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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만큼 고증은 신경 안쓰고 사극등을 만드는 나라도 흔치 않을겁니다. 뭐 돈이 드는 부분은 이해가 가나 우리나라 작품들을 보면 단순히 돈이 드는것 때문에 고증을 덜 하는게 아니고 그냥 그쪽 부분은 아예 무관심 해서 고증을 안하는 경우인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죠 저도 뭐 역사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수십년간 정말 고질적으로 고쳐지지 않아 이제는 일반인들 마저 "그때는 그렇게 하고 다녔거니~" 하고 아주 진실이 되어 버린 오류들이 발생한 것들만 이야기를 해보죠~
1. 내시의 복장
사극에서 흔하게 보이는 고증 오류 중 하나는 내시의 복장에 관한 겁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내시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실제 내시의 복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차이가 있는 부분이 사모입니다. 흔히 잘못 알려진 것은 뿔이 제거된 사모를 내시가 썼을 거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는 과거 흑백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찍을때 관복의 색으로는 내시를 구분하지 못해 이를 보완하려 사모의 뿔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고증 오류 입니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드라마나 사극에선 모두 뿔이 없는 사모를 쓰나 요즘들어 아래와 같이 고증에 오류가 없는 복장을 하는 경우도 나오고 있습니다. 고증 뭐 어때 하는 분들도 있지만, 잘못된 고증은 계속 남아서 그것을 보고 배운 사람들은 계속 오류를 범하게 되니 문제입니다.
2. 유배
모델 : 배우 차승원
사극 속에서 소달구지(함거)를 타고 가는 모습 사실은 고증 오류이며 죄인이 소달구지를 타고 이동하는건 사형장으로 가는 것 밖에는 없다고 한다
실제로는 말을 타고 가거나 걸어서 귀양길에 올랐다고 한다
사극을 보면 유배갈 때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소달구지를 타고 갑니다. 이는 잘못된 고증으로, 사실 소달구지(함거)는 처형장 갈 때 타던 것입니다. 사실 유배지를 갈 때는 말을 타고 갑니다. 먼 길을 걸어서 가면 기한 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간혹 가마를 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엄연히 불법이었습니다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고중간에 풀려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종신형이었습니다. 유배지는 어떻게 정해질까요? 유배형은 2,000리/2,500리/3,000리 이렇게 세 등급으로 구분해서 죄가 무거울수록 더 먼 곳으로 보내졌습니다 3,000리 기준은 중국 형법 대명률을 따른 규정이라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아 세종 때에 이동 거리를 수정합니다. 그러나 왕의 분노를 산 인물의 경우예전의 관행을 적용해 지역을 빙빙 돌아 3,000리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유배지에서 숙식은 어떻게 해결 할까요? 사극에는 나오지 않는 장면! 그렇다면 유배 죄인들의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각 고을의 수령이 보수주인을 정해줍니다. 주인은 유배 온 죄인의 거처를 제공하고 죄인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습니다 매몰찬 집 주인을 만나면 밥을 굶기도 했답니다 여러모로 유배인의 삶은 극도로 괴로운 삶이었다고 합니다.
3. 사형
사극 속 참수형
실제 참수형
참수형
대한민국 사극 등을 보면 거대한 칼을 들고 춤추면서 입에 머금은 술을 칼에 뿜고 목을 베는 망나니를 자주 볼 수 있지만 실은 타국의 참수형 형태와 섞여 생긴 고증오류로 실제로는 중세 및 근세 서양의 참수형과 동일했습니다. 죄인의 얼굴에 회칠을 하고 양쪽 귓불을 뚫어 화살을 끼운후 상투 부분을 기둥에 단단히 매어 묶어두고 모탕 위에 목을 괴어 엎어놓은 뒤에 참수도로 내리쳐 목을 자르는 식이며 제중원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 장면이 나올뻔했다고 합니다 네이버 웹툰에서 이괄을 소재로 목요일에 연재되고 있는 칼부림에서 세밀하게 재현하고 있으며(칼부림 23화) 윤삼육 감독의 살어리랏다나 조여정 노출로 더 유명한 후궁: 제왕의 첩에서도 이런 식의 참수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화 중에서는 개벽 초반부에 최제우의 처형 장면이 이와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극에서 사약 장면
실제 사약 마시는 장면
