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살인 - 1
1972년 3월 24일.
이 날은 금요일이며,
허열이 백수웅에게 남산 야외 음악당 광장에서 일 대 일로 만나자고 제의한 날이다.
허열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산 야외 음악당을 중심으로 세 곳의 요로에 부하들을 잠복시켜 놓고,
중앙정보부 이후락 부장에게 부탁해 특등 사수를 다섯 명이나 매복시켜 놓았다.
"음악당 광장에서 오후 5시 나와 접선하는 자를 유의하라. 나의 신호가 떨어지면 사격하라.
단, 사살은 안 된다. 허벅지나 팔뚝을 사격해 쓰러뜨려라. 그가 쓰러지면 사격을 중지하라.
절대 사살 해서는 안 된다. 생포하거든 반도 호텔 수사 본부로 끌고 가라. 거기서 내가 직접 심문한다."
앰블런스는 노출될 위험이 있어 일반 승용차에 외과 의사와 간호원을 변장시켜 대기해 놓기까지 했다.
허열 자신도 이후락 정보부장으로부터 하사받은 은빛 몰트 코브라'
권총에 탄환을 장전하고 안전 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그권총을 허리춤에 꽃았다.
재빠른 그 녀석이 칼날을 목줄기에 들이댈지도 모른다.
그 때를 대비해 턱까지 올라오는 폴라를 입고,
폴라 티셔츠 목덜미 속에 얇은 강판을 둘러 넣었다.
잭 나이프 정도로는 절대 찌르지 못할 단단한 쇠붙이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다.
오전 11시에 배치를 모두 끝낸 허열이 본부로 되돌아갔다.
연락관 혼자 지키고 있는 사무실에서 햄버거로 배를 채운 다음,
정각 오후 3시 30분 지프를 몰고 남산으로 올라갔다.
공사(工事)를 이유로 남산 야외 음악당 부근은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허열이 백수웅과의 약속을 파기한 채 야외 음악당 주변을 에워 싸던 날 아침,
백수웅은 조선 호텔의 직원(객실주임)과 자신의 객실에서 무엇인가 진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도 반도 호텔이나 이 조선 호텔을 합작 운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한국 실정을 잘 모르니 자네가 좀더 자세히 설명해 보라구. 물론 자네의 장래는 보장해 주지,
내가 합작하는 호텔의 객실부장 자리 하나는 마련해 줄 테니까."
1972년, 그 당시 한국에는 재일 동포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재일 동포 간판만 달고 다니면 무슨 짓이라도 해낼 만큼,
가난했던 국민들에게는 돈 많은 실력자로 보였다.
백수웅은 이 호텔 종업원을 유혹하는 데 가장 좋은 구실거리로
'재일 동포로서 일본과 호텔 합작'을 내걸었던 것이다.
실제 그 당시 국영 기업체인 국제 관광 공사(당시 총재 金一煥:전 교통부 장관)
산하 특급 호텔들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반도 호텔, 워커힐, 조선 호텔, 타워 호텔들에 대한 민영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온양 관광 호텔, 경주 관광 호텔 등 소위 지방 호텔들은
이미 개인의 손으로 넘어간 지 오래 된 실정이었다.
자신들의 목(직장)이 어떻게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판에,
합작을 위한 선발대 실력자를 만난 이 객실 주임은 백수웅의 발이라도 핥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국제 관광 공사의 계획을,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대로 말해 주었다.
"워커힐을 인수할 업체로 KAL과 선경이 나섰구요,
반도 호텔은 롯데 그룹이 인수할 생각이라는 게 지배적입니다."
"롯데 그룹이라면 재일 동포 돈이 틀림없는데....
우린 삼성과 합작으로 조선 호텔을 생각하고 있어.
아무튼 좋아. 몇 가지만 부탁하지.
이 곳 객실 직원 유니폼 한 벌과 프런트 직원 유니폼 한 벌씩만 구해 줘.
본사에 보고할 게 있으니까. 비밀리에 가져와야 돼.
