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그림 / 불교 44. 이인상, ‘검선도’
“수행은 목적이 아닌 증득에 이르기 위한 과정”
“이렇게 변화하면 자유롭게 오가며
돌이나 벽이 장애가 되지 않고
지역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능가경
출세 포기하고 은거하던 중
신선을 만나 득도한 여동빈
장생불사 신선으로 사랑받아
육체 뛰어넘는 심의식 경지
깨쳤다는 믿음 망상에 불과
번뇌 끊고 부처님을 따라야
▲ 이인상, ‘검선도’, 종이에 색, 96.7×62cm,
국립중앙박물관.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다. 나는 사람을 처음 보면 첫 눈에 그 사람의 전체를 읽을 수 있다.
물론 몇 퍼센트의 오차는 있지만 거의 틀리지 않는다.
굳이 상대방을 앞뒤로 돌아가면서 볼 필요도 없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고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걷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고 웃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얼굴을 보지 않고 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떤 성격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뛰어난 장점이 있고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지를 훤히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능력이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마치 다른 사람들은 갖지 못한 초능력을 가진 것처럼 우쭐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날 때면 마구마구 잘난 체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떠들었다.
돌이켜보면 낯 뜨거운 과거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얘기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경우라 하더라도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의 인생에서 행복만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고
불행이 꼭 불필요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다가오는 길흉화복은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행복도 행복인 줄 모르면 불행이고 불행도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불행이 아니다.
행복이나 불행은 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온다.
행복과 불행을 통해 삶의 진리를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굳이 미래에 대한 얘기가 필요 없다. 행복과 불행은 둘 다 스승이기 때문이다.
배울 자세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얘기해봤자 소용없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바뀌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통렬하게 깨달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돈을 잃고 건강을 잃으면서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정도 수업료는 지불할 가치가 있다.
자신이 직접 삶을 통해 체득한 진리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을 보고 읽을 줄 아는 능력은 타고 난 것이 아니다. 신내림을 받아서도 아니다.
그림을 공부하면서 생긴 버릇이 사람에게 적용되었을 뿐이다.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볼 때는 처음 본 것이 마지막이 될 때가 있다.
일본 센소지(淺草寺)에 소장된 혜허(慧虛)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그렇다.
2010년 G20 정상회의 때 처음 본 ‘수월관음도’는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약이 없었다.
일본 텐리대(天里大)에 소장된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도 비슷하다.
지금까지 세 번 한국전시 때마다 가서 봤지만 역시 다시 본다는 기약을 할 수 없다.
다시 볼 수 없으니 볼 수 있을 때 깊이 봐야 한다.
기억하기 위해 보고 보고 또 보다보니 세밀하게 보게 된다.
장황 상태, 안료, 재질, 구도와 특징 등을 집중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런 훈련을 30년 가까이 했다. 남들보다 잘 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런 훈련과 함께 글을 쓰기 위해 사람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훈련을 더하다보니
누군가를 처음 볼 때도 삶 전체가 스캔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사람이나 사물을 깊이 읽을 줄 아는 능력은 자랑할 것이 못된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상태에 머무른 채 대단한 신통력을 얻은 것처럼 만족한다면 그건 부끄러워해야 한다.
기껏해야 남들보다 조금 더 잘 보는 능력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것이 내가 풀어야 할 숙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참선과 수행을 하다보면 남이 듣지 못한 소리를 듣고 남이 보지 못한 경지를 볼 때가 있다.
신기한 꿈을 꾸는가 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예측될 때도 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
대혜가 물었다.
“의생신(意生身)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이른바 의생신이란 비유하자면 사람들의 심의식(心意識) 작용과도 같아,
환상이 일어날 때는 즉각 생기고 아무 걸림이 없어서 의생이라 한다.
이렇게 변화하면 자유롭게 오가며 돌이나 벽이 장애가 되지 않고 지역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그런데 사람의 의식이 어떻게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전의 경험이 기억으로 변해 이 기억이 마음속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져
환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의식은 본래 형질이 없어 신체의 형상에 갇히지 않으니,
이 때문에 일신을 주재하는 원천이 된다.
대혜여! 보살이 의생신을 얻는 경계 역시 이와 같아서 손가락 한 번 퉁기는 사이
일체의 신통과 묘용을 갖출 수 있다.
소위 여환삼매(如幻三昧 : 요술사가 요술을 부리는 것처럼 작용이 자재한 삼매)의 힘과
자재신통, 묘상장엄(妙相莊嚴), 성경변화(聖境變化) 등의 몸도 모두 동시에 갖출 수 있다.
마치 사람들의 의식 작용과도 같아 외계의 일체가 장애가 될 수 없다.”
‘능가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육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심의식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흔히 무술영화나 무협소설에서 봤던 경지를 상상하면 된다.
이런 경지는 불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도가(道家)에서도 양신(陽神)과 음신(陰神)을 얘기한다.
그런데 여기에만 빠져서 멈춰버리고
자신이 의생신을 얻었다고 믿는다면 이는 망상에 불과하다.
