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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누님들 요즘엔 일기 쓸만한 일이 안일어 나네요 ㅡ.ㅡ;;...
그래서 저의 어렸을적 일을 그냥 끄적여 볼까 합니다...
그냥 애교로 봐주세요 ^^....
1979년 10월 2일 천지가 개벽(?)하는날 전남 대학병원에서 새벽 2시에 내가 태어났다...
지독한 난산이었나 보다....울 어머니 나 낳다가 출혈이 많아 돌아가실뻔 했다고 그런다...
울 어머니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는 나한테 효도해야해....나 너 낳다가 죽을뻔 했어..
그렇게 내가 태어났다....
5살 이전의 기억은 생각나지 않는다....단지 우리 친척들 말을 들어보면 정말 사고뭉치 였다
고 한다...
어렸을적 내 별명은 "번개탄"이다....눈만 잠깐 떼면 동에 번쩍 서해 번쩍 한다고 번개탄이다..
그 별명을 누가 지어줬는지는 모르지만...친척 어른들 말씀 들어보면 참 그럴듯 하다...
친척 어른들 말씀이 번개탄이라는 별명이 지어진 계기가...아마도 내가 4살때였을 꺼다...
한번은 친척들끼리 놀러가기로 계획을 짰더랜다...광주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잠깐 친척들이 한눈을 판 사이에 내가 없어졌더란다...
우리 친척들 놀래서 광주시 터미널을 다 뒤지고....그래도 없으니깐 용달차 하나 빌려서 확성
확성기 입에 달고 광주 온 시내를 뒤지고.....파출소도 샅샅히 뒤졌으나 못찾았더란다...
우리 어머니 누가 나 납치한지 알고 울고 불고 난리가 아니었단다...
그런데 나를 어디서 찾았냐면 어디 파출소 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미아 신고가 들어와
그 파출소로 가보니깐 순경아저씨랑 짜장면 먹으면서 잘 놀고 있었더랜다 ㅡ.ㅡ;;...
그리고 또 한번은 영광에서 잊어버렸단다 우리 외갓집은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이다...
영광에 장보러 나왔다가 또 내가 없어졌더란다 ㅡ.ㅡ;;..근데 이번에는 어떻게 찾은지는 나도
잘 모른다....찾았으니깐 이렇게 있겠지 ㅡ.ㅡ;;;
그 뒤부터는 나는 목걸이를 항상 하고 다녔다.....이름 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목걸이를...
해줄려면 금으로 해주지 쓰댕이 머얌 ㅡ.ㅡ;;...그 뒤로 나를 또 몇번이나 잊어버렸지만 목걸
이 때문에 찾았덴다...이때부터 나는 이름 대신 우리 친척들 사이에선 "번개탄"이라고 불렸다.
또 내가 어렸을때는 우리 외할머니가 나를 다 키워주셨댄다....
외갓집에서는 정말 귀하게 컸다...왜냐고?
우리 외할아버지는 딸 여덟명에 아들 두명을 두셨다...
딸 딸 딸 딸 딸 딸 딸 아들 아들 딸 이렇게 낳으셨다...
10명이나 낳으셨다....힘도 좋다 우리 할아버진 ㅡ.ㅡ;;;
우리 엄마는 셋째 딸이다....그 많은 친척중에 아들 아들인 집은 우리 셋째가 유일하다...
나는 두번째 아들이다...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는 특히 나를 이뻐하셨다...
우리 외할머니는 어렸을때 나를 키울때 정말 귀하게 키우셨단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나는 정말 어렸을때 코흘리개였다....할머니는 휴지로 코를 풀어주면
내 코가 헐을까봐 입으로 코를 빨아주셨단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말 귀하게 컸다...ㅡ.ㅡ;;
항상 할머니는 나를 이뻐해주셔서....눈깔 사탕이나 새우깡을 외갓집에 떨어지지 않게 집에
구비해 두셨다...
격동의 70년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리라 눈깔 사탕의 맛을...내가 어렸을때는 새우
깡이 5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깐 ㅡ.ㅡ;;
외할머니 속도 많이 썩혀 드렸다...그 어린나이에....
외할머니가 아끼는 그릇 내가 다 깨먹었다고 한다 ㅡ.ㅡ;;...
그리고 그릇을 깨면 꼭 혼날까봐 광으로 숨곤했다...
