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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유덕면(有德面) 죽기동(竹基洞)에서 태어났다. 1877년경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 푸틸롭카 마을(한국명 육성촌)로 이주하였다. 장성한 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러시아 군대의 납품업자로 큰 재산을 모았다.
러시아 연해주의 원호인(元戶人, 귀화 한인) 재력가로 교육과 언론 활동에 뛰어들었다. 1908년 최봉준(崔鳳俊)·김학만(金學滿) 등이 이포에 설립한 명동학교의 찬성원으로 참가하여 활동했으며, 수이푼(秋風) 시넬니코보(영안평 · 대전재)에 설립한 동흥학교에도 많은 금액을 의연하였다. 『해조신문』의 연락원으로 수이푼 푸틸롭카·크로우놉카(황거우)·코르사콥카(허커우)로 발송하는 신문을 받아서 배포하였다. 1908년 5월 일제의 탄압으로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유진률(兪鎭律), 차석보(車錫甫) 등과 함께 『대동공보』 발간에 주력하여 8월 15일 제1차 발기인 총회에 참가하였다.
1911년 12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勸業會)가 조직되어 의장에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 이종호(李鍾浩)가 선임되었다. 권업회는 경술국치 이후 연해주 한인 사회의 민족운동가들이 보다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구상하는 가운데 조직되었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권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끝내는 조국 독립을 달성하려는데 있었다. 권업회는 언론과 교육 활동에 주력하여 1912년 4월 『권업신문』을 창간하고, 3월에는 한민회와 공동으로 신한촌에 한민학교 교사를 크게 신축하여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권업회는 중앙 조직을 완비한 뒤, 우수리스크·하바롭스크·니콜라예프스크·이만 등 연해주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1913년 6월 30일 권업회 하반기 정기 총회에 우수리스크지회의 대표자로 참석했다. 1914년 1월에는 우수리스크지회의 의원 겸 교육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몰두하던 이갑(李甲)이 병으로 드러눕게 되자 1913년 12월 25일 최재형(崔在亨)·이상설·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이갑씨 신병 치료비 의연 청구’를 발기하였다. 한인이 러시아로 이주한 지 50주년을 맞아 준비되었던 ‘한인 아령 이주 50년 기념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며, 1924년 3월 28일 지방 대표원회에 참석하여 100원을 의연하였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의 자치적 대표 기관을 창설하고자 소집된 회의에 최재형 등과 함께 9명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6월 3일부터 12일까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대회는 원호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라는 상설적 중앙 기관을 조직하였다. 대회는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의 기관지로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청구신보(靑丘新報)』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신보(韓人新報)』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최봉준·전 보리스 등과 함께 『청구신보』의 창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난 후 1918년 6월 13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지방 대표와 각 단체 대표 1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2차 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회는 원호인과 여호인(비귀화 한인)의 대부 격인 최재형과 이동휘를 명예 회장으로 추대하고,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였다. 1919년 초 파리강화회의의 대표로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을 파견하였다.
1919년 2월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명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조소앙이 기초한 선언서에는 사기와 강박으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병합은 무효이며 육탄 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같은 해 2월 상하이 신한혁명당의 파견으로 여운형이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건너오자,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 자금 조달, 독립운동의 중앙 기관 수립 문제 등에 관해 논의하였다. 여운형·이동녕·조완구 등은 독립운동의 중앙 기관의 위치를 외교 활동을 위해 국제도시인 상하이(上海)에 둘 것을 주장한데 대해, 남공선·김립 등과 함께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수십만 동포가 살고 있는 러시아 지역이 적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1919년 2월 25일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러시아령과 간도 및 국내 대표들이 참여하여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전로국내조선인대회(全露國內朝鮮人大會)’가 개최되었다. 대회에서 김치보·김하석·장기영·김진과 함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조직을 발기하여,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하는 형식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였고 대한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부의장에는 김철훈, 서기에는 오창환이 선출되고, 선전(宣戰)·재무·내무·외무 등의 집행부를 구성하고 간부들을 선임하였다.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발표함으로써 대한국민의회의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국내외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국민의회 의장으로서 1919년 3월 17일 오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시내 코르사콥카 거리에 있는 동흥소학교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대와 러시아 군대가 출동하여 해산되었다. 