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명숙의 동(動)은 곧 천하의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 전명숙은 내 세상의 앞길을 열었느니라. (증산도 道典 2:31)
*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말이 옳도다. 전명숙은 진실로 만고명장이라. 백의한사(白衣寒士)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339)
- 해석: 일개 이름없는 선비였던 전봉준(전명숙)장군이 일으킨 갑오동학혁명으로 인해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이는 결국 러일전쟁으로 번진다. 이게 발단이 되어 서구열강들을 동양에서 몰아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
조선을 둘러싸고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서양(영-미-독-프-러)으로 번져 1,2차 세계대전이 되었고, 서구열강으로부터 신음하던 전세계의 약소민족 국가들이 일제히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있다.
러일전쟁을 제대로 알아보자
1. 정의: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
2. 역사적 배경
청일전쟁 결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이 요동반도(遼東半島) 영유를 확정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러·청비밀동맹을 체결함과 아울러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를 계기로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25년간 조차, 만주를 세력권화하려 하였다. 한국에서도 을미사변 이후 4개월 만에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친러정권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일본과의 타협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북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란(義和團亂)이 만주로 파급되자(1900),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만주를 무력 점령하고, 난이 진압된 뒤에도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영일동맹론과 러일협상론으로 대응 방안이 갈렸으나, 결국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도리어 봉천성(奉天省) 남부와 길림성(吉林省) 전역을 점령하였다. 이들은 이처럼 만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압록강 유역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뒤 압록강삼림채벌권 실행을 명목으로 용암포(龍巖浦)를 군사기지화함으로써 한국에 대해서까지 야욕을 노골화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어 8월 여순에 극동총독부가 신설되는 등 대일적극정책이 전개되었다. 일본의 북진정책,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그 책임을 돌리는 견해와 함께 러일전쟁의 원인의 하나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로 돌리려는 독일외교를 비롯한 국제 역학 관계와, 러시아 자국 내 혁명이 우려되던 위기를 대외 문제로 희석시키려 했던 차르(tzar)의 계략이 전쟁의 추가 원인이다.
1903년 8월부터 개전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여러 차례 만주와 한국 문제에 관하여 공식적인 교섭을 가졌다. 일본의 기본입장은 한국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하는 대신,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월권은 인정(만한교환론 滿韓交換論)하되, 기회균등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자국의 만주독점권과 아울러 중립지대(한국의 39° 이북) 설정 및 한국령의 전략적 사용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도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함으로써 양자의 타협 여지는 거의 없었다. 1904년 1월 일본의 어전회의에서는 개전론이 유력하였고, 최후 제안에 대한 러시아의 회답이 알려지기도 전인 2월 임시각의를 통해 개전이 결정되었다.
3. 경과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밤 여순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9일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군함을 격침시킨 다음날인 10일에야 선전을 포고하였다. 여순 봉쇄에 성공한 도고(東鄕平八郞: 도고헤이아치로, 이 사람이 가장 존경한 분이 이순신 장군임. 진해항에서 이순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 발틱함대를 물리침)함대는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고,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진한 제1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였다.
6월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총병력이 15개 사단에 이른 일본군은 9월에 요양(遼陽)을 점령하였다.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하였다. 일본군은 이어 3월의 봉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육전을 사실상 마무리지었다.
양측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 일본: 전시 약 120만 명 중 사상자는 68만 9000명(전사자 13만 5000명)이었다. 일본군은 3개 보병단과 13개 예비여단으로 이루어졌고, 해군은 전함 7척, 무장순양함 8척, 경순양함 17척, 구축함 19척, 어뢰정 28척, 포함 11척을 보유하였다.
