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KCdXWk91nw
본문 사도행전 10:34-38 제목 :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오른쪽 현수막을 보시면 우리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금년도 주제와 로고가 걸려 있습니다. 로고의 모양은 십자가 모양이지요. 그런데 십자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색깔과 모양이 전혀 다른 여러 조각들이 퍼즐을 맞추듯이 조화를 이루면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지요. 일반적으로 보게되는 십자가처럼 네모반듯하고 좌우대칭이 정확한 십자가와는 달리 저 십자가는 울퉁불퉁합니다. 그리고 좌우대칭도 정확하지 않지요. 그리고 퍼즐들이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어서 조각들 사이에 여기저기 빈공간도 많이 보입니다. 즉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아직도 개선되고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은 모습인 거죠.
그런데 이 로고 오른쪽 옆에 금년도 총회 주제가 적혀 있습니다.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하소서.’ 복음의 사람, 그리고 예배자 이 둘은 다른 개념이지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복음의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믿고, 복음을 따르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실천하면서 복음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배자는 글자 그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복음과 함께 살아가는 복음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진실하게 예배하는 예배자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과 함께 살아가는 복음의 사람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이 둘은 한 개념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이 십자가의 퍼즐조각처럼 우리는 서로가 많이 다르지요. 이렇게 작은 한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모습과 환경이 많이 다른데 전 세계로 놓고 본다면 인종 언어 역사 환경 문화 등 얼마나 다양합니까? 어찌보면 서로 도저히 맞춰질 것 같지 않는 복잡한 퍼즐 조각과도 같은 거죠.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라는 공통적인 복음의 바탕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로 다른 각자의 퍼즐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틀 안에서 맞추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거죠. 아직은 완성되지 못한 부분이 훨씬 더 많지만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내 자신을 맞추어가는 경건의 과정을 겸손함과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감당해 내려는 사람이 바로 복음의 사람인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로 이끌어가지요. 그 십자가 안에서 서로 다른 여러 퍼즐들이 자신을 다듬어 가면서 위로는 예수님께 맞추고, 또 서로를 향해서도 조금씩 맞추어가는데, 그렇게 맞추어가게 하는 힘과 의지는 예배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아직은 완성되지 못해 여전히 울퉁불퉁하고, 빈공간도 많지만 계속되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예수님을 향해, 그리고 서로를 향해 맞추어 가고 다듬어가게 된다면 분명 언젠가는 예수님의 복음과 일치되어서 완벽한 십자가의 모습이 형성될 때가 오겠지요. 그 날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참된 복음의 사람으로, 그리고 예배자로 다듬어져가며 성숙되어져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겁니다.
오늘의 본문은 대표적인 세계선교사였던 사도바울보다 앞서서 사도베드로가 먼저 이방사람인 로마 백부장이었던 고넬료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예수님에 대해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가 이방인 로마사람 고넬료의 집에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문턱을 넘어서 이방인 선교사역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서론 같은 장면이지요. 그리고 베드로의 뒤를 이어 사도바울에게서부터 본격적으로 세계를 향해 선교의 역사가 펼쳐져가는 장면을 사도행전은 보여줍니다.
오늘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예수님에 대해 설교하면서 공통되게 강조하는 것이 있지요. 먼저 35절을 보면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하나님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신다는 거죠. 36절에서는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예수님의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처럼 서로가 모든 게 달라도 그것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르면서도 화평하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거죠. 37절에 보면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세례라는 말이 나오지요.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수 세탁할 때의 ‘洗’자이지요. 씻는 예식입니다. 그냥 단지 손이나 발을 닦는 정도의 씻음이 아니라 내 생명 자체를 씻는 거죠. 생명을 씻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전의 생명은 죽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는 이전의 생명을 죽여 씻어내는 예식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이전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던 죄악된 생명과 삶을 죽이고 씻어내게 되면 예수님의 부활의 은총을 힘입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거듭났다고 말하기도 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는 거죠. 이 모든 역사는 예수님과 일치되려 할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겉으로는 씻는 예식이지만 그 내면은 예수님의 보혈로 이전의 죄악된 삶을 죽이는 죽음의 예식이고, 예수님의 새로운 부활의 생명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래서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되어 가려는 예식인 거죠.
그리고 38절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언급되고 있지요. 하나님, 나사렛 예수, 그리고 성령, 이렇게 세분의 하나님은 완벽하게 일체가 되셔서 한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말로 설명하기 힘든 하나님의 신비가 담긴 삼위일체라는 말에서도 하나님은 일체, 일치의 하나님이심을 말해주고 있지요. 그리고 38절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와 일치되시려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본문에서 살펴본 내용들, 35절에서 다 받으신다, 36절에서 화평의 복음, 37절에서 세례, 38절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거나 이루어가고 있다는거죠. 예수님은 결국 일치의 역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베드로는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먼저는 전능하시고 온전히 성결하신 하나님과, 죄악되고 그래서 멸망의 길을 가야 할 우리 인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치되게 하시는 역사를 행하셨고, 지금도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통해 우리들을 계속 하나님과 일치되어가게 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일치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을 일치되게 하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따라서 유대인 이방인 같은 인종의 장벽과, 계급, 성별,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수준 같은 사람과 사람을 차별하게 하는 모든 장벽의 요소들을 허물어가면서 서로가 하나가 되고 일치를 이루려는 노력을 기울여 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의 베드로는 유대인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이방인인 로마 사람 고넬료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나누고 있고, 사도바울은 모든 지역 모든 민족 모든 계층의 장벽을 허물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전했던 거죠. 그리고 갈라디아서 3:28절의 말씀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인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이다,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던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저 로고의 그림처럼 모든 게 완성되지 않았지요. 그래도 저 그림은 상당히 많이 진전된 모습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현실은 저 그림보다 훨씬 더 투박하고 울퉁불퉁하고 서로 맞지 않아 생기는 빈공간도 훨씬 많겠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과 더 일치되어가려는 경건의 노력과,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서로를 향해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을 함께 다듬어가면서 맞추어가고 일치되어져 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이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여전히 전쟁의 위협 속에 있는 현실일수록,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정치적 대립과 이념적 대립과 계층간의 대립이 계속 심화되고 그래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우리의 현실일수록,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처럼, 특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따라서 분쟁과 다툼과 분열을 뛰어넘어 서로 화합하고 일치되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교회에서 실현해 내어야 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해 나타내어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는 거죠. 이런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사는 사람이 우리 교단 올해의 주제처럼 복음의 사람이며 예배자인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탄절을 지나 주현절 첫째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主’ 주님이신 예수께서 ‘顯’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의 절기이지요. 그리고 주현절 첫째주일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예수님 수세주일이기도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세례는 죽음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고 그렇게 죽음과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은 예수님과 일치되는 것에서만 가능한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이 역사가 가능할 수 있도록 우리와 일치되시기 위해 죄인들이 받는 세례의 자리로 내려 가신 거죠. 우리는 이렇게 우리 같은 죄인들과 일치되셔서 우리에게 온전한 영생과 구원을 허락하신 예수님을 보고 듣고 배우고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지금도 우리와 더욱 일치되어 가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