같은 날 오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독립 선언과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오후 3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영사관을 비롯하여 각국 영사관과 러시아 관공서에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다. 오후 4시부터는 신한촌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한 채 만세를 제창하였으며,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들어가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던 중 어둠이 내려 용모를 식별하기 힘든 틈을 타 자동차 3대와 마차 2대를 이용하여 시내에서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다음날인 3월 18일에는 한인 노동자들이 대한국민의회의 명령에 따라 총파업을 단행하고 신한촌에 집결하였다. 3월 17일에는 스파스크에서 5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21일에는 라즈돌리노예에서 3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당지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려는 기미가 보여 러시아 민병이 출동, 해산시키기도 하였다. 남부 우수리주 얀치헤와 포시예트 그리고 하바롭스크 등지에서도 수백 명의 한인들이 집결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만세운동 이후 1919년 4월 11일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국무총리 이승만을 행정 수반으로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교통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 각료 중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사는 군무총장 이동휘와 재무총장 최재형을 포함해 3명이었다.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대외적으로 실질적 정부로서 기능하기 위해 통합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양자 사이에 통합을 위한 교섭이 시작되었다. 1919년 4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대한국민의회 의원 총회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임시정부를 ‘잠정 승인’하되 그 정부가 러시아령으로 이전할 때까지 완전한 협력을 보류하고 임시정부의 노령으로의 이전은 일본군의 완전 철수 후에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전권교섭위원으로 원세훈(元世勳)을 상하이로 파견하였다. 원세훈은 5월 7일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위치를 둘러싸고 비타협적 논쟁이 계속되었다.
양측의 완강한 비타협적 입장은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해 4월 23일 13도 대표들이 서명한 임시 헌법과 각료 명단을 발표하며 조직된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총재에 이동휘가 선임되었다. 임시정부에 이어 한성정부에서도 국내외의 연결 등을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인 교통총장에 선임되었다. 한성정부는 대한국민의회나 임시정부에 비해 국내에서 13도 대표들에 의해 서명되었다는 점에서 권위나 ‘법통성’에서 우위에 있었다. 8월 초 대한국민의회와 임시정부는 자신들의 정부를 일체 해소하고, 한성정부를 봉대(奉戴)하며 임시정부의 위치는 상하이에 두기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5개 항의 통일안 마련에 성공하였다. 임시정부는 현순(玄楯)과 김성겸(金聖謙)을 전권 위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하였다.
8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대한국민의회 상설 의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에서 한성정부를 유일한 법통 정부로 봉대하기로 한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대한국민의회의 해산을 선포하였다.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총장에 취임하기 위해 상하이로 옮겨갔다. 10월 20일경 상하이에 도착했으나 임시정부 측이 약속대로 정부를 해산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입장임을 확인하고, 임시정부 측의 개조 조치에 대한 항의 표시로 내각 취임을 거절했다. ‘승인 · 개조 분쟁’이었다. 함께 상하이로 갔던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하는 것을 비판하고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박용만, 신채호 등 반임시정부 인사들과 만나 제휴 방안을 논의하였다.
1920년 4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하지만 4월 4-5일, 연해주의 일본군이 러시아 적군과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급습한 연해주 4월 참변으로 연해주에서 항일 운동이 어려워지자, 이전 대한국민의회 관계자 20여 명과 함께 아무르주 블라고베시첸스크로 옮겨가서 대한국민의회를 복설하였다. 대한국민의회가 아무르주로 이동해 오자 아무르주 한인의회는 대한국민의회 봉대를 선언하고, 한인 군대를 대한국민의회에 인도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아무르주 한인의회의 기능과 권위를 흡수하고, 기관지 『자유보』(주필 오창환)를 발간하였다. 한인군대의 확대를 위하여 18세에서 35세에 이르는 아무르주의 한인 장정들에 대한 「징집령」을 내렸다. 아무르주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일본군과 백위파가 지배하고 있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니콜스크-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스파스크 등지에 비밀 지부를 조직하였다. 또한 이르쿠츠크공산당 고려부 위원인 김철훈(金哲勳)과도 연락을 확보하여 김철훈을 지부장으로 하는 이르쿠츠크지부를 설치하였다. 9월 15일 러시아 내 한인들의 합법적 통일 기관임을 천명함과 동시에 “노농(勞農) 러시아가 밟아온 길을 따를” 것임을 표명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방향 전환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1923년 6월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창조파에 속해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창조파로 구성된 국민위원회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오자 이들과 함께 노농신조선국(勞農新朝鮮國) 설립을 계획하였다.