합작 준비하는 사람이 여기 투숙해 있다는 것도 비밀이고.
워커힐 총지배인과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그 외엔 날 아는 사람이 없어."
"워커힐 총지배인을 아세요?"
"알지, 신의균 씨. 관광계 원로분 아냐?"
백수웅은 자신이 파악해 놓은 관광업계 동향을 대충 말해 주었다.
종업원은 뛸 듯이 기뻐했다. 워커힐 신의균 총지배인까지 알고 있다면 틀림없는 사람이다.
그는 창고로 뛰어내려가 최근에 사직 한 직원들의 유니폼을 세 벌이나 훔쳐 백수웅에게 넘겨 주었다.
"저 잘 부탁합니다. 일본말도 제법 하거든요. 잊지 마세요. 객실 주임 김동만(金東晩)입니다. 김동만."
그는 한자로 이름까지 써서 백수웅에게 넘겨 주었다.
조선 호텔 객실 주임이 돌아갔다.
백수웅은 자신의 몸에 맞을 만한 유니폼 하나를 들고 지하 차고로 내려갔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3시 정각이다.
허열과 남산에서 만나기로 한 5시까지 두 시간이 남았다.
'틀림없이 본부는 비어 있을 것이다. 그 녀석들이 나를 당당하게 만날 이유가 없지.
다 믿어도 그들은 믿을 수 없어!'
306호 수사 본부를 습격할 작정이었다. 허 검사를 비롯한 전문요원들은 남산으로 투입될 것이다.
그 곳에는 반드시 중요한 자료가 있을 것이다.
반도 호텔은 일본인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객실 종업원 유니폼 차림의 백수웅은
반도.조선 아케이드를 가로질러 반도 호텔 로비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자신이 예측한 대로라면, 허 검사의 수사대 본부는 본부를 지키는 요원 한두 명 정도 있을 것이며,
아니면 아예 비워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벌써 3시 30분에 육박하고 있었다.
백수웅은 천천히 걸어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2층에서 3층 계단으로 오르던 백수웅이 흠칫 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리고 재빨리 허리를 굽혀 구두끈을 조여 맸다.
옆으로 건장하고 깨끗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부지런히 걸어 내려가고 있는데,
그가 바로 허 검사라는 인물이었다.
호텔 종업원 유니폼의 백수웅을 알아보지 못한 허열이,
호텔을 벗어나 지프를 몰고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허 검사가 출발하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백수웅은 그를 지켜 보고 서 있었다.
아무도 그의 뒤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정말 나와 일 대 일로 만날 계산이었나? 아닐 것이다.
그렇게 정당하게 붙을 인간이라면 서지아 같은 연약한 여자를 미끼로 삼을리 없다.
그렇다면 수사 요원들은 이미 남산을 에워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수사 본부가 비어 있다는 증거다.'
백수웅은 커다란 빈 박스 하나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발로 문을 두드렸다. 만일 누군가가 있다면 문을 열고 내다볼 것이고,
아무도 없다면 칼끝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조용했다. 백수웅이 발로 한 번 더 문을 걷어찼다.
"누구야?"
안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왔고, 잠시 후 문이 비죽이 열렸다.
"어디서 왔어?"
"대륙 상사 맞죠? 허 사장님이 이걸 여기 갖다 높으라고 하셨어요."
대륙 상사는 간판의 위장 이름이다.
"허 사장님이?"
그렇다면 이 물건은 허 검사님이 보낸 것이다. 연락관은 의심없이 백수웅을 들여보냈다.
문이 닫히고, 백수웅은 사내의 옆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허리를 굽히며 발목에서 잭 나이프를 꺼냈다.
그것은 번개 같은 동작이었다.
잭 나이프를 움켜쥐고 허리를 펴며 사내의 명치끝을 팔꿈치로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사내가 두 손으로 명치를 움켜잡으며 앞으로 허리를 꺾었다.
허리가 꺾여 숙여진 얼굴을 이번에는 무릎으로 내 질렀다.