왕족 또는 사대부가 죄를 지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극약으로 옛날부터 사용되어 왔으나 형전(刑典)에 인정된 제도는 아닙니다. 형전에는 교수(絞首)·참수(斬首)만을 사형제도로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왕족 또는 사대부는 그들의 신분을 참작하여 교살시키는 대신에 사약을 내렸던 것이며 극약의 재료는 주로 비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명확한 문헌자료를 찾기 힘듭니다. 일설에는 생금(生金)·생청(生淸)·부자(附子)·게의 알[蟹卵] 등을 합하여 조제하였다고 하나, 이것에 즉사시킬만한 독성이 있는지는 의문시 됩니다. 국내에는 부자 종류에 속하는 초오(草烏)가 많이 야생하고 있는데, 이것을 날것으로 또는 끓여서 먹으면 위장 안에서 점막출혈증상이 심하게 일어나 토혈을 하면서 생명을 잃게 되며 그러므로 구하기 힘든 것을 사용하기보다는 비상이나 초오를 사약의 재료로 응용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사약은 임금이 사람을 시켜 본인에게 내리기도 하고, 일단 유배를 보낸 다음 내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개는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의하여 전하여 졌으며 죄인은 사약이 든 그릇을 상 위에 정중하게 놓고 왕명을 받드는 예의를 갖춘 뒤 마셨습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태종 말년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이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았으며, 단종은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도 친가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고 조선 후기에 와서는 붕당(朋黨)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약이 내려져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도 사사되었으며,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장희빈도 사약을 받았습니다. 정조 이후로는 차츰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4. 갑옷
한국 사극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갑옷은 고증 수준이 상당히 심각하게 나쁘며 특히 고려 이전 시기를 다루는 사극에서 고증 문제로 가장 많이 까이는 요소 중 하나 입니다. 조선 갑옷 또한 제대로 고증 안 돼서 포졸복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고 대체로 사극의 의상 고증은 복식학자들이 하는데, 일반적으로 한복 고증에 주로 힘을 쏟기 때문에 갑옷은 소품 제작자에게 만들어달라고 대충 의뢰하거나 다른 작품에서 사용한 것을 돌려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기본적으로 주연급 인물들에게 투구를 안 씌우는 것은 애교수준이고, 주인공과 주연급 인물은 고증과는 전혀 무관한, 마치 판타지 게임에서나 등장할 법한 화려한 비닐 소재 갑옷을 입는 경우가 태반이고 점퍼 재질 갑옷에 이글루 투구가 나오는 태조 왕건은 지금 사극과 비교해보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복장 고증이 뛰어난 편이고 비록 후대에 들어 만들어진 근초고왕이나 정도전 등에 비하면 갑옷의 세세한 디테일 오류나 재질 같은 부분에서 많이 부족하지만 당시 예산이나 기술력 문제도 감안할 필요가 있고, 최소한 후술할 주몽이나 태왕사신기처럼 대놓고 고증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류에 힘입어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등의 많은 국내 사극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으며 예로 든 해당 두 작품은 발고증 판타지 갑옷의 끝판왕, 종결자라고 불리는 작품이며 물론, 둘 다 애당초 제작진이 '퓨전'을 지향한다며 고증이란 걸 염두에 두지 않은 작품이긴 합니다. 하지만 퓨전사극임에도 오히려 재미와 고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잡은 추노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무리 퓨전사극이라고 고증을 대놓고 무시해도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고 고대사를 아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한국 사극을 보는 외국의 시청자들 에게 고대 한반도의 갑옷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불러 일으키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태왕사신기는 주 수출 타겟이었던 일본 반응이 미적지근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으나, 주몽은 이란 시청률 85%, 카자흐스탄 시청률 80%에 육박했는데, 이란과 카자흐스탄 시청자들이 고구려 갑옷을 찰갑이 아닌 드라마에 나온 근본없는 판타지 갑옷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시청자들도 포함이며 일부러 논문이나 자료사진 등을 찾아보는 사람이 아닌 한 드라마에 나오는 모습을 그대로 고증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드라마 한편 나올 때마다 갑옷 고증으로 신나게 욕먹는 게 일상 다반사가 되다보니 다들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방송사 측에서도 이 문제를 느꼈는지 2010년대 들어서 제작되는 사극은 그나마 고증 자료를 슬쩍 엿보기라도 한 듯한 갑옷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근초고왕과 대왕의 꿈은 드라마 본편의 평가와는 별개로 갑옷만은 상당한 수준으로 재현해서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5. 갓(흑립)