* 러시아: 개전 직전 러시아 극동군의 배치 상황은 정규군 9만 8000명과 총 148정, 기관총 8대였다. 만주로 이동한 120만의 병력은 대부분 이미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05년에 이동한 것으로, 총 40여 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대부분의 함정이 요동반도의 여순에 기항하고 있던 러시아 극동해군은 전함 7척, 무장순양함 4척, 어뢰정 37척, 포함 7척으로 이루어졌다. |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 역시 지탱할 여력이 없어졌다. 일본은 재정면에서 1년간의 전비를 4억 5000만 원 정도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2년 동안 19억 원을 지출하였다. 또, 전선의 확대로 보급로가 길어져 전술상의 취약점이 노출됨으로써 러시아의 주력부대가 하얼빈에 집결, 반격할 기회를 노리는 형세였다.
봉천전투 이래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전력을 상실, 종전을 서둘러야만 할 입장이었다. 1905년 국내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러시아 역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양국 사이에는 이제 강화가 불가피한 형편이 되었다. 이에 일본은 결정적인 승기(勝機)를 잡은 뒤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전투가 바로 북유럽 발트해의 리바우(Libau)항을 떠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오느라 전력과 전의가 극도로 떨어진 발틱함대와의 대마도해전(對馬島海戰)이었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4시 45분, 진해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의 도고 사령관은 24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발틱함대를 격파,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Rozhestvensky,Z.P.) 제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러시아 육군은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고, 보급도 비교적 원활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포츠머스강화회의에서 러시아측 대표 위테가 패전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은 이 때문이다.
4. 결과
러시아와의 대결에 있어 일본을 적극 지원한 세력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이 점에서 구 소련학자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한 영국과 미국의 전쟁을 일본이 대리로 수행했다고 주장하였다.
1904년 4월과 1905년 5월 사이에 영·미가 네 차례에 걸쳐 일본에게 제공한 총 4억 1000만 달러의 차관 중 약 40%가 일본의 전비로 충당되었다. 특히, 영국은 동맹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영국은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으나, 러시아에 대한 제3국의 석탄공급 및 원조제공을 저지하는 등 일본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면 중립을 지키겠다고 공언했던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루스벨트(Roosevelt, T.) 미국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가 만일 삼국간섭 당시처럼 일본에 간섭할 경우, 즉각 일본편에 가담하겠다고 공언하였다. 또한 당사국인 러·일에 대해서는 전쟁의 범위를 확대시키지 말며, 북중국을 포함한 전중국의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기득권을 부정하였다. 또한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만주를 빼앗으려 하면서, 일본으로부터는 한국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였다. 한편,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스는 전쟁으로 인한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프랑스는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중립을 선언하고 그러나 프랑스로서는 발틱함대에 대한 석탄공급 등 동맹국으로서의 편의제공은 불가피하였다.
이에 반해,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아시아로 돌리고자 노력했던 독일은 러시아가 ‘극동에서 공격받을 경우 독일의 지원을 기대해도 좋다는 뜻을 1903년 7월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러시아에게 암시하였다. 그러면서도 1904년 1월 일본 쪽에는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통보했으며, 실제로 개전과 더불어 중립을 표방하였다. 독일의 이러한 태도가 러일전쟁을 부추긴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더욱이, 발틱함대에 대한 독일의 노골적인 대러시아 지지 등은 열강의 불신을 가중시켰다.
결국, 러일전쟁은 영·불협상과 영·러협상을 맺게 하여 대독일포위망(對獨包圍網)을 구축, 마침내 제1차세계대전에 이르는 과도적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된 셈이었다.
대마도해전 직후 일본은 미국에 중재를 의뢰했고, 국제정세도 전쟁을 끝낼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대항을 위해 러시아 군사력이 약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미국 역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강자로 전면에 나서는 것을 위험시하였다.
