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툽 동영상(230408); '새소리를 ...'법문에서 정성거사님께 해 주신 말씀에 대해 부가질문 드립니다.
새소리, 나무, 냄새....등등 매일 경험하는 대상들은 사실은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요. 이 '아는 마음'은 또 금방금방 사라지기도 합니다.
대상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이미 대상이 모두 다 들어있기 때문에 마음이 사라지니 대상은 자동으로 사라지는 그런 이치인 거 같아요.
사람들이 '보니까 사라진다'고 하면서 '생멸'을 말하는데, 사실은 마음이 일어나서 사라질 뿐인 거 같습니다. 따라서 관찰대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인 거 같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쭉 이어지는 알아차림' 이 힘이 강할 때, 앞에서 일어났던 대상과 마음, 뒤에서 일어나는 대상과 마음이 마치 줄줄이 소세지처럼 연결됨을 알 때, 비로소 법념처 수행를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래서 심념처 수행이 징검다리이죠? 스님께 여쭤보려고 합니다.
_(답 변)_
새소리, 나무, 냄새....등등을 ‘보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나요?
보이는 것이 왜 보이는 건가요? 보이는 것이란 뭐죠? 왜 보이죠?
진정 경험되는 것에서 어떤 이치를 알게 되었나요?
보이는 게 어떤 임무를 띄고 있다고 생각됩니까?
생각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알아차림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두 길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원 클릭’과 ‘더블클릭’이 다르 듯,
그 차이가 아주 확연하게 구별됩니다.
위의 질문 중 “새소리, 나무, 냄새....등등 매일 경험하는 대상들은 사실은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매일 경험을 하였다면 그 경험되는 대상들과, 보이는 것과, 일어나는 것의 관계 또한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이것들의 관계가 어떤(왜) 관계인지, 어떻게 해서 그런지를 알 만큼은 다 알아야 되고, 이해될 대로 이해를 해야만 됩니다.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금방금방 사라지는 것’ 또한 분명하고 명확한 이해의 앎이 동반되어야 사실대로 이해되는, 힘 있는 담마가 될 수 있습니다.
실은, “사라지는 것”은 애기 사띠, 두는 사띠로 아는 것 이상의 넓고 깊은 뜻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안경을 쓰고도 내 안경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과도 같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있습니다. 보는 힘, 이해의 힘이 많이 부족하게 되면 쓰고 있는 안경이 안 보이기 때문에 찾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야도께서는 마음챙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금싸라기를 모을 만큼 많이많이 모아둬야할 따름입니다. 그럴려면 언제나 대상과 함께 노팅을 이어가야 됩니다.
대상을 관찰하면서, 알아차리면서 대상과 아는 마음이 항상 함께 한 쌍으로 노팅을 해가면서 그것의 관계(어떻게-왜)를 직접적인 경험으로 인한 아는 것(앎/이해)이어야지 그렇잖으면 생각으로 넘어가버릴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과 직접적인 노팅으로의 이해해서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대상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이미 대상이 모두 다 들어있기 때문에 마음이 사라지니 대상은 자동으로 사라지는 그런 이치인 거 같아요.
사람들이 '보니까 사라진다'고 하면서 '생멸'을 말하는데, 사실은 마음이 일어나서 사라질 뿐인 거 같습니다. 따라서 관찰대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인 거 같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쭉 이어지는 알아차림' 이 힘이 강할 때, 앞에서 일어났던 대상과 마음, 뒤에서 일어나는 대상과 마음이 마치 줄줄이 소세지처럼 연결됨을 알 때, 비로소 법념처 수행를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래서 심념처 수행이 징검다리이죠?]
위의 인터뷰 질문을 살펴보자면, 특히 '보니까 사라진다라는 생멸'에 대한 이해되는 근거, 원인/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보입니다. ‘어떻게-왜’가 안 보입니다. 머리 떼고 꽁지(꼬리) 떼고 가운데 토막만 쑤욱 내미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보는 힘, 이해의 힘, 修慧를 얻어가는 조건(원인)이 충분해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의 가속도에 의한 직접적인 통찰의 힘을 모아가면서 그 이해의 조건이 충분해질 때 저절로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걸 미리 조건도 갖추어 놓지도 않고 건축물을 올리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그럴 때 응당 부실공사가 따를 것입니다.
기초공사를 튼튼히 해줄 때 건축물은 튼튼해 집니다. 대상을 직접 보면서 노팅을 하는 힘(가속도)을 기르면서 사띠할 때 변화하는 그 과정을 경험해야 됩니다. 그럴 때 거기에서 이해되는 것, 보이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바르게 보기 때문입니다. 사띠 있시, 항상 ‘있는 사띠’로 보기 때문입니다.
대상 없는 마음 없습니다.
‘어떻게-왜’ 없는 佛法(연기) 없습니다.
‘보이는 것(6문에서 일어나는 것)’을 대상으로 보라는 것은 '보는 쪽의 마음을 일깨워주라'는 점검, 체크, 경종, 경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보이지 않으면 대상을 보라”는 법어, 경책송이 있습니다.
반드시 대상과 아는 마음이 함께 해야만이 그 변화과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서 “어떻게-왜(원인/결과)”를 알면서 보는 힘, 이해의 힘이 길러지고 증장하게 됩니다.
즉 일어나면 왜 일어나는지, 어떻게 해서 그런지, 안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뭔지, 보이는 것은 또 왜 보이는지, 특히 사라지는 것이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지.. 일어나는 것도 대상, 보이는 것과 보는 것도 대상, 사라지는 것 또한 대상, 안다는 것마저 대상, 어느 것 하나 대상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다 대상으로 이해(통찰)될 때 진정한 諸法無我가 실현됩니다.
_(2023년 6월 26일 비가 내리는 월요일 박달골 마하보디에서 사사나 스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