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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의 영성(사순절 넷째주일)
마태복음 9:35-38
남자들만 아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만, 남자 공중화장실에 가면 소변기마다 붙어있는 스티커가 있습니다. 내용은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이런 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 태어날 때,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나라를 잃었을 때. 또 옛날 어르신들은 남자가 부엌에 들락거리면 ‘고추 떨어진다.’고 꾸중하고, 끊임없이 ‘남자다움’이라는 것은 곧 ‘강한 것’이며,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마초 문화’를 암암리에 각인시켜왔고, 용인해 왔습니다. 이런 문화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면서 이른바 ‘나쁜 남자’라는 것조차도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이 남자다움이라는 것은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를 공고하게 했습니다. 이런 문화가 가져온 민낯은 오늘날 ‘#미투’를 통하여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이 단순히 남녀 간의 성폭력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참에 이 나라가 건강한 나라로 한 걸음 나아가려면 권위와 권력 혹은 강압으로 약자에게 전가되는 모든 폭력에 대한 ‘미투 운동’으로 확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녀가 평등한 존재이듯이 강한 자와 약한 자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우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들
운다는 것은 마음 깊이 공감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울지 못하게 하는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짜 강함, 가짜 권위와 권력이 판을 칩니다. ‘감정이 없는 강함은 가짜요, 감정이 없는 권위와 권력도 가짜입니다.’
우리는 좋은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즐기며 하고 싶은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취하고 싶은 대로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언제든지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이런 시대에서는 고통이나 아픔이 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사실, 온갖 풍요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실존입니다. 단지, 현대인은 고통과 불행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살짝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데 익숙할 뿐입니다. 이미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지만, 사방에서 우는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빈곤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감당하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느끼는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 이유 없이 고통당하고 학대당하는 사람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부유한 사람들과 특권층.
사실 우리는 울음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세상은 ‘우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는 것을 영적 선물이나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는 것은 매우 신성한 일이고, 생명을 품는 일입니다. 잘 울지 못하는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울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 눈물의 신호
울음을 참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을 잃지 않으려면, 악에 물들지 않으려면, 정의롭게 살아가려면 세상의 악과 고통 속에서, 불의가 만연하는 세상을 보면서 울부짖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보신 것은 무엇일까요?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 주셨다.’는 말씀을 통해서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도 서러운데, 민족종교인 유대교가 같은 민족을 억압하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노예생활에 찌들어있던 조상에게 자유의 법으로 주신 열 가지 계명은 세분화하면서 인간을 구속하는 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신들도 지키지 못할 법을 만들어 놓고,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인 약자들과 병자들을 죄인 취급합니다. 병에 걸린 것도 가난한 것도 모두 하나님께 저주받은 결과라는 것이고, 하나님께 저주받은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결과론적이며, 외형적인 현실이었기에 세속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요, 그런 복을 받는 이유는 선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상한 논리가 횡행하는 불의한 현실을 보면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죄인 취급당하는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현실이 만연한 세상을 두루 다니신 예수님에게 그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에 버려진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는 아무런 소망 없이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병든 것도 서러운데 죄인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사는 사람들의 현실을 직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이 눈물의 결과는 십자가였습니다. 운다는 것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삶에서 무언가 변해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 영혼을 새롭게 하는 힘
눈물은 인간이 살면서 표현하는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운다면, 그것에 공감한다는 뜻입니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눈물을 자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아무 때나 울지 않습니다. 소중한 것을 상실했을 때 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상실했다는 아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암시합니다. 그런 점에서 눈물은 상실에서 변화로 이끄는 전환점입니다. 눈물은 상실의 고통에 새 생명을 줍니다.
상실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눈물은 우리를 과거에서 해방합니다. 눈물을 쏟아낼 때, 우리를 억압하고 괴롭히던 것들이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삶의 응어리가 부드러워지고 풀리게 됩니다. 눈물은 결국 상실의 통증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눈물은 영혼을 새롭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울 수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 슬플 땐 우십시오
내가 말했잖아/기쁠 땐 웃어버리라고 /복사꽃 두 뺨이 /활짝 필 때까지 /내가 말했잖아/ 슬플 땐 울어버리라고.
인간은 눈물을 흘리면서 성장합니다. 어릴 적에는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 울지만, 성장하면서 타인의 아픔, 이웃의 아픔을 때문에 웁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만을 위해서 울 뿐 이웃을 위해서 울지 못한다면, 건강한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우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영성의 깊이입니다. 눈물은 우리 자신을 직시하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직시하게 합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 눈물을 흘릴 줄 알면, 다른 이의 고통을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감정, 눈물이 없는 강함은 가짜입니다. 슬픔과 고통을 넘어설 때, 비로소 진정한 강함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는 것’을 지질한 것으로 취급하는 세상에서 살아왔으니 자신도 직시할 수 없고, 다른 사람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아이러니하게도 울 줄 모르는 사람이 더 깊게 빠져든다고 합니다. 울어야 자신을 직시하는데, 울지 않고 계속 울음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울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강압적으로 일어나는 온갖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일들은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자신의 행동이나 결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공감할 능력을 잃어버린 이유는 울음의 영성을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울음의 영성을 회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거짓된 관념
그럼에도 이러한 눈물, 울음의 영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아무리 울어도 다 적실 수 없을 만큼 바싹 마른 삭막한 마음, 무감각한 영혼이 그것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끊임없이 포장하고, 눈물을 비웃고 이성만 신봉하는 사람, 돈과 권력과 명예를 최고로 아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 깊은 곳까지 메말라 있어서 울지 못합니다. 이들의 마음속은 먼지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이 누군지 이웃이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시는 예수님(마 23:37),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우시는 예수님, 죽은 나사로를 보고 우시는 예수님(요 11),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시면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에게서 거짓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감정에 깊이가 없으면 울지 못합니다. 울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극과 고통과 절망을 너무 쉽게 비웃습니다. 자식들을 잃은 아픔에 단식을 하는 부모들 앞에서 폭식하는 일베스러움은 대표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의로운 분노를 아는 사람은 세상의 상처를 보고 우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을 실망하게 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압니다. 눈물을 통해서 자신을 정화할 수 있음을 알기에, 고통이 찾아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울음의 영성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솔직하게 보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성취에도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알고, 잃은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 울음의 영성을 간직한 신앙선조들
왕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열왕기하에 히스기야 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민족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왕하 20:5).”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다윗은 시편 6편 6절에서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탄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의식에 빠져 살아가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을 늘 돌아보며 눈물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울 정도로 울었던 다윗의 신앙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와 맞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파멸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죄인 취급당하던 사람과 병자들과 강도의 소굴이 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이런, 울음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운다는 것은 마음 깊이 공감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과 이웃을 깊게 바라보시고 공감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눈물을 애써 참지 마시고 우십시오. 새로운 출발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전환점으로 삼아가십시오. 예수님이 보시고 우시는 것을 보시면서 우실 수 있도록 영의 눈을 깊게 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