이에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열강은 제각기 종전 이전에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해 두려고 하였는데,태프트·가쓰라(Taft·桂)밀약 등이 모두 그러한 연장선상에 나온 것들이다. 러·일 양국은 1905년 6월 8일과 10일 각각 루스벨트의 평화제의를 수락했고, 미국은 12일자로 강화를 알선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러-일 간 포츠머스 강화조약)
회담장소 선정과 전권대표 선임에 양측 모두 곤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7월 7일 사할린상륙을 결행, 러시아를 강압하였다. 이런 위협으로 인해 강화교섭은 일본이 러시아에 제한 12개 강화안을 토대로 진행되었다. 양측은 한국에서의 일본의 가장 우월한(paramount) 이익 보유, 요동반도 조차권, 장춘(長春)~여순(旅順) 간의 동청철도 및 그 지선의 양도 문제 등은 쉽게 합의하였다. (그러나 사할린과 쿠릴열도 등에서는 쉽게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였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러일 간의 불씨) 이후 미국의 중재로 성립된 것이 포츠머스강화조약이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남만주에서 일본이 지배권을 확립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한 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얻지 못한 것을 청나라로부터 보상받으려고 하였다.
영·미가 일본을 지원한 이유가 동북아시아에서 러·일 양국의 상호견제를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일본으로 하여금 막자는 데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직후 일본이 비밀리에 체결한 청나라를 압박하여 체결한 만주진출 조약(청일조약)과 일방적인 만주점령은 즉각 영·미의 제재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은 다시 러시아와의 직접 교섭의 길을 택하였는데, 그것이 1907년에 체결된 러일협상이다. 패전으로 동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이 저지된 러시아는 그 진출 방향을 중앙아시아와 발칸 지역으로 전환하였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1907년 영국과의 협상으로 타협을 보았으나, 열강의 이해가 쉽게 조정될 수 없었던 발칸반도로의 팽창은 분쟁의 소지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은 결국 동아시아정세를 크게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세계대전으로 가는 세력구도의 형성을 촉진시킨 셈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상제님께서 러시아를 물리치지 않으셨다면???
* 상제님께서 김병욱에게 물으시기를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의 허약함을 틈타 서로 세력 다툼을 하는데
조정에서는 당파가 나뉘어 누구는 일본과 친선하려 하고 누구는 러시아와 결탁하려 하니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하시니
병욱이 대답하기를 “인종의 차별과 동서양의 구별이 있으니 일본과 친선하고 러시아를 멀리함이 옳겠습니다.” 하거늘 (중략~)
또 말씀하시기를 “일러전쟁을 붙여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물리치려 하노라.” 하시니
성도들이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서로 이르기를 “약소한 일본을 도와 천하에 막강한 러시아를 물리친다 하심은 터무니없는 말씀이라.” 하더라. (증산도 道典 5:50)
러시아는 공(功)과 있고 과(過)도 있는 나라입니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였고 남북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면이 있어서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일방적으로 ‘나쁘다’라고 한 칼에 단정 지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 민족이 처음 시작한 지역은 유럽 동쪽 내륙의 추운 곳이었습니다. 보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남하할 수밖에 없었던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족속들과 싸우며 그들의 땅을 침범해야했고 결국 큰 척을 짓게 된 것입니다. 그 분쟁지역이 하필 부동항이 있는 흑해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고요. 물론 서북쪽의 발트해로 진출하기 위해 핀란드, 스웨덴과도 전쟁을 벌입니다.
러시아의 바다를 향한 집념(부동항을 갖고자 하는 열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서구열강들이 버티고 있는 서쪽 대신에 동쪽으로 눈을 돌려서 시베리아는 물론 북미의 알라스카까지 나아가죠. 이런 노력에 의해 결국 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한반도와 국경을 마주하고 연해주와 만주까지 손에 넣게 됩니다. 이런 러시아에 파상공세에 불만과 두려움을 느낀 일본은 결국 전쟁의 길을 택하죠. 러시아의 집념과 일본의 야욕이 만난 지점이 조선이었습니다.