"큭."
사내는 얼굴을 감싸안으며 고꾸라졌다. 그렇게 쓰러뜨리는 데 2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백수웅이 사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머리를 들어올렸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거칠어 보이지는 않았다. 머리 폼은 행정관 같은 냄새가 났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목에 차가운 칼끝의 감촉을 느낀 것이다.
"나, 백수웅이다."
" "
"날 잡아? 쓸데없는 짓이야."
"이, 이거 , 놔 , 이거 놓으라구!"
"이 자식, 아직 백수웅 소문을 못 들었구만. 어디 먼저 맛 좀 보실까?"
들어올린 손아귀의 시퍼런 칼날이 반원을 그렸다.
백수웅은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백수웅 손아귀에 움켜쥐었던 칼날이 연락관의 목줄기를 향해 내려왔다.
이미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허 검사나 남성우, 최일우는 지금 남산을 에워싼 채 백수웅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연락관은 지금 자신의 목줄기를 향해 칼날이 내려오고 있다. 순간적이긴 했지만.
그는 이제 자신의 운명이 여기서 끝났다는 절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칼날이 바로 코앞에서 우뚝 멈추어 선 것이다.
연락관은 두 눈을 꽉 감았다.
"눈 떠. 난 너와 죽이고 죽을 만큼 원한 산 일이 없는 사람이니까. 말하지 않아도 난 다 알지.
허 검사는 지금 남산에 있지. 다른 형사들과 함께."
"네, 네, 그렇습니다."
연락관은 정통 무인(武人)이 아니다. 상황 판단이 뛰어나고 꼼꼼한 행정가로,
허열의 신임이 두터운 법조계 인물이다. 섬약한 마음이 약점이라며 늘 그걸 걱정하던 허열이었다.
"허 검사 이름은 뭔가?"
"허, 허열입니다."
"허열? 이름이 좋구만."
서두를 이유가 없다. 적어도 두 시간의 여유가 있다. 최소한의 정보는 이 사람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허열의 배후 인물은 누구지?"
" "
"누구 백이냔 말야. 내가 알고 싶은 걸 알고 가지 못할 때 네 생명은 끝나.
엉뚱한 사람, 생명 잃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빨리 빨리 대답해.
단 한 가지, 네 대답이 거짓말로 판명될 경우,
넌 언제든 죽을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말라구."
"알. 알겠습니다."
"단, 비밀은 지켜 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정적인 기밀은 아는 것이 없다.
별것 아닌 정보로 목숨을 잃기는 싫었다.
"감, 감사합니다. 배후 인물은, 이후락 정보부장과, 노범호 청와대 경제 수석입니다."
"노범호?"
노범호!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자신이 학생 운동 시절에 가장 비난하던 인물 중 하나다.
그리고 일본 히데코가 준 정보에도 노범호는 의전 담당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정보가 아니었다. 노범호 뒤만 쫓는다면 남북 회담 장소도 알 것이다.
또 하나, 노범호가 인정하는 인물이라면 허열이 자신을 체포하는 데 앞장 서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정부 당국은 백수웅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증거다. 그는 내심 뛸 듯이 기뻤다.
"노범호란 인물이 청와대 경제 수석을 맡고 있나?"
"네, 이를테면 경제 수석 비서관이란 말이 더 정확할 겁니다."
"좋다. 허열 검사의 집은?"
"성북구에 있습니다. 도선사(현 도봉구) 입구에 있습니다."
"전화는?"
"93국에 6875입니다."
백수웅은 허열의 집 위치와 전화 번호를 자신의 컴퓨터 같은 기억력에 재빨리 입력시켰다.
"한 가지만 더 서지아 사고는 누가 지시한 거지? 그리고 여기 전화 번호는?"
"네 , 남성우의 아이디어였습니다."
백수웅은 연락관의 몸을 수색하여, 가슴 속에 감춰 둔 콜트 45구경 군용 권총을 빼들었다.
그리고 탄환을 뽑아 분리시켜 놓았다.