1927년 12월 개최된 소련 공산당 15차 대회에서 농업 집단화와 새 기술에 기반을 둔 대규모 사회주의 농업 생산(집단화)으로의 전환이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1928~30년에 걸쳐 반우파 투쟁이 전개되었다. 연해주 지방에서의 반우파 투쟁과 전면적인 집단화는 1929년 말부터 급속히 진행되었는데, 한인 사회에서는 토호로 불린 부호 원호인들이 주요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1929년 제9차 원동 변경 당대회에서 반토호 투쟁이 결정되었을 때, 염하익 등과 함께 토호로 몰려 추방되었다.
최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4년 10월 상하이에서 일제가 보낸 첩자에게 독살당했다는 설과 1938년 러시아에서 옥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무부장 조소앙의 이름으로 소련에 수감되어 있는 재러 한인 지도자 57명의 명단과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한을 소련 타스통신사 주중 특파원에게 보냈는데, 여기에 그의 이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오인(吾人)은 2천만의 조선국민의 명(名)의 하에 그 완전한 주권이 하등의 제한 없이 부흥될 것을 요구하고, 그 모국(母國)에서의 독립과 주권과 재보(財寶)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선생이 러시아 니코리스크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 중에서
1919년 4월 17일 재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불령 조선인의 동정에 관한 건>을 보면, 문창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조선인 사이에서는 문창범을 대통령이라 부르고, 김하석을 총사령관이라 부르고 있는 듯하다. 문창범은 조선인 청년들 사이에서 한때 눈부신 활약을 떨쳐 촉망받고 있음이 인정된다.
문창범은 1919년 3․1운동 당시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이에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던 독립운동가였다.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문창범을 비롯한 노인단의 중요 인물들이 집중하고 있는데, 저들은 한편으로 항상 체포를 두려워하여 그 거처를 극히 비밀리 하고 있다. 문창범을 조선인들은 대통령이라 작명(綽名)하고 있다.
문창범은 러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대한국민의회의 의장으로서, 그리고 1919년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총장에 임명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구한말 러시아 연해주에서 계몽운동에 참가하다
대동공보(1909년) ⓒ독립기념관
문창범은 1870년 함경북도 경원군 유덕면 죽기동에서 출생하였으며, 8세인 1877년경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근 쁘질로프카(한국명 육성촌) 마을로 이주하였다. 그 후 그는 중국과 한국,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살면서, 계봉우가 독립신문에 연재한 아령실기(독립신문 1920년 3월 13일자)에 있듯이, 러시아 군대의 납품업자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문창범은 재력가로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교육 및 민족 언론 발전에 기여하였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구한말에 최초로 간행된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의 기사에서 문창범이 연해주 지역의 학교설립과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들을 보면, 문창범은 리포어 명동학교의 찬성원으로, 그리고 우수리스크 영안평(시넬리니코보) 동흥학교 설립 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아울러 문창범은 <해조신문>이 일제의 탄압으로 1908년 5월 26일 제75호로 폐간되자, 유진률, 차석보 등과 함께 제2의 해조신문인 <대동공보>가 발간되는데도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다. 나아가 <대동공보>의 발간이 러시아 연해주 정부로부터 허가되자, 문창범은 1908년 8월 15일 제1차 발기인 총회에 참석하여 간행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미주에서 간행된 <신한국보> 1910년 6월 14일자 [대동공보계 刊歷史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권업회에 참여하고,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점된 후 연해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자들은 보다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20만 명에 가까운 대규모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1911년 12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때 권업회를 대표하고 실질상 운영 책임자가 되는 의사부 의장에는 이상설, 부의장에는 이종호가 선임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박환 교수
권업회의 목적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권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양면전술을 취하면서 최종적으로는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권업회는 중앙조직을 완비한 뒤, 곧이어 연해주 전역에 걸쳐 지회를 설치하였다. 대표적인 지회로는 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니콜라예프스크·이만을 들 수 있다.