(러일전쟁 직전의 청-러-일의 모습. 조선을 낚고 있다)
영-프-독-미 등 다른 서구열강들은 한반도에 관심이 없었을까요? 다른 서구열강들은 조그마한 한반도보다 중국대륙을 먹느라 바쁜 상태였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열강들은 드넓은 식민지가 필요했습니다. 급증한 생산력으로 더 많은 물건을 팔고 얻을게 많은 인구와 땅이 필요했습니다. 그결과 지도에서 마지막 남은 극동의 중국대륙이 탐났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파이를 러시아에게 나누어 주기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를 끝까지 대륙 안에 묶어두길 원합니다(그래서 당시 최강대국인 영국은 일본편을 듭니다. 영-일동맹).
* 과연 일러전쟁이 일어나더니 일본 군사가 승세를 타고 해륙전에서 연속하여 러시아를 물리치니라. (증산도 道典 5:53)
부동항을 얻기위해 남하해야만 하는 러시아에게 있어서 만주와 한반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서 보듯) 염원과 같은 것이고, 명치유신으로 급속히 개화한 일본은 열강의 반열에 올라 서기 위해서는 교두보 건설이 당면 과제였습니다. 엎어지면 코가 닿는 조선을 말하는 겁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게 패망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후예들이 드디어 권토중래할 수 있는, 천 년동안 와신상담했던 한반도를 다시 차지할 수 있는 힘을 드디어 얻게 된 거죠. 임진왜란 때 접었던 꿈을 드디어 다시 실행할 수 있는 천운이 되돌아 온 것입니다. 러시아와 일본에게 조선은 필사적으로 싸울 수 밖에 없는 숙명의 장소와 같은 것이죠. 하지만 이들 두 나라의 국력차이는 너무 컸습니다.
표트르대제 때부터 서양을 롤모델로 삼아 급성장하며 힘을 길러온 러시아와 이제 막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100년 가까운 격차가 벌어져 있었죠. 이런 차이는 스포츠에서도 보듯 의지만으로 단숨에 극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력, 군사력, 기술력, 정치력 등등 모두 것들이 골고루 갖추어져야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일본국의 문신과 무신에게 천하통일지기와 일월대명지기를 붙여주고 그리고 심지어 신풍(神風- 카미가제)을 불리고(만주에서의 싸움), 꿈에선 계시를 주어(발틱함대와의 싸움) 약한 일본이 결국 러시아를 몰아내게 만드신 겁니다.
* 내가 이제 일본을 도와 잠시 천하통일(天下統一)의 기운과
일월대명(日月大明)의 기운을 붙여 주어 천하에 역사를 하게 하리라.
(증산도 道典 5:177)
* 近日日本國文神武神이 竝務道統이니라
근일일본국문신무신 병무도통
근일 일본의 문신과 무신들이
모두 도를 받아 문명을 여는 데 힘쓰고 있느니라. (증산도 道典 5:347:15)
우리 입장에서는 러시아든 일본이든 나라가 먹힌다는 건 매우 기분 나쁜 일이지만 국운이 다하여 어쩔 수 없다면, 기왕 인종과 혈통 역사와 문화를 교류한 나라 그리고 언젠가는 되찾아 올 가능성이 높은 나라가 훨씬 나을 겁니다. 또한 500년 동안 유교에 썩어빠진 구태의연한 정신을 단박에 부수어 버리고, 자주독립 의지와 꺼져가는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줄 (반면교사의) 나라는, 임진왜란 때 다 풀지 못한 원한이 아직도 남아있는 일본 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후 좁은 반도로 찌그러 들어와 도무지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던 민족성을, 일본을 통해 (중화사상을 벗게 만들고) 전세계가 돌아가는 안목과 새로운 문물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어 버리자는 상제님의 전략인 셈이죠.
