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천도교진주시교구
 
 
 
카페 게시글
게시판 스크랩 태안의 동학 "애국지사 문병석"
야무 추천 1 조회 45 14.01.05 23: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학농민형명태안군기념사업회 최기중회장님외,,

 

 

 태안문학회 지요하 소설가.

 

 동학농민형명내포지역유족회 문영식회장

 

 

 

 

 

 

                                                                       2013,12,17, 태안군 브리핑실에서 기자 간담회장에서,

 

 : 보도자료 :

본 자료는 2013년 주일 한국 대사관에서 발견된 이후 8월에 외교부를 통해 이관된 자료로 지난 11월 안전행정부에서 발표한 [3 .1 운동] 당시 일본군에 의하여 피살된 애국지사 중 우리군의 {문병석 지사}와 관련된 발표분의 일부입니다.

 

발표자료에 의하면 "문병석(文秉錫)지사는 3.1운동 당시 충남 내포(內浦)지역에서 만세운동의 총 지휘자로 예산,당진,홍성,서산,태안,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선도하셨다.

문병석 지사는 예산군 예산읍 오가면 녹야(錄野) 마을 뒷산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과 형벌로 귀(耳)가 잘려나가고 전신이 마비되어 기미년 (己未年) 3월1일 10시에 순국하셨다"라고 발표하셨습니다.

 

  * 성암 문병석 독립운동가.애국지사(1891~1970.79세 별세)

 

문병석(文秉錫) 지사의 독립운동 활동을 좀 더 살펴보면,

문병석 지사는 1891년8월4일 원북면 방갈리115번지(갈머리)에서 동학농민혁명당시 태안 수접주인 문장로(文章魯)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문병석 지사의 아버지인 문장로는 태안과 서산,당진,예산 등지의 수 많은 동학농민을 이끌고 당진 승전곡(勝戰谷)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홍주성(洪州城) 전투에서 참전했으나 일본군의 신무기 앞에 대패 후 일본군과  관군의 체포령으로 아들 문구석(文龜錫)접사(接司)와 함께 도피생활 중 외가댁(소원면 소근리)에 피신 모친과 함께 철마산 토굴에 은거하였다.

이때 문병석 지사는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길에 나섰다.

도피중인 부친을 위하여 자진 체포된 문구석 접사의 총살형 집행 후 문장로와 가솔은 변 성명 후 1895년 1월 배를 빌려 원산도를 거쳐 광천에 도착하여 공주 마곡사와 천안 광덕산에서 숨어 살다가 예산 무한천변 갈대밭으로 숨어 살았다.

 

풍찬노숙 16년간의 눈물겨운 도피생활 중 국권을 상실하고 민족적 치욕의 날인 경술국치(庚戌國恥:1910) 이후 일본의 감시망이 느슨한 틈을 타서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문병석 지사는 1904년 부친을 도와 동학의 갑진개화운동의 선봉에서 예의 바른 품행과 검소한 옷차림으로 집적 모범이 되어 사회 계몽운동과 신생활개혁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12년 천도교의 독립운동의 연성수련원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의지를 불태우며 1918년 마기상 선생(충남지역책임자)과 함께 내포지역 만세운동에 동참할 세력을 규합하여 1919년 1월 천도교의 지시에 따라 내포지역(예산,온양,홍성,신례원,당진,서산,태안)만세운동을 사전 모의를 주도하였다.

 

3월1일 과 10일 예산에서 수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직접 낭독하여 시위를 주도하면서 3월11일은 아산에서, 3월18일은 홍성에서,3월20일은 광천에서,3월15일은 서산에서,3월16일은 해미에서,3월19일은 태안에서 만세운동이 일어아는 등 4월초까지 산발적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문병석 지사는 1919년 4월 말일 경 3.1운동 주모자로 예산경찰서에 구속되어 20일간 물고문.손톱과 발톱을 뽑히고 한쪽 귀가 찢어져 청각을 상실하여 짝귀 상태로 사망 직전 가족에 인계되어 장독 민간요법으로 치유되어 불구상태로 연명하였다.

 

간신히 살아남은 문병석 지사는 불구된 몸으로 항일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는 1927년 11월 백척간두에 놓여 있는 국권을 지키고 자주 독립운동을 다지기 위하여 신간회(新幹會)예산지부를 창립하였고,1931년 5월

 

조선농민사 예산지부를 창립하여 조선농민의계몽과 협동하는데 앞장을 섰다. 또한 호서(湖西)청년동맹을 결성하여 내포지역 청년들의 민족독립정신을 함양하여 교육시키며 사회개혁과 정신개혁을 주도하였다.

 

그 당시 일제는 사상에 관한 불순분자.요시찰 대상으로 지목하여 구금 감시.미행을 상시로 행사하고 자택에는 일본경찰이 일일 2회 순찰가옥으로 분류하여 밀착감시를 하였다.이로 인하여 수차례 구속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1938년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천도교의 멸외기도 사건으로 황해도 신천 경찰서형사에 의하여 지 이송 구속되어 10여 일간 고문과 고초 끝에 석방되었다.

 

문병석 지사는 일생을 민족정신과 애국 계몽운동으로 민중의 자각과 지도에 헌신을 다하였으며 일생을 민족종교인 동학 천도교를 시낭하면서 천도교 예산 교구장을 역임하였다.

 

위와 같이 위대한 항일독립투쟁 의거 사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우리지역 문병석지사의 생가지(태안화력발전소)를비롯하여 적합한 곳에 동학형명기념관과 병행하여 기념관을 건립하고,생가지를 보존하여 새롭게역사의 교육 현장을 남겨야 할 것 입니다.

또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하신 문병석 지사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만시지탄은 있으나,그의 공적에 상응하는 훈장을 추서하고 위와 같이 유적지 정화 사업을 추진하여 민족정신을 고양해나가야 할 것 이다.

 

끝으로 ,바쁘신 중에도 이 자리에 참석하여 주신 기자님들께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우리지역에도 이렇게 훌륭하신 독립운동가께서 생활하셨다는것을 군민들이 널리 알 수 있도록 적극 적인 홍보와 앞으로 본 정신을 계승하기 우한 기념관 건립 등 지속적인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감사합니다

 

2013,12,17.

 

참여단체:

동학농민혁명 태안군 기념사업회,동학농민혁명내포지역유족회,국사편찬위원회,태안문학회,태안 참여자치시민연대,태안군문화관광해설사회,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