광으로 숨어서 깜박 잠이 들때면 우리 할머니 나 없어졌다고 또 온동네를 찾으러 다니셨단다
그래서 찾다가 못찾다가 집으로 와보면 꼭 광속이나 아니면 이불장에서 이불이랑 파뭍혀서
자고 있었더랜다...
5살때 부터는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동네 아이들과 딱지치기 구슬치기 양지 (동그란 딱지) 치기를 정말 하루종일 하고 다녔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말씀하신다....너한테 새옷 입혀주면 정말 30분도 안되서 헌옷 만들어 왔
다고...구슬치기 해본 님들은 아실껏이다...얼마나 옷이 더러워 지는지...
동네 아이들 구슬과 딱지는 다 내꺼였다....정말 어렸을때 구슬은 진짜 많았다...
검정 구슬 사기 구슬 쇠구슬.....항상 두 주머니는 구슬로 불룩해서 집에 돌아가곤 했으니깐..
그리고 숨바꼭질.....잣치기도 많이했다......숨바꼭질은 꼭 그냥 안한다......
우리 시골에서는 "깡이요"라고 불렀는데...꼭 어디서 분유통을 하나 주워와서는 하곤 했다..
술래가 숨은 사람을 보곤 누구누구 보도 찜~!..그러면 꼭 깡통에다가 발을 올리곤 했다..
술래가 찾으러 간사이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깡통을 "깡이요"라고 차고 가면 또 잡힌 모든
사람들 다시 숨으러갔다....술래가 깡통을 다시 원위치 시켜놓을때까지...
비석치기도 많이하고...
어렸을때는 뭐가 그렇게 잼있는지는 몰라도....정말 잼있고 신나게 놀았던거 같다...
나는 5살때 부터는 엄마랑 같이 살기 시작했다....아빠가 영광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홍농읍
에 홍농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으셨기 때문에...나는 또 거기로 이사를 갔다....
우리 아버지 지금도 영어사전 하나를 통째로 외우시는 정말 뛰어난 머리를 간직하고 계신다..
우리 친척들 너희 아버지는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데 왜 너는 못하냐고 툭툭 한마디 던질때마
다 마음이 아프다 ㅡ.ㅡ;;
어렸을때 우리 아버지는 항상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다...그래도 꽤 멋을 아셨나보다...
어렸을때 사진찍은걸 보면 오토바이타고 찍은 사진이 많이 있다...나 어렸을때는
싸이카라고 불렀는데...그걸 타고 여름만 되면 가마미 해수욕장으로 정말 많이 다녔다...
아버지가 낚시를 좋아하셔서...낚시도 많이 간 기억이 난다...
어렸을때부터 나는 튀긴닭을 무지 좋아했던거 같다....
어렸을때 사진을 보면 닭다리 하나에 왜 그렇게 행복해 했었는지 정말 행복했었다...
근데 청도도 짠 무 주는 닭집 있나?....있음 좋겠다...
패스트푸드점 닭보다 나는 통닭을 훨씬 좋아한다....짠무를 무지 좋아하므로...
홍농에는 외국인이 많이 살았던걸로 기억이 난다...아마도 원자력 발전소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 미국인 친구도 무지 많다.....그중에서 조지라는 이름의 친구랑은 의형제까지 맺
었으니깐......그렇게 우리 아버지는 조지라는 외국인이랑 의형제를 맺고.....조지라는 미국인
은 나도 많이 이뻐했는지......자기 자식들 장난감을 나한테 나눠 주셨다....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장난감은 미니카라고...자동차를 고정시키고 바퀴를 뒤로 땡기면 태엽
이 감아져서 그냥 혼자 가는 자동차를 참 많이 조지에게서 받아온거 같다...
어린나이에 참 신기했다....조지는 우리 가족을 외국인 아파트로 불러서...외국인 식당에 데리
고 가서...외국인이 먹는 파이랑 그런걸 많이 사준것으로 기억한다...
어린나이에 비싼거 먹었다 ㅡ.ㅡ;;...맛은 기억이 안나지만 특히 복숭아 파이를 조지가 좋아해
서 많이 먹었던거 같다...
한번은 5째 이모가 우리 아버지를 찾아왔다.....아버지를 대뜸 찾아와서는 형부 나 골프채좀
구해 주세요 그러는 것이다....