배우 조재현
배우 전현
배우 임동진
배우 이덕화
조선시대 초기 갓 (죽립)
박동진 명창
송순섭 명창
윤진철 명창
송재영 명창
지기학 명창
조통달 명창
조선시대 후기 갓 (말총갓)
몽골에서 전해진 발립 (모델: 배우 임호)
흑립(黑笠)은 과거 한국 남성이 썼던 모자들 중 하나로 우리가 가장 흔히 아는 갓(모자)으로서, 그 형태는 조선시대에 정립되었습니다. 갓과 같은 형태의 모자는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방립이 시초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대나무, 칡줄기, 갈대 등을 꼬아서 만들 수 있는 대부분의 모든 것들로 만들었고 딱히 생긴 모양도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형태는 고려시대에도 이어집니다. 원간섭기 때 말총으로 만든 몽골식 모자인 발립이 전해지며 고려 군인들은 무거운 투구는 그냥 등에다 걸치고 문라건이나 발립을 갑옷 위에 쓰고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말총으로 모자를 만드는 기술이 전해진 게 발전하며 나타난 흑립이 정립된 것은 성종 무렵으로 보는데, 이는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김시습의 초상화에 나타난 갓이 대나무를 엮어 만든 것임을 근거로 하며 그래서 용의 눈물, 정도전 같은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대나무로 된 갓을 쓰고 나옵니다 초립과 비슷한 개념으로 참고로, 상복을 입을 때는 천으로 만든 백립이나 삿갓을 썼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천둥소리에서는 양반들은 흑립을 쓴 것은 고증대로 잘 했지만, 하인들이 죽립(중립)을 쓴 것 또한 고증오류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종과 연산군 시기가 지난 이후로는 죽립이 모두 폐지되었으므로 이것도 고증오류로 볼 수 있습니다.
6. 곤장? 태형? 장형?
사극에서 나오는 곤장
실제 곤장 치는 모습 태형과 장형으로 나뉘어 진다
곤장(棍杖)은 전근대에 사용하던 형벌 도구로
한자로는 곤(棍)으로 표기하며 곤장으로 사람을 치는 '곤형'은 태-장-도-유-사 로 구분되는 오형과는 별개의 형으로, 속대전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주로 군대나 궁궐, 기관에서 중죄를 저지른 죄인을 대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때문에 장형에 곤장을 사용한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지만, 원래 장형에 쓰던 '장'은 얇은 회초리인 '태'보다 굵은 지팡이 수준의 회초리이며 곤장보다는 훨씬 작은 도구로 곤장은 배를 저을 때 사용하는 노처럼 너부데데한 형태의 형구입니다. 곤에는 폭과 길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게에 따른 파괴력의 차이에 따라서 다섯 종류가 있는데 작은 것을 소곤이라고 하며 그 다음 중(中)곤, 대곤, 중(重)곤, 가장 큰 것을 치도곤이라고 하며 치도곤의 경우 길이 5자 7치(173cm), 너비 5치 3푼(16cm), 두께 4푼으로 웬만한 성인 남성만한 큰 물건입니다. 장형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형벌이었지만, 곤장이 장형보다도 고통이 훨씬 심했으며 더 위험했고 그래서 조선시대 초중기에는 상당기간 곤장형과 사형을 동급으로 보는 시선들도 많았습니다. 도적을 토벌할 때나 군법을 어긴 자를 처벌할 때 등 중한 처벌이 필요한 곳에서만 상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게 하였으며 남용을 막기 위해 숙종 때는 30회까지만 치게 정했고, 정조 시대에 발행된 <흠휼전칙>(1778)에서는 곤장의 규격과 사용 규정을 엄격하게 정했습니다. 물론 지방 수령들이 이걸 안 지켜서 문제였지만...지방수령이 똘끼로 가득찬 인물이면 아무 때에나 치도곤을 썼다고 합니다. 사실상 죽였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렇게 가혹하게 처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장형을 곤장으로 치는 것이 반드시 틀렸다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법과 원칙이 지켜지는 자리를 묘사하면서 장형을 곤장으로 집행하는 것은 고증오류 입니다. 일부는 물곤장이라고 크고 단단한 참나무 곤장을 물에다 조금 불린 다음 죄수의 엉덩이 피부도 물을 흡수하도록 한 다음에 내리치는데 물에 불어서 약해진 피부에 그런 몽둥이질까지 더해지면서 심한 경우 뼈가 보일 정도가 되며, 이쯤되니 거의 다 죽었는데, 운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하반신 불구가 되어 평생 일어설 수 없게 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7. 주리틀기
우리가 사극에서 많이 본 주리틀기 사실은 고증 오류다
실제 주리틀기 하는 모습