(중국을 먹기 위해 영-독-러-프-일이 경쟁하고 있는 모습. 노회한 중국의 공허한 외침)
서구열강들의 통치력과 군사력으로 본다면 조선은 그냥 중국 옆에 붙어있는 조그만 땅따먹기 정도 밖에 안되는 보너스 상품인 거죠. 중국을 먹은 다음에 딸려오는 게 조선인데, 상제님의 천지공사로 일본이 예상외로 강력한 러시아를 물리치는 강인한 무력을 선보였고, 곧이어 터진 유럽내의 1,2차 세계대전 때문에 더이상 동양의 약소국들에게 마수를 뻗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 조선의 대신명(大神明)을 서양으로 보내 큰 난리를 일으켜 선천의 악폐(惡弊)와 상극의 기세를 속히 거두어서 선경세계를 건설하리니~ (증산도 道典 2:58)
지금의 우수한 선진문화를 가진 서양을 보면서 당시의 서구열강을 대입하면 안됩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전통에 속박되어 살아온 약소국 입장에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절대적인 군사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들로 여겨졌을 겁니다. (물론 4차원의 신도세계로 보면 맞는 말이지만) 서구열강에게 약소국의 반항이란 것은 꿈에서도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죠.
*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역별로 동양에 붙여 두면 다시 올 날이 있으리라. 그러나 만약 서양으로 가면 다시 올 날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164)
* “이 공사의 결정으로 인하여 천하의 모든 약소민족도 조선과 같이 제 나라 일은 제가 주장하게 되리라.” (증산도 道典 5:177)
작은 반항이라도 할라치면 집단 린치를 당하여 죽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작은 섬나라인 영국이 수십 배나 넓은 인도를 지배하고 아랍권은 물론 아프리카와 호주 캐나다를 비롯하여 전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죠. 아예 아메리카 대륙은 (반항하다가) 인종과 문명의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天이 以造化로 與吾道하여 以制西人之惡하니라
천 이조화 여오도 이제서인지악
하늘이 조화를 나의 도에 주어
서양 사람의 악행을 제어하느니라. (증산도 道典 4:10)
당시의 서양은 약소국에게는 거의 악마와 같은 존재였겠죠. 어쨌든 다행히 동양의 약소국들은 정체성을 영원히 잃어버리기 전에 다시 소생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진 상제님께서 일본을 쓰신 이유이고 일본의 공덕일진대, 왜놈들의 심성이란게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좋게 할 수도 있는데 너무 잔인하고 이기적인 방법과 반성없는 행태를 보임으로써 그때에 쌓았던 공덕을 고사하고 죄만 더 짓게 되는 형국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 일본에게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어질 인(仁) 자라. 만일 어질 인 자까지 붙여 주면 천하는 다 저희들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증산도 道典 5:177)
지구상에 많은 강대국들이 있었지만 러시아는 (문화적 역량을 빼고) 스케일과 근성만큼은 그리스와 로마제국을 넘어섰고, 몽골 영국 미국과 비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무섭고 강력한 러시아를 물리치기 위해 상제님께서는 갓 개화를 시작한 작은 섬나라 일본에게 기운을 붙여 물리치게 하셨으니...
만일 110년 전 조선말에 친러파가 득세하고 러시아에게 우리나라가 먹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꿈에도 그리던 부동항을 얻은 전투민족 러시아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대규모로 그리고 꾸준히 자국민들을 이주시켰을 거고, 이와 같은 방법으로 조선인들은 추방되었겠죠. 조선반도는 러시아 경제와 군사의 최전방이자 동방정책의 중심지가 되는 거죠
(=> 독일을 점령한 소련군의 모습)
러시아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가진 국가이고 과거 사례를 보더라도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민족의 이주정책은 일도 아닐 겁니다. 그 결과 지금의 크림반도보다 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 있을 테고, 조선국과 백성은 영원히 러시아에게 흡수되어 버리고 흔적만 남아 있을 겁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후덜덜 합니다. 심한 비약이라고요? 아닙니다. 러시아의 역사를 보면 부동항을 향한 그들의 집념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장난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