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교회의 박해
사도행전 12:1-10
예루살렘교회가 성령 충만함으로 크게 부흥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교회가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므로 예루살렘교회는 흩어졌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울은 흩어진 성도들까지 잡아 가두고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복음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안디옥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하였고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목회를 하므로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11:26).
1절에 “그 때에”란 큰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므로 안디옥교회가 부조를 보내고 할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 교회에 몇 사람을 죽이려고 한 것을 말합니다. 예루살렘교회가 흩어지므로 핍박이 잠시 주춤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치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헤롯이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한 것 입니다.
헤롯이 교회를 핍박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교회를 박해한 것 입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조용하는 것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므로 예루살렘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 헤롯은 로마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교회를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재판도 죄목도 없이 무조건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야고보를 죽이니까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를 죽이니까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를 죽이면 유대인들이 더 좋아 할 것으로 생각하고 베드로를 체포했습니다. 2절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헤롯의 교회 박해는 본격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것을 보고’라는 말의 원문은 ‘만족하는 것을 보고’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의 죽음을 보고 유대인들이 기뻐 만족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아주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기독교가 존재하는 한 자기들의 종교, 유대교는 죽은 종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행하고 있는 한 자기들은 무능한 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기뻐하고 만족했던 것입니다. 헤롯은 베드로를 죽이려고 했지만 ‘무교절’이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로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절기이므로 죄수를 석방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쳐서 바라바가 석방되었습니다(요8:40). 그래서 무교절이 지나서 베드로를 죽이려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천사가 와서 베드로를 석방시켰습니다.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석방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째서 하나님께서 야고보는 죽도록 내 버려두시고 베드로는 천사를 보내어 석방을 시키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해대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제자인데 야고보가 죽을 때에는 내버려두시고, 베드로는 잡히니까 당장 천사를 감옥에까지 보내시어 탈옥시키신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실 때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요샛말로 청탁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하시니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요20:22).
누가 대답을 했다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는 없어나 아마도 야고보가 ‘내가 마시겠다’고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잔’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포도주 잔이 아닙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십자가의 죽음인 줄을 모르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야고보가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말에 씨가 있다’는 옛 말처럼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제가 마시겠다’ 라고 대답한 대로 야고보가 순교를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야고보의 죽음은 단순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야고보는 죽임을 당해도 내버려 두시고 베드로는 천사를 보내어 탈옥을 시켜 죽지 않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목 베여 죽을 때에는 못 보신 것처럼 하시더니, 베드로가 잡혀 옥에 갇히니까 밤중에 천사를 보내시어 탈옥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어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 잡던 제자들에게 찾아 오셔서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18).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순교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요한도 순교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다 순교를 했지만 요한만은 순교를 하지 않고 자연사를 했습니다.
야고보는 일찍 죽도록 내버려 두시고 베드로는 옥에 갇히자마자 천사를 보내어 죽지 않도록 해 주었다고 해서 야고보는 훌륭하지 않고 베드로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리고 베드로는 영광을 돌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선하고 착한 사람이 일찍 죽고, 악하고 나쁜 짓을 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보고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보면 야고보 보다도 베드로가 더 많은 실수를 하였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까지 했습니다. 야고보는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베드로는 좀 더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했을 뿐입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곧 바로 천사를 보내서 탈옥을 시켜 살려주었지만, 훗날에는 로마 옥에 갇혀도 천사를 보내시지도 않았습니다.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높은 선교적인 섭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감옥 안에 들어가게도 하실 수도 있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을 나오게도 하실 수도 있습니다. 매를 맞게도 하시고 순교를 당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다가 잡혀 감옥에 갇혀 매를 맞을 때, 때리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하시든지 때리는 막데기를 부러지게 하시던가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좋아하겠지요.
예수님이 잡혀 매를 맞아도, 십자가에 달리셔도 하나님은 가만히 두셨습니다. 사람들이 ‘뛰어 내리라, 뛰어 내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조롱하고 저주를 했지만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있어도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비웃음과 저주를 받으시고 조용히 죽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야고보의 죽음, 그 속에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은 엄청난 사건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시안적으로 사건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대 로마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드신 것입니다. 핍박과 고난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고난을 선교적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핍박과 고난을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신앙적으로 감수하고 신앙적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 신앙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야고보나 베드로가 당했던 사건과 같은 것이 아니라도 우리가 당하는 작은 사건까지도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 속에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혀 두 군사 틈에서 잠자고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6). 야고보가 목 베임을 당한 것을 알고 감옥에 갇혔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잠이 올 것 같습니까?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는 보초가 지키고 두 간수가 양 옆에 같이 쇠사슬에 묶어 있는데 잠을 잘 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잠을 잘 수 있는 이 평화, 이 평안함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볼 수가 있습니다.
5절에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에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옥에 갇힌 베드로는 편안히 잠을 자더라, 는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가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밖으로 이끌어 내었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기도했더니 베드로가 편안히 자더라’ 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감옥에서 베드로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그 평안에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평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날이 새면 죽을 수 있는 절박한 밤중에 쇠사슬에 묶여 있는 베드로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다는 이것이야 말로 peace, 그야말로 샬롬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평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바다가 고요한 것은 평안이 아닙니다. 바람이 불면 곧 바로 깨어지는 불안한 평안입니다. 바람이 불고 광풍이 일어나도 평안함이 참된 평안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새록 새록 자는 것처럼 주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시고 잠자는 베드로를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했다’(9)고 말씀합니다. 꼭 꿈을 꾸는 것 같이, 그러나 환상도 꿈도 아닌 실제로 감옥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감옥 밖에 나온 뒤에야 정신이 들어 참으로 주께서 천사를 보내 신줄 알았다고 합니다(11).
옥에 갇힌 베드로가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탈옥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탈옥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생각지도 않았고 그렇게 되기를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옥 밖에 나와 있습니다. 비로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헤롯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께 감사를 하였습니다(11).
베드로는 아무 까닭없이 잡혀 옥에 갇혀 죽게 되었지만 조금도 억울함이나 자신의 불행을 위해 하나님께 호소하거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안히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잠자는 베드로를 깨워 이끌어 냈습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어떤 억울함이나 피해를 당했을 지라도 당황하지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불안해야 할 때 평안함이 참 평안 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기다리면 그 다음에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 입니다. 그럴 때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놀라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원하지도, 기도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일을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잠을 잘 수 있는 평안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