"정보 제공에 감사한다. 필요한 건 없지만, 한 가지 분명 히 경고할 게 있다.
만일 내가 이 시간 여기 다녀간 걸 보고하면,
나는 네 상관에게 네가 몇 가지 정보를 내게 실토했다는 걸 알려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 인생도 끝장나는 거야. 내가 여기 왔다는 걸 잊어라.
지금 이 시간부터. 나도 잊을 것이다. 네가 나를 잊는 대가로 나는 너를 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는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신고할 생각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
연락관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 일보 직전에 살아난 것이다. 그것은 정말 천행이었다.
이 침입자가 가져온 빈 박스만 치우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환원된다.
백수웅은 연락관의 권총에서 뽑아 낸 탄환을 책상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자물쇠를 잠가 버렸다.
그리고 잠가 버린 상태에서 열쇠를 부러뜨린 후 반쪽을 넘겨 주었다.
"그럼 난 간다."
백수웅은 천천히 몸을 돌려 호텔을 빠져나갔고, 얼이 빠진 연락관은
백수웅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었다.
백수웅이 호텔 객실로 되돌아가 휴식을 취하며 다음 전략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시간,
남산에서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차출된 몇 명의 특등 사수들이 일반 시민으로 위장한 채 남산 야외 음악당을 에워쌌고,
최일우.남성우 두 특수대 요원이 잠바 깃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길목을 단단히 차단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백수웅과 접선하기로 한 오후 5시가 되었다. 봄 해는 제법 길어져,
오후 5시가 되었는데도 아직 중천에 떠 있었다.
겨울 추위를 이겨 낸 싹들이 파랗게 얼굴을 내미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허열은 긴 호흡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 사내와 만날 시간이 된 것이다.
긴장을 풀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반복했지만 도무지 긴장이 풀리지가 않았다.
녀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극히 제한된 인원의 민간인들을 들여 보냈고,
그들은 배드민턴도 치고 산책도 하고 있었다. 1
0분 전 무전 통신을 이용해 배치 병력에 대한 확인도 끝냈다.
'오늘은 반드시 결판낼 것이다.'
권총도 점검하고, 목에 두른 폴라 속의 강판도 다시 매만졌다.
이제 그 악당만 나타나면 된다. 그러나 5분이 지났는데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7분이 지나면서부터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백수웅이 병력 배치를 눈치챈 것인가? 아니면 겁을 먹고 꼬리를 감춘 것일까,
지금까지 녀석의 태도로 보아 절대 두려워할 성격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
마침내 10분이 지났고, 허열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해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이 때다. 중학교 1-2학년으로 보이는 여학생 하나가 허열에게로 다가왔다.
"아저씨가 허 선생님인가요?"
"허 선생? 그런데. 왜?"
"어떤 아저씨가 이걸 전해 드리래요."
그 소녀가 단정하게 접은 쪽지 하나를 넘겨 주었다.
허열이 그걸 받아 부지런히 읽어 가기 시작했다.
메모지를 읽어가던 허열이 흥분에 들떠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개자식! 또 꼬리를 감추었어 이봐!"
갑자기 고함을 지르는 통에 여학생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어떤 아저씨가 전해 주라고 했어요. 약속이 있는데 급한 일로 못 나가니 꼭 전해 주라구요.
여기서 시계를 들여다보며 서성대고 있을 거라고 했어요. 천 원이나 받은걸요."
"알았어! 가!"
그는 메모지를 땅바닥에 버리고 구두 뒷굽으로 짓이겨 버렸다.
백수웅의 메모지가 마구 짓밟혔다.
'허 검사, 비겁하게 여자나 괴롭히더니 이번에는 또 약속을 깨고 병력을 차출시키셨군요.
나는 속이지 못합니다.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죠.'
허열은 잠복 근무자들을 철수시키고, 남성우.최일우 두 특수대원과 함께
남산을 떠나 반도 호텔 수사 본부로 돌아왔다.