문창범은 1913년 6월 30일에는 하반기 정기총회에 우수리스크지회의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권업회 금년도 하반기 정기총회는 예정과 같이 아래 지난달 三十일에 회관 안에서 개회하였는데 회원 七十여 명이 출석하였고 각 지회 중 우수리스크지회 대표자 문창범, 장생일 양씨와 영안평(시넬리니코보)지회 대표자 이영생 제씨가 출석하여 의결사항을 당일에 마친 후 폐회하고 (후략) - 권업신문 1913년 7월 20일자 권업회 정기 총회
1914년 1월에는 우수리스크지회의 의원 겸 교육부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권업회 우수리스크지회에서는 지난 三일에 선거총회를 열고 임원 총선거의 결과 회장 김야곱프, 부회장 김시약, 총무 안미학, 재무 김려직, 서기 한창근, 김삼흔 (의원제겸), 의원 문창범, 장성일, 김도엔디, 검사원 황두진, 김발세니, 박뜨로핌, 박와실리, 김이반, 교육부장 문창범, 실업부장 김인학, 종교부장 김박홍 제씨더라. - 권업신문 1914년 1월 11일자 우수리스크 권업회 총선거
아울러 문창범은 권업신문 1월 11일자 <이갑 씨 신병 치료비 의연청구서>에서 볼 수 있듯이, 독립운동가 이갑의 신병치료비 청구서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여 동지의 안위를 살피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또한 권업신문 1914년 4월 26일 <특별광고>를 통해, 한인의 러시아 이주 50주년 행사에 러시아 지역 귀화한인의 대표이며, 최고 지도자인 최재형과 함께 100루블을 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문창범은 만주 길림에서 배포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만주·러시아 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중심인물 39명과 함께 서명한 인사로 주목되고 있다. 문창범과 함께 서명한 인물로는 김교헌·김동삼·조소앙·신규식·정재관·여준·박찬익·박은식·이시영·이상룡·윤세복·이동녕·이세영·유동열·이광·안정근·김좌진·김학만·이대위·손일민·최병학·신채호·허혁·박용만·김규식·이승만·조성환·김약연·이동녕·이종탁·이동휘·이탁·이봉우·박성태·안창호 등 당시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 지역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되다
1917년 2월,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자 한인들은 한인사회의 결집을 위해 대규모 회의를 소집하였다. 러시아령 한인 사회의 자치적 대표기관을 창설하고자 회의를 소집하였다. 문창범은 최재형 등과 함께 9명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대회는 그해 5월 21일부터 30일까지 니코리스크시에서 개최되었으며, 전로한족회중앙총회라는 상설적 중앙기관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러시아 귀화 한국인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다. 대회 결의 중에는 한국어신문을 간행하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니코리스크시에 신문사를 설립하고 일주일에 2회씩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발간한 신문이 청구신보인데, 창간호는 7월 7일에 발간되었다. 이 신문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기관지였으며, 따라서 귀화인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었다. 문창범은 최봉준, 전 보리스 등과 함께 창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한 직후인 1917년 12월, 러시아령 연해주의 한인들은 니코리스크에서 귀화인, 비 귀화인 모두 참여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중앙기관인 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의원회를 두고 이 의원회에서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하였는데, 이때 문창범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문창범은 함북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따라 러시아령으로 이주하여 자수성가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던 적도 있으며, 최재형과 더불어 한인사회에 양대 인물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창범이 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귀화인과 비 귀화인 모두에게 적합한 인선이었다. 또한 문창범은 1917년 8월, 니코리스크에서 이동휘, 유동열, 양기탁 등 러시아령 간도의 유력한 독립운동가 7, 8명을 초치, 러시아인 볼셰비키가 참석한 회의에서 볼셰비키 세력과의 제휴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비 귀화인 지도자들과도 협력관계에 있었다.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제2차 개최 장소 ⓒ박환 교수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1918년 6월 13일, 니코리스크에서 지방대표와 각 단체대표 1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총회를 개최하였다. 대회 개막에 앞서 극동소비에트 정부 수상 크라스노쇼코프가 축하연설을 하였다. 그는 러시아령 한인들과 볼셰비키의 협력을 역설했다. 이 연설에 대해 참석자들은 만장의 박수갈채로 응답했다. 그러나 원호인 세력의 지도자로 꼽히는 전로한족회중앙총회장 문창범은 크라스노쇼코프의 소비에트 정부에 대하여 내심 불만이었다. 이 박수갈채가 “크라스노쇼코프의 현 지위에 대한 경의에서 나온 것이지 반드시 과격파의 주장을 찬성한다는 표현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2차 총회는 비 귀화, 귀화 한인의 대부 격인 이동휘와 최재형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회장에 문창범, 부회장에 윤해를 선출하였다. 또한 대회에서는 자유만세와 한인의 정치적 중립 등을 선언하였다.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 것은 시베리아의 정치적 상황의 불확실성과 귀화인과 비 귀화인의 정치적 입장을 절충한 결과라고 보여 진다.