지금은 골프채가 많이 싸지만 그때 당시에는 골프가 무슨 운동인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론...아마도 1983~4년도였으니깐...
우리 아버지 골프가 뭐냐고 물어보셨고.....조지에게 부탁해서...미국인이 쓰는 좋은건지..
안좋은건지는 모르지만....미국인 친구가 쓰던걸 골프가방까지 구해주셨고...
우리 5째 이모는 얼마가지 않아 프로골프 선수가 됐다..
팬텀 골프 소속 강미영프로라고....몇년전에 돌아가셨지만....
우승도 몇번하고 TV스포츠 뉴스에도 나오고 그랬으니깐 꽤 유명한 골프 선수였던건
확실하다...아는분 계시려나?...
그렇게 조지는 우리 가족에게 참 고마운 분이셨다...
중국오기전 아빠 조지라는 분 생각나? 이렇게 물어보니깐..
아버지는 홍농에 있다가...지병때문에 미국으로 건너가셨는데...돌아가셨다고..나에게 말씀
하셨다....지금도 조지 부인이랑은 국제전화 가끔한다...
또 한번은 이런일도 있었다....
우리 형이 트럭 지나갈때 앞으로 반드시 뻗어 있으면 안죽는다고 그러니깐...
나는 우리 큰외삼촌하고 나하고 둘이 외갓집에 있을때....혼자 신작로로 나와서...
그게 정말인지 하고 시험해 본적도 있었다...저기 끝에서 트럭이 달려오고 있을때..
나는 타이밍 잘맞춰 트럭에 뛰어들어 뻗었다...결과는(?)
그 트럭은 뺑소니를 쳤고....그 트럭은 내 다리를 깔고 지나갔고 나는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 외갓집 밑에 전빵(시골 구멍가게를 옛날엔 전빵 이라고 불렀다) 할머니 그걸 보고 놀라
서...우리 삼촌에게 알렸고....우리 삼촌은 낮잠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정말로) 나를 지나가는
용달차에 태워서 영광군민병원에 대려갔고...내 다리를 꼬맸다...
다행이 뼈에는 이상이 없었나보다.....나는 우리 큰외삼촌께 무지 많이 혼났고..또한 우리
부모님께도 정말 많이 혼났다....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삼촌이 사준 땅콩카라멜에 나는 그냥 마냥 웃고만 있었다...
그 후부터 우리 사촌 누나 형 동생들은 신작로에서 놀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에...
신작로에서 놀기를 포기했던거 같다....
생각해 보면 정말 죽을고비 어렸을때 많이 넘긴거 같은데...어줍잖은 글솜씨로 쓸려니 너무 길어질꺼 같아서...다음에 또 생각나면 올리겠습니다 ^^....
정말 하찮은 글솜씨로 형님 누님들 눈을 어지럽힌건 아닌지 ^^;....
참 저 어렸을때 "싸개"였다는거 아세요?
무슨 "싸개"였냐구요?....음 오줌이라는 글자가 앞에 붙어요 ^^;...
잼있다고 리플 많이 달아주시면 담에도 또 올릴께요 ^^
그럼 행복하세요 ^^
첫댓글 아까비~ 좀더 정리된 자세로 엎드렸으면 다리도 안 다치고 잘 넘어갔을지도... 왜 영화에서도 가끔 나오잖아요. 철로에 정돈된 자세로 엎드려서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탈주범 등등... 그래도 살아서 인터넷상으로나마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지금도 멋있는 번개탄..ㅎㅎ
잼있네....^^ 근데 한반도님....전빵이 아니라 점빵 아녀요???원래 가계로 쓰는 방을 점방(발을 : 점빵) 이라고 쓰는데.....^^
쓰댕에 뒤집어짐..ㅋㅋㅋㅋ
그땐 한글을 몰라서...어르신들이 하는 말씀이 전빵인지 점빵인지 생각은 잘 안나요....점빵이 맞겠죠^^
ㅎㅎㅎㅎ 사투리의 묘미가 여기에 또 있네요.
한반도님...ㅋㅋㅋ글을 읽다보면 나도몰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군여..무척 바뻤던 일상을 접으면서 옛추억이 생각나는 군요..
ㅎㅎㅎ 한반도님 KBS아침마당에 나올 뻔 했네요. 거기 나오는 대부분이 장터에서 터미널에서 잃어버린 후 30-40년 지나고 만나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