보통 사극에서 나오는 주리틀기 장면 입니다 흔히 죄인을 나무로 된 형구 의자에 앉혀놓고 밧줄을 묶어 허벅지 사이에 끼워서 집행을 했으나 실제로는 저렇게 허벅지 사이에 끼워서 하지 않았다고 하며 죄인을 맨 바닥에 앉혀놓고 양 다리를 묶은 뒤 다리 사이에 굵고 큰 막대기 주릿대 두 개를 끼우고 양쪽으로 비틀어 정강이를 비트는 고문이였다고 합니다 한국 사극을 보면 어느 시대고 고문의 단골손님 주리틀기가 나오는데 원래 주리틀기는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전해져 온 고문 방식으로 조선을 제외한 고려, 후삼국, 통일 신라 등등의 사극에서 주리틀기가 나오면 100% 고증 오류입니다
그러니 태조 왕건과 용의 눈물에서 나온 주리틀기는 한마디로 고증 오류입니다
8. 관복 흉배
배우 김상중
배우 김선호
배우 이민호
배우 여의주
배우 김흥기
조선초기에는 관복에 흉배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배우 이제훈
드라마 천둥소리
흉배(胸背) 또는 보(補)는 조선, 명나라, 청나라 등에서 특정 계급이 입는 의복의 가슴과 등에 붙이던 표장입니다. 명나라, 청나라에서는 보자(중국어 간체자: 补子, 정체자: 補子, 병음: bŭzi)라고 하였으며 다양한 무늬를 수놓아 옷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관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 무늬를 다르게 해서 계급을 표시하는 구실도 했습니다. 2000년 당시에 KBS 2TV에서 방영하던 천둥소리는 조선 중기를 다룬 사극인데, 거기서도 고증오류가 나왔습니다. 선조 때는 이미 당상관은 물론, 당하관, 심지어 참상관과 참하관이 모두 입은 관복에 흉배를 새겼고, 그것이 여러 조선 중기의 사극에서 묘사 되었습니다. 불멸의 이순신과 징비록, 왕의 얼굴에서는 당상관만 말고 당하관, 참상관, 참하관도 관복에 흉배를 새긴 것이 고증대로 나타났으며 다만 천둥소리에서는 당상관들만 흉배를 매달았고, 당하관, 참상관, 참하관은 흉배를 모두 매달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본래 당상관만 새기던 흉배는 연산군 11년 들어서면서 당하관, 참상관, 참하관도 흉배를 새기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걸 보면 천둥소리는 심각한 고증오류를 저질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1996년 이전 KBS 사극에서는 세조 이전에도 흉배가 보급되어 있는 것처럼 나왔는데, 그것 또한 고증오류 입니다. 그리고 공주의 남자에서도 대다수 고증오류가 나왔습니다.
9. 가체와 첩지
배우 최정원
탤런트 신은정
배우 김혜수
조선 후기, 가체가 폐지된 후에 왕실 여인들은 당의 차림인 때 머리에 첩지를 두르고 그 위에 반드시 족두리나 화관을 썼으나, 한국 사극에서는 왕실 여인들이 그냥 첩지만 매고 다닙니다. 사실 첩지 자체가 속이 비어있는 화관이나 족두리를 고정하는 고정도구이기도 한데, 첩지 위에 모자 없이 다니는 것은 마치 왕이 상투관만 쓰고 익선관은 안 쓰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의 반영 오류로 또 다른 문제는 실제로 요즘 사극에서는 왕이 정말로 익선관을 안 쓰고 상투관 바람으로 나다니는 일이 많아진 것입니다
10. 환도 패용법
사극에서 나오는 환도 패용법 모두 일본식으로 하고 있다 이는 잘못 된 고증이다
실제 환도 패용법
일본 사무라이가 칼을 차고 있는 모습 허리에 칼을 찼으며 지금껏 나왔던 사극의 89%는 환도를 일본 사무라이 식으로 차고 있었다는 증거다
지금껏 나왔던 사극의 89%는 환도를 일본식으로 차고 있습니다 손에 들고 있거나 허리춤에 걍 꽂고 다니는 방식으로 실제 환도 패용법은 저렇지 않았습니다 한반도는 예부터 칼보다도 활을 중시해서 전장에 있어서도 칼은 어디까지나 보조무기였습니다 활을 쏘다가 근접전에 돌입하면 빼드는 것이였고 칼이 앞쪽에 있으면 활을 쏠 때 걸리적거릴 뿐더러 말을 타고 다닐 때도 방해가 되며 따라서 칼을 뒤로 차고 다녔습니다 띠돈이라는 장치가 있어서 칼손잡이를 앞으로 빙글 돌려서 칼을 빼서 공격을 했고 정확히는 검집을 왼손으로 잡고 재빠르게 돌리면서 오른손으론 손잡이를 잡고 방도를 하고 그냥 띠로 되어 있어 탄성때문에 다시 뒤로 돌아가는 중국의 띠돈과 달리 조선의 띠돈은 고리로 되어 있어 칼을 쓴 후에 그대로 앞을 향해 있는 검집에 놓고 다시 뒤로 돌리면 오케이였다고 합니다 환도라는 말 자체가 고리 환을 쓰기에 조선칼=환도의 아이덴티티가 바로 저 띠돈과 패용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11. 상투와 망건
우리가 사극 드라마에서 많이 본 상투머리 사실은 고증 오류다
김옥균
민영익
한양원 민족종교협의회 초대회장
실제 상투머리와 망건 착용한 모습
망건이란 상투를 바르게 유지시켜주는, 또 관과 모가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물건입니다 망건의 용도는 이마가 아니라 머리가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도구로 측두 주위의 머리를 감싸는데 있었습니다. 