좌도이고 외도이며 삿된 경지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기 전까지의
모든 수련은 과정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번 이 맛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어렵다.
마치 세상을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구니의 장난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곁에 선지식이 있어야 한다.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거든 다시 경전으로 돌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이런 번뇌가 어찌 수행에만 해당되겠는가. 모든 공부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이 그린 ‘검선도(劍仙圖)’는 신선 여동빈(呂洞賓)을 그린 작품이다.
여동빈은 문무를 겸비한 유자(儒者)로 혹은 장생불사의 신선으로 조선시대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동빈은 당(唐)나라 때 실존했던 인물로 이름은 암(巖), 자는 동빈(洞賓), 호는 순양자(純陽子)다.
그는 과거에 두 차례나 낙방하여 출세를 포기한 채 은거하던 중
여산(廬山)에서 화룡진인(火龍眞人)을 만나 천둔검법(天遁劍法 : 악귀를 쫓아내는 검법)을 배웠다.
64세에는 화산(華山)에서 신선 종리권(鍾離權)을 만나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다.
그는 도교에서 여조(呂祖)라 칭송받으며 신선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도상은 그림에서 흔히 머리에 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있으며
소매와 옷자락이 펄럭이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는 이 검으로 회수(淮水)에서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교룡(蛟龍)과 호랑이를 처치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버드나무 정령(柳仙子)을 검으로 제압한 이야기는 여러 희곡에 등장한 단골메뉴다.
푸르스름한 얼굴빛을 한 유선자가 머리에 버드나무가지가 솟은 채
여동빝 곁에서 피리를 부는 모습은 여러 그림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악령이나 정령까지 제압할 수 있는 검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동빈의 검은 단순히 악을 물리치는 정의의 의미를 뛰어 넘어
세속적인 욕망을 끊는 도구로 승화된다.
번뇌와 색욕과 탐욕과 성냄 등을 끊어주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게 해주는
상징성을 지는 검으로 거듭난다. 이로써 여동빈은 검선이라는 명성 못지않게
시선(詩仙)이라는 호칭도 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많은 문인들이 여동빈을 좋아하게 된 배경이다.
이인상이 그린 ‘검선도’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여동빈과 자신을 동일시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그루 노송을 배경으로 수염을 휘날리며 앉은 여동빈 옆에 검이 그려져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주인공이 여동빈이 아니라 이인상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라 해석한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든 조선시대 회화에 등장하는 검은 살인과 살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번뇌를 끊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능가경’은 대혜대사(大慧大師)가 석가모니부처님께 질문한 108가지의 내용과 그에 대한 답이다.
이 법문은 인도의 남해 바닷가에 있는 사자국(獅子國) 능가산(楞伽山) 정상에서 이루어졌다.
대혜대사는 부처님께 심(心), 성(性), 상(相) 등 불교의 형이상학적 문제를 비롯해
인생, 우주, 물리, 인문 등에 관해 질문한다.
그래서 ‘능가경’에는 불교의 신심성명(身心性命)뿐 아니라
우주 만상의 근본 체성(體性)을 비롯한 사상과 이론은 물론 수행 방법까지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혜대사가 질문자로 나선 것은 대중의 상좌였기 때문이다.
그는 불법이 깊어 일체 유심과 만법 유식의 심식이 드러나는 경계에 대해
이미 그 의미를 증득한 상태였다. 다만 아직 자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대중과 후세인들을 위해 부처님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마치 ‘금강경’에서 장로 수보리가 여러 사람을 대신해 질문한 것과 같다.
대혜대사가 질문한 내용은 실로 다양하다.
‘어떻게 해야 마음 속 망념을 깨끗이 할 수 있을까요?
왜 마음 속 망념이 멈추지 않고 늘어나기만 하는 걸까요?’부터 시작해
‘만법을 생겨나게 하는 인과 연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등
불교의 근본적인 질문이 담겨 있다.
그런가하면 ‘어떻게 해야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이 몸을 만들 수 있나요?
왜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나며 또 내란이 발생하는가요?
왕생해서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나요?’ 등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도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예전에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질문은 이것이다.
‘세속적 신통이란 어떤 것입니까? 출세간적 신통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람은 오직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만 보는 법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무르면 안 된다.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고 유체이탈을 한다한들
그것이 무생법인을 얻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잘라내야 할 번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무생법인이 무엇인가.
다음 연재에서 살펴보겠다.
아무튼 나도 한때는 이런 능력이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지금도 나의 얘기를 듣거나 글을 본 사람 중에서 이런 능력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경우가 있다.
꼭 과거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굳이 이런 글을 쓰면서까지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밝히는 이유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이런 능력은 나만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누구나 조금만 훈련하면 가능하다.
특별히 훈련하지 않더라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무생법인을 아는 기쁨에 비하면 그까짓 신통력은 어린아이들이 갖고 노는
구슬치기에 불과하다. 딱지치기나 마찬가지다.
2014년 11월 26일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