그러나 1919년 말에는 시베리아 정치정세에 대하여 문창범 등 대부분의 러시아 지역의 한인들은 백위파 군사정권의 붕괴를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문창범은 1919년 10월 28일, 독립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옴스크정부는 장차 멸망되고 과격파의 세력이 확대케 되리라. 그 이유는 이러하다. 코착이 자기세력을 수립하기 위하야 타종족인 일본군대를 이용하야 동류(同類)인 과격파를 파결코저 하며, (중략) 시베리아 인민은 장차 옴스크 정부를 전복하고 과격파군과 악수하야 일본을 구축코져 한다. (중략) 불원(不遠)에 일병은 시베리아에서 세력이 없이 되고 막대한 해(害)를 당하리라. 우리 한인은 근일(近日) 일병의 무한한 학대를 당하니 옴스크정부가 변경되는 날이면 북대륙(北大陸)에 활동이 용이하게 되리라.
한편 1919년 2월, 여운형이 상해의 신한청년당의 파견으로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건너와 문창범 등 러시아 지역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문제와 동지규합, 자금조달, 독립운동의 중앙기관 수립 문제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거리감이 생겼다. 여운형·이동녕·조완구 등은 독립운동을 끌어갈 중앙기관이 무력단체가 아니라 외교활동을 펼쳐야 하므로 국제도시인 상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와 반대로 문창범은 남공선·김립 등과 함께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동포가 많이 살지 않는 상해보다 수십만 동포가 살고 있는 러시아 지역이 적당한 곳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919년 2월 25일, 니코리스크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러시아령, 간도 및 국내의 대표들이 모여 전로국내조선인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여 러시아령과 중국령 내 한인들의 의사를 집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발표, 만세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방략의 수립, 그리고 이를 추진할 주체로서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는 것들을 의논하였다.
이 회의에서 문창범은 김치보, 김하석, 장기영 등과 함께 대한국민의회 조직을 발기하였고, 대한국민의회는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하는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의 명으로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발표함으로써 대한국민의회의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이 조직은 국내외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대한국민의회 한족대표 지명서(1919년) ⓒ독립기념관 | 대한국민의회선언서 ⓒ독립기념관 |
대한국민의회에서는 의장에 전로한족중앙총회 회장인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 서기에 오창환을 선출하였다. 문창범은 의장으로서 대한국민의회의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하여 대외적인 문제와 내정, 외교를 관장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러시아령의 한인들은 문창범을 대통령으로 별칭하였다.
러시아 지역 3․1운동을 주도하다
문창범은 1918년 12월, 국내에서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온 이춘숙을 만나 동경유학생과의 연락문제,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 등 독립운동 전반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어 동경유학생들로부터의 통신연락이 있었고, 동경유학생 대표가 직접 러시아령에 와서 이와 같은 문제로 문창범을 만나기도 하였다.
1919년 1월초, 러시아 중동철도 연선지방으로부터 집결한 한인 2백여 명이 니코리스크에서 니코리스크한족회 대회를 개최하고, 시국에 대한 협의를 한 후 한족대운동회 명목으로 태극기를 내세우고 시내를 행진하였는데, 주둔 일본군은 이 시위를 해산하고 태극기를 압수하였다.
이 시위를 주도한 한인들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 회장인 문창범, 안정근, 박두우 등이었다. 이어 문창범 등 러시아령의 독립운동세력은 소약국회의에 참가하고 있던 박용만을 지원하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파견 대표는 문창범이 최재형 등 핵심간부들과 논의한 결과, 1919년 1월 27일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상설의회에서 윤해와 고창일을 파견대표로 내정하였다.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이동휘·최재형·문창범 등 ‘수령급(首領級) 인사’들을 파견하려던 당초의 계획이 윤해·고창일로 교체된 것은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세력의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전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당시 전로한족중앙총회 회장으로서 파견대표 선정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문창범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그 논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파견 당시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나와 최재형·이동휘 등도 그 후보자로 헤아려졌지만, 당시 파리에는 세계 각 방면으로부터 한인대표자를 파견하는 모양이었기 때문에 러시아령에서의 파견자도 다만 그들 간에 끼여 일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족한 것으로, 요컨대 우리의 의사를 발표함에 그쳐 우리 희망의 성패 여부는 반드시 우리 대표자의 책임으로 돌아올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어·프랑스어 등 외국어를 해득하고 다소 교육이 있어 세계의 정세에 통하면 가하였다.