사극에서는 이마로 가려서 망건을 착용하나 실제로는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야 하며 조선시대 초상화나 구한말의 사진을 보아도 이런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극을 자세히 보시면 어떤 배우는 긴 머리가 나오고 심지어 짧게 커트 친 머리도 그대로 노출 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참고 보니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대부분의 배우들이 모두 현대식 머리에 관모나 갓만 달랑 쓰고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배우의 귀밑머리는 가위인지 바리깡인지로 밀어낸 흔적이 역력하가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관상 현대인의 눈에는 이마 위로 망건을 쓰는 것이 더 좋게 보여서일 것입니다 사실 망건은 비싸서 일반 평민들은 보통 흰 천을 머리에 둘렀는데 그것마저도 머리카락 위로 오게 둘렀고 양반이 망건이 아니라 머리띠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로 머리카락 위로 둘렀다고 합니다 한편 고증을 지켜 제대로 쓴다고 해도 사극 배우들은 대부분 자기 머리 위에 상투 가발을 덮어쓰기 때문에 자기 머리와 가발의 경계선을 가려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이마 위로 쓰는 걸 선호한다고 합니다 망건의 착용법이란 머리카락이 자라난 자리 위로부터 쓰는 것인데 사극에서는 헤어밴드마냥 이마 위로만 쓰고 있다고 합니다
12. 사또의 복장
사극에서 보는 사또복장 사실은 고증 오류다
동래부사 송상현 그는 평소에 이 복장으로 업무를 수행했고 임진왜란에서도 갑옷 위에 단령을 입고 싸우다 전사했다. 실제 사또들은 관복을 입거나 양반들 처럼 흑립과 도포를 입고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사극에서 사또들이 전부 구군복을 입는 것은 고증오류 입니다. 구군복을 입는 것은 변방의 무관직 수령들뿐이었고, 문관 출신 수령들은 그냥 양반의 정장인 흑립과 도포를 착용한 것이 아래에서 보듯 여러 그림자료와 조선시대 사진에서 나옵니다. 무관직 수령은 대체로 오랑캐 출몰지역에 많이 배치되었는데 그들이 굳이 구군복을 입은 이유는 전투가 벌어지면 그 위에 갑옷을 덧입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군복의 숨겨진 용도 중의 하나가 갑옷의 속옷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문관 출신 사또들이 전부 흑립과 도포만 착용한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사모와 단령을 착용하고 사또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다만, 이럴 경우에는 자신의 품계에 맞는 단령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현감 주제에 당상관 단령을 입으면 파직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외 사극 고증 오류들
에브리바디 삼지창(당파)
조선시대 사극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고 이미 뇌리에 박혀버린 무기인 삼지창(당파)입니다 임진왜란 그린 사극에서 조선 수군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포도청 포졸도 당파를 사용하고 사실 당파는 활용하기가 무지 힘든 무기로, 숙련자만이 이용가능한데 사극에서는 너무나 쉽게 쓰이는 걸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일단 삼지창 자체가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군대에 의해 도입된 신무기였습니다 즉, 조선 후기의 무기가 삼지창이었습니다 삼지창의 모양을 잘 보면 3개의 창날이 나와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창날 좌우는 휘어져있기에 찌르는 용도가 아니었습니다 삼지창은 적을 찌르는 용도가 아닌 양쪽 흰 창날을 이용해 장창 등의 상대에 창류 공격을 무력화하는 일종의 특수 무기였습니다. 상대의 창 공격을 무력화하고 아군이 처리하는 식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병법서에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삼지창은 용맹과 담력이 큰 사람이 사용해야한다고 명시하고 즉, 정예병들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극의 영향으로 삼지창은 조선시대 대표무기로 인식되었으며 심각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민속촌이나 조선 테마파크 등에도 이러한 모습은 아무렇지 않게 활용 된다고 합니다
군인이 천쪼가리 하나 입고 싸움
당시 기록화 들을 보면 일개 병사들도 갑주를 입고 있는걸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양궁사법으로 쏘는 사극
사실 국궁사법은 엄지와 검지 사이로 활을 잡아 쏘는 사법을 이용합니다 오른쪽의 깍지손 종류 중에서 국궁 사법에 쓰이는 것은 몽골리안드로우 밖에 없습니다. 과거 고구려 시대 수렵도 사진을 보면 핀치드로우도 쓰인 적이 있는 듯하나, 도태되고 몽골리안드로우만 살아남은 듯합니다. 왼쪽의 줌손 종류에 나오는 두 가지 방식은 둘다 국궁에 쓰이는 방식이며 막줌의 경우 후술할 주류 사법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줌손이고, 흘리기줌의 경우 후술할 별절사법, 즉 고자채기 사법을 쓸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줌손입니다. 흘리기 줌은 하삼지(=중지, 약지, 소지)를 약간 비스듬하게 쥐어 활을 약간 비껴 잡는 방법이고, 여기에 중구미(팔꿈치)를 엎는(팔오금이 바닥을 보도록 돌려준다) 국궁 사법이 결합되면 자연스럽게 활몸이 틀어지며 약간의 고자채기 효과를 주어 화살이 더 깔끔하게 빠지게 됩니다. 국궁 사법은 제대로 익힐 경우 발시할 때 자연스럽게 화살이 줌손에서 약간 떨어진 상태로 나가게 되어 화살대나 깃이 줌손이나 활채를 전혀 때리지 않게 되어, 활장갑 같은 것 없이도 얼마든지 상처없이 쏠 수 있습니다.
