당하자 학포는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쌍봉사 골짜기 일명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 (서원터)마을에 모옥을 짓고 춘추로 문인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후 선조 1년 (1568)에 정암선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의 건립이 논의되었고 선조 3년(1570) 다시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천일대 옆(현위치)에 서원을 짓고 죽수란 사액을 받았다. 그후 1613년 서원을 중수하였고 l630년 도내 유림들과 조정에서는 사계 김장생 등의 발의로 학포선생을 죽수서원에 배향하였다.
l868년 죽수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하였고 단만을 마련하고 제향하였다. l97l년 능주의 유림과 제주양씨 후손들이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그러다가 l983년 다시 한양조씨 조국조를 중심으로한 정암선생 후손들에 의하여 원래의 위치이자 죽수서원 사액을 받은 모산리에 죽수서원 복원을 추진, 월곡리의 건물을 이건하고 신축하였다.
서원의 경내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에 의해 제향구역과 강학구역으로 분리된 전학후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89년 동재를 신축하고 1994년 외삼문 보수, 1997년 내삼문을 보수하였다.
3) 학포당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92호 소유자 : 사유 (제주양씨 문중) 소재지 :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411 규모 :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657㎡) 시대 : 조선시대(1521) 지정 : 1986. 2. 7
학포당은 조선 중종대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혜강공 학포 양팽손(1488 ~ 1545)이 사용한 서재이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학포선생이 쓰던 건물이 아니라 중간에 퇴락하여 없어진 것을 1920년에 그 후손들의 현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85평이 넘는 경내에는 학포당 창건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노거수 은행나무 1그루가 있다. 1994년 학포당을 보수하였고, 1995년 외삼문 복원과 담장 보수, 1996년 담장 설치, 1997년 담장 보수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