한글 독립선언서 ⓒ박환 교수
또한, 문창범은 대표파견운동의 결과에 대하여도 열강들이 일본과 전쟁을 하면서까지 한국의 독립 문제를 관철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에 파견대표의 활동도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러시아 지역에서 1919년 3월 17일 오전,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은 니코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거행하였다. 문창범은 특히 니코리스크 코르사코프카 거리에 있는 동흥소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일본헌병대는 물론 수비대와 러시아 군대도 출동해서 점차 해산되었다.
그리고 문창범은 동일 오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당일 한인상점들과 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에서 오후 3시경, 한인 2명이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부의장 김철훈 명의의 러시아어, 한글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에 전해달라는 요청서를 첨부하여 일본영사관에 전달하였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 관청과 11개국 영사관에도 선언서를 배부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3.1절 만세시위 ⓒ독립기념관
독립선언서는 회장 문창범, 부회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의 명의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선언서 끝부분에 “오인(吾人)은 2천만의 조선국민의 명(名)의 하에 그 완전한 주권이 하등의 제한 없이 부흥되어질 것을 요구하고, 그 모국(母國)에서의 독립과 주권과 재보(財寶)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정부 당국자의 이름으로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즉 이 독립선언서는 대한국민의회의 간부명의로 된 ‘독립승인요구서’라고 볼 수 있다.
신한촌의 3∙1운동 기념식 ⓒ박환 교수
오후 4시에는 신한촌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였고,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2만여 명의 동포들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해가 진 오후 6시부터는 문창범의 지휘로 청년,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가 자동차 3대와 마차 2대에 분승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과감한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총영사는 러시아요새사령관과 연해주 장관에게 문창범의 체포와 한인의 시위운동 금지를 요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에 선임되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조직된 대표적인 정치적 실체는 대한국민의회와 상해 임시정부이다. 전자는 1919년 2월 25일, 니코리스크시에서 조직된 것이고 후자는 같은 해 4월 10일, 상해 임시의정원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이 두 정부는 대외적으로 실질적 정부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통합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서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에 통합을 위한 교섭이 개시되었다.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 등 지도부는 1919년 4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의원총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는 문창범, 최재형 등 상설의원 23명이 모였다. 이 회의에서는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문제가 의제로 올랐는데, 그를 “잠정승인”하되 그 정부가 러시아령으로 이전한 후에 비로소 일치행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대한국민의회는 전권교섭원 원세훈을 상해로 파견하였다.
대한국민의회와 상해 임시정부의 통합분위기는 6월, 파리강회회의가 종결되고 10월에 워싱턴에서 개최예정인 국제연맹회의에 대한 대책을 수립, 추진하는 과정에서 무르익어 갔다. 상해 임시정부가 국제연맹회의 파견대표로 김규식을 선정하자, 문창범이 중심이 된 대한국민의회는 적극 지지하였다.