부록
사극속의 한복 (♡이건 글로만 설명 할게요☆)
# 이 글은 어느 한 작성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라 쓰여진 글이며(글이 흥미롭고 재밌어서 복사를 했습니다)다른 분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잡글이니 그냥 참고용으로만 읽어주세요 #
시간이 지날수록 복식 고증을 지키는 사극을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놓고 고증을 무시하는 소위 '판타지 사극' 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판타지 사극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사극에 무슨 짓거리냐", "볼거리가 풍부해져서 좋다". 어떤분들은 한국 사극이 망했다고 하고, 어떤분들은 눈이 즐거워져서 좋다고 합니다. 어느쪽의 말이 맞는걸까요. 정답은 없다고 봅니다. 결국 어느것을 중요시 하느냐에 따른 시각의 차이일뿐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은 사극의 복식들 고증과 예술 사이에서 방황하다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았습니다. 옛날 삼국기나 태조왕건 등의 사극에서는 고증 흉내라도 내어 수수한 복식을 입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태조왕건 제작 당시 태조왕건 의상팀은 인터넷이 미발달한 이유로 곳곳의 자료를 찾아다니며 수집한 다음 방에 틀여박혀 공부하는 식으로 생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작되는 사극들에서는 그런 정성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극에서 고증을 중요시하기 보다는 미와 멋을 더 중요시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조선 시대 사극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고려나 삼국 시대 사극으로 가면 패션쇼가 벌어집니다. 인물마다 화려한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나오며 스크린을 장악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속 고구려의 고유한 복식은 어느덧 삼국 시대 사극에서 찾아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갑옷은 사정이 더합니다. 복식은 그래도 어거지로 삼국 시대 복식이 맞다고 끼워맞출수나 있습니다. 하지만 갑옷은 절망스럽습니다. 고구려인들은 고분벽화라는 훌륭한 자료를 남겼습니다. 고분벽화에 고구려의 복식과 갑옷이 그대로 그려져있기 때문에 고구려의 복식과 갑옷을 재현하는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갑옷은 벽화 속의 그림대로 재현되지 못했습니다. 황금색의 판금갑옷과 뿔투구를 걸친 고구려군이 고구려 사극에 나오는 고구려군이었습니다. 고구려의 갑옷은 극도로 화려해집니다.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의 후반부에 가면 광개토태왕은 황금 판금갑옷을 입은데다가 용무늬를 수놓은 망토까지 걸치고 나옵니다. 보기에 멋지긴 했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고구려군의 갑옷과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광개토태왕 뿐 아니라 주변의 부장들도 고구려인지 아니면 반지의 제왕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갑주를 걸치고 나옵니다. 화려함과 멋을 중시한 나머지 고증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결과였습니다. 광개토태왕의 PD인 김종선 PD님은 고구려 고분벽화 속 갑옷들 보다는 이런 갑옷을 더 선호했다고 합니다. 사극 매니아들 입장에서는 뒷목 잡고 쓰러질 노릇입니다. 다행히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져서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정상적으로 고증된 갑옷을 입고 나오는 빈도가 크게 늘었습니다. 이제 삼국 시대 사극에서 백제군은 윗사진처럼 잘 고증된 갑주를 걸치고 나오며, 신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여전히 뿔투구에 판금갑옷 등 엉터리로 고증된 갑옷을 입고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현재 방영중인 다큐드라마 <한국사기>에서 백제와 신라군은 비교적 고증이 잘 된 갑옷을 입고 나오면서 고구려군의 갑옷은 아직도 옛날 광개토태왕 시절 엉터리 갑옷 소품을 사용중입니다. 제작팀도 그것이 잘못된 고증이라는걸 압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사기 제작팀이 광개토태왕 시절 소품을 쓴다는 것은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건 의도적인 고증 파괴입니다. 드라마 화랑의 의상들은 외주 협찬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신라 시대 복식 고증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멋과 옷을 착용하는 인물들에게 얼마나 어올리나 그것만을 고려한채 제작되었습니다. 