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입니다. 옆에 분에게 인사합시다. “열매를 맺어 자라갑시다.” 어떤 열매입니까? 당연히 좋은 열매입니다. 가장 좋은 열매는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열매인줄 믿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금이 세 개가 있답니다. 첫 번째는 황금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필요한데 황금 곧 돈입니다. 사람들은 오죽 했으면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고 돈만 벌어 오면 다 용서된다고 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노총각이 결혼하려고 두 가지를 열심히 기도했는데 돈과 여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돈 여자를 만났답니다. 두 번째는 소금입니다. 소금은 식생활에 가장 중요합니다.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는 것도 3.4%의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고 소금이 음식을 보존합니다. 우리 몸에도 일정량의 염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만큼 소금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지금입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결과로 변합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잘 이용했느냐, 이용하지 못했느냐에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돈으론 살 수 없습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알 수 없으니 지금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오늘은 어제 돌아가신 분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날이기도 하며 또한 내일을 준비하는 자에게 주어진 첫날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범사에 다 때가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가 세월을, 즉 오늘 지금을 아껴야 합니다. 그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본문에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골로새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고 소망 중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열매도 맺으면서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용서하고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치가 있는 것에는 어떤 희생도 감수합니다. 기꺼이 목숨을 바쳐 충성할 때도 그 대상이 지극히 존경스러울 때 가능합니다. 그런 위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분이나 제가 너무도 존경스러워서 목숨을 내어주셨을까요. 우리가 어떤 위인이나 의인이라서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해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해를 의인에게나 악인에게 골고루 비침 같이 죄인 된 우리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처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 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우리도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느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자라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언제부터 효도합니까. 부모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효도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자랍니다. 그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예배에 한 번이라도 더 참석하고 틈을 내어서 성경을 펼치고 말씀을 듣기를 사모할 때 은혜 받게 됩니다. 그렇게 은혜를 깨달을 때 성숙하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할렐루야!
오늘 사도바울을 통해 우리가 우리에게 질문하자면 ‘너희가 신앙 안에서 자라고 있는가?’ 입니다. ‘지금도 자라고 있는가’, 그것도 ‘바르게 자라고 있는가’, 입니다. 어떻게 자라는 것이 바른 자람입니까? 본문 4,5절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늘에 대한 소망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자란다는 말은 단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을 말합니다. 성장이 외적인 자람이라면 성숙은 내적인 자람입니다. 성장은 보이는 것이라면 성숙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괄목상대’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눈을 비비고 상대를 다시 보다’는 뜻입니다. 중국 오나라에 여몽이라는 장수가 용맹하고 무예에 능하기는 비길 데 없는데 지략이 모자랐습니다. 공부 좀 하라는 말을 들은 여몽이 병법서를 읽기 시작했는데 노숙이라는 사람이 가서 테스트를 해보니 예전의 여몽이 아닙니다. 무예만 뛰어난 줄만 알았는데 학문이 이렇게 뛰어난 줄 몰랐다고 하자 여몽이 대답하기를 “선비라면 사흘만 지나도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도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지금 믿음이 자라고 있는가, 신앙이 성숙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살림살이가 늘어나고 있는가, 재물이 얼마나 늘어났는가, 생활이 편해졌는가도 중요하겠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성숙하였는가, 주님과 얼마나 가까워졌는가, 이런 질문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사흘은 아니더라도 지난 달 보다는, 아니 지난 해 보다는 달라져야 않겠습니까. 그 사람, 이전에 알던 사람이 아니더라고 해야지, 다르더라고 해야지, 예수님 믿은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더라, 그 성질도, 마음 씀씀이도, 인격도 하나도 변한 게 없더라고 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오늘 이후부터 달라지기 바랍니다. 평화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오면 달라지더라고 해야죠.
성숙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의 변화가 아니라 긍정의 변화입니다. 육신의 생각, 소욕대로 살던 인생이 하나님을 알고 영의 소원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감성적인 사람이 이성적인 사람으로, 본성적인 사람이 신앙적인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고전10:24에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합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살던 인생이 영원히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요6:27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이 땅에서 먹고 마실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로 살던 사람이 돌봄과 배려의 삶으로 바뀌는 삶입니다. 탐욕과 불평과 원망 속에 살던 인생이 나눔과 기쁨 속에 찬양과 감사로 사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젖어 살던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이고 거듭남이고 성숙함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움켜질 줄만 알던 아이가 자라면서 친구에게 손을 폅니다. 먹는 것을 나눠주기도 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도 합니다. 그렇게 아끼던 장난감을 빌려주기도 하고 심지어 너 가지라고도 합니다. 이러면 잘 하고 바르게 자라는 것인데 지켜보는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다시는 안 사 준다’라며 못하게 합니다. ‘그게 얼마 주고 산 것인데’하면서 벌써 돈의 쓴 맛도 알게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아니랄까봐 장난감도 돈으로 환산하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성숙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섬길 줄 모르던 사람도 은혜 받고 조금씩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섬김을 조금만 알아주지 않으면 더 이상 안합니다. 진정한 섬김은 남에게 드러내지도 않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숙입니다.
미우라 아야꼬가 쓴 “살며 사랑하며” 라는 에세이집이 있습니다. 자신이 남편을 만나 신앙을 갖게 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적은 것입니다. 미우라 아야꼬가 조그마한 가게를 열어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가게가 동네에서 소문이 나서 단골이 늘어나 꽤 수입이 생겼습니다. 남편도 직장에서 월급이 오르면서 생활이 좀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 아야코 씨와 똑같은 가게가 생겼습니다. 얼마나 속상할 일입니까. 아야코 씨가 단골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경쟁에 질세라 물건을 잔득 구입했습니다. 손님들이 저 가게도 틀림없이 가보겠지만 우리 가게가 훨씬 좋은 물건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와서 보니 못 보던 물건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묻습니다. 아야코 씨가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이때 남편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동네 사람들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줄 아는데 똑같다고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면서 저 집도 가게 열면서 대출 받았을 테고, 우리는 아이도 없는데 저 집은 애가 둘이나 있으니 생활비도 우리보다 훨씬 많이 들어갈 것이고 저 가게는 아직 단골손님도 없으니 얼마나 어렵겠느냐고, 우리는 단골도 있고 더구나 내 월급도 올랐으니 저 가게 주인을 미워하지 말고 먼저 당신이 찾아가서 인사도 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어떠냐고, 이렇게 세상 물정도, 장사하는 심정도 모르는 소리를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 중에 누가 바른 그리스도인,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미우라 아야코가 남편의 말에 순종하여 그대로 했습니다.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야코의 가게가 망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녀는 틈틈이 쓴 소설 ‘빙점’이 당선되어 당시로는 상상도 못할 상금을 받고 그 명성을 힘입어 더 이상 가게를 하지 않고 전업 작가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내려놓음,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고 기도응답이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선행이 그리스도인의 정신인 것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성숙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자라가길 축복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우리가 함께 자라가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벧후3:18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어디까지 자라야 합니까. 골1:28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처럼 그리스도를 닮은 완전한 자가 되도록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라고 싶다고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골2:19절입니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고전3:6,7에도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셔야 자랍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지만 우리가 자라기를 사모하여 말씀을 읽고 들으려 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힘쓸 때 하나님도 자라게 해주십니다.
나의 성숙이 전도의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납니다. 나의 성숙이 곧 하나님의 나라 확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자라야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열매를 맺어야 자란 것입니다. 열매와 성숙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모두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