문창범은 국제연맹회의에 참가할 한인대표 김규식을 위한 여비모금 및, <한족의 신임과 후원>을 표시하기 위한 100만인 서명의 신임장 작성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국민의회 회장 문창범과 대한국민의회 훈춘지회장 이명순의 공동명의로 된 8월 3일자 경고문에 따르면, 김규식에게 휴대케 할 신임장은 18세 이상의 남녀 모두가 참가하되, 지방의 사정에 따라서는 지방민 전부의 서명이 곤란한 경우에는 그 대표자만 서명하고 나머지는 기명케 하였고, 완성된 신임장은 8월 25일까지 국민의회로 송부하게 하였다.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이 중심이 된 신임장 서명운동은 러시아령, 훈춘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러시아령에서 문창범과 협의한 후 8월 23일 북간도로 귀환한 국민의회 북간도지부장 구춘선, 유예균에 의하여 북간도 지역에서도 전개되었다. 한편 문창범은 이동휘와 함께 국내진입 독립군을 후원할 목적으로 18세 이상 30세미만의 청년을 대상으로 군정사후원회와 일반 유지를 대상으로 애국단을 북간도와 훈춘, 국내 등지에 조직하였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대한국민의회 전권의원 원세훈 간의 교섭은 8월 중순 경에 마무리되었다. 임시정부는 5개항의 통일안을 작성하여 현순과 김성겸을 전권위원으로 러시아 연해주로 파견하였다. 통일안의 골자는 앞서 언급한 정부를 폐지하는 대신, 국내에서 13도 대표 명의로 공포된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기로 했다. 문창범 등 대한국민의회 지도부는 정부통일안을 심의하기 위하여 1919년 8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원 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결국 대한국민의회는 해산을 결의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책 중 국내외의 연결 등을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직책인 교통총장에 선임된 문창범은 취임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으나, 상해 임시정부 측이 약속대로 정부를 해산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입장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문창범은 상해 임시정부 측의 개조 조치에 대한 항의표시로 내각 취임을 거절했다. 문창범의 거부 태도는 적어도 10월말까지 계속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와의 통합문제로 상해에 가 있던 문창범은 북경에서부터 동행한 박용만, 유동열, 신채호, 김영학, 고창일 등과 함께 1920년 4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으나, 일제의 연해주 지역 한인탄압 사건인 4월 참변(신한촌 참변)으로 연해주에서의 항일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1920년 4월, 일제의 연해주 토벌을 피해 문창범 등 대한국민의회 간부들은 아무르주로 이동하였다. 대한국민의회 관계자 20여명이 아무르주의 수도인 블라고베셴스크시에 도착한 것은 그해 5월 말경이었다.
대한국민의회는 대외를 정비한 후 한 때 아무르주 한인공산당과 협력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지지 문제로 이 단체와의 협력문제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블라고베셴스크에서 불화를 겪은 대한국민의회는 알렉세예프스크(자유시)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아무르주 한인의회는 대한국민의회를 최고 정부기관으로 승인한다고 결의하였다. 나아가 자신이 관할하고 있던 한인부대의 지휘권도 인계할 것을 결정했다. 그 무장부대는 자유시에 주둔하고 있던 1개 대대병력이었다.
블라고베셴스크 시내 ⓒ박환 교수
한편 상해를 떠나 러시아령으로 돌아오던 도중, 문창범은 북경에 들러 처음부터 반(反) 상해 임정의 입장에 있던 박용만과 만나 군사통일의 필요성을 논하였다. 북경의 박용만과 신채호 등 반 임정파와 대한국민의회의 제휴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후일 군사통일회의 및 국민대표자회에서의 창조파의 태동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창범은 1923년 6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소집한 국민대표회에 참가, 창조파에 속하여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문창범의 역사적 성격
문창범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 지역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서 중요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는 니코리스크에 기반을 두고 귀화, 비 귀화인 등 모든 한인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전로한족회중앙총회 회장에 이어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문창범은 명실 공히 러시아 지역 한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문창범은 러시아혁명 후인 1917년 8월, 볼셰비키와의 타협을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이 임박한 시점인 1918년 7월에는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세력과 제휴하여 볼셰비키 세력의 지원을 받는 의용대 조직을 추진한 적도 있었다. 또한 문창범은 전로국내조선인회의의 결의에 따라 선전부장인 이동휘를 중심으로 추진하게 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도 진력하였다.
신상기록카드 ⓒ박환 교수
문창범은 3․1운동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의 측근인 원세훈을 상해에 파견하여 상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을 시도하였고, 양측의 합의에 따라 1919년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의 해산결의를 선언하였다. 그 후 자신도 교통총장에 취임하고자 상해에 갔으나 상해 임시정부 측이 해산치 않고 개조함에 머물렀기 때문에 입각을 거부하고, 러시아령으로 돌아와 대한국민의회 조직을 재건 정비하여 별도 세력을 형성하였다.
문창범의 사망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차적으로는 상해에서 독살 당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일설은 1938년 러시아에서 옥사하였다는 설로, 육성촌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에 작가 조명희로부터 조선 문학을 배웠던 최예까쩨리나 미하일롭나(한국명 최금순, 1918년생)가 쓴 “륙성촌에 대한 회고”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 근거한다.
문창범은 장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륙성촌의 학교나 교회는 모두 다 그의 지도하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는 큰 부자로 우수리스크에서 구역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중략) 문창범은 1938년 감옥에서 이질을 하다가 60세를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한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