보기에는 옷이 아름답고, 빨간색으로 가득한것이 멋져보일수는 있어도 고증 측면에서 바라보면 맞는것이 하나도 없는 엉터리 복식 제작입니다. 현재 사극에서 복식 제작의 중점이 어디에 맞추어져있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렇듯 사극 속 복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화려해지거나 고증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걸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작사 측에서 고증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증이 틀린것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변형하는 케이스가 점점 늘고있습니다. 일례로 한국 사극에서 고증 안되기로 유명한 '환도 패용'은 소품팀에서 패용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으나 연출팀에서 보기에 흉하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바람에 사극에서 고증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환도 패용 하나에서만 국한되진 않을겁니다. 최근 한복을 향한 관심이 크게 늘면서 아름다운 한복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디자이너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복 열풍은 현재 무섭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비록 한옥마을이나 궁궐에 한정되긴 하지만 적어도 그 장소들에서 이제 한복을 보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부터가 전주한옥마을에서 한복을 입고 돌아다닌 경험이 있으며,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의 글을 보면 한복을 입은 사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한복이 관심을 끌면 끌수록 사극에 나오는 한복을 찾아보는 사람들 또한 늘게됩니다. 디자이너들은 한복을 최대한 아름답고 멋지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극에서 복식의 고증을 찾아보기 어려운것에는 이런 이유도 분명 있을겁니다. 시각적인 멋을 중요시 하는 디자이너와 제작진들에게 고증은 크게 상관할바가 못됩니다. 한복을 끊임없이 만들고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옛것의 고증은 어느정도 희생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확실히 디자이너들이 한복 제작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 사극에 나오는 복식들은 날이 갈수록 우아해지는 중입니다. 고증은 희생되어도 예술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극 매니아들에게 과거 인물들의 옷은 고증해야할 '복식' 이지만 많은 수의 디자이너와 의상팀에게 옷이란 '패션' 입니다. 자신들이 만든 옷이 영상에 나왔을때 어떻게 보이나에 더 많은 신경을 씁니다. 이렇듯 보는 시각에서 차이가 발생하니 나오는 결과물에 호불호가 갈리는것은 당연합니다. 사극에 나오는 옷을 두고 인터넷에서 '우와 옷 예뻐서 좋다' 라고 쓴 댓글들을 몇번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 댓글이나 글들을 볼때마다 사극 매니아와 일반 대중들 사이에 간격이 크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고증이냐 패션이냐, 현재 제작되는 사극 상당수가 후자의 시각에서 제작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극에서 고증을 완전히 배제하는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고증과 예술이 어우러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현재 고증과 예술 둘 다를 모두 아우른 균형잡힌 사극의 수는 많지가 않습니다. <칼과 꽃>이나 <정도전>이 고증을 적정선에서 지키면서 옷의 예술성도 첨가한 드문 예라고 생각합니다 시각의 차이 외에도 현실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KBS 의상팀에서는 되도록이면 고증이 된 복식을 착용시키기를 원하나 연출팀과의 의견 충돌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것으로 보입니다. 광개토태왕의 김종선 PD는 보기에 싫다는 이유로 잘 고증된 <근초고왕>의 갑옷들을 입히지 않았으며, 소품팀과 연출팀의 의견 차이로 환도 패용 고증은 보기 힘듭니다. 환도나 갑옷에서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복식 고증에 있어서 양 팀간의 의견 충돌이 있을것은 자명합니다. 연출팀과는 별개로 KBS 고증팀은 되도록이면 고증을 중시하자는 방향으로 가는듯합니다. 실제로 제가 작년에 의상팀 담당자들을 만났을때 화랑 이야기가 나오자 의상팀에서는 화랑이 무슨 사극이냐며 콧방귀를 뀌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배우 문제도 있습니다. 인문학자 '전우용'님의 글에 따르면 아래의 문제로 사극 의상팀의 고충이 크다고 합니다.