본부를 지키던 연락관이 책상에 달라붙어 끙끙대고 있었다.
"허 검사님, 이제 오십니까? 녀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뭐하는 거야!"
"책상을 열다가 열쇠를 부러뜨려서요."
"자, 다들 앉으라구."
허열은 침통한 얼굴로 의자에 앉으며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연락관은 겨우 한 시간 전 이 곳에 출현했던 백수웅에 대한 보고를 하고 싶었지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목숨을 걸고 덤벼들지 못한 책임도 크려니와,
놀란 마음에 몇 가지 들려 준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넨 왜 안색이 안 좋아?"
안절부절못하는 연락관을 바라보며 허열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열쇠를 부러뜨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불길한 생각도 들고 "
"제길, 그 불길이 맞았어, 녀석이 어떻게 알았는지 꼬리를 감춰 버렸더라구.
이젠 달리 방법이 없어. 좀 유치한 방법이긴 하지만, 서지아를 희생시키자구.
2,3일 후 없애 버리고 동대문 아이들에게 뒤집어씌우면 녀석은 반드시 나타나.
그러지 않고서는 녀석을 찾아 낼 방법이 없어."
"서지아를요? 진작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년을 어디가서 찾죠?"
"머지않아 바를 정리하겠지. 그 여자는 곧 나타나. 집이나 스타 바를 철저히 감시하라구."
달리는 방법이 없다. 한번 사라지면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그 동안 청량리 경찰서와 양동 쪽의 남대문 경찰서에 지시해 수 차례나 불심 검문을 해 보았지만,
걸려든 녀석들 중에 백수웅은 없었다.
"종삼(종로 3가 사창가를 말함)도 더 알아보고, 천호동 우범지대도 소홀히 해서는 안 돼.
녀석은 틀림없이 그런 곳에 잠입해 있을 거야."
허열은 백수웅에게 속고 있었다.
양동 창녀촌의 무허가 하숙집에 은신해 있던 그가 하루아침에 조선 호텔의 고객으로,
그것도 특실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음 날 아침, 백수웅은 조선 호텔에서 철수해
우이동 새 명물로 등장한 그린파크 호텔로 옮아 가 버렸다.
도선사 입구 허열의 집을 습격하거나 가족들을 찾아 협박해
노범호의 집이나 위치를 파악할 작정이었고, 그것은 허열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그는 남성우를 먼저 없애 버릴 것을 굳게 맹세하고 있었다.
은신처로서의 그린파크는 너무나 훌륭했다. 뒤로는 북한산 줄기로 이어지는 빽빽한 숲이 있고,
바로 앞에는 허열의 본가가 있다.
몸을 숨기기도 좋고, 급한 경우 도주하기도 좋았다.
백수웅의 훌륭한 무기인 오토바이는 커버를 뒤집어씌운 채
아직 개장하지 않은 수영장 창고 옆에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
오후 2시에 체크 인하여 두 시간 동안 작업을 끝낸 후 호텔 주위를 샅샅이 조사하여
여러 가지 여건들을 살펴보고 도주로들을 익혀 놓았다.
아직은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숲길을 가로질러 도선사 입구 주택가로 들어섰다.
초라한 함석집과 기와집들이 늘어 선 제법 큰 골목길 한가운데 대저택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도선사 입구에서 3백 미터 정도 전방에 있었는데, 얼핏 보아도 대지가 3백여 평은 되어 보였다.
짙은 갈색 벽돌로 지은 양옥이었는데, 서울에서도 보기 드문 현대식의 주택이었고,
재료 하나하나가 모두 고급 제품으로 되어 있었다.
문 앞에는 흰 대리석을 쪼아 만든 문패가 있었는데,
거기에 검은 글씨로 '허열, 이라는 이름이 크게 씌어 있었다.
첫댓글 백수웅의 계획은 주도면밀하군....저런 사람을 허열이 감당할수 있을까?
허열집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글 올려주시느라 고생하셔습니다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마누라하고 ㅎㅎㅎ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