"예전에 사극의 복식 고증을 담당하는 의상학 전문가로부터 이 일의 고충에 대해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대본상으로나 PD의 연출 방식에서나 별 차이가 없어야 마땅한 두 인물이 시청자들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경우, 상대적으로 ‘찬 밥’이 된 캐릭터를 맡은 연기자가 복식이라도 좀 눈에 띄게 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차피 100% 정확한 고증이 불가능한 만큼 60%나 30%나 거기에서 거기라는 심정으로 그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 보니 시청자들 처지에서는 복식에 관한 한 ‘대하역사드라마’를 보는 것인지 ‘첨단 SF드라마’를 보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
-인문학자 전우용님의 블로그 글에서 발췌-
이는 곧 한국 사극계 전체의 고충이기도 합니다. 고증을 단순히 생각하기엔 이런 저런 문제가 많더군요. 결국 이 또한 사람 사는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의견충돌의 과정이었습니다. 사극에서 고증도 중요하지만 시청자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예술성과 멋도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종합 영상예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역사쪽 교수님들은 사극에서 고증이 없으면 그게 무슨 사극이냐며 고증을 최고로 치십니다. 이토록 다른 두개의 시각이 하나로 합쳐져 고증도 잡고 예술도 잡는 그런 사극이 나오기란 불가능한걸까요. 판타지 사극에서 이런 고증 파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타지 사극임을 내건 작품들은 완벽한 창작의 영역입니다. 온갖 복식이 아름답게 탄생하며, 고증은 판타지라는 명목하에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태왕사신기>나 <화랑>같이 사극들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판타지여도 최소한 껍데기만이라도 다루는 시대의 복식 냄새가 느껴지게 해줬으면 좋겠다는것이 제 바램입니다. 화랑 본방 당시에는 화랑의 복식에 대해서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그건 화랑의 다른 부분들이 워낙 엉망이었기에 그것들 까느라 정신 없어서 언급하지 못한거고, 복식에 있어서도 아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한국의 전통 복식, 고증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지키면서도 한복의 예술과 미를 살리는 방식으로 의상이 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하게 바랍니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뭐든지 보기에 좋지 않은 법이니까요
사진 : Google
첫댓글 혹시 놀라셨나요? 사극에 많은 고증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셨나요? 우리나라 만큼 고증은 신경 안쓰고 사극등을 만드는 나라도 흔치 않을겁니다. 뭐 돈이 드는 부분은 이해가 가나 우리나라 작품들을 보면 단순히 돈이 드는것 때문에 고증을 덜 하는게 아니고 그냥 그쪽 부분은 아예 무관심 해서 고증을 안하는 경우인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죠 저도 뭐 역사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수십년간 정말 고질적으로 고쳐지지 않아 이제는 일반인들 마저 "그때는 그렇게 하고 다녔거니~" 하고 아주 진실이 되어 버린 오류들이 발생한 것들만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사극이 점차 전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어 한국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한국의 문화까지 전파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역사 고증 오류와 잘못 된 역사 지식으로 사극을 만들어서 역사의 자료와 근거 보다는 재미와 감동을 역사의 실체와 역사의 실제 사건 보다는 극본의 픽션을 가감하고 왜곡하는 사극들이 많아 안타까움을 느끼게 합니다
늘 새로운 자료들 올려주셔서 잘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